박정희와 그의 시대(1) - 만주에서 돌아오다(2)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교사, 결혼, 싫증…
  
  朴正熙가 그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만주의 대지를 처음 밟은 것은 1935년5월 4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학생들은 2주일간 봉천-대련-여순-신경-하르빈-길림-무순지방을 기차로 여행했다. 광활한 평야와 지평선 뒤로 떨어지는 장엄한 석양은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朴正熙는 대구사범 5학년에 재학중이던 1936년 여름방학 때 경북 선산군 도개면의 金 南처녀와 결혼했다. 그가 19세, 金씨는 16세 때였다. 朴在熙는 결혼식에 참석 못했고 1년 뒤 일본에서 나오 金씨를 처음 보았다.
  
  {그때도 친정집의 형편은 군색했읍니다. 정희가 졸업을 하고 문경으로 선생이 되어 간 뒤 제가 일본에서 잠시 나와 집에 들렀더니 식량이 떨어져 밀기울을 가지고 온 식구가 끼니를 잇고 있었어요. 그때 정희의 처도 상모리에서 시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읍니다.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며느리를 보시겠다고 해서 동생을 서둘러 결혼시킨 것이 잘못이었어요. 동생은 돈을 더 번 뒤에 결혼하겠다고 반대했었는데 아버님의 강권에 못이겨 혼인을 했답니다. 재옥이 어머니는 아주 순박하고 좋은 사람인데, 왜 그런지 동생은 정이 溶?않는다고 가까이 하려 들지 않아요. 문경에도 혼자 가 있었고, 간혹 고향에 다니러 와도 따로 자곤 했읍니다}
  
  朴正熙에 대한 글이 10·26 뒤 허다히 나왔지만 실증적인 면에서는 아직 문제가 많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첫 결혼 부분이다. 朴正熙가 金씨아 결혼한 시기에 대해서 1938년 7월30일설(호적 기재일자)과 교사시절설 등으로 엇갈리고, 첫딸(在玉)의 출생도 1938년 9월9일(호적기재일자)로 알려져 있어 결혼일자와 안 맞는 등(호적대로라면 金씨는 결혼한 지 두 달도 안 되어 출산했다는 얘기가 된다) 정확하지 못한 점이 많다.
  
  朴在玉의 남편 韓丙起에 醯8?朴在玉의 출생은 1937년 음력 10월22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朴正熙의 결혼시기는 친족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그 1년 전 여름방학 때임이 분명한 것 같다(호적일자는 혼인신고일을 가리키는 듯). 朴正熙는 결혼식에 동기생들을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것 같다.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국민학교 교사시절까지도 그가 결혼한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朴正熙는 결혼날이 다가와도 대구사범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어 아버지가 가서 데리고 왔다고도 한다. 꿈이 큰 朴在玉로서는 결혼을 서둘 이유가 없었다.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억지 혼인]을 한 셈이다. 朴正熙부부는 상모동의 본가로 옮겨 신혼생활에 들어갔다. 방학 때라 朴正熙는 한달 남짓 머물렀다. 두 부부가 가장 오래 함께 있었던 기간이다.
  
  1937년 3월20일 朴正熙는 70여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대구사범을 졸업, 4월1일 문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 4학년을 맡게 됐다. 20세 때였다. 당시의 초봉은 월 45원(지금 시세로 50만원쯤), 보너스가 연 1백%였다. 일본인 교사에겐 봉급에 60%가 가산됐다. 朴교사는 몸이 작은 데다가 교무실에선 출입문에 가까운 말석에 앉아 손님들이 가끔 사환으로 오해했다고도 한다. 朴교사가 학생들을 따뜻히 감싸준 얘기도 많이 전한다. 그는 늘 두 서너 명의 월사금(1인당 70전)을 대신 내주었다고 한다.
  
   하숙 동기생의 증언
  
  朴正熙교사는 학교 바로 밑에 있는 과부 김순아(金順牙.당시 36세)의 집 본채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金씨는 그 전에 주막 비슷한 음식점을 운영한 적도 있었으나 이때는 하숙만 치고 있었다. 朴교사가 하숙에 든 다음 달에 문경군청 농회기사인 허동식(許東植.당시 20세)이 아래채에서 하숙을 시작, 두 사람으로 늘었다. 하숙비는 1인당 월 8원씩. 지금 대구에 살고 있는 許씨는 하숙 친구 朴正熙를 이렇게 기억한다.
  
  {저는 대구농업을 졸업하고 왔어요. 그의 첫 인상은 꾀죄죄했어요. 눈이 다부진 느낌을 주었지요. 곧 친해졌어요. 지금 기억하면 거의 매일 집안에서 술을 마셨던 것 같아요. 그와의 기억은 술 마신 기억이 거의 전부예요. 막걸리를 바케스로 받아 와서 쪽박을 띄워 놓고 허연 배추와 된장을 안주삼아 마셔댔어요. 朴正熙는 평소엔 말이 없었으나 술만 들어가면 말도 좀 하고 어허허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잘해요. 황성옛터도 뽑고요. 결혼한 줄은 몰랐어요. 방학을 해도 집에 가지 않고, 집안 이야기를 도통 꺼내지 않았어요}
  許씨는 朴교사 하면 스파이크와 나팔이 연상된다고 했다. 운동회땐 단거리 선수로 나가곤 했던 朴교사는 스파이크를 늘 갖고 다니며 애지중지했다. 朴교사는 아침 6시쯤 일어나면 꼭 하숙집 뒷 언덕위에 있는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올라가 나팔을 불었다고 한다. 이 나팔소리만 들리면 문경사람들은 {아, 朴선생 나팔소리다. 이제 일어나자}고 말할 정도였다.
  
  許씨는 朴교사의 반일감정이 적어도 자기보다는 훨씬 강한 것 같았다고 했다. 의식적으로 일본어를 덜 쓰는 것 같았고, 무슨일로 아리마 교장을 때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날밤 朴교사는 {그새끼 때려 죽이려다가 놔 두었다}고 씩씩대더란 것이다. 그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당시의 분위기로는 일본인을 때리기가 쉽지 않았다고 許씨는 말했다. {그때 朴교사는 특별히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지는 않았고, 여자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오직 술이 친구였어요. 우리 하숙생과 여주인은 허물없이 지냈어요. 여주인은 朴교사한테는 꼼짝못했어요. 생선요리도 몸통은 朴교사한테만 주고, 나한테는 꼬리만 주어 화를 낸 적도 있지요}
  
  여주인 金씨는 임창발(林昌發)이란 아들을 하나 데리고 있었다. 朴교사보다 한 살 아래였다. 지금 서울 등촌동에 살고 있는 林씨는 朴교사가 불칼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기억한다. 사람과 사귈 때도 좋다, 나쁘다가 너무 분명했다고 한다. 朴교사는 하숙집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여 방학 때나, 그 뒤 만주군관학교 시절에도 방학 때는 문경 하숙집에 들러 계속 묵었다는 것이다. 朴교사는 가정엔 별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애써 피하고 있었던 것 같다. 1969년 6월20일 金順牙 할머니가 68세로 죽었을 때 朴대통령은 林昌發에게 친필로 위로의 편지를 써보냈다. [30년전 문경 재직시에 피몽한 갖가지 후의를 다시 추억構?됩니다. 문경선 개통식에 참석하려다가 급한 용무가 있어서 불참했는데, 모친께서도 오래간만에 나를 만났으면 하고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장발시비로 교장구타, 사직
  
  朴正熙가 왜, 어떻게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됐느냐 하는 문제는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파악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 朴正熙의 만주행에 대해서 가장 확실한 정보를 가진 이는 교사로서의 朴正熙를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던 대구사범 동기생 ㄱ씨일 것이다. {나는 그때 상주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군은 달라도 朴正熙가 근무한 문경국민학교까지는 4㎞밖에 되지 않았읍니다. 일요일만 되면 서로 하숙집을 오가며 만나곤 했읍니다.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로 기억합니다. 일요일에 정희가 나한테 놀러와서 만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화요일 아니면 수요일)이었어요. 오후 4시쯤 제가 6학년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는데 누가 복도에서 창을 똑똑 두드려요. 나가보니 정희였읍니다}
  
  국민복을 입은 채 친구 ㄱ을 찾아온 朴正熙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수업이 언제 끝나느냐}고 물었다. {한 30분 있으면 된다}니까 朴正熙는 바깥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ㄱ은 30분 뒤 朴正熙를 데리고 운동장 나무 밑으로 갔다. 나무 밑에는 朴正熙가 들고 온 가방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이부자리 등 큰 짐은 시외버스정류장에 맡겨두었다는 것이었다. 朴正熙는 사표를 던지고 나온 길이라고 했다. 그날밤 朴正熙는 ㄱ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朴正熙는 친구에게 {오늘밤은 맥주 먹어야겠다}면서 막걸리를 물리치고 맥주를 사오게 했다. 술을 마시면서 朴正熙가 설명한 사건의 경위는 대강 이랬다.
  
  朴正熙는 그때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교사들은 군대식으로 머리를 빡빡 깍게 되어 있는데, 그는 요새 기준으로 하면 장발이었다. 당시로서는 이건 대단한 도전이었다. 나를 내쫓아달라는 오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반발이었다. 이틀 전에 데라도(寺戶)란 시학(視學 장학사)이 문경공립보통학교에 시찰을 왔다. 1년에 한 번 있는 이 시찰의 평가에 따라 교장의 인사고과도 결정된다. 교사들을 불러 놓고 강평하는 자리에서 데라도 시학은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 이것은 황민화정책이 철저하지 못한 증거다}고 은근히 朴교사를 겨냥하여 비판했다.
  
  그날밤 아리마(有馬)교장 집에서 시학을 위한 술자리가 있었다. 교사들도 초대되었다. 시학과 교장은 朴교사의 머리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취한 朴교사는 시학과 교장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다가 술잔을 던지는 등 소란으로 발전했다. 동료교사들이 말려서 朴교사는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다음날 40대의 아리마 교장은 자기 방으로 朴교사를 불러 또 질책을 했다. 울컥한 朴교사는 그 자리에서 교장을 [패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표를 써 던지고 짐을 싸 문경을 뜬 것이었다. 대구사범관비생들은 졸업 후 4년간(사비생은 2년간) 의무적으로 교사직에 있어야 하고 그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받았던 관비를 되돌려 주도록 되어 있었다. 朴교사는 그때 교사생활이 3년째였으나 뛰쳐 나와버린 것이었다(그 뒤 만주로 갔으므로 관비 환불은 하지 않았다).
  
   관동군 대좌 소개로 군관교 입학
  
  이야기를 다 들은 ㄱ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한 것인가} {막막하다. 부모님한테는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런데 전에 우리 학교의 배속장교인 그 아리까와 대좌 알지? 실은 졸업 후에도 편지왕래가 있었어. 그 분은 지금 만주의 신경에서 관동군 독립부대장으로 있어. 거기로 가 볼까 해} 다음날 아침 ㄱ은 朴正熙의 가방과 짐을 함께 들고 함창역까지 나가서 김천행 열차를 태워 보냈다. 朴正熙는 김천에서 다시 구미로 와서 상모동의 본가엔 들리지 않고 누님 朴在熙로부터 여비를 받아 만주로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군관학교 시절 고향에 다니러 온 朴正熙는 ㄱ을 찾아 와 아리까와를 만난 얘기를 해주었다. 즉, 朴正熙가 그의 관사를 찾아가니 아리까와는 반갑게 맞아들여 {왜 왔느냐}고 묻더란 것이다.
  
  일본인 교장을 패주고 온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이라까와는 {그자식, 잘 때려 주었다. 넌 군인이 되게}라고 하더란 것이다.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에 필요한 추천서는 아리까와 대좌가 써주었다. 한국의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하는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막강한 일본 엘리트 장교의 추천이 있었으니 朴正熙에 대한 신원조사 등의 문제도 수월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리까와는 그 뒤 남방전선에서 전사했다. 다른 기자들이 문경에서 당시의 문경보통학교 직원이나 하숙집 부근 사람들을 상대로 취재한 朴교사의 사표 제출경위는 朴교사가 ㄱ에게 털어놓은 내용과 세부사항에서 약간씩 틀리긴 하지만 사건의 대강은 일치하고 있다.
  
  朴正熙가 일제의 지나친 교육정책에 소극적이지만 반발했고(당시의 기준으로는 용기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일본인 교장의 구타로 발전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왜 일본의 괴뢰인 만주국의 사관학교에 들어가 대륙침략전의 한 도구가 되기를 자원했던가. ㄱ의 증언으로 미루어 관변측 전기 작가들이 주장하듯 [독립에 대비해서 군사지식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볼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머리를 깎으라는 지시에 반발한 그가 그보다 더 혹독한 규율과 천황숭배를 강요하는 만군에 들어가기로 한 가장 큰 동기는 [적성에 맞는 직종을 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그의 변신으로 볼 때 朴正熙는 당시의 식민지 정책에 인간적으로나 감정적 차원에서 반항하기는 했지만 질곡의 구조를 꿰뚫어볼 수 있는 체계적 안목과 그런 인식에서 우러나는 근원적 문제의식이나 결단력을 아직 갖지 못했던 것 같다.
  
  朴正熙가 군인의 길을 택한 것은 갑작스런 사건 때문이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늘 군인을 동경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朴正熙는 [나의 소년시절]에서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일본군이 훈련하는 것을 보고 군인이 되었으면 했음. 보통학교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했고, 5학년 때는 춘원이 쓴 책을 읽고 이순신을 숭배하게 되었고, 6학년 때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숭배하게 되었음]이라고 썼다. 대구사범의 군대적 교육은 그의 군인기질을 더욱 굳혔을 것이다. 교사시절 그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모른다. 이 다음에 긴칼 차고 대장되어 돌아오면 군수보다 높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22세였다. 첫 결혼생활에는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안온한 가정이 있었다면 그의 만주행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주행이 없었더라면 그 뒤의 朴正熙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고 한국의 모습도 그러했으리라.
  
  [동양의 서부] 만주의 대지
  
  1928년 6월 관동군 참모 가와모도의 음모로 만주군벌 張作霖이 폭사한다. 이것을 신호탄으로 하여 관동군내 극우파 소장장교들은 일본 중앙정부의 지시를 노골적으로 깔아뭉개면서 만주점령계획을 추진해 갔다. 그 전략적 목표를 만주사변의 주모자 이시하라 간지(石原莞)는 [만몽문제 해결안]에서 간결하게 설명했다. […일본이 동양의 선수권자이기 위해서 만몽을 우리의 영토로 하는 외에는 절대로 다른 방도가 없다. 이에 의해서 대소(對蘇) 작전에 유리한 근거지를 마련하며, 배일·공산운동의 조선침투를 막음으로써 조선지배를 튼튼히 할 수 있다. 이것은 명치유신 후 10만의 생명과 20억 엔의 국비를 투입한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하는 길이다]
  
  1931년 9월18일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하라와 이다가끼 세이시로(板垣征四郞 뒤에 조선군사령관)이 명콤비는 만철선 폭파사건을 조작,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관동군은 1932년 3월까지 만주의 거의 전역을 점령했다. 1931년 11월엔 봉천특무기관이 천진폭동을 조작, 망한 청나라의 선통제였던 溥儀를 피신시킨다면서 빼내 와 황제로 삼고 괴뢰만주국을 발족시켰다. 약간의 이상주의적 환상을 갖기도 했던 이시하라 그룹은 만주를 한국, 만주족, 한족, 몽고족, 일본족 등 5족이 협화하는 지상천국으로 만들겠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보다 관료적인 일본의 중앙군벌에 의해 이들 주동장교들은 거세되고 1930년대 중반부터 만주는 전쟁확대에 열중한 일본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탈되기 시작한다. 당시의 만주경영을 지휘했던 일본관료 중에는 총무청차장(산업부차장도 겸직)으로 괴뢰 내각의 실권을 쥐었던 기시 노부스께(뒤에 일본 수상)와 산업부 국장 시이나(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외상)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 안에서 막강한 만주인맥을 형성, 5·16 뒤에는 朴正熙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만주인맥과 악수함으로써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키게 된다. 朴正熙가 운명의 발길을 내디딘 1939년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이기도 했다. 야망에 불타는 군인과 관료 엘리트, 만철 조사부와 같은 세계 최대의 두뇌집단, 관동군, 만군, 마적, 蔣介石군, 팔로군, 한국계독립군, 첩자, 아편밀매자, 사기꾼 등 갖가지 모습의 인간군상은 5족이 뒤엉켜 사는 이 넓은 대지에서 기회를 찾아 나름대로의 꿈을 펴려고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용광로요 나쁘게 말하면 쓰레기통이었다. 야만, 음모, 살인, 방화, 벼락출세, 떼돈벌기 등 비일상적인 사건의 연속인 만주는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공통된 분위기를 남겼다. 스케일이 크고 호방하면서도 원칙이 없고 부패하기 쉬운 한일 만주인맥의 공통점은 1930년대 만주의 낙인이기도 한 것이다.
  
   15등으로 합격
  
  1940년도의 만주국 공보를 뒤적여보면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채용시험 합격자 공고]가 나온다. 여기에는 만주인과 조선인 합격자 2백40명의 이름이 성적순으로 적혀 있다. 朴正熙는 [수험지 목단, 수험번호 15번]인데 성적도 전체에서 15등이다. 동기생인 李翰林(전 건설부 장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쳤는데 성적은 20등이었다. 목단강에서 朴正熙와 같이 시험을 쳤던 李再起(신경군관 2기생·육군대령예편·지금 67세)는 이렇게 증언한다. {1943년 11월에 목단강성의 만군관구사령부 안 장교구락부에서 시험을 보았읍니다. 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일본어), 신체검사 등 네 과목이었죠.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국민복을 입은 자그마한 청년이 만주국 육군대위와 함께 들어오길래 시험감독관인 줄 착각했어요. 그 청년이 朴正熙, 그를 데려다 준 장교는 대구 사람 姜在浩였읍니다. 姜대위는 대단한 민족주의자란 사실을 그뒤에 알았죠. 朴正熙가 만군시설 민족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면 거기에는 姜대위 의 영향이 컸을 겁니다}
  
  신경군관학교 2기 신입생도는 일본인생도 2백40명, 중국인 2백23명, 한국인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생도는 일본육사에 시험을 쳐 떨어진 학생들 중에서 추린 것이었다. 한국인 2기생 가운데는 朴正熙이외에 李翰林 李再起 李燮俊 金在豊 金默 등이 있었다. 신입생들은 거의가 3년제나 4년제 중학교 과정을 거치고 들어왔으므로 나이가 16∼19세였다. 5년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생활을 한 뒤 23세에 입교한 朴正熙는 나이나 지식면에서 동기생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신경군관학교(정식 명칭은 만주제국육군군관학교)의 전신은 봉천(지금의 신양)에 있던 봉천군관학교다. 1932년부터 2년제 간부훈련소로 운영되다가 9기생을 끝으로 문을 닫고 1939년부터 신경(장춘)에서 정규 4년과정의 군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한국인들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봉천군관학교 제4기때부터였다. 주로 함경도 사람들이 만주군관 학교에 많이 들어가 뒤에 만군인맥을 형성하는 바탕이 됐다.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의 교외 야산지대에 자리잡은 이 군관학교의 예과 2년과정은 일반대학의 과목배정과 비슷했다. 윤리, 법, 철학, 역사 과목 이외에 중국어 시간이 별도로 있었다. 일과는 아침 6시에 기상나팔소리와 동시에 일어나 바깥에서 점호를 받는다. 이때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을 향해, 즉 동쪽을 향해 절하는 궁성요배와 고향요배를 한다. 내무반으로 돌아와선 침구를 정돈한 뒤 청소를 하고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 일본인 생도들을 수수와 쌀이 섞인 밥을 먹고 중국인과 한국인 생도들은 순 수수밥만 먹으면 소화가 안 되기 때문이란 게 이유였다. 소화가 안 되기는 한국인도 매한가지였다. 식사차별 때문에 저절로 민족감정이 생기더라고 한다. 식사 뒤엔 내무반으로 돌아와서 지도생(1기 선배)과 구대장으로부터 내무 검사를 받은 다음 오전엔 4시간의 학과 공부, 오후엔 4시간의 훈련을 받는다. 저녁식사 뒤엔 자습시간이 있다. 이때 일기를 써야 한다. 일기장은 구대장이 갖고 가서 검열하기 때문에 생도들의 사고방식이 드러나기도 했다. 취침직전엔 조명을 어둑하게 한 다음 내무반에서 차렷자세로 반성시간을 갖는다.
  
  지도생이 [5성](五省)을 외친다.
  - 至誠에 위배된 적은 없었던가.
  - 언행에 부끄러운 점은 없었던가.
  - 기력이 부족했던 점은 없었던가.
  - 노력에 아쉬운 점은 없었던가.
  - 부정(不精)에 손을 댄 적은 없었던가.
  
   모진 구타에서 끄덕 없어
  
  신입생들에겐 첫 여섯달 동안은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픔과 무지막지한 구타였다고 이재기(李再起)는 회고했다. 1기생 선배들이 가장 무서웠다고 한다. 특히 한국인 선배들이 1개 후배들을 밤에 몰래 불러내 구타를 하거나 체벌을 주는 일이 잦았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뒤지지 말라}는 독려성 구타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2기생들을 스파르타식으로 휘어잡는 데 앞장 선 1기생으로는 박임항(朴林恒.육군중장예편·건설부장관 역임·사망)과 최창윤(崔昌崙.6·25때 전사)이 유별났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정열적이고 민족성신에 투철한 수재였으며 인간적인 매력이 많은 이였다.
  
  두 사람은 그 뒤 朴正熙와 숙명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나이가 4∼6세나 아래인 1기 선배들로부터의 수모를 朴正熙는 그 특유의 과묵한 인내심으로 잘 소화했던 것같다. 朴正熙는 만군시절이나 해방 뒤 군에 들어가서도 군관학교 선배에겐 나이나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형님]으로 부르면서 깎듯이 대했다. 한국군부의 주도권 싸움이나 5·16쿠데타에서 드러난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유별난 결속력은 군관학교시절의 끈적한 선후배간 관계에 힘입은 바 크다. 1기생 방원철(方圓哲.육군 대령 예편)은 {후배들을 무섭게 다룬 만큼 아껴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보니 정이 들었다}고 했다. 李再起는 동기생 朴正熙가 어느 일요일에 외출을 다녀왔다가 무슨 일로서인지 崔昌崙선배에게 취침 직전에 불려나가 죽도록 얻어맞고 하소연하러 온 일을 기억하고 있다. 朴正熙는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더란 것이다.
  
  方圓哲도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다고 주먹으로 朴正熙를 때린 적이 있었다. {다른 후배는 턱을 맞으면 휘청휘청 하는데 그는 딱 버티고 주먹을 받는데 차돌같이 단단한 느낌이었읍니다. 맞아서 몸이 밀리면 금방 제자리로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독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때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몰랐읍니다} 당시 신경군관학교의 일본인 교관이었던 大高勝工(71세·國士館대학전자계산센터 사무장)은 이렇게 증언했다(일본 [문예춘추]에 실렸던 [한일인맥의 원류]에서 인용).
  
  {나는 3기생을 가르쳤기 때문에 朴正熙생도를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1941년의 종합연습 때 나는 소대장, 그는 분대장이었는데 진지공격 같은 훈련에서 맹렬한 투지를 발휘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의 인상으로 나는 朴正熙가 팔방미인이라기보다는 성실한 인간이며, 투지를 가슴 속 깊숙이 감추고 있는 생도라고 생각했다}
  
  동기생 李再起가 본 朴正熙는 이러했다. {학교공부하러 갈 때는 생도들이 책상 서랍을 열어놓고 가게 돼 있었어요. 그때 朴正熙의 서랍을 보면 책이나 문방구류가 그렇게 깔끔하게 정돈돼 있을 수가 없더군요. 이때 朴正熙는 교칙위반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외출나가면 줄담배를 피우는 것이었읍니다. 그때는 여자와 관계하든지 담배를 피면 무조건 퇴교였거든요. 외출에서 돌아오면 칫솔질을 하여 냄새를 없애려고 애를 쓰더군요.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나서 군관학교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읍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시키는 것을 본 적은 없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란 인상은 여러 번 받았습니다}
  
   창씨개명, 수석졸업, 어전강연
  
  그때 정일권(丁一權)은 만군 중위로서 신경에 근무하고 있었다. 생도 朴正熙는 봉천군관학교 출신인 丁一權을 자주 찾아 왔다고 한다. {일요일이 되면 신경관사로 나를 찾아와 놀다가 가곤 했읍니다. 담배와 술을 좋아하고, 말수가 적고 아주 성실한 청년이었읍니다. 가난했던 어린시절 이야기를 더러 했는데 나도 똑같은 환경에서 컸기 때문에 대화의 공감대가 있어 각별히 친해졌지요. 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가 오면 배급표를 정종으로 바꿔 대작하곤 했읍니다. 그는 일제가 멀지 않아 망하고 한국이 독립하고야 말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어요} 당시 신경군관학교에는 간노 히로시(管野弘)란 일본인 교관이 있었다. 일본육사 출신이었다. 그는 1936년 2월26일에 도오꾜 기도(2·26사건)에 연루됐던 이였다. 철저한 천황주의자면서도 이상주의와 아시아주의의 성향이 강한 이들 청년장교들 중 주모자급은 처형되고 연루자들은 추방당했다. 간노도 추방당했으나 동료들의 주선으로 만주군관학교로 옮겼다.
  
  여기서 그는 은밀하게 중국인과 한국인 생도들에게 독립에 대비한 준비를 하도록 충고를 하고 민족정신이 강한 생도들을 불러 격려를 하곤 했다. 신경군관학교의 전신인 봉천군관학교의 7기생인 고 李相烈(해군대령예편·작고)은 생전에 이런 증언을 했다(효창원순국추모위원장 박재홍.朴在鴻보관). {어느날 간노가 나, 박승환(朴承煥), 常世英(중국인)을 불렀다. 대뜸 일본인 패전하고 만다, 너희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생각일랑 버려라, 이러면서 경제·군사·사상관계 책을 주면서 공부를 하라고 합디다. 그 뒤 우리는 수시로 그를 찾아가 지도를 받았읍니다}
  
  方圓哲은 만주군관학교의 교육이 일제의 충복을 만들려는 목적을 뚜렷이 하고 있었지만 중국·한국 생도들이 고분고분 따라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중국 생도들이 비밀결사를 만들었다가 발각돼 여러 명이 무기징역 형을 받고 해방 때 출감한 사건도 있었고, 졸업하자마자 장개석(蔣介石)군대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읍니다. 중국인 구대장이 중국·한국인 생도들에게 대놓고 일본의 침략성을 비판하는 말을 해도 밀고자가 없어 다치지 않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교육도 한국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정도로 지독하지는 않았읍니다. 만주국의 국시가 5족협화니까 노골적으로 일본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기가 어려웠지요}
  
  군관학교에서의 공용어는 일본어였다. 朴正熙 등 한국인 생도들도 일본어로만 이야기했고, 그들끼리 모일 때는 한국어를 썼다. 朴正熙는 입교한 다음해 다가끼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다. 군관학교에선 한국인생도들에게 1주일간의 휴가를 내주어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시켰던 것이다. 창씨개명을 안하면 퇴교시킨다는 명시적 협박은 없었으나 안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동기생들은 말한다.
  
  1942년 3월 朴正熙는 2백40명의 중국인·한국인 생도(일본인 생도는 별도교육) 가운데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식장에서 만주국 부의(溥儀)황제로부터 상(시계)을 받았고 [어전강연]이란 답사를 그 특유의 깐깐한 목소리로 읽었다. 그 내용은 천황과 溥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이었다. 동기생 李再起는 {아마도 학교에서 써준 것을 읽었을 것이다}고 했으나 方圓哲은 {수석졸업자가 써서 검열을 받은 뒤 읽었다}고 엇갈리는 증언을 했다. 신경군관학교 1기생졸업 때도 朴林恒이 수석을 했고, 3기 때는 중국인 4기에선 張銀山(해방 뒤 포병사령관·작고)이 수석을 했다. 숫자에서 중국인 생도의 20분의 1밖에 안되는 한국인 중에서 수석졸업자가 많이 나온 것은 한국인생도들의 우수성을 증명한 일이었다. 강문봉(姜文奉.육군중장예편)이 군관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도 朴正熙가 수석으로 졸업식에 나와 상을 받는 뉴스영화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 육사 유학 : {권력은 총구에서}
  
  1944년 朴正熙는 이섭준(李燮俊), 이한림(李翰林), 김재풍(金在豊) 등 세 한국인 동기생과 70여 명의 만주계 생도들, 그리고 2백40명의 일본인 생도들과 함께 일본육사 유학생대에 편입됐다. 정규 57기가 3학년 때로서 동기 관계였다. 李燮俊(서울 망원동 거주)에 따르면 일본육사 교육은 정신적으로 쥐어짜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침 6시에 일어나 2㎞를 구보하여 오다께 신사에 가서 군인칙유를 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기서도 朴正熙는 모범생이었다. {도무지 불만이 없고 표현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한문 교관이 朴正熙의 작문엔 뭔가 숨은 뜻이 있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의 일기장 검열을 한 교관도 도대체 朴正熙의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李燮俊은 {나는 그때 90%는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독립이 왜 필요한지 생각도 해본적이 없었다. 받은 교육이라곤 황국신민교육뿐이었으니까. 그러나 朴正熙는 달랐다}고 기억한다. 朴正熙는 일본청년장교들의 실패한 쿠데타 기도인 2·26사건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이런 시대에 배울 거라곤 군사학뿐이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독립 이야기를 자주 해서 李씨가 {독립이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朴正熙는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더란 것이다. {자유시간엔 朴正熙가 혼자서 골똘한 생각에 잠겨 운동장을 거니는 걸 자주 봤어요. 무슨 생각하느냐고 말을 건네면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해요. 그래서 대통령이 된 뒤에 내가, 그때부터 정권 빼앗을 꿈을 꾸었지, 하고 농담을 한 적도 있어요}
  
  朴正熙와 같은 구대에서 교육받았고 바로 옆자리에서 잤다는 일본인 동기생 다께자와(국사관 대학 사무장)는 {그는 에피소드가 없는 사나이였다. 성실과묵이 전부다}고 기억했다. 동기생 오리구찌에 따르면 朴正熙는 사까끼 구대장을 좋아했는데, 사까끼는 {일본은 곧 진다. 끝까지 살아 남아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반골이었다고 한다. 朴正熙는 여기서도 담배와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담배·술·여자는 금지되어 발각되면 퇴학감인데, 그는 외출 때는 꼭 담배와 술을 즐겼다는 것이다. 한국인 생도들은 영친왕을 문안가기도 했고 3학년 방학 때는 고향에 가지 않고 일본 전국을 유람하는 등 여가를 재미있게 보내기도 했다.
  
  李燮俊의 누이동생은 일본에서 자취하면서 여고를 다니고 있었다. 전시하에서 식량을 제대로 못 구해 배고파했다. 李씨는 朴正熙 등 세 동기생들과 일요일에 외출나올 땐 도시락에 밥을 꽉꽉 담아 와서 동생에게 주었다고 한다. 朴正熙 등 네 한국인 동기생들은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소·만 국경지대의 지지하르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어 사관견습을 석달간 받았다(朴正熙의 졸업성적은 3등). 중국인 동기생 두 명이 만주로 돌아가는 길에 蔣介石군으로 달아난 사고가 난 뒤라 이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모래주머니를 지고 8㎞를 구보하는 벌을 자주 받았다. 朴正熙는 그 무게를 감당 못해 잘 넘어져 李燮俊이 대신 짊어져 주기도 했다. 이 부대에서도 한국인 견습사관들은 차별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4: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