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8군 사령부(하) - 용산 합중국의 내막(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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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복(吳滋福) 장관의 논문
  
  현 국방장관인 吳滋福씨는 1982년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육군장교 경력관리에 관한 연구]란 논문으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吳씨는 현역으로 있으면서 행정고시 합격자도 떨어진다는 어려운 대학원시험에 실력으로 합격하여 이 논문을 썼었다. 이 논문에서 吳滋福씨는 [윤리적 측면에서 본 군의 특질]을 이렇게 지적했다. 첫째, 투쟁의 인식. 군은 인간이나 자연계에서 충돌과 투쟁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보편적 형태로 본다. 둘째, 폭력의 인정. 군은 인간의 성악설을 더 인식하여 폭력을 인간의 생리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본다. 설득보다는 힘의 사용을 더 인정한다. 세째, 집단존중과 국가중심. 네째, 현실주의. 군은 모든 행동을 경험과 역사에 의존하여 행함으로써 보수성과 현실성을 가지며, 융통성과 직관 또는 감성적 면은 적다. 다섯째, 미래지향성. 군은 적과의 생사를 건 승패를 늘 의식하여 그것에 대한 대비에 있어서는 적극적 미래지향성을 갖는다.
  
  吳씨는 평상시의 군장교가 갖게 되는 집단 심리적 변화로서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전시에 발휘되던 무덕(武德)도 평화시에는 보수와 직위, 생활환경 등 물질 지향적인 타산 심리로 바뀔 수 있고, 둘째로는 전시에 시민사회가 군에 대하여 보냈던 존경심이 줄어들면서 [군의 위신의 하락]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吳씨는 [군의 사회적 기능면]에 있어서 군이 ①청년들에 대한 국민화, 사회화 교육기능 ②인력양성기능 ③사회저변 층의 흡수 등 긍정적 기능을 하고 있지만 군대독단주의(Military Dogmatism)의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하여 [후진국에서는 시민 사회를 지도할 사명감을 만들고 국민의 협력을 구하는 대신 강제 수단에 호소하려는 성향을 낳게 하며, 문민통제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吳씨는 또 [정치체제가 민주적일수록 또 공업화될수록 사회적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사람들로써 군이 충원되기 쉬운 여건이 구비되기 때문에 지배계층과의 동질성이 약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吳씨는 그 한 예로서 육사지망생들의 고교성적 분포가 떨어지고 있는 자료를 제시했다. 현재 중령, 소령으로 있는 1970년 육사 입학생들의 고교시절 평균석차는 상위 30%선에서 40, 50, 60%선 까지 떨어졌다는 것이다. 吳씨는 군 직업주의를 확립하는 방안으로 7개 요건을 제시했다. 즉 ①군 직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높이고 ②우수한 젊은이들을 임용할 수 있는 절차가 마련되어야 하며 ③진급의 공정 ④훈련·교육의 강화 ⑤보수의 적정 ⑥승진에서 탈락된 사람들에 대한 이직방안 ⑦장기적 군장교수급 계획의 수립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吳씨는 장교들에 대한 국내외 대학 위탁교육이 너무 정규육사출신들에게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지난 79년까지의 위탁교육자 1천71명중 7백63명이 정규육사출신). 吳씨는 장교들이 진급을 지상과제로 삼고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음을 지적, 진급제도에 대한 개선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吳씨가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현행진급 제도에 대해서 육군장교 들의 38·8%가 긍정, 42·5%가 중간, 38·7 %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吳씨는 일반장교는 진급에 가치지향을 두게 하고, 직능장교는 전문적 직업성 및 보수에 가치지향을 두도록 해야 하며 심사 과정에 대한 공개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변하든 군사력의 핵심은 곧 사람이며, 전승의 최종적인 관건이 인적 요소에 있다]고 지적했다. 吳씨는 [우리 육군의 인사제도는 완전폐쇄 식이기 때문에 관공서나 기업체와는 달라서, 필요에 따라 관리 층을 외부로부터 채용할 수가 없으며 오로지 진급을 통해서만 관리 층 인재를 확보할 수 있어 인재육성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인사적체는 불안 불러
  
  吳장관이 지적했듯 장교들은 명예심을 무겁게 여기는 이들이다. 그 명예심의 구체적 표현이 계급이다. 계급이야말로 군 조직의 시작이요 끝이다. 진급관리는 군 인사와 군 운영의 고삐인 것이다. 군장교단에 인사의 주름이지면 그것이 국가적인 변혁으로 나타난다고 까지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정규육사 출신이며 예비역 대령이기도 한 한용원(韓鎔源)교수(교원대학)는 {5·16은 육사 8기생들의 인사불만, 12·12사태는 정규육사출신들의 승진의욕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육사 8기생들은 5·16 당시 대부분 중령이었는데 6∼7년간 그 계급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8기생들보다 1∼2년 앞선 육사 선배들이나 군사 영어학교 출신들은 소장, 중장까지 승진해 있었고 나이차이도 거의 없었다. 5·16거사에 8기생들이 많이 참여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인사불만이었다고 한다.
  
  12·12사태 때 정승화(鄭昇和)총장을 연행하러 갔던 우경윤(禹慶允) 당시 대령(소장 예편·당시 합수본부 수사국장 겸 육본범죄 수사단장)은 바로 그 며칠 전에 장성진급에서 누락되었음을 전두환(全斗煥) 장군으로부터 귀띔을 받았었다. 이 정보를 전해주면서 全장군은 협조를 부탁했던 것이다. 禹대령이 鄭총장을 연행하러 가서 한 첫 마디가 {총장님, 진급에서 누락되었더군요. 섭섭합니다}였다. 그날 밤 최규하(崔圭夏)대통령의 경호실 간부로 있으면서 全장군 편에 서서 崔대통령을 외부와 차단했던 모 대령의 경우도 장군 승진자 심사에서 鄭총장이 직접 지적하여 탈락시켰던 사람이었다. 이 대령은 12·12사태 뒤 대장까지 승진했다. 12·12사태 때 鄭총장편에 섰던 이들은 거의 전부가 육사10기 이전의 장성들이었고 全장군 편에 섰던 이들은 전부가 정규육사 출신이었다. 12·12사태 뒤 10기 이전의 비정규육사출신 장성들이 무더기로 예편되면서 인사에 숨통이 트였고, 정규육사 출신들이 대거 진급함으로써 12·12사태에 기인한 군내의 앙금도 씻어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용원(韓鎔源) 교수는 {한국군에서는 10년 주기로 진급에 적체 현상이 생기는 경향이 있다. 1960년대 초에 이어 1960년대 말에도 생길 뻔했으나 월남전이 해결해주었고 70년대 말에는 12·12사태가 해결해 주었다. 이런 인사의혹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한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유신사무관 제도의 폐지 등으로 장교들을 사회로 너무 빨리 내보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군 인사법을 고쳐 장교들의 정년을 3∼5년 정도씩 연장할 계획이다. 현재 군에서는 계급정년, 근속정년, 연령정년 등 세 가지 정년제를 적용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중 먼저 오는 것에 걸리면 전역하게 돼 있다.
  
  대령의 경우 계급정년이 9년, 근속정년이 27년, 연령정년이 50세다. 이번에 국방부는 이 세 가지 정년제를 단일화하여 대령정년을 50세에서 55세로, 중령은 47세에서 50세로 연장하는 식으로 조정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진급이 늦어지고 인사적체 현상이 생길 것이라고 우려하는 측도 있다. 5·16과 12·12사태 이후 군이 계급을 논공행상의 한 방편으로 이용한데 대하여 울화통을 터뜨린 예비역 장교들도 있었다. 권정달(權正達), 허삼수(許三守), 허화평(許和平), 이학봉(李鶴捧)씨 등 이른바 개혁주도 핵심들은 동기생들보다 수년이나 앞서 준장으로 승진했고, 승진하자 며칠도 안 되어 전역하였다. 이들을 [3일 장군]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전역하기 위한 장성 승진]은 신성해야 할 군 계급을 사용(私用)한 것이며, 군의 위계질서를 스스로 어지럽힌 처사라고 흥분한 한 예비역 장교는 {논공행상은 훈장으로써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축소되는 군부의 비중
  
  타룩더 매니루자만이라는 방글라데시의 정치학자는 군사 쿠데타를 경험한 개발도랑국가 61개국의 군사통치 기간 랭킹을 낸 적이 있었다. 1946∼84년간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한국은 23위였다. 즉, 36년 중 두 차례에 걸쳐 23년간(63·9%) 군사 통치를 받았다는 것이다. 1위는 1백%의 군사 통치율을 보인 대만, 2위는 89·5%인 태국, 이어서 86·8%의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 86·4%의 알제리아, 84·2%의 이집트, 83·3%의 자이레, 81·8%의 브룬디, 81·6%의 시리아, 78·9%의 파라과이, 75%의 수단, 71·1%의 아르헨티나 등등의 차례였다. 이들 나라는 한국처럼 오랜 문민 통치의 역사를 갖지 못한 국가이다. 한국은 2천년 역사에서 몇 백년에 불과한 군사통치의 경험을 갖고 있을 뿐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분기점으로 해서 27년간 지속되었던 군사통치는 이제 퇴조기에 들어간 것이 확실하다. 대령 출신의 한 정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사정권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 둡시다. 우리는 이제 왜 이 나라가 군부의 통치를 27년간 받았는지,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던지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읍니다. 군부통치를 다시 받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1988년 일반회계예산 규모는 17조4천6백44억원이었다. 국방비는 전체의 32·8%인 5조7천3백30억원, 지난해의 국방비 예산보다 15·6%가 늘어났다(일반회계 예산의 전체 증가율은 8·7%). 1988년의 국방비는 88년도 추정 GNP대비 5·43%로서 87년도 예산편성시의 GNP대비 5·55%에 비해서는 0·12%포인트가 떨어졌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방비의 절대 규모는 늘어가지만 국가경제 규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얘기다. 군의 영향력의 원천은 물리력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물리력이 돈의 액수로 표현된다.
  
  한국 군부의 영향력은 민간부문이 커짐에 따라 축소의 길을 밟고 있으며 이것은 문민통치의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정치학자의 논리였다. 군부통치가 가능했던 것도 6·25전쟁을 계기로 군부에 인력, 자금이 집중되어 다른 어떤 사회조직 보다도 양과 질에서 앞서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경제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70년대부터는 기업 조직의 효율성과 규모가 군을 압도하게 되었고 군부의 국가지도력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88년 예산에 따르면 교육비는 3조6천10억원으로서 전체 예산의 20·7%를 차지, 국방비에 이어 두 번째다. 교육비의 투자는 학생세력의 영향력을 키우는데도 일조를 했다. 한국정치를 좌우한 2대 조직인 군과 학생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투자액수와 유관하다는 얘기다.
  
   교육으로 지새는 장교집단
  
  육사출신 대령급의 약 3분의 1은 석사학위 소지자라고 한다. 보통 정규 육사 한 기수의 5∼7%는 박사학위 소지자들이다. 교수를 제외한 우리 사회의 어떤 집단보다도 정규육사 출신의 교육수준은 높다. 이들은 이 점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동희(李東熙) 교수(경기공업개방대학)는 [정규육사출신들은 1950년대에 사회가 혼란하고 일반대학의 교육제도가 정상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미국식 고등교육과 민주주의 이념을 철저히 배운 장교들이다. 비교적 직업의식이 강한 교육을 받은 군인이기 때문에 장차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할 수 있는 집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평했다([한국의 정치발전과 민군 관계]).
  
  李東熙교수는 이 논문에서 [민과 군의 관계가 복수와 도전의 승부 관계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규육사출신들이 걷는 대령진급까지의 경과를 보면 교육과 근무와 진급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4년 제 육사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되면 4개월 과정의 초등 군사반 교육을 이수한 뒤 소대장으로 일하게 된다. 대위 때 4∼5개월 과정의 고등 군사반 교육을 받고 중대장을 역임한 뒤 소령으로 진급, 육군대학에서 1년간 또 공부를 한다. 중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국방대학원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한 뒤 대령으로 진급한다. 최근엔 육군대학과 국방 대학원 과정을 2년으로 연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대령까지 진급하는 동안 적어도 약3년간의 집중교육을 받는 것이 장교들이다.
  
  엘리트들은 국내외 대학에 유학하는 위탁교육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훈련과 교육의 반복 및 장교 특유의 책임감은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박력 있는 추진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데 쌍두마차 역할을 했던 안무혁(安武赫/육사 14기) 당시 안기부장과 이춘구(李春九) 당시 민정당 선거대책본부장 두 사람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을 해내는 집념과 끈기에서는 기성 정치인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겠더라}고 했다. 그러나, 군 출신 기업인들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난관을 돌파해가는데는 군인정신을 살려 잘 하지만 평상시의 경영에는 부적합한 것 같다고 한 예비역장교는 평했다. {군인은 명예심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교육받아온 이들인데 그런 것들을 팽개쳐야 하는 로비나 영업 부문을 맡기면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쿠데타도 혁명도 불가능한 나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핵심 참모로 근무했던 한 고위공무원은 이런 비교를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구 세대적인 야당의 관리능력 대(對) 현대화된 군사문화의 승부였다. 단일화를 공약했던 두 김씨는 대권을 앞에 두고 분열했던 데 대하여 위태위태하게만 보이던 전(全)·노(盧) 두 분의 인간관계는 끝까지 지속되었고, 기가 막힌 역할 분담을 해냈다. 대통령선거 기간 중 全대통령은 盧후보를 불러 표를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면 과감하게 나를 비판하라고 했었다. 선거가 끝난 뒤의 정권이양 기에도 全대통령은 측근들에게, 모든 비난은 우리가 뒤집어 써야한다. 앞으로 우리가 OB역할을 해서 새 정부를 밀어주어야 한다고 부탁했다.
  
  6월 사태 때 군이 나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도 단임 약속에 대한 全대통령의 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역사는 중요한 줄기만 기술할 것이다. 全대통령 시대에 경제 안정이 이룩되고, 올림픽의 유치로써 남북한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해졌으며, 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기록될 때 비로소 그 분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기자가 이번 취재과정에서 만나본 전·현직 장성들, 군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이제 대한민국은 쿠데타도 민중혁명도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번 총선에서 주요 정당을 업지 않은 재야 투사들이 많이 낙선하고, 허삼수(許三守)·이상재(李相宰)·허청일(許淸一)·강창희(姜昌熙)·김식(金湜)씨 등 민정당의 군 출신 개혁주도 세력이 무더기로 떨어져 {총선은 투사와 별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말이 상징적으로 그런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제는 군대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행동해도 실패할 것이며 일시적으로 집권에 성공해도 정권유지가 안 될 것이란 얘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군이 주도적 세력의 역할을 할 수 있던 시대를 지났다는 것이다. 군대도 언론, 관료, 학생, 종교, 기업 등 이 사회의 여러 세력집단 중 하나이며 그 상대적 비중은 날로 약화될 것이란 분석이었다. 그러나 군이 나서는 상황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역장성들도 {경찰력이 한계에 이르고 용공·좌경세력이 국기를 뒤흔들려고 할 때는 군이 구경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권차원이 아닌 국가수호란 차원에서 군이 행동할 가능성은 있지만, 성숙돼 가는 국민과 정당의 정치의식이 그런 상황을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1980년 5월에 군이 나올 수 있었던 데 반해 1987년 6월에는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80년 5월에는 중산층이 학생 편에 서지 않았던 데 대해 지난해 6월에는 학생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중산층이 위기의식을 느낄 때 군부쿠데타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도 전군의 지지를 받는 세력이 아니면 정권장악에는 실패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 고위공무원은 {물리력으로 충돌하면 군대를 당할 세력이 어디 있는가. 그런 상황을 절대로 만들지 않아야 민주화가 된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는 총선에서 민정당이 패배한 때문에 노(盧)대통령에 대한 군부의 지지가 약화될지 모른다는 기사를 실었다. 군 수뇌부가 김대중(金大中)씨의 재 부상(浮上)으로 약간 긴장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련한 金씨의 온건선회는 그런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낳게 하고 있다. 여권의 한 핵심참모는 {金大中씨가 盧대통령의 신임 투표에 승부를 걸려고 하면 정국이 시끄러워지고 군도 긴장할 것이다}고 내다보았다.
  
   분단국가 군인의 보람과 슬픔
  
  기자가 만난 대부분의 현역장교들은 {그래도 군대만큼 지역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집단도 드물 것이다}고 말했다. 서로 뒤엉켜 같이 뒹굴면서 동고 동락하는 중에 지역감정이 잊혀지고 만다는 것이다. 지역감정에 둔감한 군은 요즈음에 와선 {지역감정이 이래선 안 되는데…}하는 쪽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 대령은 말했다. 군부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군사문화의 그러한 좋은 점까지 잊게 하였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할 수 없게 한 경색된 분위기도 이제 풀리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교들만큼 사람이 된 이들도 드물 것이다. 건강하고, 정직하고, 정의감 있고, 행동적이며 추진력이 있는, 만나서 유쾌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군인문화가 경제개발에 끼친 공헌은 굉장한 것이다} 흔히 예로 드는 것이 군의 경영·기획 제도가 행정·기업에 넘어가 현대적인 관리 기법으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이다. 해외로 뻗어 가는 국민적 에너지의 대 폭발을 군대경험으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남자들은 전쟁과 군 경험을 통해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좌절과 모욕감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맨 밑바닥에서 비로소 우러나는 용기와 희망을 한국인들은 터득하게 되었고 그 저력으로서 세계를 누비며 악착같이 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군대에서 겪었던 고생을 떠올리며 {에이, 군대 생활하는 셈치지}라면서 다시 용기를 얻고 돌파를 시도하는 [안되면 될 때까지]의 정신력이 한국의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는 풀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군 조직의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젊은 날 2∼3년간의 군대생활이 한국인을 강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부모와 가정의 품속을 떠난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들의 허전함을 잊게 해주는 기상나팔, 배고픔, 구타, 구보, 원산폭격, 그리고 연지편지… 이런 체험을 공유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동질성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람과 한 시간만 이야기해보면 군대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느낌으로 알아낼 수 있을 만큼 한국 남자들의 체질 속에는 군사문화가 배어있다. 앞으로의 문제는 민군 관계를 부마사태, 이전의 친선관계로 돌려놓으면서,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뿌리박은 군사문화를 승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민주화란 것이 군사 정권의 선의나 시혜에 의하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의 대결에 의하여, 즉 사회세력간의 역학 관계가 변화하는 결과로서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우리는 얻었다. 군사정권이, 민주화의 물결을 타게 된 것, 또 다른 군인정치가에 머물렀을 노태우(盧泰愚)씨가 극적으로 변신한 것, 장교들이 여론을 두려워하고 오히려 피해의식까지 갖게 된 것, 이런 일들이 모두 국민들의 강력한 권리주장으로 얻어낸 대가가 매우 비쌌던 변화이다.
  
  군이 정치 판으로부터 퇴장하게 된 것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 동안 국민을 품속에 안았던 군은 이제야말로 국민의 품속에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국민은 커지고 군은 작아지며 착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민기(金敏基)씨가 전역하는 늙은 상사를 위해 작사·작곡했다는 [늙은 군인의 노래] 2, 3절엔 이런 대목이 있다.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 프냐 맛난 것 먹고 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중략)/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내 청춘 다 갔네] 분단국가의 군인 된 보람과 슬픔. 그런 애환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모른 척 해올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이 이제 희미해진 그 옛날의 추억을 되살려 내는 것, 거기서부터 민군 관계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될 터이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4: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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