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개(未開)朝鮮과 개화(開化)日本의 접점(接點)이 된 朝鮮 통신사(通信使)·수신사(修信使)
오늘날 韓國이 外交·安保 분야에서 큰 위기에 直面한 이유는, 무지(無知)와 오판(誤判)을 겸비한, 朝鮮時代 水準의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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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부분, ‘일본에서 웃음거리가 된 조선 수신사’(펜앤드마이크, 2021.8.27) 내용을 참조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日本과의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1607년(宣祖 40년) 再開되면서 朝鮮 통신사(通信使)가 日本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日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년)가 권력을 잡은 時期로서, 막부(幕府) 쇼군(將軍)의 치세를 드러내고 朝鮮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朝鮮 通信使 행차를 추진하게 되었다. 朝鮮 通信使는 한번 갈 때마다 400~500명의 대규모였다. 通信使 대표의 직위는 정사(正使)로서 정삼품(正三品)級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1級 공무원쯤에 해당한다.
  
  朝鮮 通信使는 한번 행차하는 데 100만 냥 정도의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었다. 비용은 전액 日本 막부(幕府)가 부담했다. 通信使 일행이 500명일 경우, 人當 2000냥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당시 日本에 거주하는 外國人 중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것은 이탈리아 선교사 ‘시도치’(Sidocci)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1년 생활비가 25냥 수준이었다. 체재 기간에 상관없이 비교하면 ‘外國人 VIP 1人 1年 생활비 25냥 vs. 朝鮮 通信使 1人 1回 행차비 2000냥’으로 나온다. 朝鮮 通信使가 外國人 VIP에 비해 80倍나 되는 超호화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朝鮮 通信使는 1811년(純祖 11년)까지 총 12回가 실시되었다. 朝鮮 通信使의 이동 코스는, 한성(漢城)으로부터 출발해 동래(東萊)를 거쳐, 대마도(對馬島), 시모노세키(下關),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 등을 경유하여 에도(江戶, 도쿄)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朝鮮 通信使 행차 시기와 규모 등은 다음과 같다.
  
  01回次: 1607년(宣祖 40년), 467명 행차, 日本과의 국교 회복 기념 차원
  02回次: 1617년(光海君 9년), 428명
  03回次: 1624년(仁祖 2년), 300명,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취임 축하
  04回次: 1636년(仁祖 14년), 475명
  05回次: 1643년(仁祖 21년), 462명,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 탄생 축하
  06回次: 1655년(孝宗 6년), 488명,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 취임 축하
  07回次: 1682년(肅宗 8년), 475명,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 취임 축하
  08回次: 1711년(肅宗 37년), 500명,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 취임 축하
  09回次: 1719년(肅宗 45년), 479명,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취임 축하
  10回次: 1748년(英祖 24년), 475명,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 취임 축하
  11回次: 1763년(英祖 39년), 472명,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취임 축하
  12回次: 1811년(純祖 11년), 336명,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 취임 축하
  
  朝鮮 通信使 일행은 日本에 도착하여 발전된 모습과 문물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충격을 받는다. 이같은 내용은 朝鮮 通信使 기록에 그대로 남아있다. 朝鮮 通信使가 日本 쪽에 朝鮮의 선진 문물을 전해주었다는 式의 이야기들은 100% 거짓이다. 마지막 12번째 朝鮮 通信使는 日本 본토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대마도(對馬島)에서 그냥 朝鮮으로 돌아왔다.
  
  막대한 경비를 들여가면서 朝鮮 通信使를 맞아왔는데 日本 막부는 그 동안 朝鮮으로부터 배운 것은 거의 없었다. 通信使 일행들이 항상 성리학(性理學)과 주자학(朱子學)을 거론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다 돌아가는 모습들만 봐야 했던 日本은 행사의 지속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日本 막부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통해 세계 최신 정보를 거의 리얼타임 수준으로 파악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여전히 주자학, 성리학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朝鮮의 通信使는 점차 효용가치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1811년 12번째에는 아예 에도(江戶, 도쿄)까지 올 것도 없이 通信使 일행을 대마도에서 적당히 대접한 후 그냥 돌려보낸 것이다. 이것을 역지빙행(易地聘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日本 막부는 이미 1600년代에 나가사키(長崎) 앞바다에 ‘데지마’(出島)라는 인공섬을 조성했다. 1634년부터 1636년까지 약 2년간의 공사를 거쳐 부채꼴 모양으로 조성한 인공섬에서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동양에 대한 무역권 행사 차원에서 東印度에 설립한 무역회사) 소속 선박들이 출입하면서 日本과 상업행위를 영위할 수 있도록 했다. 데지마(出島)는 일종의 무역기지였던 셈이다.
  
  日本 막부는 1857년 네덜란드와 추가적 무역조약을 맺기까지 200여 년 동안 나가사키 데지마(出島)를 통해 서양의 무기(武器), 기술(技術) 등 선진 문물과 文明을 무차별적으로 흡수했다. 日本 막부는, 네덜란드側에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제공하는 대신, 네덜란드가 전세계에 존재하는 동인도회사 지점들을 통해 획득한 고급 정보를 데지마(출도)주재 네덜란드 책임자로 하여금 보고서 형태로 정리토록 하여, 에도(江戶) 막부에게 매년 의무적으로 브리핑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이에, 데지마(出島) 주재 네덜란드 책임자는 전세계 동인도회사를 통해 파악한 최신정보들을 정리하여 매년 에도(도쿄)를 방문하여 직접 막부에게 그 내용을 상세하게 브리핑했는데, 이러한 브리핑은 1857년까지 총 166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에도(江戶) 막부는 이런 式으로, 이미 1600년代 초반부터 세계 정세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수준의 막부에 대고, 朝鮮 通信使 일행이 性理學이 어떻고 朱子學이 어떻고라는 式의 헛소리들을 계속 늘어놓았으니 日本 막부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1853년 7월 美國 페리 함대(黑船)의 日本 에도(도쿄) 앞바다 등장(출현)에 日本이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日本은 이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美國 페리 함대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고 日本에 도착할 시점까지 알고 있었다. 日本이 놀랐던 것은, 페리 함대의 등장 자체가 아니라, 페리 함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나름 日本에서 가장 좋은 화포 등 막강한 무기들을 준비해놓고 기다렸는데, 실제 페리 함대의 무장(武裝) 수준을 눈으로 확인한 결과 예상보다 훨씬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1876년(高宗 13년) 2월에, 朝鮮과 日本 間에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원래, 큰 틀에서 양국 間 합의한 내용만 취급하게 된다. 따라서, 관세(關稅)나 개항지(開港地)의 체류가능 상대국 인원 규모 등 방대한 세칙(細則)들과 관련해서는 별도의 실무 논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강화도조약 체결 후 朝鮮은 이러한 후속 조치를 취할 생각을 전혀 안 하고 그냥 있기만 했다. 조약 체결로 뭔가 朝鮮이 조금이라도 변할 것으로 기대했던 日本은 이러한 朝鮮의 모습에서 답답함과 함께 실망감을 갖게 되었다.
  
  朝鮮의 내부 사정은 조약 체결 이후에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도하던 최익현(崔益鉉)은, 日本의 사신 구로다 교타카(黑田淸陞)가 강화도조약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등장하여 구로다(黑田)의 목을 베어야 한다며 상소했다. 朝鮮의 지도부가 여전히 위정척사 세력들에게 발목 잡혀 한 치도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본 日本은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朝鮮의 지도층에게 日本의 근대화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지도층이 자극을 받아 近代化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면, 조약에 따른 실무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日本은 기대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중단되었던 조선 통신사(通信使)의 부활이었다. 명칭은, 朝鮮과 日本 간의 신의(信義)를 새롭게 닦는다(修)는 의미에서 ‘수신사’(修信使)로 했다. 以前 朝鮮 通信使의 뉴(New)버전쯤 되는 셈이다. 朝鮮 通信使 때 그랬던 것처럼, 朝鮮 修信使의 행차 비용 또한 日本이 전액 부담하기로 했다. 日本까지의 교통 수단까지 日本側이 전부 제공하기로 했다. 다만, 인원 규모는 과거 通信使와 같은 400~500명의 대규모가 아닌 실무형으로 대폭 축소하자고 日本側이 朝鮮側에 제안했다. 그러자 朝鮮側은 “무슨 소리냐, 그래도 최소한 우리 조선의 위용은 드러낼 수 있는 규모가 되어야 한다”고 물러서지 않아서 결국 76명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76명 中, 30여 명이 풍악대와 기수단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일본 사람들에게, 朝鮮 修信使 일행이 문명국에서 왔다는 것을 널리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 풍악대와 기수단을 고집했던 것이다. 朝鮮 修信使 대표로는 김기수(金綺秀)라는 인물이 선정되었다. 金綺秀는 당시 日本의 상황과 세계 정세를 이해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고종(高宗)은 출발 前에 김기수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일본이 비용을 다 댄다고 하니, 그대는 일본의 물정을 잘 살펴보기 바라오. 특히 일본의 군사 기술을 잘 살피고 빠짐없이 기록하면 좋겠소”
  
  김기수는 性理學과 朱子學을 신봉하는 者로서 평소 朝鮮의 소중화(小中華) 문명이 日本보다 훨씬 우월한 문명이라는 신념으로 가득 찬 인물있었다. 김기수 같은 인물을 修信使 대표로 뽑은 것을 놓고, 朝鮮 지도부만의 잘못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시 朝鮮의 지도층 전부는 이런 式의 성리학 신봉자들만 존재하고 있었던 까닭에 김기수 말고 다른 누군가를 대표로 맡긴다고 해도 사정은 똑같았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당시 朝鮮에서 머리가 좀 깬 인물을 굳이 꼽으라면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같은 사람 정도였다. 하지만 吳慶錫 같은 인물은 양반 계층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위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오경석 같은 사람들은 외국 문물을 빨리 접하면서 머리는 깨었지만 신분의 한계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게 되어 나중에 김옥균(金玉均) 등 청년개화파를 포섭하게 된다. 김기수는 고종(高宗)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朝鮮 修信使 대표로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이렇게 규정했다.
  
  “어쩔 수 없이 일본에는 가지만, 이는 전통적 예법에 따라 조약 체결 때 일본측이 조선에 온 것에 따른 의례적 답방 차원이다.”
  
  당시 朝鮮에는 마땅한 선박이 없었다. 日本은 朝鮮 修信使 일행을 위해 日本 內務省 전용 증기선(蒸氣船) 고류마루(黃龍丸)를 보내주었다. 朝鮮 修信使 일행은 강화도조약 체결 3개월 後 1876년 5월 29일 釜山을 출발해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橫浜)에 도착했다. 요코하마에 도착한 後에는 기차를 타게 되었는데, 김기수를 비롯한 수신사 일행은 이때 증기기차에 충격을 받게 된다. 김기수는 자신이 쓴 일동기유(日東記遊)에 日本의 증기기차를 화륜거(火輪車)라고 표현했다. 김기수는 日本의 증기기차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천둥번개처럼 달리고 비바람처럼 날뛰어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차제는 안은하여 요동치 않는다. 좌우의 산천, 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뒤에서 번쩍번쩍하므로 도저히 걷잡을 수가 없다. 담배 한 대 피울 동안에 벌써 도쿄 신바시(新橋)에 도착했다.”
  
  朝鮮 修信使 김기수 일행은 도쿄(東京) 도착 이틀 後 日本 天皇을 알현하고, 日本 정부 주선으로 日本의 정관계 실력자 50여명과 만났다. 日本帝國 초대 박물관장으로서 駐美日本 大使를 역임한 日本 철학자 ‘구키 류이치’(九鬼隆一)는 김기수 대표가 말끝마다 性理學, 朱子學을 언급하는 것과 관련해 이렇게 질문했다.
  
  “귀국(조선)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朱子)만을 숭상하는가 아니면, 다른 학문도 숭상하는가?”
  
  김기수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조선은 500년 동안 주자(朱子)만을 숭상했다. 주자를 어기는 사람은 난적(亂賊)이라는 죄목으로 처단했다. 국법이 엄중하여 上下貴賤이 다만 朱子만을 숭상해 왔을 뿐이다.”
  
  구키 류이치는 해외 유학파였다. 당시 日本은 해외 유학파가 1만 명에 달할 만큼 유능한 인재들이 넘쳐났다. 日本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以前의 막부 시절부터 이미 대규모 인력을 서양 열강에 유학보냈다. 막부 휘하의 번(藩: 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은 번(藩) 나름대로 중앙의 막부 몰래 인재들을 해외로 유학보낼 만큼 해외 유학 열기가 뜨거웠다. 당시 日本은 수 많은 해외파 인재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日本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것도 사실은 以前에 막부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그냥 달린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김기수를 대표로 하는 朝鮮 修信使 일행은, 朝鮮이 文明國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日本 시내를 행차하면서 풍악(風樂)을 울리며 전진했다. 근대화된 日本의 거리를 고풍스런 복장에 기수(旗手)를 앞세워 풍악을 울리며 지나가는 광경이 연출된 것이었으니, 평소 보기 드문 이런 진기한 모습에 日本 사람들은 모처럼 볼거리가 생겼다며 대거 몰려들었다. 급기야 日本 경찰이 동원되어 진정시킬 만큼 朝鮮 修信使 행렬은 日本 사람들의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한 마디로, 환영 인파가 모인 것이 아니라, 보기 드문 구경거리를 즐기려는 인파였다.
  
  日本의 역사학자 사사키 스구루(佐佐木克)는 이러한 모습의 朝鮮 修信使를 가리켜 “조선이 파견한 수신사는 쇄국 朝鮮의 無知가 빚은 시대착오적 해프닝”이러고 평했다. 아울러 당시 日本 駐在 英國 신문기자는 이렇게 썼다.
  
  “전통복장을 하고 최고의 위엄을 부리며 행진하는 조선 수신사 행렬은 화석(化石)과 같은 일행이다.”
  
  그런데, 더 큰 해프닝이 발생했다. 日本의 모습을 보고 빨리 朝鮮도 근대화를 추진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부국강병을 이루라는 목적에서 日本側이 많은 돈을 들여가며 준비한 것인 만큼 修信使의 일정은 견학 코스로 가득한 상태였다. 하지만, 日本 국회의사당, 원로원, 육군성, 해군성, 내무성, 문부성, 대장성, 경시청 등을 시찰한 以後에, 김기수 대표가 더이상의 견학 일정을 거절하겠다고 선언하고 숙소에 틀어박혀 담배만 피우며 사실상 사보타지에 돌입한 것이다.
  
  강화도조약 실무를 맡았던 외교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가 설득에 나섰다. 모리야마(森山)가 김기수에게 왜 견학하기 싫은 것인지 물었다. 김기수가 이렇게 대답했다.
  
  “구경해도 몸만 수고로울 뿐 이익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는, “좋다, 정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하라.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군사와 산업 시설만은 꼭 견학하는 것이 좋겠다. 朝鮮도 빨리 부국강병해야 한다”고 간곡히 제안했다. 거듭된 모리야마(森山)의 간청에 마지못해 김기수 일행은, 日本의 步兵과 騎兵, 砲兵의 연합훈련과, 병사학교, 육군포병 본창 등을 건성으로 시찰했다. 나중에 김기수는 자신이 기록한 일동기유(日東記遊)에서 日本의 부국강병과 관련해 이렇게 썼다.
  
  “일본이 추구하는 부국강병은 외국과의 통상이 핵심인데, 외국과 통상하면 돈은 천(賤)하게 되고, 물건은 귀(貴)하게 되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김기수는 日本이 추진하는 부국강병은 실패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日本은 곧 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修信使 일행은 총 28일을 체류하고 日本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김기수 대표는 日本에서의 일정이 몹시 피곤했는지, 떠나면서 “앞으로 수신사는 15일을 초과하면 안 된다.”는 언급을 했다. 朝鮮에 도착한 김기수를 향해 高宗은 기대감에 차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高宗:문견별단(聞見別單, 해외 다녀온 관리가 귀국 후 해당국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 外에 추가로 말할 것이 있으면 자세히 말해 보라.
  김기수:문견별단(聞見別單) 外 딱히 말할 것 없습니다.
  高宗:일본은 열국과 통상하고 있다는데, 각국의 인물들을 보았는가?
  김기수:각국 사람들은 대동소이하고 혹 보더라도 어떤 나라 사람인지 판별할 수 없습니다.
  高宗:일본에 양학자(洋學者)가 있는가?
  김기수:양학(洋學)이 있는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高宗:자기황(自起磺, 성냥)이라는 것을 보았는가?
  김기수:보지 못하였습니다. 혹 보더라도 배워 알 수 없어서 처음부터 묻지 않았습니다.
  高宗: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본 이후 우리나라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혹시 들은 것이 있는가?
  김기수:그에 관해 들은 것이 없습니다.
  高宗:총(銃)의 길고 짧음은 어떠한가? 육혈총(六穴銃, 권총)만한가?
  김기수:육혈총은 보지 못했습니다.
  
  高宗은 日本의 군사, 군병, 전신, 기차, 기선, 화폐주조, 농기구 제조 등과 관련한 많은 질문을 했지만, 김기수의 대답은 한결같이 이런 式이었다.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배울 수 없었기에 애초 묻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간 것은 저들의 간청에 따라 부득이 간 것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니, 그러한 기술에 관한 것은 한번도 질문한 적이 없습니다.”
  
  日本側은 朝鮮 修信使 일행에게 특별히, 남하정책을 추진하며 한반도를 노리는 러시아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김기수를 비롯한 朝鮮 修信使 일행이 日本 체재 中이던 1876년 6월 4일에 日本의 전권대사(全權大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김기수 대표에게 러시아의 위협과 관련해 이렇게 당부했다.
  
  “러시아가 병력을 움직일 조짐이 있다는 것은 내가 강화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우리 일본인들이 매번 러시아에 갈 때마다 그들은 병기를 만들고 흑룡도(黑龍島)에 군량을 많이 비축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을 위함이겠는가? 귀국(조선)을 치고자 하는 것이다. 귀국은 기계를 수선하고 병졸을 연마하여 방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나흘 후인 6월 8일에도 이노우에(井上)는 김기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세계지도 한 폭을 선물로 주면서 또 충고했다.
  
  “러시아가 조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내가 이미 누누이 말한 바다. 나는 중풍이 들어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다. 공이 돌아가거든 내 말을 조정에 힘써 알려 대비해 주길 바란다.”
  
  이러한 日本 지도부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김기수는 귀국 後 러시아와 관련된 내용은 高宗에게 단 한 마디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강화도조약의 후속 작업으로서 통상 관련 조약을 위해 1876년 7월 30일 日本 대표단이 漢城(서울)에 도착했다. 朝鮮側 협상 대표로는 조인희(趙寅熙)라는 인물이 나왔다. 日本 대표단은 日本 정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훈령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무역 관세가 없는 것이 최선이지만, 조선측에서 분명 관세 부과를 끝까지 요구할 것이다. 아무리 조선측이 요구한다 해도 관세는 물건 값의 5% 이내 수준으로만 협상하라’
  
  日本 대표: "개항장(開港場) 무역 거래時 관세를 부과해야 하는데, 귀국(조선)은 관세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朝鮮 대표: " ……… "
  
  朝鮮은 당시 쇄국정책 영향으로 국제법에 있어서의 관세(關稅)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기가 막힌 日本 대표는 그 자리에서 朝鮮 대표에게 관세의 개념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협상을 계속했다.
  
  日本 대표: “양국간 교역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서로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소?”
  朝鮮 대표: “일본 제품에 대해 조선이 관세를 부과 안 하면, 일본 또한 조선 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 안 하는 것이 틀림 없소?”
  日本 대표: “그렇소”
  
  朝鮮 대표는 쌍방이 無관세의 동일한 조건이라면 朝鮮이 손해볼 것 없다고 판단하여 그대로 수용하고 말았다. 이후 日本의 제품들은 無관세로 朝鮮에 쏟아져 들어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朝鮮의 지도부는 얼마 후, 淸나라로부터 ‘외국과 무역할 때 수입 제품에 관세를 징수하는 것은 당연한 국제관례’라는 말을 듣고서야 日本과의 관세협정이 치명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김기수를 대표로 하는 朝鮮 修信使가 귀국한 이후에도 朝鮮은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었다. 이에, 日本의 실망감은 커져갔다. 아울러, 당시 러시아와 패권을 겨루던 英國 또한 국제정세에 너무도 무지한 朝鮮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보다 못한 英國은 결국, 김홍집(金弘集)을 대표로 하는 제2차 朝鮮 修信使(1880년) 행차 때, 淸나라 이홍장(李鴻章)의 팔을 비틀어 이렇게 압력을 넣었다.
  
  “조선은 너희(중국) 속국이니까, 그래도 너희 말은 좀 들을 것 같다. 러시아를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책을 써서 조선에게 건네 줘라.”
  
  이에, 이홍장(李鴻章)은 日本에 주재하는 淸國공사 하여장(何如璋)과 참사관 황준헌(黃遵憲)에게 ‘러시아 조심하라는 책을 써서 조선 수신사 대표 김홍집에게 전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조선책략’(朝鮮策略)이라는 책이다. 朝鮮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親중국, 結일본, 聯미국이라는 외교정책을 펴고 서양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불이 나서 집이 모두 불타게 되었는데도 한가로이 처마에 앉아 지저귀는 제비와 참새를 朝鮮에 비유한 ‘연작처당’(燕雀處堂)도 언급되었다.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朝鮮을 위태롭게 여기며 바라보고 있는데, 정작 朝鮮人들만 임박한 재앙(災殃)을 알지 못한다는 모멸적 指摘이었다.
  
  강화도조약 체결에 따른 日本과의 통상 조약에서, 朝鮮側의 협상대표라고 나온 인물이 관세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상이 진행된 어처구니 없는 모습에서 淸나라는 ‘저것들(조선) 저렇게 더 놔두다가는 더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朝鮮에 대한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淸나라는, 원세개(위안스카이)에 이어, 추가로 ‘마젠창’과 ‘뮐렌도로프’라는 인물을 朝鮮에 파견하여 朝鮮의 재정과 외교를 각각 간섭토록 했다. ‘뭘렌도로프’는 朝鮮에서 협판(協辦, 외교 차관급)의 직위로까지 올랐다.
  
  日本과의 강화도조약에 따라 1876년 부산항(釜山港)이 개항되고, 1880년 원산항(元山港)이 개항되었으며, 1883년에는 인천항(仁川港,제물포항)이 개항되었다. 이 중 원산항 개항은, 당시 러시아와 패권을 다투던 英國의 對러시아 견제 정책을 日本이 반영하여 추진한 결과였다.
  
  東西古今, 國家의 불행은 무지(無知)와 오판(誤判)에서 비롯된다. 性理學, 朱子學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학문이며 明나라 代를 이은 朝鮮이 소중화(小中華)로서 세상 문명의 중심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던 朝鮮은 대표적 케이스다. 안타까운 것은, 21세기 오늘날에 와서까지, 그토록 한심했던 과거의 朝鮮이 그리워 그 朝鮮으로 돌아가고자 하려는 것인지, 허구한 날 反日을 울부짖고 反美를 외치며 中國사대주의 본능(DNA)을 드러내는 미개인(未開人)들이 주변에 넘쳐난다는 점이다.
  
  이들(未開人)은 겉모습만 스마트폰 등 문명의 이기(利器)를 사용할 뿐, 머리 속은 朝鮮時代 때와 다를 것 없는 性理學과 朱子學的 사고방식으로 꽉 차있는 상태다. 오늘날 韓國이 특히 外交·安保 분야에서 큰 위기에 直面한 이유는, 무지(無知)와 오판(誤判)을 겸비한, 文明의 탈을 쓴 朝鮮時代 水準의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https://youtu.be/8rX-kDPsX0g
  
  
  
[ 2021-09-01, 08: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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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국     2021-09-02 오전 10:59
지금 한국의 학력수준은 더 높고 경제력은 일본에 버금간다. 단 펀드같은 저질 왜구나 지식 수준이 떨어져서 그렇지......덤으로 게시판 관리자 수준도 토착왜구 수준을 넘지 않지......
   강국     2021-09-02 오전 10:57
이자는 줄기차게 한국놈은 바고고 무식해서 일본에게 강점당하고 노예로 사는게 당연하다는 논리다. 일본놈이 약한 조선을 어떤 연유로든 짓밟고 지나갔을 것이다. 고종이 외교력이 낮고 지질한 왕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상국으로 일본만을 받들고 살라는 것이지 전형적인 일본 간자내지 토착왜구임에는 틀림없다. 결론은 기-승-전-토착왜구가 되라는 것이지........
   onoda74     2021-09-01 오후 6:06
일본까지 와서 방에만 쳐박혀 있는 김기수를
모리야마 시게루가 애 달래듯
"여관에서 적절하실 텐데 나와서 함께 놀며 울적한 마음을 풀지 않으시렵니까?"하자

김기수,
"이사람은 본디 고요한 것을 좋아하며
실로 울적한 것이 고통이 되는지 알지 못하므로,
놀고 구경하는 일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모리야마가 개혁과 부국강병을 계속 강조
김기수 : "우리는 신의를 앞세우고 수신하고자 하여 갑자기 온 것이니
그런 일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산중의 빈사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고 재식이 전혀 없으며,
손으로 만져도 편리가 무엇인지 어떤것이 무딘지 모릅니다.

수행원들도 모두 몸가짐이 근신하고 옹졸하며,
다만 죄저지르지 않는 것만 준칙을 삼고 있으니
나와 비슷할 뿐입니다...."
   정답과오답     2021-09-01 오전 11:04
자유님은 혹 좋아 하는 나라가 있으십니까 ?
귀하의 글을 보니 어느 나라던 다 싫다고 할거 같아서 물어 봅니다
일본이 싫다고 하는대 과거의 조선은 좋아 합니까 ?

그 포악한 군주의 시대 니죄는 니가 알렸다고 들고 패던 시대
국민 반을 노예등급으로 매매하던 시대를 좋아 할수는 없는건대
귀하의 특이한 글에는 그런 시대의 암흑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거던요

북의 동족에 관해서 일말의 동정심은 있으십니까 ?
아니면 귀하의 가족이 아니니 관심조차 없는가요 ?
인간을 짐승으로 다루는 북한이나 조선이나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북의 동족은 지금 온 국민이 백두혈통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거 중국으로 합치던지 잘해서 일본으로 나라가 합방되면
과거 한일 합방으로 봐 즉각 지옥에서 천국으로 된다는거 아십니까 ?

굶어죽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법이고 나발이고 어더터지는 것은 없어집니다
이거 좋아 잔다는거 자우님은 이해가 잘 않될거 같지만
그래도 지금의 북한이나 조선시대 보다는 좋아 진다는거 이해가 어려울듯 합니다만

어찌 되었던 귀하의 수준으로 봐 이해가 어려운 소린듯 하다는거
아니 굶아 죽는게 났다 일본이나 중국으로 합방 당하느니
북한은 지금의 백두혈통을 거부하는 매국노가 되지 말그라 할거 같긴 합니다
   자유의메아리     2021-09-01 오전 10:33
뽄도삐루도씨 당신이 그렇게 하고싶은말이요 그때는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개화,문명에길로 가고있었고 우리는 고종, 철종시대에 그리고 대원군같은 얼간이로 인해서 이나라는 개화는고사하고 암흑의길로 가고잇었오 이씨조선 전기간도 그랫지만 이조 말옆에는 일본이라는 날강도같은 왜놈들에 의해서 우리는 국권을잃고 36년간 암훅에살았오삐루도씨 기분이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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