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말한다(완) - 국제공작전선의 낮과 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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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金賢姬)는 말한다 完
  
  국제공작전선(國際工作戰線)의 낮과 밤
  
  -국제화·개방화 무드의 뒤안길에서 싸늘하게, 그러나 더욱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납치, 위장, 위조, 침투, 자폭의 침묵전쟁-
  
  <1989년 7월 월간조선>
  
   제1장 공작원 제조법
  
   북한 첩보조직의 실험작
  
  金賢姬는 북한의 대남 공작 역사상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이었다. 북한 첩보기구가 변화가 극심한 한반도 주변정세와 국제화돼 가는 남한의 실정에 맞게끔 새롭게 개발한 실험폭탄이 金賢姬였다. 金을 통해서 북한의 대남 공작 전술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 한국 정보기관의 한 수확이었다. 金賢姬에 대한 수사는 KAL858편 폭파범행과 金賢姬를 테러리 스트로 만든 북한 공작조직의 속사정에 집중되어 왔다. 폭파범행에 대한 수사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공작조직에 대한 신문과 조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金賢姬가 소속된 조선노동당대외 정보조사부는 대남 공작을 맡고 있는 4개당 부서 중 하나다. 나머지 3개는 통일전선부, 작전부, 연락부이다. 대남 심리전을 맡고 있는 통일전선부의 부장은 김중린으로 추정되고 있다. 작전부는 공작원의 대남·대일(對日) 침투 및 그 수단의 지원·보급을 책임지고 있다. 부장은 전투원(공작원을 한국 및 일본 해안가에 해상 침투시켜 주고 돌아가는 요원) 출신인 임호근, 연락부는 대남간첩망을 관리하는 부서로서 부장은 정경희라는 60대 여자이다.
  
  해방 직후부터 대구지역에서 공산당 세포 조직활동을 했던 정경희는 6·25전쟁 때 서대문 형무소에 있다가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 북으로 갔다. 정경희는 1950, 60년대에 남한을 자주 오가며 간첩활동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공작조직사회에서는 신화적 인물이 돼 있는데 미혼이다. 대 외정보조사부는 해외에서의 테러 납치를 맡고 있다. 金賢姬에게 KAL858편 폭파지령을 직접 내린 것?李○○부장이었다. 金양이 1980년 3월에 공작원으로 뽑힐 때는, 최은희(崔銀姬)·신상옥(申相玉)씨의 납치를 지휘하였던 강해룡 부부장 겸 부장이었다. 金賢姬는 『1980년 3월 중순에 평양시 시당위원회 간부대기실에서 김형직 사범대학 영어과 여학생 김모 양과 함께 강해룡 부부장으로부터 3차 면접시험을 받았다』고 했다.
  
  『일어판 「김일성 회상기」를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학교생활을 어떻게 했나, 힘든 일을 해 보았나, 탄광에 보내도 일할 자신이 있나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에서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강 부부장은, 「가장 어렵고도 영광스러운 일을 할 수 있나」면서 몇 번 다짐을 하더니 「돌아가서 학교생활을 잘 하라. 졸업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했습니다』 金賢姬는 학교로 돌아간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정식으로 당에 소환돼 금성 정치군사대학 내 묘향산 골짜기 2지구2호 초대소에 밀봉되었다. 4월8일에 金양은 금성정치군사대학 속성 정보반에 입학. 그 후 1년간 공작원 훈련을 받았다.
  
  -김숙희라는 여자 공작원과 함께 초대소에 생활하면서 교육을 받았다는데 그 생활은 어떠했는지?
  『김숙희는 경공업대학에 입학한 지 몇 달 되지않아 공작원으로 뽑혀 왔는데 순천이 고향인 아주 예쁜 처녀였습니다. 저보다는 한 살 적었어요. 처음에는 성격 차이로 오해를 하기도 했지만 곧 선의의 경쟁자가 돼 서로 돕고 위로하며 잘 지냈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총화시간이 있었습니다. 지도원이 와서 우리 둘을 불러서 호상비판과 자아비판을 하게 했습니다. 둘이서만 생활하는데 공개적으로 비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해가 있으면 서로 상의해서 해결하면 되는데. 그러니까 지도원은, 「동무들은 왜 호상비판을 소홀히 하느냐」고 질책하기도 했지만. 호상비판을 하면 의가 상할 것 같아 끝내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초대소는 산골짜기에 고립된 별채 건물인데도 서실, 학습실, 침실, 화장실이 있었고 부엌은 없었습니다. 식사는 식당에서 지은 밥을 아저씨가 날라다주어 먹었습니다. 아궁이에 가루탄을 땔 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나무를 잘라 도끼질을 해서 장작을 만들고 이것을 불쏘시개로 하여 가루탄에 불을 붙이는데 석탄가루에 물로 반죽을 하여 장작불 위에 놓는 거지요. 석탄가루가 날리고 콧구멍이 새까매지고…. 밭을 일구어 채소를 가꾸었고 토끼도 키웠습니다. 토끼 사료도 어디서 살 데도 없어 고구마 넝쿨을 먹이든지 음식물 찌꺼기를 주었습니다. 온수 보일러식의 난방이었는데 겨울에는 추워서 솜버선과 솜옷을 입고 자고. 강의실에서 오들오들 떨고… 그 1년이 가장 고통스러웠고 기억에도 남습니다』
  
   야간행군길에 개소리 듣고
  
  金賢姬의 일과는 대강 이러하였다.
  06 : 00 ∼ 07 : 00 기상 및 청소
  07 : 00 ∼ 07 : 30 아침식사 07 : 30 ∼ 08 : 00 독보(金日成의 덕성자료 공부)
  08 : 00 ∼ 13 : 00 오전강의(90분씩 세번)
  13 : 00 ∼ 16 : 00 점심 및 휴식(낮잠)
  16 : 00 ∼ 17 : 30 오후강의
  17 : 30 ∼ 19 : 00 자체복습 및 운동
  19 : 00 ∼ 20 : 00 저녁식사
  20 : 00 ∼ 21 : 00 훈련
  21 : 00 ∼ 22 : 00 야간행군
  22 : 00 ∼ 23 : 00 예습 및 취침
  
  -강의는 여러 사람이 같이 받았는지?
  『강의실에는 칸막이가 돼 있었습니다. 저와 같이 입교한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훈련원은 8명이었습니다. 저와 김숙희를 제외한 6명은 남자였습니다. 8명이 같이 강의를 받지만 칸막이 안에서 교단 쪽으로만 바라볼 수 있어 1년 동안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칸막이로 들어가는 통로도 폐쇄회로처럼 돼 있고 화장실 출입도 다른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설계 돼 있었습니다. 옆의 칸막이에 들어 있는 남자가 칸막이 벽을 똑똑 쳐서 신호를 보낸다든지 인기척을 내곤 하기도 했지만 얼굴을 스친 적은 없었습니다. 초대소를 나설 때는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도록 돼 있었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정신적인 면에서는 남조선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혁명가로서의 사명감을 주입하는 것이었고 육체적인 단련으로서는 사격·격술·수영·행군 등이 있었다. 자동소총과 권총 사격연습과 함께 배운 격술은 태권도와 비슷하지만 상대방의 급소를 공격하도록 한 실제형의 무술이었다. 金賢姬는 매일 격술장에 나가서 샌드백을 치고 발차기 연습을 했으며 「주먹누르기」를 했다고 한다. 나무에 새끼를 감아 만든 데다가 주먹을 꽉꽉 눌러 정권을 단련했고 뜀줄(줄넘기)을 1단은 하루에 1천번 2단은 1백번씩 넘었다. 金양은 『격술을 배우고 나니 한적한 데 혼자 다녀도 마음이 든든하더라』고 했다. 야간행군은 10kg짜리 모래 배낭을 지고 산과 계곡을 넘어 다니는 것이었다. 40대 담임선생이 두 金양을 데리고 출발하는데 따로따로 걷도록 했다.
  
  『첫날 50리를 뛰다시피 했는데 숨이 막혀서 이러다간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미喘?側?논두렁에 빠지기도 하고… 특히 비오고 눈 내리는 날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눈 덮인 산을 달밤에 행군할 때는 멋있었겠다』고 했더니 金賢姬는 『그런 서정성을 찾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지도 모른 채 1년을 보냈습니다. 눈오면 눈치울 걱정이 앞섰습니다』고 했다. 金賢姬는 『행군이 끝날 무렵에는 인가가 있는 곳을 지나게 돼 있었는데 개 짖는 소리와 사람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행군 중에 다른 공작조와 마주치게 되면 서로 등을 돌려 피하여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혁명가 생각하며 난관돌파
  
  金賢姬와 김숙희는 평양 근교 석암 저수지에서 1주일간 수영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고 했다. 교관 한 명이 두 金양만 지도했는데 텐트를 쳐놓고 밥을 지어 먹어가면서 평영으로 2km를 헬 수 있도록 훈련을 했다. 『이틀간 동작을 익힌 다음 3일째부터 물에 들어갔습니다. 고무공을 달고 헤기 시작했는데 공의 크기를 점점 줄였습니다. 2백m가 고비였습니다. 숨이 차서 공을 붙들고 늘어지기도 했고 마음대로 안돼 울기도 했습니다. 매일 생활총화 시간을 갖고 교관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낑낑 앓으며 잤습니다. 교관도 「이 고비만 넘기면 되는데…」하면서 속상해 하였습니다. 5일째 되는 날에는 우리를 배에 태우고 저수지 한가운데 들어가 무조건 육지 쪽으로 헤어나가도록 빠뜨려버렸습니다. 이를 악물고 하니까 그 날 오후에는 1km를 헤었고 다음날에 드디어 2km를 해냈습니다』
  
  1주일만에 2km을 헬 수 있었던 것은 金賢姬의 의지력 때문이었다. 金양은 『숨이 막힐 때마다 「이렇게 해야 혁명가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었다』고 했다. 『어릴 때 읽었던 「金日成 회상기」에는 소년이 혁명가가 되기 위해 고문에 견디고 악전고투하면서 金日成 사령부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이야기와 영화에서 본 주인공의 간고한 투쟁의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내가 이 어려움을 못 넘기면 혁명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습니다』 남한 사람 같으면 어려운 고비에 처했을 때 부모나 자식 또는 아내나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들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아야지』하는 심정으로 용기를 다졌을 것이다. 金賢姬가 고통에 처했을 때 자동적으로 떠올린 것은 혁명가상(像)이었다. 이것은 북한의 주 입·반복식 교육이 어떤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 자료인 것이다.
  
   남한 유행가 부르는 金正日
  
  金賢姬로 하여금 KAL 858편을 폭파하도록 시킨 명령구조를 더 자세히 분석해보면 「金日成의 권위를 업은 金正日의 친필지령」이었음이 드러난다. 金賢姬는 金日成을 유일신처럼 생각하고 복종했지만 金正日에 대한 평가는 그러한 완전한 복속은 아니었던 것 같다. 金日成 우상화에는 항일 무장 투쟁경력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있지만 金正日 우상화에는 그럴 듯한 자료가 부족했고 그러자니 만들어내야 했으며 그만큼 설득력이 약하다는 이야기다. 金賢姬는 金正日 덕성자료를 줄줄 외다시피 했다. 덕성자료라는 것은 金正日의 품성을 미화하기 위한 에피소드 모음이다. 『유치원 때 배우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金正日이 어릴 때 산수공부를 하는데 선생이 1+1은 2라고 가르치니까. 金正日이 「1+1은 1이 되는 것도 있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진흙에 진흙을 더한다든지, 물방울에 물방울을 더하면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화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金正日의 관찰력이 어릴 때부터 비상했다고 칭찬하지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金日成의 아내 김정숙은 金日成이가 낮잠을 잘 때는 참새를 쫓아 시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김정숙이가 죽고 나서도 참새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한 金日成이 나가 보았더니 그 어린 金正日이 나무 막대기로 참새를 쫓고 있더라는 식입니다』 북한의 선전기관이 金正成에 대한 우상숭배의 중요한 관점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金正日이 영화, 음악 등 예술의 천재라는 이야기다. 『어느날 金正日이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다가 갑자기 중단하라고 소리쳤답니다. 金正日은 어느 단원을 지적하면서 악보보다 반음을 틀리게 연주했다고 지적을 해주더랍니다. 그 연주가는 이런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적인 지휘자나 金正日뿐이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 영화 주제곡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악상이 떠오르면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리듬을 읋어 준다는 이야기, 예술인들을 위해서 좋은 대우를 아끼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등 많습니다』
  
  金賢姬는 1984년 4월에 崔銀姬·申相玉씨가 북한 텔리비전에 등장. 기자 회견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崔銀姬의 옷차림이 세련되고 엷은 색안경이 멋있었습니다. 그 뒤 申감독이 만든 영화를 다 보았습니다. 사상성이 많이 들어 있지 않아 재미있었습니다』 金正日의 인간됨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했고, 가장 상세히 외부세계에 알린 것은 申相玉·崔銀姬 부부였다. 申相玉씨는 金正日과의 대화를 비밀 녹음하여 두었다가 탈출할 때 가져 나왔다. 이 녹음테이프를 틀어 본 한 수사관은 『金正日의 이야기는 화제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바람에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라』고 했다.
  
  申相玉씨에 따르면 金正日이 주최하는 당과 정부고관들의 파티는 해괴망칙하다고 한다. 밴드를 데려다 놓고 부르는 노래는 「돌아와요 부산항」과 같은 남한 유행가이고 여자 예술인들을 상대로 옷 벗기기 게임을 벌이는가 하면 金正日의 지시에 따라 참석자들이 일제히 해군복, 또는 간호원 복장을 하고 나오는 일종의 가면무도회가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북한인민들이 그런 사실을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무슨 변이라도 나고 말 것이다』고 했다. 북한 텔리비전은 金正日의 모습을 비치기는 하지만 金正日의 육성을 들려준 적은 없다고 한다. 金日成도 신년사와 당 대회에서의 보고서 낭독 때만 육성을 들을 수 있다. 북한 선전 기관은 金부자의 신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텔리비전 노출을 굉장히 제한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가 통치 수단
  
  金賢姬에게 박혀 있던 金正日의 이미지는 ①예술의 천재 ②통이 큰 지도자 ③대담한 사람이다. 金賢姬는 『金正日에 대한 북한 우상화 선전의 목표는 「金正日이밖에 후계자가 될 사람이 없다」「주체사상을 향도·발전시켜 나가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이룩할 지도자이다」는 데 맞추마져 있다』고 했다. 정치지도자로서 金正日의 공적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것은 사상, 기술, 문화 등 3대 혁명 소조 활동을 金正日이 지도했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중신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인 1973년에 겪은 혁명소조의 사상투쟁을 이렇게 증언했다. 『혁명소조 소속 사범대학생 10여명이 학교에 머물면서 모든 학생들에게 자아 비판서를 10∼ 20페이지씩 쓰게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학급단위, 학년단위로 한 사람씩 자아비판을 공개적으로 하는 사상투쟁 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교장선생님도 이들 대학생에게 꼼짝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대학생은 당 중앙에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거든요』
  
  혁명소조 활동이란 사회 각 조직의 활성화를 위해 金正日의 특별지시를 받은 엘리트 대학생들을 현장으로 보내 문제점을 검열하고 이를 즉시 시정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중국의 문화 혁명에서 아이디어를 빈 것이었다. 金賢姬는 金日成이 죽으면 일단 金正日이 권력을 승계 하겠지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金正日이 金日成만큼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북한의 젊은이들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저의 동생 경우만 하더라도 외국 노래를 배운다고 카세트 테이프를 복사하여 몰래 부르고 다니는 등 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때와는 또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金賢姬를 신문한 수사관들은 金賢姬의 사고체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영화가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한다. 북한사람들의 생활에 있어서 영화는 남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텔리비전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金正日이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崔銀姬, 申相玉씨를 납치하고 윤정희(尹靜姬)씨 납치를 시도했던 것도 영화의 중요성과 영화에 대한 金正日의 집념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의 영화는 오락수단일 뿐 아니라 정치·사상의 선전·교양수단이다. 가족끼리의 휴가나 다른 오락기능이 거의 없는 북한에서는 영화가 가장 대중성이 높은 오락물이다. 공휴일에 만수대 텔리비전에서 새 영화를 상영하면 북한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가슴을 설레이며 그 시간을 기다리고, 방영 시간대엔 거리가 한산하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새 영화를 많이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사람들은 같은 영화를 여러번 본다고 한다. 「조선의 별」같은 연작 영화는 북한사람들이면 적어도 열번 이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텔레비 깍쟁이」
  
  金賢姬는 『당에서 지정하는 영화는 직장 학교별로 의무적인 관람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총화시간을 갖고 어떻게 하면 저 영화의 주인공처럼 영웅적 업적을 쌓을 것인가를 토론합니다. 이를 실효 투쟁이라고 합니다. 그런 영화의 주제가 부르기 경연대회도 있고, 영화 대사는 별도의 프린트로 나와서 학습대상이 되는데, 유명한 대사는 외우며 토론도 해야 합니다』 申相玉씨가 북한에서 감독한 춘향전 영화에서는 「사랑가」란 주제가가 나왔다. 혁명이나 원수님이 아니라 사랑을 노래의 주제로 삼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金賢姬는 말했다. 『아이에서 버스 운전사, 노인들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아이들은 「사랑, 사랑, 내 사랑,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식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고요』
  
  북한에는 만수대 텔레비 중앙 텔레비 개성 텔레비 등 3개 채널이 있다. 만수대 텔레비는 명절과 일요일에만 방송하는데 주로 외국 영화를 방영한다. 金賢姬의 집에서는 칼러 텔리비전을 샀는데 흑백 텔리비전을 친척들이 서로 얻어가려고 싸웠다고 한다. 『텔리비전 때문에 이웃끼리 싸움질이 자주 일어난답니다. 텔리비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집으로 몰려와서 구경한다고 괴롭히기 때문에 보여달라. 안 된다 식으로 다투기도 하지요. 텔리비전을 잘 보여주지 않는 집 문에다가 아이들이 「텔레비 깍쟁이」라고 낙서를 하기도 합니다. 학교 다닐 때는 텔리비전 수상기를 사놓고도 친구들에게 말을 하지 않지요. 알려지면 「같이 보자」고 몰려오니까요』
  
  金賢姬가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의 교과 편성을 보면 金日成 사적지 관광과 영화관람 등 시청각 교육이 필수 과목으로 돼 있다. 일본인화 교육을 받을 때 교육용으로 본 영화는 북한, 일본, 소련, 미국, 영화들로서 「달매와 범달이」 「조선의 별(1∼5부)」 「검과 방패 1∼4부」 「먼 해변가에서」 「낙천적 비극」 「붉은 날개」 「고난의 길」 「나까노 학교 1∼4부」 「필살의 여격술가(1∼3부)」 등등이었다. 미국 영화로는 「나바론 요새」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한다. 金賢姬는 교재로서 「세계정탐실화9권」 「조르게사건」 「모스크바는 제네바를 부른다」 「마타 하리」 등등 16권의 첩보 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유럽에선 나쁜 것만 보려고 애써
  
  金賢姬를 새로운 세대의 국제공작원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관리, 제조된 공작원」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북한이 양성한 공작원은 일본이나 중국에 사는 한국교민출 신이었다. 金賢姬는 머리 좋고 모범적이며 인물이 뛰어난 엘리트 대학생들을 재학 중에 선발하여 철저한 국제화교육을 거쳐 아예 제 3국인으로 만들려는 새로운 시도의 첫 실험작이었다. 金賢姬는『교관들도 첫 시도이기 때문에 교재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구세대 공작원의 마지막 인물격인 김승일(金勝一) 과 새 세대 공작원의 첫 인물 격인 金賢姬를 한 팀으로 배합한 것도 세대교체에 따른 노우하우의 전수를 노린 것인지도 모른다.
  
  金賢姬는 국제 공작원으로서 소양을 익히기 위해 동구권과 유럽 실습여행을 두 번, 중국의 광주와 마카오에서는 1년 반의 현지 생활을 하는 등 북한의 부족한 외화사정을 고려한다면 막대한(약 10만 달러) 투자를 받은 셈이다. 金賢姬가 북한보다 잘 살고 자유로운 외국을 여행하면서 金日成주의에 의문점을 품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金賢姬는 『교육을 받을 때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잘 살지만 속으로는 썩었다고 배웠기 때문에 나쁜것만 골라서 보려고 애썼다』고 했다. 『유럽에서 데모나 거지, 노점상, 술집, 밤 여자 등을 보고는 역시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에 가보니 거리가 너무 깔끔하고. 지도만 펴 보고 있으면 행인이 다가와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등 사람들이 상냥하여 나쁘게 보려고 해도 그런게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북한이 싫어지지는 않았는지?
  『못 산다고 조국을 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혁명가의 길을 걷는 제가 일신상의 안락에 연연할 수도 없고요』
  
  金賢姬는 여행중에 베토벤의 생가를 관광한 적이 있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베토벤이 작곡가란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 없는 영웅들」이란 20부까지 나간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항일투쟁을 하는 기자가 누구와 다방에서 접선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접선의 신호로 쓰인 것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시작부분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본 다음날 교수님이 오시더니 베토벤이 누구인 줄 아느냐 고 물었습니다. 저희들은 베토벤이 빵 이름인지, 신문 이름인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 교수님이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라고 했기에 비로소 그렇구나 했지요』 金賢灌는 유럽 국가가 북한보다도 잘 사는 데 대하여는 이런 식으로 자위했었다고 한다. 『우리는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군사비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니까 그들보다 못 사는 것이 당연하다』 金賢姬는 그뒤 「못사는 것이 당연한」 또 다른 반쪽의 남한이 잘 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고의 혼란을 겪게 되었고 이것이 전향의 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이 더 잘 산다』
  
  金賢姬와 김숙희는 1985년 7월말부터 1년간 중국 광주시에 있는 북한 노동당 대외정보 조사부 현지 주재원 박창해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중국인화 현장 실습을 했다. 朴의 조카로 행세했다. 여기서 金賢姬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허애영(許愛英)이란 27세의 처녀를 알게 돼 친구처럼 지냈다. 許양은 광주여행사 부기원이었다. 許양을 따라 金賢姬와 김숙희가 어떤 모임에 갔더니. 許양의 중학교때 스승인 당길명(唐吉明)(36,세)과 그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두 金양은 광주시의 이모저모를 많이 구경 다녔다고 한다. 『광주시는 중국에서도 가장 먼저 개방된 도시여서 그런지 거의 자본주의 사회 같아 보였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라고 했습니다』 중국과 북한 가운데 어느 쪽의 생활이 나으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북한이 높고, 평양사람들의 생활은 중국인의 평균생활보다 나은 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金賢姬는 그러나 평양과 광주를 비교할 때 『광주사람들이 훨씬 잘 산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상점에 물건이 많고 돈만 있으면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있고 훨씬 자유로우니까요』
  
  金賢姬는 중앙당의 지도원들이 중국의 개방정책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했다. 『저렇게 개방해 놓았다가 자본주의화되면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더군요』 金賢姬는 최근의 북경대학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공산주의사회에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사회에서는 아무리 동족이라도 일단 반동분자로 규정해 버리면 무자비하게 투쟁해야 할 대상이 돼버립니다. 북한에서는 지주계급이 그러했고, 이번에 중국에서는 학생들이 그런 대상이 되었습니다』 金賢姬는 마카오에서 실습을 할 때 나이트 클럽에 구경하러 간 적은 있으나 춤은 차마 추지 못했다고 한다. 두 金양이 광주와 마카오에서 1년 6개월간의 실습을 끝내고 돌아갈 때 본부 사람들에게 줄 선물로 산 물건은 일제 고급 라이터 5개, 값싼 홍콩 제 라이터 5개. 중국 만년필 6개, 넥타이 2개였다.
  
  「스트레스」를 알게 되다
  
  -여자는 통상 남자에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한다는데 金양은 초대소에서 밀봉되어서 누구를 위해서 화장을 했을까?
  『적구화 교육의 하나로서 자본주의식 화장법을 배웠습니다. 일본인 교사 리은혜선생이 가르쳐 준 대로 일본여자의 화장법으로 매일 화장을 했습니다. 당 간부들이 불시에 들르기 때문에 항상 화장을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저처럼 여러 가지 화장품을 많이 쓴 화장을 할 수 있는 이는 북한에서는 예술인들 이외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밤에 화장을 한 채 집에 들렀더니 어머님께서 눈가에 바른 아이새도우를 보시고는 「누구한테 얻어맞았니?」라고 하시며 놀라십디다. 어머님은 제발 그것 좀 지워버리라고 질색을 하셨습니다. 저는 브라운색의 아이새도우를 주로 발랐습니다. 3∼4 개월에 한번씩 지도원의 차를 타고 평양시내의 최고급 미장원인 창광원에 가서 퍼머도 했습니다. 화장이란 것이 저 자신에게 좋게 보이도록 하는 면도 있으므로 싫지는 않았습니다』
  
  金賢姬가 남한 생활을 하면서 배운 낱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 쌓인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차츰 남한사람과 남한 사회를 알게 되면서 그 뜻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쪽에서는 스트레스에 합당한 말이 없습니다. 기분 나쁘다는 뜻도 아니고… 북한은 같이 못사니까 스트레스가 별로 없으니까요』 金賢姬가 스트레스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남한의 실정과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과 그 부작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단계에 다가갔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의 가장 큰 희망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글쎄요. 지금 상태에서는 뭐 저야. 뭐… 조국통일이 빨리 되었으면 합니다. 북쪽에서는 그 냥 이념적으로. 또 관념적으로 통일 통일했는데, 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저의 모든 것과 통일이 직접 관련지어져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5: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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