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말한다(중) - 김일성 지령의 내막(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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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북한 가정의 초상
  
   북한 사람, 더 바쁘다
  
  오늘날 보통 한국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여가일 것이다. 여가를 어떻게 내고 활용하며, 그 러한 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고 바쁜 사람들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이에 대해서 金賢姬는 반발한다. 『여기 와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휴일도 많은데 정말 놀랐습니다. 저희 가족은 함께 놀러간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에게는 텔리비전과 영화 보는 것이 여가를 보내는 일의 거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영화도 대작은 1년에 몇 편 안 나옵니다. 텔리비전에는 드라마가 없습니다. 요사이 「텔레비 소설」이란 것을 만들어 드라마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좋은 영화는 수십 번 봅니다. 저는 신상옥(申相玉)씨가 만든 영화는 다 보았습니다. 사상성이 많이 들어 있지 않아 재미있었습니다』 金賢姬는 『아버님은 오전 7시30분에 출근하셔서 밤1시에 돌아오시니 얼굴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일요일에도 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고 했다.
  
  북한의 휴일은 1월1, 2일, 2월16일 金正日생일, 4월15일 金日成생일(16일도 연휴), 6월1일 어린이날, 5월 1일 메이데이, 8월15일 해방기념일, 9월9일 국가창건일, 10월10일 당창건일, 12월27일 헌법절, 추석, 한식날뿐이다. 4월15∼16일은 이틀간 쉬는 대신 그 앞(혹은 뒤)의 일요일에는 일해야 한다. 金賢姬는 『북한의 어머니들은 자신이 일터에서 늦게 돌아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가족들의 벤또를 준비하느라 늘 잠이 부족하다』고도 했다. 金賢姬의 대학재학 중 일과시간은 대강 이러했다.
  
  오전 6시30분 : 일어남. 식사.
  오전 7시20분 : 집을 나와 평양 혁신역에서 10전짜리 지하철표를 사 승차. 두 번째 역인 전승역에서 ? 출근 때는 앉기가 어려움. 사람들은 金日成 신년사 등 정치학습교재를 들고 독서하는 예가 많음.
  오전 8시 : 등교. 운동장에서 사열식.
  오전 8시30분 : 강의 시작(90분씩). 金賢姬는 열 과목을 수강했는데 김일성 혁명역사, 김일성 노작, 정치 경제학, 일본어 강독, 청취, 회화, 문법 등이었다. 일본어과는 남자 6명, 여자 3명 등 모두 9명이었다.
  오후 1∼4시 : 점심식사 및 오침시간.
  오후 4∼7시 : 오후 강의.
  오후 7∼9시 : 사로청 점검, 강연회 수강, 정치학습, 운동.
  오후 9시∼10시 : 귀가.
  
  강의는 교수가 맡지만 강의 이외의 정치학습, 주간총화, 강연회 등 사상 관리는 전국 학생조직인 사로청에서 맡는다. 일본어과에서는 소대장으로 불리는 남학생이 사로청의 말단 간부였다. 토요일 오후에는 대학교를 포함한 전국의 여러 조직에서 정치학습 시간을 2∼3시간씩 갖는다. 金日成부자의 교시나 말씀을 배우고 자아비판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사제지간에 별로 정이 없고 교수를 발전성이 없는 직업으로 여기고 있다』 고 하였다.
  
   뻥소니 사건도 있다
  
  다른 직장에서도 대학생처럼 일과 이외에 정치학습, 총화, 노력동원 등이 많아 쉴 시간이 남한에 비해서 오히려 짧다는 것이 金의 주장이다. 북한에는 술집이 없다. 명절, 잔치 날에만 구매권으로 술을 사 집에 가져가 마신다. 인삼술, 태평술, 금강술, 뱀술, 룡성맥주 따위는 비싸기 때문에 평양술이란 25도짜리 소주가 인기다. 한 병에 2원50전인데 북한사람들은 『술 밑창을 다 낸다』는 말대로 술을 절대로 남기지 않는 버릇에 익숙하다고 한다. 외식할 만한 식당은 있으나 그날에 팔 수 있는 그릇수가 정해져 있어 손님이 늦게 가면 사먹을 수가 없다. 데이트하는 젊은이들은 입장료가 50전∼2원 하는 영화를 보고 대동 강변을 산책하는 것이 거의 지정된 코스처럼 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북한에서 교육·선전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직장별로 의무적으로 영화를 관람 그 주인공처럼 살자고 다짐하는 모임을 「실효투쟁」이라고 한다. 金의 가족이 살았던 무역부 아파트에는 목욕시설이 있는데 온수는 하루 에 2시간쯤 공급되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는데 입욕료는 어린이가 5전, 어른은 10전이다. 목욕탕의 분위기는 1950년대의 우리나라 대중목욕탕과 흡사하다고 한다. 金賢姬는 북한의 언론풍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로동신문과 평양신문 가운데 하나를 구독하게 돼 있습니다. 로동신문은 평일에는 6면, 4·15같은 명절날에는 화보를 곁들여 10면을 발행합니다. 1면 톱은 늘 金日成부자가 독점합니다. 金日成사진이나 초상화가 실려 있는 지면은 집집마다 보관함을 만들어 간수하였다가 인민반장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 지면에 낙서를 한다든지 찢으면 비판받습니다』 金賢姬는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미용실에 갔다가 미용원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아들이 대낮에 공원으로 놀러갔다가 시계를 빼앗겼답니다. 외화를 많이 가진 집에 강도가 들어 딸이 찔렸다는 이야기를 지도원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우리 아파트의 인민반에는 차에 치어 버려진 사람의 시체사진을 돌리며 신원파악에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金賢姬가 남한에 와서 처음들은 말 가운데 하나는 「사춘기」다. 최근에 일본의 상사 과장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약 75%가 외도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金은 『북조선 같으면 90% 이상이 그렇게 답했을 것입니다』면서 성 문제에 관해선 깨끗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예술인들 가운데 「날라리」라고 불리는 행동이 불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혁명화 내려간」 모양이라고 수군댑니다. 나쁜 품행이 적발 돼 비판받고 지방으로 쫓겨갔다는 뜻입니다. 직장에서 가끔 직위를 이용하여 성을 요구하는 일이 있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지요』 金은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을 강조했다. 러브호텔도 없고, 상호감시가 철저한 통제사회에서는 불륜관계가 들키기 쉽다는 얘기였다. 북한 사람들은 바둑은 거의 두지 않고 장기, 주패(트림프), 윷놀이를 즐긴다. 주패놀이에 쓰는 카드는 스페이드를 공병삽, 클로바를 고양이발 식으로 말을 바꾼 것이다.
  
  金은 『북조선 사람들에게는 외국여행이란 것이 꿈으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고 했다. 공무출장 이외에는 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이란 개념도 없다고 한다. 집안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양쪽 집안을 오가고, 평양시내를 드라이브하는 것으로 때운다. 金은 어릴 때부터 해외거주를 하고 비행기를 타 보았다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金賢姬의 아버지 金元錫은 함경도 풍산 사람인데 3남3녀 중 2남이다. 여행의 자유가 없어 金賢姬는 검덕광산의 기계작업반에서 일하는 작은아버지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1987년 5월에 金은 몰래 초대소를 빠져 나와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간 적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15년만에 처음으로 사위집에 다니러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손녀를 보자』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제5장 金賢姬의 비밀
  
   장기영(張基榮)에 바친 꽃다발
  
  金賢姬가 북의 공작원임을 증명한 가장 극적인 물증은 1972년 11월 2일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평양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헬리콥터 편으로 평양시 근교에 내린 우리측 장기영(張基榮)대표에게 중신중학교 1학년 金양이 꽃다발을 바치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이것의 보강증거로서는 일본의 공산당기관지 아카하다의 평양특파원이 바로 이 장면의 직전 사진(화동들의 대열 속에서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金양의 모습)을 찍어놓은 것이었다. 북한은 이 증거가 아팠던지 엉뚱한 여자를 내세워 『꽃다발을 준 것은 나다』고 주장하게 하였었다. 이 꽃다발 바치는 장면에 대한 金賢姬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 행사 전날에 저는 여러 학교에서 뽑힌 여학생들과 함께 평양시 외성 구역에 있는 평양시 행정위원회에 불려가 주의를 받았습니다. 간부가 오더니 저에게는 「남조선 기자들이 와서 아버지 직업을 물으면 그냥 평민출신이라고 대답하라」고 시켰습니다. 이날 우리 각자는 치마, 저고리, 붉은 넥타이, 스타킹, 구두를 배급받고 집에 돌아갔다가 다음날 아침 행정위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까르샤」라는 큰 고급버스를 타고 중화지역 쪽으로 가다가 중간에 꽃방에 들려 꽃다발을 하나씩 받았습니다. 야산의 펑퍼짐한 잔디밭에서 차가 멈추고 우리는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온다기에 바깥으로 나가 정렬했습니다. 헬리콥터가 내릴 때 바람이 일었는데. 이것(아카하다지게재)은 이때 찍힌 사진인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진 기자들인데, 어깨에 무엇인가 주렁주렁 많이 맨 사람들이 먼저 내리고 그 뒤에 귀빈들이 내렸습니다. 저는 두 번째 내리는 사람에게 달려가 인사하고 꽃다발을 바쳤습니다. 몸이 큰 그 분은 「몇 학년인가」하고 물었습니다. 「1학년입니다」고 대답했더니 「이게 무슨 꽃인가?」 하고 또 물었어요. 꽃 이름을 몰라 대답을 못했는데 또 다른 질문을 할까봐 가슴이 떨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앞에 섰던 아이 하고는 버스 안에서 바로 옆에 앉아 이야기도 하고 해서 이 사진을 보고는 단박에 알아보았습니다』
  
  金賢姬의 범행에서 몇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이것을 밝혀본다.
  -범행 뒤의 퇴로로서, 아부다비-로마-비엔나로 돌아가는 코스를 잡지 말고 바로 홍콩이나 마카오를 거쳐 중공으로 들어갔으면 더 수월하였을 텐데…. 배터리 검색제도 계획 때 몰라
  『김승일(金勝一) 동지가 그런 제의를 했더니 崔과장이 「그렇게 하며 자금이 더 많이 들고 이미 안내조인 나와 崔지도원은 비엔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합류하기로 확정했다」고 반대했습니다.
  
  -KAL858기에 폭탄을 둔 뒤 아부다비에서 내려 계획대로 암만-로마로 빠졌으면 잡히지도 않았을 테데 아부다비의 공항사정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위장용으로 끊어두었던 아부다비→바레인 항공권을 썼고 이 때문에 바레인에서 잡힌 셈인데….
  『초대소에서 노정(路程)연구를 할 때부터 아부다비에서 내려 로마가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데 아홉 시간을 보세구역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이 되었습니다. 쫓기는 입장에서는 아홉 시간이 너무 길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부다비공항의 보세구역으로 들어가는 데는 아무장애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막상 공항에 내려 비행기에서 공항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들어서는데 공항직원이 여권과 비행기표를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부다비-암만-로마 표를 꺼내지 못하고 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 표를 제시함으로써 탈출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내키지도 않았던 바레인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폭파 계획을 짠 사람들 중에는 아부다비나 바그다드공항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그다드 공항에서 KAL기에 탈 때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金賢姬는 폭파용 라디오의 배터리 4개를 압수 당했다. 이 배터리는 폭파용으로서 일반 배터리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金勝一이 기지를 발휘하여 이 배터리를 되찾아 폭파임무를 수행하기는 했는데 배터리를 갖고 비행기에 오를 수 없다는 것도 북한 공작부서에서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한다. 국가적인 대사를 계획, 추진하는 과정에서 저들이 보여준 허술함은 워낙 폐쇄된 사회에 길들여져 국제감각이 무디어진 결과인 것 같다.
  
   김승일(金勝一)은 누구인가
  
  국가안전기획부가 바레인으로 입국한 사람들 가운데서 입국카드에 마유미, 신이찌라고만 쓰여진 두 사람에게 주목한 까닭이 있었다. 일본인이라면 성명을 다 쓰든지 하찌야란 성만 쓰 는 게 보통인데 이름만 써넣은 것이 한국식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金賢姬는 이 부분에 대해서 『그것은 金勝一이 기재한 것인데, 출국할 때는 하찌야라고 써 입국시와 출국시의 이름을 틀리게 함으로써 추적에 혼란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고 했다. 자살한 金勝一은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검찰조서에서는 金勝一이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1918년 대한민국 이하 미상 지역에서 성명미상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도일, 일본 지역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전기통신 계통의 중학교 과정을 졸업후 년도 미상 경 남한에 귀국하여 거주타가 1948년 성명 미상 처와 함께 월북하여 슬하에 7남매를 두었고 6·25 동란 시 북괴군이 패주하자 북괴 기술연수생을 인솔하여 중공 천진으로 피신하였다가 휴전 후 북괴지역으로 귀환하여 전기통신기술 분야에서 활동 중 1954년 중앙당 조사부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남한 및 일본 구마모도 등지에 침투. 대남공작 활동을 자행타가…」
  
  金賢姬는 이렇게 진술했다고 한다. 『7남매를 다 출가시켰다고 합니다. 호남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말이 없고 조용한 분으로서 교수 같았습니다. 잡기로는 장기를 좋아했고, 여행 중에는 사업 이외에는 별로 주고받은 말이 없습니다. 이번 일이 마지막 임무였습니다. 성공하면 영웅칭호를 받도록 하겠다고 崔과장이 약속했습니다. 그 전에도 여러 번 남한을 드나들며 공작활 동을 했다고 합니다』
  
   金日成의 영원한 두통거리
  
  金賢姬는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권총사격·AK소총사각·격술·수영을 배웠다. 권총과 소총사격은 50m 거리에서 10발 중 9발을 표적에 명중시킬 정도라고 한다. 격술은 사람의 급소를 치는 방어 무술인데, 그렇게 진지하게 훈련받은 것 같지는 않다. 수영은 2km를 헬 수 있을 정도이며 운전도 배워 승용차를 몰고 평양시내를 여러 번 돌아다닌 적이 있다. 야간 산악 행군훈련에서는 6시간만에 1백리를 걸었다고 한다. 일부신문에 金양의 손에 격술로 단련된 굳은살이 남은것 처럼 보도된 적이 있는데 金의 손은 곱고 길며 가냘프다고 한다. 단검던지기를 배웠다는 것도 와전이다. 金은 중국어를 배울 때 모란꽃 소대 소속인 성인애라는 동갑내기 공작원과 몇 달을 같이 생활했다. 성인애는 남한의 유흥가에 작부로 위장하여 침투할 목적으로 훈련된 공작원이었다고 한다. 남한의 유행가도 잘 부르고, 젓가락 장단도 맞출 줄 알고, 카바레 춤에도 능했으며 단검 던지는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란다.
  
  모란꽃 소대는 인민무력부 소속이다. 金賢姬를 자주 만난 사람들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토록 지독한 체제 안에서 어떻게 저런 인간형이 나올 수 있었을까』 어떤 자리에서도 단정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金양을 보면 알뜰했을 어머니와 단란했을 가정분위기를 짐작 할 수가 있다. 金은 전통적인 한국여자의 미덕을 두루 갖춘, 남쪽에서는 보기 드문 고전적인 용모와 품성을 갖고 있다. 안기부 수사관들도 『그 친구들이 잘 뽑긴 뽑았다』고 했다. 우리가 한시도 잊어선 안될 것은 이 미모의 여자가 한 때는 인간폭탄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는 영화배우·음악도를 꿈꾸었고 커서는 아버지의 권유로 외교관이 돼 보겠다고 했던 이 처녀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작원으로 뽑혔다가 지금은 사형수가 돼 버렸다. 한 여린 처녀를 흉악범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金日成 유일체제와 거기에 흘린 남한의 젊은이들에게는 「살아 있는 金賢姬」이야말로 영원한 두통거리일 것이다(계속)
  
출처 : 월조
[ 2003-06-30, 15: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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