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말한다(중) - 김일성 지령의 내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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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자폭정신의 실천
  
  「金正日의 친필지령은」은 상식
  
  「혁명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시며,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시며, 세계혁명의 위대한 영도자이시며, 절세의 영웅이시며, 경애하는 수령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주체사상의 창시자이시며, 자애로운 어버이시며,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1987년 10월7일 저녁 조선로동당 대외정보조사부의 李모 부장이 김승일(金勝一)과 김현희(金賢姬)를 앞에 두고 『이번 동무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는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다』고 했을 때. 金日成의 존재는 기나긴 찬사의 수식어 그대로 金賢姬의 정신세계를 꽉 채우고 있었다. 눈매가 매섭고 퉁퉁한 몸매의 李부장은 이 임무가 金正日의 친필지령이 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기자들?金賢姬가 친필을 본 것도 아니고 李부장을 통해서 들은 말이기 때문에 그 신빙성을 낮게 보려는 경향이다. 이에 대해서 金賢姬는 『저를 포함한 공작원들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金正日이 관심을 갖고 있고 우리 조직이 金正日의 직할하에 있다는 것을 거기서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고 진술했다.
  
  『1984년에 金勝一의 남한침투를 엄호하기 위해서 따라갈 때도 金正日의 친필지령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KAL기 폭파와 같은 엄청난 일을 金正日의 지시 없이 누가 지령 할 수가 있겠습니까. 金日成도 모를 수가 없습니다. 해외공작. 윤정희·최은희·일본인 납치 같은 것은, 金正日의 고유업무소관이라는 것이 우리 조직에서는 상식이 돼 있습니다』 金賢姬가 초대소에 있을 때 밥을 해 주던 식모는 최은희(崔銀姬)가 납치돼 와 격리 돼 있을 때 식모 노릇을 해준 여자였다고 한다. 이 식모는 金양에게 『崔銀姬는 납치돼 온 직후에 혼자서 눈물을 흘리며 세월을 한탄하고 가끔 노래를 부르기도 하더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1979년 1월3일 金正日은 당중앙위원회 간부들에게 이런 「말씀」을 남겼고, 이 「말씀」은 대남 공작원들이 학습함으로써 우리 정보기관에도 알려진 바 되었다. 그 「말씀」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북한의 무장간첩이 남쪽의 포위망을 뚫고 생환한 데 대하여 한 말이다.
  
  『그들은 적들의 포위 속에서도 수령님 초상화를 모시고 당 회의를 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그 사실을 보고 받으시고 그 동무들이 안전하게 빠질 수 있겠는가를 거듭 물으셨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그들이 자폭하면 했지 절대로 적들의 손에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金正日의 말대로 라면 金日成은 사소한 무장 간첩의 고립에 대해서도 진행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그런 金日成이 서울 올림픽에 일대 타격을 가하겠다는 KAL기 폭파 지령을 사전에 몰랐을 리는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金正日의 친필지령은 金賢姬에게는 거부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 목적을 의심할 수는 더욱 없는 절대명령이었던 것이다.
  
   불구자로 살아 뭘 하나
  
  -KAL858기에는 한국노동자들이 탄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金양을 포함하여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나라에서 그럴 수가 있나?
  『리부장으로부터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때 저는 「과연 저 임무를 해낼 수 있을까?」하고 불안해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많은 공작원들 가운데서 제가 뽑혔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조국통일에 기여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던 것입니다. 바그다드에서 막상 KAK기에 타고 보니 많은 동족 로동자들이 보이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죽게 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조국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각오해야 한다. 나도 이미 희생을 각오하였다는 생각으로 자위했습니다. 저는 폭파대상으로서 KAK기를 선택한 것은 한국 노동자들만 타고 있으므로 폭파되어도 국제 문제로 커지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이 폭파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들었는가.
  『대외정보조사부 리부장이 초대소에서 폭파 명령을 하달한 다음날 최(崔)과장이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88년 1월17일까지 세계 각국이 서울 올림픽에 참여하는지 여부를 확답하게 돼 있는데. 그전에 비행기를 폭파해야 다른 나라에서는 올림픽 참가를 꺼리게 될 것이고. 남한 내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격화돼 올림픽을 치르지 못 하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崔과장은 함경도 사람인 듯했는데 코가 높고 다부지게 생긴 50대였습니다』
  
  -지도원이 독약 앰플이 든 담배개비를 만져보게 한 뒤 일단 유사시에 金日成과 金正日의 권위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자살을 지시한 데 대해 인간적으로 너무하다는 생각도 안 해봤는지?
  『공작원으로서 비밀을 엄수하고 수령님의 권위와 위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를 자폭정신이라고 하는데 영화를 통해서도 이를 미화. 선전하고 있습니다. 영화 「조선의 별」 2부에는 金日成의 항일무장투쟁 시절 동지인 김혁이 적들에게 포위된 건물의 베란다에서 투신자살하면서 「金日成장군 만세!」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자살 지시에 대해서 어떤 의문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1980년 12월 8일에 金正日은 「조선의 별」 1부를 보고 나오면서 자폭정신에 대해 말하였다. 1983년 12월에 부산 다대포로 침투하다가 붙들린 무장간첩 전충남이 기억해낸 「金正日의 말씀」은 이러했다. 『혁명영화 「조선의 별」 주제가에 「가야 할 혁명의 길」이란 가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전투원 ○○명이 가야 할 혁명의 길을 갔습니다(주 : 횡간도 간첩침투사건에선 전원이 사살된 것을 가리킴). 그들은 모두 총각들이었으며 20대 꽃나이에 적구에 나갔다가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자폭하는 마지막 순간에 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유언전문을 날리고 청춘을 혁명에 바쳤습니다. 나는 만약 한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면 변절자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부상을 입고 돌아올 것인데 혁명을 계속하지 못하는 불구자로나 살아 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적에게 무자비하라!
  
  -동족을 떼죽음시키는 명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김승일(金勝一)과 둘이서 자유롭게 여행하는 틈을 타서 망명하거나 신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러지 않았나?
  『그 말씀이 이해는 됩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활하시고 여기 기준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해는 갑니다만 북한의 실정을 너무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북의 교육과 그 곳이 어떤 체제인가를 모르십니다. 저쪽에서는 머리를 갖고 있지만 자기류 대로 사고 할 수가 없습니다. 계급교양을 통해서 저는 끊임없이 「적에게는 무자비하라!」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쪽에서 말하는 적은 미제와 거기에 빌붙은 남조선 괴뢰를 가리키는 것이지 불쌍한 노동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남조선은 우리의 적대국가라고 배웠습니다』
  
  -국가와 국민과 지배세력을 구분할 텐데…
  『…』
  
  -KAL858기에 타서 귀국길에 들떠 있는 동족들을 보고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조국통일을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는데, 그런 생각은 金賢姬의 자의적인 해석이었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저도 죽을 각오가 돼 있었는데…』
  
  -나도 죽을 각오가 돼 있으니 너희 노동자들도 조국통일을 위해서 희생 돼야 한다고 합리화한 것이 아닌가?
  『그때는 잘못생각 했습니다』
  
  -결국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대로 행동한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나요?
  『당의 명령은 비판과 평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집행할 뿐입니다』
  
  김현희(金賢姬)는 바그다드에서 대한민국 영토의 일부인 KAL858편 보잉 707기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기분을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밤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스튜어디스가 「어서 오십시오」라고 상냥하게 인사했습니다. 김승일(金勝一)이 이미 갖고 있던 폭탄이 든 쇼핑백을 위의 선반에 올려놓았고 멜 가방은 제가 갖고 앉았습니다. 제 옆에는 서양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 여자와 함께 화장실에 다녀온 것 밖에는 움직이지 않고 신문을 보는 척하다가 담요를 덮고 자는 척 했습니다』 金賢姬는 아부다비에서 내린 뒤에도 『두고 내린 폭파물이 제대로 작동할 지 걱정이 되고 이 지역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불안했었다』고 했다. 金賢姬와의 일문일답에 나타나듯 金賢姬는 KAL858기에 올라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양심의 가책을 혁명과 통일에의 사명감을 구실로 삼아 덮어버렸다. 1백15명의 운명이 결정된 결정적 순간에 인간본연의 심성은 광신적 교육과 제도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것이다. 金日成이란 납덩이는 金賢姬를 죽음의 골짜기까지 몰고 간다.
  
   고문 겁네 또 자살 기도
  
  1987년 12월 1일 오전 바레인 공항을 빠져나가려다가 붙들린 김승일(金勝一)과 김현희(金賢姬)는 경찰관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의자에 붙어 앉아 있었다. 金勝一이 賢姬에게 『…차라리 여기서 약을 먹고 죽는 게 낫겠다』고 했을 때의 심경-. 『저는 「할아버지, 제가 먼저 죽을 테니 저의 죽음을 확인하시고 하세요. 신호를 보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金日成이는 육체는 죽어도 정치적 생명은 영원하다고 했지만, 인생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끝내 이렇게 가누나 하고 생각하니… 그래도 살겠다는 마음은 추호 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독약을 안 깨물면 고문을 받고 더 큰 고통을 당하다가 비밀만 털어놓고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여기서 죽는 길밖에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金이 독약 앰플이 든 담배개비를 깨문 데는 金日成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살아서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코 잘 리고 눈 뽑히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는 죽음이 편하다」는 이기주의적 타산이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얘기다. 1백 15명의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결정을 내리는 데는 金日成·金正日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크게 작용하였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하는 데는 자신의 고통을 피하자는 이기주의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래서 金賢姬는 깨어나서도 다행하다는 생각이나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심과 범행에 대한 반성을 한동안 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레인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를 金賢熙는 최근에 이렇게 회상하였다. 「마유미!」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는데, 살아 있구나 하는 자각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났다는 것이 그토록 원망스럽고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났다는 기쁨보다는 고문 받고 죽을 생각에 또 다시 절망했기 때문이었다. 金賢姬는 자살할 틈을 엿보았다. 『의사가 칼을 가져오면…』 하고 기다렸으나 온몸이 묶여 있어 소용이 없었다. 金은 혀를 깨물었으나 피만 나고 아픈데다가 잘리지도 않았다. 안기부 수사관들에 따르면 온몸이 묶여 있으면 이빨만으로는 혀를 자를 수 없다고 한다. 아래턱을 쳐 올리든지 하는 바깥 힘의 도움이 있어야 혀가 잘린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바레인의 병원에 있을 때 남한사람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남조선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겁이 나서 눈을 꼭 감고 뜨지 않았다고 한다. 金은 金勝一 이 죽었으리라는 짐작은 했으나 간호원과 경찰관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확실히 알게 되었다.
  
  깨어난 지 4일쯤 뒤에 金은 바레인 경찰서로 옮겨졌다. 수사책임자인 영국인 핸더슨씨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통역으로 내세워 金을 신문하였다. 중국어통역은 바레인의 중국식당 여자 종업원이었다. 이 중국여자에게 金은 『일본에 가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金勝一)가 돈벌이가 있다고 해서 따라나갔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다. 나는 이용만 당했다』고 호소하듯 말했다고 한다. 이 중국여자도 동감한 듯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중국사람이라 도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현지의 일본인 상사에 근무한다는 26세의 일본여자 통역은 『일본의 어디에 살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핸더슨씨는 『마카오에 살았다는데 신원을 보증할 만한 친지의 이름을 대 보라』고 했다. 그는 또 『네가 솔직히 털어놓고서 진상을 밝히지 않으면 우리가 계속 데리고 있기가 어렵다』고 했다. 金은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고집하면서도 속으로는 남한으로 보내질 경우에 대비하여 거짓 진술할 시나리오를 구상하기도 했다. 金賢姬는 경찰서 유치장의 침대에 한 손이 수갑으로 묶인 채 며칠 밤을 지샜다.
  
   죽은 김승일(金勝一)이 부러웠다
  
  1987년 12월 15일 저녁 바레인 경찰의 한 간부가 나타났다.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끝났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혹시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해달라』 金은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가 경찰차에 탔다. 경찰관들이 양쪽에서 金을 붙들고 있었다. 차는 어디로 달리는지 한참 뒤 멎었다. 바깥으로 끌려나왔다. 부릉부릉 하는 소리가 나고 어둠 속에서 비행기가 대기중이었다. 金은 『이제 남조선으로 끌려가는구나』하고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눈을 꼭 감고 있는데 누군가가 입을 막았고 조선말이 들려왔다는 것이다. 비행기 안으로 들려 올라갔다. 金은 『비행기 안에서 저를 때리고 치고 할 줄 알았는데 침대에 눕히고 입 마개를 밀어 넣습디다』고 했다. 누군가가 귓가에다 대고 누구누구는 귀순하여 잘 살 고 있다느니 『너는 북한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서울로 날으는 특별기 안에서 金은 『이 중대한 비밀을 어떻게 지킬까』하고 머리를 굴리는 데 바빴다. 金은 그 때 심정으로는 『죽은 金勝一 할아버지가 부러웠다』고 회상한 바 있다. 『고문 하다가 죽이겠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심도 생겼습니다. 그때는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비밀을 지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특별기가 15일 오후에 김포공항에 도착 바깥으로 나왔을 때 金賢姬는 확 밀라오는 한기를 느끼면서 「서울에서 죽게 되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이름만 들어도 무섭던 서울, 그리고 살아서 나오기 어렵다는 남산 지하실…. 그 지옥 같은 취조실로 끌려갔는데. 뜻밖에도 저를 침대에 눕히고 「쉬라!」고 하면서 입 마개를 뽑아줍디다. 수사관들이 저를 믿고 대해주는 것 같아서 저도 자살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백할 때까지는 혹시 잠자다가 한국말로 잠꼬대를 할까봐 신경이 쓰였습니다』
  
  -왜 자책감을 느끼게 되었나?
  『여기에 와서 여러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남한사람들이 동족이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남한사회가 북에서 알았던 그러한 사회가 아니란 것도 깨달았습니다. 저는 사상과 제도의 차이 때문에 남한을 증오해 왔는데 여기 와 보니 제도도 그런 제도가 아니고…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쁜 줄 알았지만 이쪽의 악독한 제도를 바로잡는다는 생각에서 참고했는데 저쪽 제도가 오히려 더 나쁘다는 것을 알고부터 죄책감을 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金賢姬는 『자백한 뒤에 남한을 돌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꼭 내가 북한에 있는 것 같고 이따금 고향에 와 있다는 착각을 느낄 만큼 산천이 흡사한 데 놀랐고, 풍습과 음식이 같고 해서 한 핏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죄스러워지고…』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자백한 직후에는 남한을 확고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金日成수령님을 배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차츰 진실을 알게 되면서는 金日成과 金正日에 증오심이 더욱 끓어올랐습니다』
  
   사형집행이 된다면…
  
  김현희(金賢姬)는 요사이 꿈을 꾸면 가족들이 자주 나타나곤 한다는 것이다. 평양의 집에 가서 부모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살자고 설득하면 눈이 휘둥그레지곤 하는데. 답답해서 발을 동동 구 르다가 눈을 뜬 적도 있단다. KAL858기에 타고 있던 노동자들이나 재판정에 나와 울부짖던 유족들의 얼굴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金은 1심 재판정에 나가서 비로소 자신의 범행이 유족들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못을 박았는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유족들에게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괴로왔습니다. 저 자신으로서는 그렇게 욕을 먹으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저를 살인자로 만든 金日成·金正日이 더욱 저주스럽습니다』
  
  -주범 김승일(金勝一)의 보조자 역할로서 죄책감이 덜하리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金勝一은 죽었고 저는 살아났으니.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져야 할 사람은 저 한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렇게나 되어도 괜찮습니다. 유족들의 슬픔만 덜어줄 수 있다면…』
  
  -일부 유족들이 『金賢姬는 범인이 아니다!』고 소리쳤는데….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여기 인민들이 믿지 않아 섭섭하고 답답했습니다』
  
  -사형구형, 사형선고 때의 감상은?
  『저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려드리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죽었더라면 사건의 진상도 사라졌을 것이고 저는 金日成만 아는 상태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을 텐데 이런 사회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오는 돼 있었지만 기분은 좋지는 않았습니다. 겁 같은 것은 없었으나 가족 생각이 나고…』
  
  -가령 金賢姬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할까. KAL858기 폭파에 성공하여 북한으로 무사히 탈출한 뒤 영웅대접을 받고서 金日成의 체제 아래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지금처럼 인간회복을 한 뒤 뉘우치고 사형집행을 당하는 길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는지,? 『…그때 북한으로 귀환했다면 최고의 영광을 누렸겠지요. 지금 이 상태에서는 저 개인으로서는 고통스럽지만 크게 봐서 민족 역사 통일에 대해서는…, 제가 기여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항소를 안 하려고 한 이유는?
  『저야 뭐…, 처벌받아야 마땅하고 더 이상 변명도 하기 싫고…』
  
  -항소를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는?
  『변호사님들께서 권하시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는 한 번의 재판으로 충분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더 밝혀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변호사님들에서 알아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만약 사형이 확정된 뒤 정부가 사면령을 내려 살려준다면?
  『저는 재판받는 중이라서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살아난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을 텐데?
  『저쪽의 진실을 이쪽 사람들에게 똑 바로 알려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정부가 金양의 사형을 집행한다면 억울하다고 생각하겠는지?
  『저 죄를 알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金日成. 金正日이가 저를 살인자로 만든 데 대하여 저주하고 이쪽 인민들에게는 죄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6: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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