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말한다(중) - 김일성 지령의 내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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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金賢姬)는 말하다(중)
  
  김정일(金正日) 지령의 내막
  
  『죽음으로써 수령님의 권위를 보호하라』는 자살명령의 뒤에 있는 金日成 주체사상의 광신성(狂信性)
  
  <89년 6월 월간조선>
  
   제1장 金日成주체왕조(王朝)의 본질
  
   맏딸 같은 여자
  
  김현희(金賢姬)는 「이 여자가 1백15명을 죽게 한 항공기 폭파범」이란 사실을 깜박 잊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예쁘고 예절 바르고 수줍어하며 속이 깊고 시키는 대로 하는 여자이다. 햇볕을 받지 못하고, 화장도 못하며, 늘 죽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金賢姬의 얼굴은 어디서 봐도 예쁜데 특히 옆얼굴이 고대 앗시리아의 부조(浮彫)처럼 완벽한 균형미를 갖고 말끔하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金賢姬의 얼굴은 어쩔 수 없이 처연하다. 쌍꺼풀진 눈가에 서린 그림자는 1백15명의 죽음이 남긴 자취이리라. 일단 입에 떼고 말을 시작하면 金賢姬의 얼굴에는 생기와 화색이 돈다. 어머니가 개성출신이고, 유아기를 쿠바에서 보낸 金賢姬는 공작원 교육을 받으면서 상당히 남한화 된 탓도 있어 서울말씨에 가깝고 어휘력도 풍부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그녀의 말은 그대로 옮겨도 문장이 될 정도이다. 金은 북한의 성 문제, 결혼, 가족계획 이야기가 나오면 손을 입으로 가리고 『아이, 그런 건…』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얼굴을 붉힌다.
  
  『아버지는 매일 자정이나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신다』는 말을 받아 한 수사관이 『혹시 외도하시는 것 아니냐?』라고 농담을 했더니 金賢姬는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다』고 거듭거듭 해명하더라고 한다. 金은 여기의 중학교 국사교과서를 읽고는 『남한에서는 히스토리(History Story)를 가르치고 북한에서는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친다』고 했다. 金賢姬의 표현력을 정확하면서도 사물의 핵심을 찌르는 구석이 있다. 金양은 대부분의 귀순자들과는 달리 남북한에 전쟁이 터지면 남한이 이길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남한의 인력이 우세하기 때문인데, 머리수로서의 인력이 아니라 남한에는 현대전을 치를 만한 전문기술인력이 북한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수사관들은 『여자로서의 정신연령은 공작원으로 뽑힐 때인 18세에서 정지된 것 같다』고 金을 평하면서도 『맏딸답다』는 말도 한다.
  
  金賢姬는 2남2녀 중 장녀이다. 식량이 모자랄 때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해 이따금 절식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 눈치가 金양이 먼저 『오늘은 밥맛이 없다』면서 어머니를 위해 밥을 남기기도 했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기자회견이나 재판정에서는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생각대로 정직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여 『남의 기분을 맞추어주기 위해 소신을 변경하거나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다』는 평을 듣고 있다. 金은 이런 말도 했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가슴에 안으면 체온이 저의 가슴에 따뜻하게 느껴져 섬찟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남한에서든 북한에서든 단란한 가정의 모범적인 주부가 돼 보통사람의 평범한 삶을 꾸려가도록 운명지어진 것 같았던 金賢姬는 「바퀴벌레도 잡을 수 없을 여자」라는 인상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흉악범이 되어 우리 앞에 앉아 있다. 金과 재미있게 이야기 하다가 보면 이 여자가 1백15명을 죽게 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이 가질 않는다고 한다. 金도 자신의 처지를 잠시 잊고 이야기에 열중하다가 『그래도 나는 살인범인데…』하고 스스로를 점검하고는 다시 그 다소곳하게 슬픈 모습으로 돌아간다.
  
  「자애로운 수령님」과도 만나고
  
  기자는 1988년 1월15일에 KAL858기 사건의 범행전모가 발표된 직후에 한 변호사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 변호사는 『金賢姬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자는 『그것은 값싼 온정주의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 변호사는 『이 범행은 개인의 범행이 아니라 제도의 범행』이라고 했다. 기자는 『아무리 金日成. 金正日의 명령이라고 해도 누가 옆에서 권총을 들이대고 따라다니지 않았는데 그런 살육을 거부할 수 없었을까. 외국에서 여행하던 중 탈출하거나 신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金賢姬를 취재하면서 기자는 이 자유 의지의 문제를 꼭 한번 해명해 봐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작업의 순서는 金賢姬와 金日成의 관계를 푸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金賢姬는 한 살 때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쿠바의 하바나에서 5년간 생활하다가 1967년에 돌아와 유치원에 들어감으로써 비교적 늦게 金日成을 알게 되었다. 金日成 초상화를 향해서 『金日成 원수님 고맙습니다』 『아버지 원수님 고맙습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만수 무강하세요』라는 인사를 하고 金日成의 어린 시절 일화를 통해서 『옷을 깨끗이 입어야 한다』고 배우는 등 모든 교육이 金日成의 덕성에 빗대어 이루어졌다.
  
  인민학교 2학년 때 이미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 金賢姬는 북한의 큰 행사에 꽃다발을 바치는 학생으로도 자주 동원되었다. 金은 1971년 12 월31일에 평양학생 소년궁전에서 있었던 설맞이 예술공연 때, 1972년의 캄보디아 전 국왕 시아누크부처의 평양방문 때, 그 해 4월15일의 金日戚 생일 축하행차 때 동원됐다. 비록 金日成에게 직접 꽃다발을 건네지는 않았으나 가까이에서 「자애로운 수령님」을 대면하는 영광을 맛보았다. 만경대에서 있었던 金日成 생일축하 행사연단에서 金賢姬는 다른 화동(花童)들과 함께 金日成한테 달려가 옷자락을 잡고 매달려 보았다. 그것을 집안에 돌아와 자랑하기도 했다. 그때의 기분을 金은 이렇게 말했다. 『신처럼 존경하고 그리워하던 수령님을 만나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접견한 사람에게는 발전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십오성상의 간고한 항일투쟁을 통해서 일제를 때려부수고 나라를 찾아주신 수령님을 만났다는 감격으로 그저 얼떨떨했습니다』 기자가 놀란 것은 金賢姬가 북에 있을 때는 한번도 金日成을 무섭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북한의 교육·선전기관은 金日成을 「자애로운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 金賢姬는 金日成을 「인민을 위해 한 생을 바치고 계시는 인자롭고 경애하는 수령님」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金日成은 많은 북한사람들에게 위대하고 자애로운 지도자이지 무서운 독재자가 아니란 이야기다. 공포심이 아니라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金日成이란 존재이다.
  
  「당명 거부」란 단어도 없다
  
  말을 잘못했다가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지는 동급생과 이웃, 배고픔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런 오류는「인자하신 지도자」의 뜻을 제대로 실천해 주지 못한 밑의 사람들이 저지른 것이지 「수령님」의 잘못은 아니라고 金은 믿었다. 金日成은 잘못할 수 없는 신격(神格)이며, 악역을 따로 두어 金日成의 인자한 이미지를 보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金日成 우상화의 비결을 발견 할 수 있다. 金賢姬는 金日成이 해방 직전에 소련으로 달아나 소련군 장교가 돼 해방 뒤 북한으로 돌아왔고 소련군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알았다고 했다. 6·25는 「일요일에 군인들이 휴가를 나간 틈을 타서 미제 원수놈들과 그 주구인 남조선 괴뢰가 북침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굳게 믿었다. 1980년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 중 중앙당에 의해 소환되었을 때 金賢姬는 『공작원으로 뽑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당에서 저를 쓰려고 한다는 것만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당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가』란 물음에 대해서 金賢姬는 펄쩍 뛰듯 했다. 『거부 말입니까. 당의 명령을 거부… 그런 단어도 없습니다』
  
  김현희(金賢姬)가 1년간 금성정치군사대학 공작원 속성정보반 교육을 받을 때의 정치사상, 학습 과목표를 보면 13과목 중 12과목이 「김일성 혁명역사」 「김일성 저작전집 20권)」「김일성주의 철학」 등 金日成에 관한 것이다. 金賢姬는 『북한의 각급 학교에서 金日成주의 과목이 시간적으로 약 30%를 차지할 것이다』고 했다. 金賢姬는 주체사상교육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자본론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레닌 책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 헤겔의 이름만 알고. 유물론과 변증법도 그런 것이 있다는 정도로만 배웠습니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통공산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어둡습니다. 주체사상은 金日成이가 공산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시대에 맞게끔 독창적으로 창시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항일무장투쟁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검증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의 수령관에는 수령, 당, 인민을 전일체(全一體)라고 하면서도 특히 수령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수령은 「통일과 단결의 중심으로서 혁명과 건설에 관한 전술이론을 제시하여 인민을 승리로 영도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이 있어야 인민도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의심 가졌다가 스스로 삼가
  
  김현희(金賢姬)는 주체사상을 배우면서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수령님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을 갖는 것조차 불경으로 여깁니다. 「수령님을 높이 모시기 위한 4대 원칙」은 ①신격화 ②신조화 ③절대성 ④무조건성입니다. 그런데 「전세계의 김일성주의화」를 가르치는데 대해서 「그렇게 하면 전세계를 김일성주의로 지배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것과 위배되지 않느냐」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런 의심을 품는 저 자신이 두려워 기겁을 하고 그 생각을 버렸습니다. 의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나의 사상이 변질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자세습체제의 부당성에 대해서도 金賢姬는 느껴보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소련과 중공에서 스탈린과 모택동이 죽은 뒤 이념노선과 후계자 문제로 혼란이 일어난 점을 지적 주체사상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지도자가 후계자가 돼야 하는데 金正日동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논법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바깥 세계와는 완전히 봉쇄돼 있고, 조선시대-일제시대-해방 뒤를 통해서 폐쇄사회만 경험했고. 특히 집권자의 교체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 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대손손 해먹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비교적 적은 것 같습니다』는 풀이도 한다. 납치된 일본여자 리은혜로부터 일본인화 교육을 받고 있던 1982년 4월 15일의 金日成생일에 리은혜는 金賢姬와 함께 술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리은혜는 취하자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면서 그 해 2월16일 金正日의 생일파티에 초대돼 갔던 일을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이 파티에서는 참석자들이 놀이를 하면서 「진 사람을 때리기」 「진 사람은 옷 벗기」를 했다는 것이다. 최해옥이란 30대 가수는 여러 번 지는 바람에 알몸이 드러날 때까지 옷을 벗어야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金賢姬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파티에서 그런 일도 있나』하면서 의아해 했으나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이 스스로 불경스럽게 느껴져 잊어버리려 애썼다는 것이다.
  
   정치적 생명은 영원하다
  
  金賢姬는 『북학에서는 사랑 때문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의리와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수령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즉 충실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친다는 것이다. 金賢姬가 배웠고 실천한 인간으로서의 덕성은 「수령과 당에 대한 충실성, 인민과 조국에 대한 애국심, 고매한 공산주의 품성에 기초한 혁명적 사업방법과 인민적 사업작풍,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었다. 金賢姬는 『북에서는 애국가보다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더 자주 부르고, 국기보다는 金日成초상화에 더욱 지극한 경의를 표한다. 여기에 와서 남한사람들이 국기에 대해서 소중히 여기고 엄숙히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金日成 우상숭배가 극도화 됨으로써 金日成은 당과 국가보다도 위에 있는 전지전능의 존재가 돼버렸다는 얘기다. 그래서 金賢姬는 안기부의 관할 하에서 생활하면서 성경을 읽어보고는 『주체사상과 그렇게도 같다니…』하고 감탄해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성경은 읽을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힘과 용기를 주며 인생의 보람을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러나 성경에는 내세가 있고 공산주의 유물론은 내세를 부정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金은 이렇게 답했다. 『북쪽에서는, 인간에는 두 가지 생명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는 부모가 주신 육체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수령님이 주신 정치적 생명이랍니다. 육체적 생명은 죽음으로써 끝나지만 정치적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다. 노동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적 생명을 얻게 된다. 따라서 영원한 정치적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육체적 생명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영혼이란 말을 쓰지는 않지만 성경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그 쪽에서는 종교라는 소리를 들으면 저 자신부터 무시무시해지고 속이 뒤틀릴 정도로 종교를 악선전하였는데 알고 보니 같지 뭡니까』
  
   자나깨나 원수님 생각
  
  『성경에 10계명이 있는 것처럼 주체 사상에는 10대 원칙이란 것이 있어 늘 외도록 하고 있습니다. 매주 올리는 예배는 북쪽에서 하는 주간생활총화, 즉 자아비판과 매우 비슷합니다. 지난 한 주의 생활에서 잘못한 것을 金日成 교시에 비추어 비판을 합니다. 자기가 소속된 당세포, 사로청, 소년단 등등의 조직별로 이루어지는데 저는 혼자 밀봉교육을 받으면서도 지도원 앞에서 1인 자아 비판을 했습니다. 자아 비판의 끝에 가서는 호상비판을 하며, 결함이 큰 사람은 사상투쟁이라 하여 모든 조직원들로부터 집중적인 성토를 당한 뒤 벌을 받게 됩니다. 성령, 성자, 성부의 삼위 일체와 당, 인민, 수령의 전일체도 비슷하고 金日成의 무오류성은 하느님의 전지전능과 같습니다. 金賢姬는 1986년 11월 마카오에서 공작원 실습을 하고 있을 때 金日成 사망설을 텔리비전 뉴스로 들었다고 한다. 『그럴수가 없다』는 의심이 먼저 들었지만 『원수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는 것이다.
  
  『자나깨나 원수님 생각이기 때문에 金日成이가 있으므로 오늘의 우리 행복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金日成이의 죽음에 대해서 외국인이 이야기를 꺼내면 화를 낸답니다. 金日成 사망설이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무리 심리전이라 해도 감히 金日成의 죽음을 그 수단으로 삼을 사람이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최근에는 金日成 사망설의 근거가 된 북한 군부대의 방송을 우리쪽이 잘못 들은 것이라는 데 북한 문제 전문가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는 새한 마리도 의미 없이 죽게 하지는 않는다는 구절을 보고서 저의 기구한 생애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제가 독약을 깨물고 죽었는데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金賢姬는 다시 얻은 생명으로써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겠다』는 다소 거창한 포부를 밝히곤 한다. 『여기 와서 보니 북쪽을 너무 모르더군요. 저는 북쪽의 진실을 알리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북쪽의 진실을 알아야 올바른 대책을 세울 것이고. 그래야 통일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남한에서도 金日成 흠모」라고
  
  金賢姬는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평양시 용성구역에 있는 남조선 혁명 사적관을 몇 번 구경했다고 한다. 이 사적관은 일반인용이 아니라 대남공작원을 위해서 활용되고 있다. 통일혁명 당을 조직하려다가 잡혀서 죽은 김종태의 기념실이 있고 남쪽에서 金日成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존경과 흠모의 정으로서 한 뜸 한 뜸 수놓아 쪽배 타고 사선을 넘어서 갖다 바쳤다」는 축기(祝旗)도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金賢姬는 『남조선에도 金日成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통일혁명당 목소리 방송이 남한에 있다고 믿어 『과연 남한의 혁명기운이 조성되고 있구나. 얼마나 세력이 크면 비밀 방송국까지 운영할까』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텔리비전에 남한의 시위 장면이 많이 나왔습니다. 저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자유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고 얼마나 압제가 심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저렇게 투쟁할까란 생각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쪽에서 어떻게 살았나 하지만 그때는 완전히 외부세계와 차단된 속에서 어떤 비교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의심, 비판, 분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金日成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인생인데도 어떤 것이 자유인 줄 모르고 당에서 선전하는 대로 일제시대보다 잘 사니까 행복하다고 믿었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金日成 유일체제 때문에 창발심과 탐구력이 억제되고 있습니다』
  
  金賢姬가 배운 金日成덕성자료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金日成이 지방시찰을 가는데 한 소년이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병원에 있는 동생을 위문 간다』는 것이었다. 金日成은 차에서 내리고 그 차에 소년을 태워 보냈고 차가 돌아올 때까지 길에 서서 기다렸다는 것이다. 안기부 수사관이 『차에 같이 타고 가면 될텐데 왜 내려서 기다렸을까?』하고 지적했다. 金賢姬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런 데까지는 생각이 가지 못했습니다』고 했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6: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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