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말한다(상) - 5백일에 걸친 김현희 증언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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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은혜 미스터리
  
  金賢姬를 가르친 리은혜의 실체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978∼79년쯤 일본에서 납치돼 온 일본인 여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에서도 인정하고 있으나 몽타즈 수배를 해도 리은혜를 안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金賢姬는 리은혜에 대한 기억을 상세히 진술하였다. 일본 경찰은 수사팀을 한국에 보내 金을 몇 차례 만나게 하여 리은혜가 납치된 일본여자라는 심증을 굳혔다. 일본 경찰은 우리 당국이 그려준 리은혜의 몽타즈로써 전단을 몇백만 장 만들어 전국에 뿌렸었다. 리은혜는 북한에서 지어준 가명이고 일본에서의 본명은 알 수 없다. 金에 따르면 리은혜는 현재 32세 가량인데 도쿄출신의 이혼녀로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와 공작원 교육기관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키 1백65cm, 몸무게 56kg가량인 리은혜는 술을 자주 마시고 술을 따르는 데 익숙해 있어 일본에서 그런 업소에 종사한 경험이 있지 않나 추정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리은혜가 재일동포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기되었다. 金賢姬가 기억하는 리은혜의 행동 양식은 전형적인 일본여성의 그것이다. 예컨대 밥은 공기를 들고 젓가락만을 사용하여 먹고, 『조선사람은 식후에 입가심을 한 물을 마신다』고 흉을 보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어릴 때 조선 여자아이가 입고 다니는 치마 저고리를 입고싶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그런 것은 조선여자가 입는 것인데…』 하면서 화를 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는 것이다. 리은혜는 1982년 2월의 어느 날 취중에 이런 푸념도 하더라는 것이다. 『김정일동지의 생일(2월16일) 만찬에 일본인 여자로서 특별히 초대되어 갔었다. 나처럼 납치돼 온 것 같은 일본인 부부를 만났는데 이 사퓽?절대로 알려선 안된다』 리은혜는 술에 취하면 멍하니 앉아서 끌려 온 탉셔막?하며 자식들이 보고싶고 일본에 가고 싶다면서 울기를 잘 했다고도 한다. 한 일본인기자는 『리은혜가 스스로 한국인임을 숨기려는 일본인으로 귀화한 한국인의 집안에서 자란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공개 수배를 해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북한측이 이미 연고자들에게 협박을 해둔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1985년 6월에 안기부가 붙든 북한의 간첩 신광수(辛光洙)는 1980년 6월에 조총련 실업인이 경영하는 중국 음식점의 독신요리사 하라다다아키(당시 49세)를 미야자키 해안으로 유인, 북한공작원과 함께 납치, 자루에 넣어 선편으로 북한으로 싣고 갔었다고 자백했었다. 辛은 하라다다아키의 이름으로 위조여권을 만들어 일본 안에서 하라다다아키행세를 하면서 간첩활동을 했었다. 북한공작기관에 의한 일본인납치가 확실한데도 일본경찰에서는 북한과의 관계와 한국으로부터의 정보제공에 의해 수사를 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자체적인 수사를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 측의 시각이다.
  
   노동당에 입당하다
  
  일본인화교육을 받고 있던 1982년 3월 중순부터 약40일간 김현희(金賢姬)는 동북리2층3호 초대소에서 동북리10호 초대소로 옮겨, 수용된다. 왜 갑자기 숙소를 옮겼는가. 안기부는 북한의 거물간첩 신광수(辛光洙)(59)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그가 1982년 3월에 일단 북한으로 소환돼 평양의 동북리초대소에서 3개월간 사상무장 재교육을 받았다는 진술을 받았다. 辛이 이때 머문 초대소는 金賢姬가 밀봉교육을 받고 있던 동북리 2층3호 초대소였다. 즉, 金賢姬는 辛에게 자기 방을 빌어주고 잠시 숙소를 옮긴 것이었다. 金과 辛의 진술이 일치한 것은 金賢姬가 진술한 내용이 아주 정확하며 金의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1982년 4월13일 金賢姬는 노동당에 입당한다. 이때의 선서문을 金賢姬는 기억을 되살려 신문관에게 정확히 진술하였다.
  
  「경애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의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손수 창건하시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향도 발전시키는 조선노동당에 당원으로 입당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높은 긍지를 가지고 당과 수령님을 위해 생명을 다 바쳐 당의 명예를 지키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합니다」
  
  입단보증인은 담당과장 오세영, 지도원 리명길로 돼 있었다고 한다. 입당한 지 이틀 뒤인 4월15일에 金賢姬는 리명길 지도원의 리드에 의해 학습실 벽에 붙어 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향해 선서식을 가졌다. 이 선서문의 내용도 金賢姬는 안기부의 신문때 정확히 기억하였고, 1심 재판 때도 또박또박 진술했었다. 이 선서문은 노동당원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므로 소개한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 끝없이 충성을 다하는 『김일성 주의자』 『주체형의 공산주의 혁명가』가 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엄숙히 선서합니다.
  첫째.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높이 우러러 모시고 따르며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사상과 교시 방침을 신조화 하겠다.
  둘째,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말씀을 곧 법으로서, 지상의 명령으로 여기고 무조건 관철하겠다.
  셋째,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보장하고 그를 훼손시키는 현상을 반대하여 투쟁하겠다.
  네째, 우리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공산주의 혁명정신을 가지고 서로 돕고 이끌면서 집단주의 정신을 배양하겠다.
  다섯째, 우리는 노동에 성실히 참여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혁명적 조직생활에 성실히 참가하겠다.
  여섯째. 우리는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철저히 확립하여 전당·전민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강철같은 규율을 확립하겠다.
  일곱째,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고매한 공산주의 도덕품성을 따라 배워 언제나 겸손하고 소박하며 가장 높은 인간성을 지닌 공산주의자가 되겠다.
  여덟째, 우리는 당의 유일 사상체계와 어긋나는 온갖 반당 반혁명적 요소들을 반대하여 비타협적으로 투쟁하겠다.
  아홉째, 우리는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 부분에 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교시와 말씀을 높이 받들고, 수령님의 사상과 이론으로 조국을 통일하는 길에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라는 혁명적 신념을 가지고 생명을 다 바쳐 끝까지 투쟁하겠다. 열째,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김일성주의화를 위하여 전세계 혁명적인 인민들과 피압박 인민들을 비롯한 혁명적 역량을 굳게 묶어 세워 지구상에서 제국주의 지배주의를 반대해서 견결히 투쟁하겠다」
  
   김승일(金勝一), 서울에 잠입하다
  
  공작원 실무교육 : ( 1983·3∼1984·7) 1983년 3월 중순에 김현희(金賢姬)는 리은혜와 헤어진다. 金은 별달리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던 듯하다. 金은 리은혜의 행동거지가 천박하다고 생각했음인지 깊은 정을 나누지는 않았던 것 같다. 金은 평양시 용성구역 용궁동 소재 용성40호 초대소로 옮겨 밀봉 수용된다. 이모(50세 가량) 지도원의 지도에 따라 간첩 실무교육을 받는다. 첩보영화나 첩보소설들을 많이 보고 읽었다. 미국영화 「나바론 요새」도 한 교재였다. 간첩들이 사용하는 A-2통신법, 산악행군, 격술, 수영 등의 훈련도 받았다. 이런 교육기간에서도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金日成사상 주입이었다. 세뇌관광코스도 金日成생가, 金正日의 야영지 등 우상화 코스였다.
  
  해외실습 : (1984·8∼10월) 84년7월초순 金賢姬는 교육을 받은 지 5년만에 처음으로 실제 임무를 받는다. 金勝一 이란 70세 가량의 노인과 한 조가 돼 해외여행과 남한침투실습을 하게 됐었다. 이 여행에서 金賢姬와 金勝一 은 일본부녀로 행세하였다. 金勝一은 하찌야 신이찌, 金賢姬는 하찌야 마유미였다. 아버지 신이찌는 오오이 운수주식회사의 부사장이며. 어머니 다마에는 7∼8년 전 사망했다. 현주소지는 도쿄 시부야구 에비수이며, 전에 살던 곳은 이다바시구다. 마유미는 2년제인 아오야마 여자단기대학 가정과를 졸업했고, 네살 위인 언니가 한 사람 있다는 기초지식을 익혔다.
  
  1984년 8월15일 두 위장 일본인 부녀관광객은 장(張)지도원과 함께 평양 순안 비행장을 출발하였다. 이 3명은 모스크바→부다페스트(헝가리)→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여행하였다. 오스트리아에 입국할 때까지는 북한의 공무여권을 사용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이 공무여권을 張모지도원에게 반납하고 신이찌와 마유미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받았다. 이 위조여권은 자본주의국가를 여행할 때 쓰도록 돼 있었다.
  
   김승일(金勝一)의 한국내 행적
  
  세사람은 빈→코펜하겐→프랑크푸르트까지 여행하였다. 여기서 인솔자인 張 지도원은 마카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두 사람과 헤어졌다. 金勝一, 金賢姬 두 사랑은 츄리히→제네바→파리까지 여행하였다. 金勝一은 이미 여러 차례의 해외여행 경험이 있었다. 그는 앞으로 국제여자공작원이 될 金賢姬를 데리고 다니며 자본주의 사회와 생활을 견학시켰다. 두 사람은 9월 20일 파리의 드골공항에서 다시 헤어졌다. 金勝一은 서울로 갔고, 金賢姬는 방콕→흥콩→마카오로 갔다. 金勝一은 일본에서 바로 서울로 들어가면 김포공항에서 검색·검문이 엄할 것으로 판단하고, 유럽관광여행 끝에 귀로에 서울에 들른 일본관광객으로 행세, 공항의 엄격한 검색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張지도원과 金勝一, 金賢姬 세 사람은 9월26일에 마카오에서 합류한다. 이때 金勝一은 서울에 잠입했던 결과를 차중에서 張지도원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옆에서 들었던 金賢姬는 나중에 안기부의 신문을 받으면서 그 내용을 진술하였다. 이것을 실마리로 잡고 보강수사를 벌인 안기부 수사단은 金勝一의 한국내 행적을 이렇게 밝혀냈다.
  
  金勝一은 드골공항에서 9월20일 오후2시15분발 대한항공 906편을 타고 21일 오후4시10 분에 김포공항에 내렸다. 그는 서울중구을지로 1가 프레지던트호텔 2502호실에 하찌야 신이찌의 이름으로 투숙하였음이 숙박부에서 밝혀졌다. 이 호텔에서 1박한 뒤 金의 행방은 묘연하다가 9월 26일 오전 11시에 홍콩행 태국항공기 (CX421)편으로 출국하였음이 출입국관리기록으로 확인되었다. 그 사이 6일간 무엇을 했는지는 金勝一 이 마카오에 돌아와 張지도원에게 보고한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서울로 만나러 갔던 대상자는 서울에 살면서 대구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는 사실이 확인되어 그 곳에 찾아갔으나,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안되어 접선하지 못하고 그 대로 왔습니다. 9월 24일 대구에 내려갔을 때 마침 그날 우리 공작원 한 사람이 대구의 미장원에서 자살한 사건이 터져 대구일원에 드나드는 사람과 모든 차량을 일일이 검문하는 바람에 혼이 났었습니다』
  
  『정을 뗄 때가 왔다』
  
  김승일(金勝一)과 김현희(金賢姬)는 마카오에서 중국 광주로 넘어갔다. 이때는 다시 북한의 공무여권을 사용하였다. 광주→북경→평양으로 복귀했다. 金勝一, 金賢姬는 이 해외여행의 비용으로 3만 3천달러를 썼었다. 두 사람은 상관들에게 줄 선물로서 양복지 네벌, 여자 옷감 네벌, 파카 만년필 3개, 가스라이터 10개, 볼펜 10갑을 샀다고 한다. 10월2일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최(崔)과장은 金賢姬에게 『자본주의 국가에서 보고들은 것들중 좋은 이야기를 하면 곤란해진다』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金賢姬는 총화보고서에서 「평소 교육받은 대로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라는 인식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었다」고 썼다. 金賢姬는 金勝一과 함께 1985년 연말까지 동북리 2층2호 초대소에서 해외여행 실습과정에서 해이된 사상을 재무장하기 위한 정치사상 학습을 받았다. 金賢姬는 1985년 1월∼2일은 평양시 문수구역 문수동 65반 무역부 아파트 7층1호의 집으로 휴가를 가 가족과 함께 이틀을 보냈다. 金은 8년간의 교육 기간중 네번의 짧은 휴가를 얻었을 뿐이다.
  
  중국인화교육 : (1985·1∼6 월 중순)용성 5호 초대소에 밀봉수용 된 金賢姬는 헤어졌던 김숙희와 다시 「배합되어」 중국어담당교원 표모(63세)의 지도로 중국어와 중국의 문화·풍습을 배웠다.
  
  중국실습 : (1985·7∼86·8월) 중국의 광주에 주재하는 공작지도원 박창해(47세)의 아파트로 보내어진 金賢姬와 김숙희는 현지실습교육을 받으면서 북경어뿐 아니라 광동어도 배웠다. 두 사람은 삼촌집에 놀러온 조카의 행세를 하였다. 金賢姬, 김숙희는 평양중앙방송을 통해서 발신되는 간첩과의 연락방송을 듣고, 암호를 해독하는 실습도 하였다. 광주생활중 두 북한 처녀는 어느 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종업원이 처음에는 남한에서 온 사람으로 알아보고 친절하게 대하더란 것이다. 나중에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니까 그 종업원은 갑자기 냉냉한 표정이 되어 선불을 요구하여 말다툼까지 벌였다는 것이다.
  
  마카오 실습 : (1986·8∼87·1월) 金賢姬와 김숙희는 광주에서 마카오로 건너가 명주대 아파트 1동3층A호실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공작비로 4천 달러를 받았다. 여권은 金賢姬가 하찌야 마유미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김숙희는 다카하시 게이코란 이름의 위조여권을 이용했다. 두 사람은 마카오와 홍콩당국이 쓰는 입 출국고무도장을 위조한 것을 지급받았다. 마카오에서 두 사람은 평양 중앙방송을 통한 지령수신 및 암호 해독법을 실습하였고, 미용실·은행·영화관·택시·환전소 등등 자본주의 편의시설의 이용법을 익혔다고 한다.
  
  재무장교육 : (1987·2∼9월) 87년 1월에 평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용성43호 공작원 초대소에서 사상재무장교육을 받았다. 이해 金日成생일(4월15일)을 맞아 金賢姬는 집으로 휴가를 갔다. 金은 휴가 중 신혼생활중인 대학교 동창생 집에 놀러갔었다. 그 친구는 김책공대를 졸업한 남자와 결혼, 다른 신혼부부와 한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방 가운데 커튼 같은 것으로 칸막이를 해놓고 있더라는 것이다. 친구는 『부엌을 먼저 쓰려고 저 집과 다투기도 한다』면서 『차라리 이혼하고 싶다」고 불평하였다. 金賢姬는 『나는 시집 안 갈래…』라고 했다는 것이다.
  
  金賢姬가족이 살았던 방은 아파트 7층의 1호실이었다. 방2개에 화장실이 붙은 13평짜리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였다. 아침 점심 저녁 전후에 2∼3시간씩 제한급수를 받았다. 평양의 외곽지역에서는 1일에 3∼5시간씩 송전이 중단된다고 한다. 주택사정에 대해서 金賢姬는 이렇게 말했다. 「직장에서 가족 수 등을 고려하여 직장에 할당된 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 『입사증(0아파트 0층 0호)』을 받지만 주택 공급사정이 나빠 결혼 후에 바로 주택배정을 받기가 힘들다. 보통 한 가족 당 방이 1∼2개인데 결혼한 자녀가 주택공급을 받지 못하면 결혼 한 자녀에게 방 1칸을 내주고 남은 방1칸에서 나머지 가족이 같이 동거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 후에도 주택공급을 받을 때까지 당분간 부부가 떨어져 사는 경우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부부와 자녀들이 떨어져 살기도 한다. 방이 다소 여유가 있을 때는 당에서 다른 세대와 동거할 것을 지시한다」
  
  이틀 쉬고 金賢姬가 초대소로 돌아오는데 지도원이 데리러 왔다. 마침 그때 金의 아버지 金원석은 앙골라주 재 북한 대사관 수산대표로 일하던 중 일시 휴가를 얻어 귀국해 있는 중이었다. 金원석은 술에 취한 채 지도원을 붙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우리 딸을 언제 돌려보내 주려고 합니까. 언제나 결혼을 시킬 수 있을 까요』 金賢姬가 초대소로 돌아갈 때 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려도 아버지는 외면하는 것이었다. 초대소로 돌아온 金은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초대소 식모에게 눈감아 달라고 부탁한 뒤 몰래 외출하여(이것을 「자유주의」라고 한다) 다시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이미 앙골라로 귀임 한 뒤였다. 金은 어머니에게 따져 물었더니 어머니는 『이제 너와의 정을 떼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그러신 것이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그 몇 달 뒤 金賢姬의 남동생(13세)이 피부암으로 죽었다. 金은 뒤에 소식만 들었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마카오로 가라!
  
  마카오 파견 : (1987·9∼10)1987년 9월20일 金賢姬, 金숙희 두 사람에게 중요한 지시가 떨어졌다. 李모 지도원은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최근 마카오 이민국에서는 대륙에서 밀입국한 난민들에게 곧 신분증(영주증)을 발급해줄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동무들은 마카오 신분증을 얻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대기하도록 한다. 마카오 신분증에는 중국인으로 등록해야 하므로 각자 사용할 가명과 신원을 알려주겠다. 옥화(김현희) 동무는 우잉(吳英)이라는 가명으로 행세한다. 우잉은 현존하는 사람인데 오상시에 살고 있고 나이는 29세이며. 흑룡강성 오상현 오상시 성진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공사에서 당서기로 일하다가 문화혁명시기에 반동 분자로 몰려 끌려 다니다가 풀려났는데 우잉이 5세 되던 해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이렇게 알고 구체적인 성장 과정과 학·경력 등을 구상하여 제출하라』 이때 구상한 시나리오는 金이 폭파 사건 뒤 바레인과 한국에서 조사를 받을 때 거짓진술을 하는데 이용되었다.
  
  金賢姬와 김숙희는 87년 9월22일 광주에 도착 2년 전에 함께 머물렀던 북한공작원 아지트(아파트)에서 대기에 들어갔다. 북한의 대남 우회공작을 맡고 있는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는 두 처녀가 마카오 영주권을 얻어 마카오사람 행세를 함으로써 자유롭게 또 합법적으로 한국을 드나들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기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제3국인이 돼 한국을 드나들고 있는 북한공작원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제3국 경유방식의 대남 침투는 개방화시대에서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공작인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7: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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