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말한다(상) - 5백일에 걸친 김현희 증언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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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金賢姬)는 말한다(上)
  
  5백일에 걸친 김현희(金賢姬) 증언의 최초공개
  
  냉혈 테러리스트의 탄생에서 인간회복으로 金日成의 굴레에서 해방될 때까지 국제공작원 金賢姬가 살아온 세뇌·음모·음독·전향의 파란만장한 인간드라마
  
  <1989년 5월 월간조선>
  
   제1장 테러리스트의 탄생
  
  지옥도와 같았을 최후의 장면
  
  1백 15 명이 죽은 KAL 858기 폭파는 그 참담함의 실감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희한한 사건이다. 폭파현장은 한국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버마 남쪽 공해 상공 약 11km 하늘에서 공중분해 될 때의 상황을 우리는 상상으로만 알뿐이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껴지는 참상이 아니라 머리로 분석되는 현장이기에 실감이 덜한 것이다. KAL858기 (보잉707)에서 폭발했던 양과 같은 양(3백50g)의 콤포지션-4(C-4) 폭파력 시험장면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본 적이 있었다. 직사각형의 쇠 상자 뚜껑 안쪽에 밀가루 반죽 덩어리 같은 C-4를 부착시켰다. 약2백m 떨어진 토치카에서 원격조종으로 단추를 눌렀다. 굉음과 함께 쇠 상자는 분해되면서 날아갔다. 파편은 2백m나 떨어진 토치카 창의 앞까지 날아와 실험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회수된 두께 1cm의 철판(뚜껑부분)은 종잇장처럼 찢어져 있었다. 보잉707기의 동체외판은 몇 mm정도이고, 철판보다 훨씬 약한 알루미늄 합금이다. 앞자리 선반 위에서 C-4폭약이 들어있는 라디오 시한폭탄과 그 옆에 있던 액체용 폭탄이 동시에 터졌으니 보잉707은 동체가 부러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기체가 터지면서 일시적으로 기내는 급격한 기압감소로 인해 자욱한 안개로 덮였을 것이다. 승객들은 수초내지 수십초간의 의식으로 지옥과도 같은 장면을 마지막으로 망막에 담았을 것이다. 조종榮?비상사태가 나면 습관적으로 머리에 쓰고 있는 송수신기를 작동시키고 峨憑鑽?보고를 한다. 이 행동에는 1∼2초가 걸릴 뿐이다. 소련요격기의 미사일을 맞은 KAL007의 조종사도 10여초간 알아듣기 힘든 비상사태 보고를 했었다. KAL858기 조종사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공중 폭파된 비행기에서 구조신호가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기내상황은 KAL007 사건 때보다도 더욱 처참했다는 얘기다.
  
  폭파순간에는 급격한 감압, 그 직후에는 엄청난 압력증가가 나타난다. 감압 상황에서는 머리에 있던 피가 사지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고 압력이 증가하면 피가 머리로 몰려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런 순간적 압력변화로 대부분의 승객은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기체는 화염에 휩싸여 동강난 채 떨어지고 기체에 있던 물건과 사람들은 섭씨 영하 50∼60도의 고공으로 흩뿌려졌을 것이다. 버마 서해안에서 발견된 구명보트 등 KAL858기의 잔해들은 엄청난 압력을 받은 흔적들을 보여주었다. 구명보트에 실린 공기압축펌프의 고무손잡이는 그슬려 있었고 강철 피스톤은 40도쯤 휘어져 있었다. 이런 압력과 고열을 1백15명의 인간들은 그 연약한 육체로써 감당하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 산화해 버린 것이었다.
  
  그 주검들 가운데 한 사汰?고 이사성(李師成)씨(당시 39세·대우개발 차장)의 친구들은 지난해 7월에 추모문집을 냈다. 李씨와 미망인 서정옥(徐貞玉)씨 사이에 오고간 편지와 친구들의 글들로 꾸며진 이 책의 제목은 「옥가락지 둥글 듯이」. 「옥가락지 둥글듯이/옥가락지 둥글듯이/우리 사랑 끝이 없어라」로 시작되는 부인 徐씨의 추모시에서 딴 제목이다. 「당신의 목소리가 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올 것만 같고, 새벽의 늦은 귀가처럼 선뜻 내 옆자리에서 날 안아줄 것만 같은 무수한 착각 속에 일어나 앉아보면, 사진만이 나의 눈물 맺힌 동공 속에 클로즈업되어…」 「사(師)야! 이 아비 불유부덕(不有不德)하여 부모에게 자식 노릇 못하고, 너희들에게 아비구실 못했으니 좀더 살자니 세상사람 부끄럽고 지하에 가자니 부모님께 죄로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허둥대는 것이 오늘의 내 꼴이다. …저 젊디 젊은 김현희(金賢姬)가 아무리 양심적 고백을 한들 전세계의 여론이 물끓듯 북괴를 규탄한들 우리들의 크나큰 슬픔에 무슨 손익이 있겠나?」
  
   인간의 악마성과 분단의 비극
  
  이 추모문집을 만드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은 李씨와 고등학교(부산고교) 대학교(서울법대) 동창이었던 안경환(安京煥)교수(서울법대)였다. 安교수로부터 이 책을 전달받아 읽어가면서 기자는 처음으로 KAL858사건의 비극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찢기고 그슬린 시체들이 발견되었다면 더욱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을 터인데, 시체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아 아직도 어느 유족은 『밤중에 전화벨이 울리면 금방이라도 딸이 「아빠. 저에요」할 것 같아 얼른 전화기를 든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유족은 KAL858기가 버마 정글속에 동체 착륙하여, 자신의 남편이 어느 부족의 포로가 돼 있을 것이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KAL858기 폭파사건의 비극성이 제대로 실감되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것이 정치의 소용돌이로 말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건이 난 날은 대통령선거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7년 11월29일이었다. 이날 여의도에선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대규모 집회를 가졌었다. KAL858사건은 신문 지면과 텔리비전 화면에서 이 대군중의 열기를 냉각시켰고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후보를 유리하게 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권 교체를 바라던 약60%의 한국인에게는 KAK858기 사건이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다. 1988년 1월15일 김현희(金賢姬)라는 아리따운 처녀가 범인으로 등장하자 이번에는 金의 미모가 시중의 화제로 올랐고 『살려야 한다』 『죽여야 한다』는 논쟁 속에서 이 사건의 본질은 또다시 왜곡되고 말았다. 더구나 북한측이 金賢姬를 한국공안기관이 조작한 범인이라고 일대 선전전을 전개하고 북한 선전자료를 그대로 베낀 문서가 국내에 돌아다니면서 이 사건의 본질은 또 한번 흐려지게 되었다. 진실은 정치나 선전의 도마 위에 올라갈 때 해체돼 버리는 것이다.
  
  KAL858기 사건에 신경이 무디어진 기자에게 「옥가락지 둥글듯이」는 충격이었다. 이 세상보다도 무겁다는 생명이 1백15명분이나 처참하게 사라졌다는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고 그 범인이 동족이며. 죽은이들은 이역만리에서 몇 년간 고생한 끝에 드디어 그리운 가정으로 돌아가던 노동자였다는 것, 그 유족들 중 일부는 金賢姬를 조작된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 이런 사실들은 인간의 악마성과 분단의 비극을 다같이 보여주고 있다. 金賢姬는 1백15명의 생명을 허공에서 흩날려 버리는 결심을 했을 때의 상황을 안기부수사관과 이번 1심 재판부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었다.
  
  『바그다드 출발 KAL858기에 올라 김승일이 폭파용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폭약이 들어있는 비닐쇼핑 백을 좌석 위 선반에 올려놓는 것을 린?사업결과 총화시 보고할 목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탑승객은 1백여명 정도 되는데 거의가 중동근로자들로서, 중동에서 일하기가 힘들다면서 소속회사에 대한 불만을 많이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귀국하는 것이 좋은지 즐거워 하다가 기내식이 끝난 뒤에는 거의가 잠에 들었습니다. 아부다비에 도착하여 내릴 때, 이 근로자들이 죽을 것을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양심의 가책이 왔습니다만 김일성이 지시한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마음먹고 내렸습니다』
  
   연구대상 김현희(金賢姬)
  
  양심이 마비된 이러한 인간폭탄 金賢姬는 연구대상이다. 이 金賢姬를 취재함에 있어서 기자 가 다음과 같을 전제를 밝히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金賢姬는 과연 범인인가? 「이수근(李 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쓴 의심 많은 기자의 눈에도 金賢姬는 확실한 범인으로 비친다. 북한측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하는 일은 정부의 일로 돌려놓자. 간단하게 북한측 선전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북한의 방송·신문은 지금까지 한번도 북한 사람들에게 金賢姬란 이름과 그 가족상황 학교관계를 알린 일이 없다. 金賢姬를 마유미라고 계속 부르고 있다. 북한의 중앙조선통신사는 88년 1월 15일자 성명에서 「마유미라는 여자를 우리와 관련시키기 위하여 학력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으나 그가 다녔다는 평양의 인민학교나 중학교 대학에는 그런 학력을 가진 여학생이 없으며. 그가 특수훈련을 받았다는 그런 이름을 가진 대학이나 양성소도 없다」고 주장했다.
  
  고유명사 대신에 「그런」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인민학교가 아니라 「평양시 서성구역 하신동 소재 하신인민학교」라고 그런 대학이 아니라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라고 밝힐 자신이 없는 것이다. 북한 주장대로 金賢姬가 남한에서 조작한 범인이라면 金은 남한사람이 아니면 넓게 잡아서 일본인이나 중국인이어야 한다. 金의 얼굴이 세계의 텔리비전 화면과 지면을 뒤덮은 지 1년이 지나도록 『그 아이와 같이 지냈다』 『그 아이는 내 딸이다』는 신고는 한 건도 없다. 金賢姬를 26년간 밀폐되고 격리된 공간에서 사육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대명천지에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북한측이 제기한 의문점은 다 지엽적인 오해의 소지를 확대한 것을 뿐이다. 金賢姬가 바로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물증 그 자체이다.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마땅할 金賢姬를 살려 놓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된 것도 金이 살아 있어야 KAL858 사건의 진실을 북한에 빼앗기지 않는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金賢姬는 1962년 1월 27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에서 났다. 아버지 김원석(金元錫)(59세)은 그때 정무원 외교부 지도원이었고 어머니 임(林)명식(55)은 개성 만월 중학교 역사교사를 하다가 결혼한 예절바른 여자였다. 金賢姬는 2남2녀 중 장녀이다. 金賢姬는 어릴 때 사주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에 이름을 떨칠 여자다」는 성명풀이였다. 최근 金은 『이런 식으로 이름을 떨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고 푸념하더란 것이다.
  
   이름을 떨칠 운명의 아이
  
  金賢姬는 자기 성의 본을 모른다. 『무슨 주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는 것으로 봐 경주 金씨인 듯하다. 북한에서는 호적을 없애고 한글 이름만 쓰므로 한자로 표기할 줄 모르는 젊은이가 대다수라고 한다. 金賢姬는 태어난 다음해(1963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 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하바타시로 가 67년까지 살았다. 1968년 9월 金은 평양의 하신인민학교에 들어갔다. 3학년 때 선전영화 「사회주의 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에 아역 배우로 출연하였다. 아버지는 영화배우가 되려는데 반대하였다고 한다. 金은 안기부에서 인민학교의 실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실수가 부족하여 2부제 수업을 실시하고 있는데 1부 수업반은 오전 8시-오후1시까지, 2부 수업반은 오후2시-오후7시까지다. 수업시간 이외에는 소년단 활동 소조활동과 각종 작업에 노력동원 되기도 한다.
  
  매 학년은 9월에 시작하여 8월에 끝나고, 입학시 편성된 학급 및 담임교사는 졸업시까지 바뀌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인민학교 2학년때 의무적으로 소년단에 가입하는데 주로 4·15 명절(김일성 생일), 6·6(소년단 창립일), 9·9절(정권 창건일)등 주요행사시에 가입을 시킨다. 유치원에서부터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심, 주체사상, 유일사상, 혁명전통, 계급교양 등 김부자 우상화 및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사상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과목 중 가장 중요시되는 혁명역사는 전부 김일성, 김정일에 관한 내용이다. 항일투쟁 역사도 3·1운동 만세는 김일성이 일곱 살 때 처음으로 불렀다는 식으로 가르치므로 나는 독립 선언서나 유관순 등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1972년 8월 金은 인민학교 4학년을 졸업한 뒤 평양의 중신중학교에 들어갔다. 1학년 때 「딸의 심정」이란 영화에 출연했다. 그 해 11월2일 평양시 근교 헬리콥터장에서 제2차 남북조절위 평양회담에 참석하러 온 한국측 대표단의 장기영(張基榮)씨에게 꽃다발을 전달하였다. 이 사진은 지난해 1월15일 안기부발표 때 공개된 적이 있다. 일부 언론사에선 안기부 제공사진 이외에 자기 회사에서 보관중이던 사진 가운데서 비슷한 것을 골라 썼는데 진짜 金賢姬의 사진이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언론사가 자체적으로 추정하여 쓴 사진을 문제삼아 그 화동(花童)은 金이 아니라는 선전을 한 바 있다. 金은 중학교 1학년때 같은반 친구의 부모가 남한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친구는 독재대상구역으로 보내진 사실에 대해서 진술한 바 있다. 그 친구의 동생이 아버지를 고발했다는 것이다. 독재대상구역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장소로서 약 10만 명이 이런 곳에서 자급자족의 농민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중학교 과정에 대한 김현희(金賢姬)의 진술은 이러했다. 「또한 2-3학년시 상용한자를 가르치는데 그 동안 한글전용이 언어의 민족주체성 회복이라고 선전해 왔으나 한자성 단어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력이 뒤지자 할 수 없이 남조선이 한자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통일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기본한문교육을 시키고 있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인민학교 학생들이 『고향의 봄』 『반달』 등 일부 정서적인 동요도 불렀으나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정서적 동요가 『사상성』이나 『혁명성』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금지시키고 혁명성 고취 가요나 김일성 김정일 찬양가요만 부르게 하고 있다」 1977년 8월 金賢姬는 중신중학교 5학년을 졸업,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 예과 1년을 수료한 뒤 1978년 9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金은 평양 외국어대학 1년 재학시 같은 과 여학생 4명과 함께 평양근처의 심신탄광에 노력동원되어, 갱안에 들어가서는 소변도 바로 옆자리에서 봐야 하고 식사도 갱안에서 해야 하는 등 불편이 많았다.
  
  「대학생 군사교육은 남녀 전대학생이 대학생활중 의무적으로 6개월간 교도대에 입대, 현지 군부대에 파견되어 군사이론·실기·붉은기쟁취운동 등 군사교육을 이수하여야 한다. 『나는 김일성대 예과 입학 후 다섯달 간 교도대에 입대하여 평양시 용성구역 중이리 소재 85 mm 고사포 부대의 지휘소대 정찰분대에 배치되어 방공 정찰 훈련을 받았다. 교도대 이수 대학생에게는 소위자격을 준다. 대학생들은 『평양 하늘은 대학생들이 보위한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사전이 희귀하여 나의 경우 초대소 생활시 한일사전·한영사전은 남한에서 출판된 것을 사용하였고, 타자기는 87년 노동신문에서 한글타자기가 생산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으나 한글타자기를 직접 보았거나 사용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공작원으로 소환되다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80년 3월 金은 3차의 면접시험을 거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공작원으로 소환된다. 김현희(金賢姬)는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심청이를 보내는 심정이다』고 푸념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4월8일에 그는 묘향산 골짜기 2지구2호 초대소에 밀봉 수용되었다. 김숙희(본명 김순애·26세)란 여자공작원과 한 조가 돼 금성정치군사대학 공작원 속성 정보반에 입학했다. 金賢姬는 이때부터 김옥화라는 가명을 쓰게 되었다. 金賢姬는 87년 12월23일에 서울 안기부 조사실에서 자백을 시작할 때까지 약 8년간 그의 본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金은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1981년 4월17일까지 기초적인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정치사상학습(주로 김일성 사상 공부), 실무학습(사격, 지형학, 행군, 수영 등), 영화를 통한 세뇌교육을 받았다.
  
  金은 1년 과정을 마친 뒤부터는 남한실정교육, 일본인화교육, 해외실습, 중국인화교육, 유럽·중국·마카오 현지 실습 등 단계적으로 전문화 교육을 받아 나간다. 모여서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혼자이거나 두 사람이 한 조가 돼 마치 여러 가정교사들로부터 집중지도를 받는 방식이었다.
  
  남한화교육(1981·4·17∼7·4) : 金은 김숙희와 함께 평양시 용성구역 임원동소재 동북리9호 초대소에서 남한실정에 대한 교육 및 일본어 자습 등을 받았다. 교재로는 동아일보와 일본소학교 1∼ 6학년 국어교과서가 쓰였다. 동아일보는 원형 그대로가 아니고 재편집한 것이었다. 광고란을 빼고 주로 사회면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지면이었다고 한다.
  
  일본인화교육(1981·7·4∼1983·3) : 동북리2층3호 초대소에서 金은 혼자 밀봉교육을 받는다. 김숙회와는 헤어진다. 여기서 金賢姬는 일본인교사를 만나게 된다. 「리은혜」로 불리는 일본여자였다. 金賢姬는 32 세 가량의 리은혜와 약 2년간 함께 기거하면서 일본어·일본풍습 등을 익히는 일본인화교육을 받았다. 교육규율은 ①모든 일상생활용어는 일본어만을 사용한다 ②오전 중에는 리은혜가 작성한 강의 안에 따라 설명을 듣고 오후에는 복습하며 일본의 신문·잡지를 읽고 일본 라디오방송을 듣는다 ③매주, 매월에 필기시험 ④일본 영화와 텔리비젼 프로를 비디오나 공작원 전용영화관을 통해서 관람한다는 것이었다. 이 교육의 목적은 金賢姬를 일본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金은 일본 노래도 배우고, 일본식 손님 접대법과 예절을 익힌다. 이런 머리로써의 교육은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실제생활과 동떨어진 격리공간에서 아무리 일본 공부를 해도 체험과 연결되지 않아 「아는 지식」에 머물렀지 「실천할 수 있는 행동양식」으로는 굳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교재로 쓰는 일본잡지도 동아일보처럼 재편집된 것이었다. 난잡한 기사나 나체사진들을 오려낸 것이었다. 金日成은 이른바 교시라는 것을 통해서 『공작원에 대한 교육은 철저하게 적구화(敵區化)돼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교육담당자들은 눈치를 봐서인지 공작원들에 대해서도 남한이나 자본주의국가의 사정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왜곡된 정보로 교육받은 공작원들은 실제로 그 나라에 가 보면 배운 것과는 너무 다른데 놀라고, 배운 것을 써먹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金賢姬도 안기부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북쪽의 형식주의적 교육이 효과가 없음을 비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7: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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