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제5공화국(5) - 5.17 기습작전(2)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가두정치투쟁으로
  
  5·17조치 하루 전에 열린 28차 계엄위원회에서 黃永時계엄부사령관은 『학내문제는 총·학장들이 책임진다고 하더니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니까 당국(계엄사·내무부)에서 책임지라고 하니 문교부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질책했다. 공군참모차장은 『계엄 하에서도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봐 계엄이 해제된다면 수습이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나리라고 본다. 현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전환하는 등 강경책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701 보안부대장은 『학생들의 소요양상으로 보아 언젠가는 폭도화 될 것으로 판단되며 고교생까지 가담 시 문제는 더욱 클 것이다』고 말했다. 계엄사기획관리실장도 강경책을 건의했다.
  
  1980년 4월의 전국대학 캠퍼스를 휩쓸었던 병영집체 훈련거부 투쟁은 5월로 넘어가자 정치투쟁으로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 대전환의 신호탄은 5월1일 서울대학교에서 올라갔다. 이 날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운영위원회는 철야회의 끝에 복학생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입영훈련거부투쟁을 철회하고 2일부터 유신잔당 퇴진·계엄해제·정부개헌 중단·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성균관대와 서강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들도 투쟁노선을 전환하였다.
  
  5월 2∼13일 사이 전국의 대학생들은 대대적인 교내시위와 철야농성으로써 결전을 준비하는 「민주화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전국적인 조직화의 움직임도 보였다. 5월10일 서울대, 고려대, 전북대 등 전국 23개 대학의 대표들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실에서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가졌다. 이 시기 각 대학의 농성장에서는 가두시위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학생들이 강, 온파로 갈라져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5월 10일에 崔圭夏대통령이 중동국가 순방차 출국?이후 「신군부가 대통령의 부재중에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다」는 소문이 퍼져갔다. 5월 12일 밤에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서울대총학생회장 심재철(沈在哲)씨의 광주특위 증언. 『5월12일,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서울지역에 병력배치가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외부에서부터 쿠데타 징조가 보인다, 피신하라는 얘기들이 저희 학생회사무실로 많이 들려왔습니다. 당시 7시30분 CBS 뉴스로 기억합니다마는 그 CBS 뉴스를 듣다가 뉴스가 갑자기 끊어지면서 「아! 뭐야」하는 소리가 나더니 음악이 나가버렸습니다. 그 상황을 보고 「아! 이것은 쿠데타다」라고 저희들은 판단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날 밤 거의 모든 대학에서 비슷한 오해가 빚어졌다. 총학생회 간부들은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귀가시키고 피신했다. 그 다음날 각 대학 총학생회 간부들은 강경파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했다. 가두시위를 자제키로 한 것이 「총학생회 간부들의 나약함과 비겁함」때문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학생들은 강경 노선에 휘말려들면서 거리로 나서게 된다.
  
   총체적 난국
  
  서울 도심에서 있었던 5월 13∼15일의 대규모 시위는 신군부에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계엄위원회에 치안본부가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1980년 1∼3월에 범죄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살인이 64.3%, 강도가 1백13.9%, 폭력 20.1%, 절도 21.4%, 밀수가 1백22.6%나 증가하였다. 계엄위원회에서 徐延和 내무부차관은 『강력범들은 사회복귀가 불가능하도록 강제노동이나 강제수용 등의 특별조치가 필요하며 계엄당국에서 뒷받침해주면 좋겠다』고 건의하여 이미 삼청교육을 예고하였다. 1980년 들어 4월24일까지 전국에서 발생한 노사분규는 7백19건으로 79년 한해 동안의 분규건수보다 7배나 많았다. 1월29일에 정부는 석유제품가격을 59.4%, 전기요금을 36%인상했다. 경제기획원은 1980년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을 30%로 예상하였다.
  
  사북 사태를 기폭제로 한 노사분규의 확산, 신민당을 분당으로 몰고 가는 양金씨의 적전 분열, 물가고, 범죄의 증가, 학생시위의 격화는 5월에 들어서면서 한 시점을 향하여 동시에 상승곡선을 그리며 치닫고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한때 민주화로 모아졌던 국민여론은 보수화 되면서 신군부에 대해 『빨리 나와 난국을 수습해달라』는 일부 언론인·종교인·경제인의 호소까지 등장하고 있었다. 계엄당국은 이상하게도 이런 위기에 보도검열기준을 완화함으로써 사회혼란상이 언론을 통해 증폭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우리 사회의 여러 집단이 여러 방향으로 각개약진하고 있는 가운데 군부만이 조직된 물리력을 비축하면서 전략적 사고에 몰두하고 있었다.
  
  「충정계획」의 전개
  
  우리 군은 朴대통령시절부터 「충정계획」이란 수도권소요진압작전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 이 진압작전에 투입될 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 특전사의 1·3·7·9여단, 수도권의 20·26·30사단으로 지정돼 있었고 이들을 충정부대라고 칭했다. 신군부는 1980년 이른 봄부터 충정부대를 점검하면서 충정작전에 대비해 갔다. 1980년3월6일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盧泰愚소장)는 충정부대장 및 작전참모회의를 수경사 회의실에서 가졌다. 충정부대는 수도권진압작전 때는 수경사에 배속돼 수경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므로 수경사령관이 이 업무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소요대비태세 훈련강화 및 출동태세유지」가 시달되었다. 계엄사는 4월30일 오전10시부터 오후3시20분까지 장시간에 걸친 계엄지휘관회의를 갖고 「학원 및 노조의 난동사태가 법치주의 원칙과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엄단되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5월에 들어서 학생시위가 격화되자 충정부대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5월1일 수도군단은 헬기를 출동시켜 수원시내 5개 대학의 상공정찰을 실시하였다. 3일 심야에는 수경사 33경비단이 독립문일대에서 야간 폭동진압훈련을 했다. 5월7일 육군본부는 鄭鎬溶 특전사령관에게 중요한 명령을 하달했다. 강원도에 있던 특전사 11, 13여단을 「재경지역으로 이동시켜 소요진압 기동예비로 운용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13여단은 5월8일 강동구 거여동의 특전사에, 11여단은 10일 김포1여단으로 이동, 소요진압훈련을 하면서 출동 대기태세에 들어갔다.
  
  공수부대를 시위진압에 동원하기로 한 것은 일선에서 부대를 빼지 않아도 되고 미8군사령관으로부터 작전 통제해제를 받을 필요가 없는 부대이기 때문이었다. 5월13일 수경사 산하의 30, 33 경비단, 헌병단, 방공단, 전자중대 등 전병력은 새벽 0시부터 3시 사이에 보안목표경계훈련을 서울시내에서 실시했다. 예컨대 수경사 30경비단은 전차 6대와 장갑차 16대를 출동시켜 새벽 0시30분부터 2시까지 중앙청 부근에서 경계훈련을 했다.
  
  5월14일 오전9시 특젼사령관은 대학생들이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일 것繭遮?첩보에 따라 수도권에 집결된 1, 3, 5, 9, 11, 13 등 6개 여단에 출동준비지시를 내렸다. 이날 오후 5시30분 공수 3여단의 병력 7백14명은 30대의 트럭에 분성, 국립묘지에 포진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진압하기 좋은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오후 6시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에는 전투교육사령부로부터 31대의 2.5t 트럭이 공급되었다. 출동준비작업이었다.
  
   20사단, 서울로 진주
  
  5월15일 오전 10시30분 육군본부는 양평에 있던 20사단(사단장 朴俊炳소장)에 대해 사단 직할대와 61, 62연대를 서울로 이동시키도록 지시했다. 장교 2백53명, 사병 3천4백41명으로 이루어진 이 병력은 2백54대의 2.5t 트럭에 나눠 타고 다섯 시간만에 서울로 진입, 61연대는 효창운동장에, 직할대와 62연대는 잠실체육관에 진주하였다. 이날 서울역 앞에는 10만에 육박하는 대학생 시위대가 집결하였다.
  
  20사단의 병력이동사실이 이곳에 전해지자 한 학생 연사는 『군인들도 다 우리 형님 오빠들이 아닙니까? 그들이 탱크를 몰고 오면 저 간악한 유신잔당에게 총부리를 돌리도록 호소합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날 저녁 각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들은 고려대학교에서 격론을 벌인 끝에 시민의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한다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판단하여 시위를 중단, 학교로 복귀한다는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의했다.
  
  5월16일 오후 5시30분 육군본부는 「수도권소요사태 악화에 따른 진압부대 추가투입을 위한 부대 이동지시」로서 양평에 남아 있던 20사단의 60연대를 육사로 이동시키도록 3군사령관에게 지시했다. 장교 95명, 사병 1천5백85명으로 구성된 60연대는 17일 새벽 3시에 육사 제4연병장에 도착하였다. 전군지휘관회의가 계엄확대를 결의한 직후인 5월 17일 오후4시50분 육군본부는 각군 사령부·관구사령부·사단사령부의 작전참모들에게 「정위치 하여 작전참모부장의 지시를 받을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어서 육군본부는 계엄확대조치와 동시에 각 지역에 투입될 부대에 대한 수송차량지원 지시를 내렸다. 서울의 20사단, 포항의 해병사단, 금마의 7여단이 차량지원을 받았다.
  
  5월17일 밤11시30분 육본은 최초의 출동 명령을 내렸다. 금마의 공수 7여단에 대한 것이었다. 7여단의 32대대는 대전 충남대로, 31대대는 전주의 전북대로, 33 및 35대대는 광주의 전남대로 진주하라는 명령이었다. 33, 35대대는 18일 새벽 3시10분에 전남대에 도착했다. 광주사태가 시작된 것이었다. 계엄확대조치에 동원된 군 병력은 특전사, 20사단, 해병사단 등 2만5천여 명이었다. 이들은 31개 주요 대학과 1백36개 보안목표에 진주하였다.
  
   대통령 결재 전에 행동개시
  
  전국으로의 계엄확대를 결의한 1980년 5월17일의 전군지휘관 회의는 崔대통령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그 일정과 결의내용이 정해져 있었다. 金潤鎬 1군단장이 참모장으로부터 『내일 국방부에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가 있답니다』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16일 오후 일과시간 중이었다고 한다. 보안사령부는 16일에 전군보안부대수사과장 회의를 소집하였다. 수사과장들에게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사실과 검거대상자 명단이 통보되었다. 검거대상자들을, 계엄확대를 알리는 방송이 나가기 전에 체포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신군부는 崔대통령의 결재 이전에 이미 계엄확대를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행동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것은 12·12사태 때 全장군이 鄭昇和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받기 전에 연행에 착수하였고 그 뒤 사후결재를 받은 것과 같은 과정이었다. 5·17은 12·12사태의 되풀이였다. 신군부는 이미 崔대통령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밀어붙였고 崔대통령은 끌려갔다. 합수본부에서는 5월20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준비되고 있는 학생들의 궐기대회나 기자들의 제작거부 움직임 등이 金大中씨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D데이가 나중에 전국대학의 대표자회의에서 22일로 연기된 것도 金씨측의 방침변경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전국계엄확대 조치를 5월17일로 잡은 것은 이 D데이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5월20일에는 국회가 열려 계엄령 해체 결의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있었고 고교생이 시위에 가담할 기미도 보였다. 신군부도 몰리고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펴낸 「계엄사」는 「제한된 병력으로 안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고교생이 본격적으로 시위가담하기 전에, 전국대학생의 일제시위가 있기 전에, 그리고 근로자와 불량배 등 부화뇌동 분자들이 가세하기 이전에 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일 밤10시30분 崔圭夏대통령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申鉉碻총리, 周永福국방장관, 金鍾煥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청와대로 들어가 崔대통령과 함께 심야간담회를 가졌다. 新총리는 국내상황을 보고했고 周장관은 17일 오전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전군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申총리의 광주특위증언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군 수뇌부는 계엄확대조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증언이 정확하다면 이날(16일) 신군부는 이미 계엄확대에 대비한 예비행동에 들어가고 있었는데도 군통수권자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 다음날의 충격적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최근 崔圭夏 전 대통령은 자신이 격동의 한 가운데서 중동순방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털어놓은 바 있다. 그때 국내의 원유재고가 거의 바닥 나고 있어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긴급히 원유공급을 받지 않으면 경제공황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기름 사정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했던 것은 그랬을 경우 대 혼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늦은 崔대통령 구상
  
  崔대통령은 귀국 길에 올라 국내사태를 수습하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학생과 정치세력에게는 자제를, 군에 대해서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면서 헌법개정 일정을 연내의 어느 시점으로 분명히 못 박으려는 안도 검토하였다. 그러나 귀국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신군부의 치밀한 시나리오와 기습적인 조치였다. 崔대통령이 계획한 시국타개책은 이 소용돌이에서 잊혀졌다. 너무 늦었던 것이다. 5월16일 金泳三신민당 총재와 金大中씨는 한시간의 회담을 가진 뒤 공동발표문을 냈다. 학생시위 등 정치, 사회적 혼란은 崔圭夏정부가 권력을 연장하려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비상계엄의 즉시해제, 정부개헌구상의 철회, 민주정부의 연내수립을 약속하는 정치일정 발표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는 자제를 당부하였다. 金大中씨는 그 뒤 이 자제 요구 부분을 자주 인용하면서 자신이 결코 사회혼란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 오고 있다.
  
  국회의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신현확(申鉉碻)총리는 『세 金씨가 학생들을 잘 타일러서 학원을 조용하게 하는 등 협력이 잘 되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정치인들의 요구는 학생들과 비슷했다. 시위가 격화되는데 계엄령을 어떻게 해제할 수 있는가』라고 증언했다. 두 金씨의 공동발표문은 학생들에게도, 신군부에게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이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구실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그것은 구실을 다 준 뒤의 약방문에 불과하였고 자신들의 정치행태 또한 그런 구실이 되었다는 것을 간과한 정치적 수사,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崔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양金씨도 너무 늦게 깨달았으며 그때는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한 뒤였다.
  
  주영복(周永福)씨의 국회광주특위 증언에 의하면 5월17일 오전에 권정달(權正達) 보안사정보처장이 찾아와 국보위의 필요성에 관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周장관은 전군지휘관 회의가 열리기 직전에 3군참모총장과 柳炳賢합참의장을 따로 불러 이 문제를 논의했다. 周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제가 그 자리에서 국보위라고는 안 했습니다만 국가보위를 위한 어떤 합의체 같은 것, 이런 것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것을(전군지휘관) 회의전에 확실히 이야기 한 바가 있습니다.』 이 회의에서 周장관은 국회해산의 필요성도 제기하였다.
  
  유병현(柳炳賢) 합참의장은 광주특위에서 이런 요지의 증언을 했다. 『저는 계엄령 하라고 하더라도 국회기능은 정지시킬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해산이라고 하는 것은 위헌이 될지도 모르겠노라, 그와 같은 두 가지 문제(국보위설치와 국회해산)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겠느냐, 군지휘관 회의에서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의제 삼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周장관은 이 두 가지 의제를 전군지휘관회의에서는 꺼내지 않았다가 申총리에게 지휘관회의의 결의사항(계엄확대)을 보고할 때 끼워 넣어 함께 건의하는 수법을 썼다.
  
   전군지휘관 회의의 분위기
  
  군단장급 이상 44명의 군수뇌부 인사들이 참석한 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 사단장으로서 유일하게 앉아 있었던 것은 그 이틀 전에 서울에 진주한 朴俊炳 20사단장이었다. 이 회의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동아 1988년 10월 호에는 「믿을 만한 소스로부터 입수했다」는 회의록 초본이 실렸다. 필자는 이 회의 참석자들에게 이 초본의 정확성을 물어보았다. 대체로 정확하다는 이야기였다.
  
  먼저 합참정보국장 최성택(崔性澤) 소장이 북한의 동향과 국내외 정세에 대해서 브리핑했다. 그 뒤의 회의는 周장관이 주도했다. 발언자를 지명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이 찬성발언 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는 『계엄사령관과 내무장관이 군동원을 요청해왔으나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학원자율화를 찬성하는 등 많은 양보를 했습니다. 학생들이 민중봉기로 이란사태로 몰아가려고 합니다』고 했다.
  『어제 밤11시에서 12시 사이에 청와대 대책회의 겸 정세보고 자리에서 각하가 「나이 60이고 살만큼 살았다. 이 시점에서 국가전복은 보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정권이전의 문제입니다. 국가보위의 신성한 임무를 띤 군은 단안을 내려야 할 단계입니다. 여러분의 결의사항을 국무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며 정식결재를 받고 계엄군을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지역비상계엄을 전국비상계엄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학생은 계엄해제를 요구하나 해제하면 국기가 흔들립니다』
  
  周장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제의도 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정치풍토를 이 기회에 쇄신해야겠습니다. 사회혼란을 조성하는 불순세력들이 배후에 많았습니다. 정치 및 중요단체의 문제인물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시점에서 요망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3金씨 등 기성정치세력의 제거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때 이 회의에서 유일한 이의가 제기되었다.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安宗勳)중장(공병3기 출신)이 지명을 받지 않고 고성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군이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중요한 결과가 됩니다. 3천7백만 국민 모두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군과 경찰이 잘했다, 국민들이 절대 호응하고 있다, 군이 개입하는 것은 마지막이다 하고 전체 여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국민합의에 의해서 해야 합니다. 회의는 그런 대책을 마련하는 방식에 있어서 미리 결정해 놓고 하면 의의가 없습니다』
  
  鄭鎬溶특전사령관이 나서서 이를 반박했다. 『국민이 원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표현합니까. 지금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국회가 개회되면 국가를 오도할 사례가 많아집니다. 이대로 간다면 하루아침에 경제가 무너집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한 육군장성은 『그때 분위기에서 참석자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찬성하든지, 아니면 반대하고 군복을 벗든지. 내 기억으로는 게엄 확대 조치에 어느 누구도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안종훈 장군의 이의제기는 명시적 반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용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초 계획은 긴급조치 발동
  
  토론이랄 것도 없는 천편일률적인 의견 개진을 마무리하면서 周장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의 의견을 요약하면 전국비상계엄선포 건의로 봅니다. 둘째, 정치풍토를 쇄신해서 각하가 일할 수 있는 뒷받침을 하게 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배후조종자를 색출하고 넷째는 군이 일치단결 하여 각하가 시국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국무회의에 상정하려고 합니다. 보안에 유의해 주십시오. 내 보좌관도 안 나왔습니다. 결의서는 준비했으니 각자 서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의가 없습니까?(일동 박수) 내가 하루 다섯 갑 피우던 담배를 두 달 반전에 끊었는데 어제부터 다시 피웁니다』
  
  연판장에 서명할 때는 앞서 이의를 제기하였던 柳炳賢, 安宗勳장군도 참여하였다. 설명문이 붙지 않은 종이에 백지 위임식으로 서명했다는 것이다. 신군부가 당초 계획했던 5·17조치는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권을 이용한 5·16쿠데타와 비슷한 수준의 혁명적 거사였다. 이 조치안을 崔대통령에게 재가 받는 과정에서 그 성격이 합헌적 비상조치로 누그러뜨려진 것이다.
  
  보안사에서 4월말부터 본격적으로 꾸미기 시작한 5·17시나리오는
  ①전국계엄으로의 확대
  ②金鍾泌씨 등 권력형 부정축재혐의자 조사
  ③金大中씨 등 학생소요배후조종혐의자 구속
  ④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한 국회 해산 및 5·16때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비슷한 비상대책기구 설치
  ⑤5·16때의 혁명공약과 비슷한 대통령의 특별선언문 발표를 주요골자로 하고 있었다.
  崔대통령이 이 시나리오대로 재가했다면 우리는 지금 5·17의 성격을 명백한 헌정 중단, 즉 쿠데타로 쉽게 규정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직업공무원 출신인 崔대통령은 그런 변칙을 거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5·17조치를 혁명적 상황이 아닌 합법적 비상조치로 위장하도록 도와주었다.
  
  국보위 설치는 원래 5·17조치 시나리오 안에 포함돼 있었다. 국보위계획에는 全斗煥·盧泰愚 ·정호용(鄭鎬溶)·박준병(朴俊炳)·허화평(許和平)·허삼수(許三守)·이학봉(李鶴捧)·권정달(權正達)씨 등이 참여하였고 실무책임자는 權正達보안사 정보처장이었다. 鄭鎬溶씨는 광주특위에서 국보위계획에 대하여 몰랐다고 증언했으나 이는 명백한 허위증언이다. 5·17조치에 관해서는 全·盧·鄭장군 등 12·12사태주동세력의 지휘탑이 결심을 내렸었다. 더구나 신군부의 핵심이긴 하지만 약간 외곽에 있었던 權처장이 국보위 작업을 맡아 하는데 지휘탑의 鄭씨가 몰랐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국보위의 구상단계에서 신군부와 崔대통령 측근 사이에는 의견교환이 있었으나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5월17일에 崔대통령이 국보위설치 건의를 보류시킨 것도 사전에 충분한 토의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8:0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