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잠입한 北韓工作 지도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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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북한 對南 공작부서 간부
  
  노동당 연락부와 김낙중(金洛中) 커넥션
  
  북한은 金씨를 미군첩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로 보는 간첩교육을 시킨 뒤 남한으로 돌려보냈다.
  
  <1992년 10월 월간조선>
  
  합법공작과에서 인수
  
  月刊朝鮮은 안기부의 북한 고정간첩 金洛中 체포사건 발표 후 金洛中 씨가 지난 55년 6월25일 자진 월북해 56년 6월20일 다시 남방한계선을 넘을 때까지 1년 동안 북한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A씨를 13일 오후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만났다. A씨는 60대 후반으로 당시 월북한 金洛中씨를 직접 조사했던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인 연락부 합법공작과와 업무상 관계로 金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합법공작과는 남한에서 불법 지하 활동을 하는 공작원과는 달리 합법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간첩활동을 하는 공작원을 담당하는 조직이다)
  
  A씨는 인터뷰에서 金洛中 조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연락부의 업무체계상 합법공작과로부터 金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넘겨받거나 金씨를 직접 취급했던 金모 李모 등으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어 金에 대한 조사 상황을 알 수 있었으며 金씨가 간첩교육을 받던 초대소, 金씨가 구경 간 영화관에서 거리를 두고 그의 모습을 두세 번 직접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을 통해 金洛中씨가 지난 91년 자신의 환갑기념 논문집안 「강천(剛泉 김낙중 선생 환갑기념 논문집「환갑기념문집 간행위원회 편 한백사 출간)」의 「剛泉 김낙중 선생 연보(年譜)」에서 밝힌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점검해 보았다. 연보에서 金씨는 55년 6월25일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수립안」을 휴대하고 임진강을 넘어 「북조선」으로 월북했으며 7월2일 개성 내무서를 경유 평양 내무성 예심처에 이송 됐고, 7월말에는 남한 치안국 특수 정보과 중앙분실에서 파견하여 월북했다고 허위 자백하고 북조선 형법에 의한 간첩죄로 기소됐다고 기록돼 있다.
  
  연보에서는 이어 金씨가 8월 초순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가자 8월13일 기소 중지되어 평양 시내의 「민가」로 이송됐으며. 8월 하순 남한으로 강제 송환하겠다는 통지를 받고 자신의 통일방안에 대한 북조선 당국의 공식적인 답변을 요구하며 강제송환을 결사 반대했다고 기술됐다. 金씨는 이어 11월 초순까지 평양시내 「민가」에서 신병치료를 받다가 11월 중순 평북 신의주 근처인 용천군 용암포리에 있는 양시영예 전상자 병원(양시는 지명)으로 후송됐으며 해가 바뀐 56년 4월 다시 평양시내 민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金씨는 이후 6월 중순까지 2개월 동안 북조선 각지의 산업시찰을 하고. 평양시내 박물관 영화관 등 문화 시설들을 참관했으며 「북조선」 당국이 자신의 통일방안에 대해 남한 당국이 요구하면 토의할 용의가 있고 본인이 원하면 남한으로 송환하겠다 고 해서 남한으로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에 배치
  
  金은 6월20일 오전 6시30분 판문점 부근의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다가 남방한계선 부근에서 미군 보초에 붙잡혔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金씨의 북한 내 행적에 대해 A씨는 『金洛中을 군으로부터 노동당 연락부가 정식으로 인계 받은 것은 金이 월북한 지 한달 정도 지나서였다』며 『金은 군에서 조사를 강하게 받는 바람에 몸이 상해있었다』고 증언했다. 金씨의 월북 루트가 당시 미국 첩보 기관이 일년이면 몇 명씩 파견한 대북 공작원들의 월북 경로와 비슷해 북한군은 金씨를 강하게 의심했다는 것이다.
  
  A씨는 金씨가 연보에서 내무성의 취조를 받았다고 기술한 데 대해 『金씨를 처음 잡은 것은 휴전선 부근의 군 부대였을 것이고 군사분계선 후방 지역에서 내무성에 잡혔다 하더라도 군사기밀 유지상 군이 넘겨받아 조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군이 노동당에 金씨를 인계한 것은 노동당 연락부 차원에서 金씨를 이용 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었고 만일 당이 이용가치가 없다고 했다면 金씨는 간첩으로 기소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연락부장인 朴일영(68년 동백림사건 당시 동독 주재 북한대사 역임)은 「단순 간첩으로 처벌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는 조사 보고서를 받고 『당에서 인수해 연구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1차로 金씨를 취급한 담당자는 보고서에 「金洛中이 설사 미국 첩보기관과 관계했더라도 청년(당시 24세)으로서는 기본 바탕과 사상이 좋다. 본인 얘기대로 통일문제를 담판하러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썼다. 金씨는 조사과정에서 『미국 첩보기관과의 관계를 말하라』는 신문에 화를 내며 당차게 나오는 바람에 「자살 할 우려가 있으니 너무 세게 다루지 말라』는 지시도 들어 알고 있었다고 A씨는 말했다.
  
  이후 金씨는 연락부 부부장인 崔모를 만났다. 崔모는 이전 중국에서도 공작분야에 경험이 많았던 인물로 金씨를 신문하고는 『金이 모험을 좋아하는 타입으로 연구가치가 있으니 교육을 주면서 검토하라』 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金씨는 朴일영 연락부장의 지시대로 우선 군에서 다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있는 2∼3주 동안은 신문도 받지 않고 편안한 상태로 보냈다고 A씨는 기억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한 후 교육을 받기 위해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에 들어갔다. 당초에는 간첩 교육 장소인 초대소에 보내려 했으나 초대소에서는 교육담당자는 교육만 할뿐이고 초대소 식모 등 잡일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金씨의 동태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金의 연보에 나오는 「민가」는 간첩 교육 장소인 「초대소」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쓴 것이라고 A씨는 말했다). 이에 비해 전쟁 직후 납북 및 월북 인사들의 사상 재교육을 위해 마련된 인민경제 대학 특설반에 보내면 金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쉽게 감시하고 金씨의 참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특설반에서는 남북 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6·25 전쟁 전 공산당원임을 숨기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간첩활동을 하다 검거돼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서대문 교도소에서 복역 중 전쟁발발로 월북한 노일환 김옥주 등 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자들이 사상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연령과 지식수준에 따라 10∼15명 단위로 반편성이 됐으며 교육기간은 6개월에서 1년까지였다. 金洛中씨는 이중 국회 프락치사건 연루자들과 같은 반이 됐다.
  
  특설반은 중앙당 조직부에서 관장했지만 대남 관련 부서인 연락부도 일부 관계했었기 때문에 金洛中씨를 특설반에 배치할 수 있었다고 A씨는 증언했다. A씨는 金씨가 특설반에 배치됐다는 것은 보고서를 보고 알았으며 金씨가 그 곳에서 3∼4개월간 교육받았다는 것은 나중에 관계자들로부터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대담하게 써보라』
  
  金씨는 56년 4월에 열린 노동당 3차 대회에서 조국통일 선언서가 발표되면서 북한사회 전반에 통일이 임박할 것 같은 분위기가 고조되자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듯 『나는 북한의 지도자와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에 왔으므로 더 이상 공부시키지 말고 남으로 보내달라』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마침 3차 노동당 대회를 계기로 연락부장이 朴일영에서 임해로 교체됐다. 임해는 단식투쟁을 하는 金씨에 대해 『대담하게 써 보라』를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는 金씨가 미국 첩보기관과 관계가 있다면 남한에서 미국 첩보기관을 위해 일할 수도 있지만 사상적 바탕이 좋으니까 우리가 노력해 우리 일을 더 많이 하도록 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즉, 2중첩자가 될 가능성을 감안해서 잘 이용하라는 뜻이었다. 이에 따라 金洛中씨는 평양시내 초대소로 보내져 집중적인 간첩 밀봉 교육을 받았으며 공작임무를 띠고 남한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A씨는 이후 金씨가 남한에서 체포 됐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사고로 처리한 합법공작과의 보고서를 통해 金씨가 남파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A씨는 북한 연락부에서 金씨의 존재가 다시 거론된 것은 60년 4·19 직후였다고 말했다. 『남파 후 체포돼 징역을 사는 줄 알았던 金洛中이 언론인으로 활약하면서 청년조직 활동을 하는 등 그의 활동상이 보고서에 나왔다. 보고서에서는 그가 어떻게 석방됐는가에 대해 의심하기도 했지만 미국 첩보기관의 도움으로 석방된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남한측 첩보기관의 대북공작원으로 월북했다가 간첩으로 다시 남한에 밀파된 인물이 2년 징역을 살다가 나온 사례도 있고 해서 당에서는 「나쁘게만 보지 말라」고 지시했다』(연보에 따르면 金洛中씨는 60년 6월에는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고려대의 진보적 학생출신의 사회인들로 구성된 신조회(新潮會)의 간사직과 기관지 「신조」의 편집을 담당했으며 10월에는 주간신문 「정론(正論)」의 정경부장과 통일문제 담당 논설위원을 겸직했다) A씨는 북한은 4·19 직후의 사태를 이용하기 위해」일단 남한 내에 침투시킨 간첩들을 북으로 불러들였으며 金洛中도 그 대상 중의 하나였다고 증언했다.
  
  사형구형 받자 일단 종결처리
  
  A씨는 金씨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金씨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 그에게 보낼 사람을 교육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연락부는 일단 金씨가 미국 첩보기관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첩에게 일반적으로 지급되는 A-3 방송지령 청취용 단파라디오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직접 연락원을 보낼 준비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61년 5·16 군사혁명이 나고 金씨가 사형구형을 받자 연락부는 金씨와 관련된 대남사업을 종결처리 했다.
  
  A씨는 이 같은 사실을 63년 말 대남 공작원들에 대한 사업을 점검하는 연간총화(결산의 의미) 회의에서 회의 담당과장 李철호가 金씨가 처형된 것으로 간주하고 金씨에 대한 사업을 종결하겠다고 보고했으며 나중에 자신의 과로 넘어온 총화보고서를 통해서도 다시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A씨는 총화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A씨는 연락부는 남파 공작원이 체포되더라도 종결처리하지 않지만 일단 사형 판결을 받으면 종결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고 추가 설명했다. A씨는 金씨가 사형구형을 받자 연락부는 金씨가 미국 첩보기관과 무관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A씨는 어떻게 37년이 지난 지금에도 金洛中씨를 잘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당시 金洛中을 조사하던 사람들로부터 金이 똑똑하고 당돌한 청년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金이 평양 서쪽의 감응리 초대소에서 교육받을 때 거리를 두고 金을 직접 보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A씨는 안기부 수사관들에 털어놓은 金씨의 진술 중 『초대소를 옮겨 다닌 사실과 초대소의 위치 그리고 초대소의 식모에 대한 기억이 소상했으며 특히 崔모 부부장의 멧돼지 같은 인상에 대한 金의 기억이 자신의 기억과 일치했다』고 말했다.
  
  A씨는 북한이 90년에 다시 金洛中씨와 선이 닿아 金씨가 확고한 지하조직을 갖지 못한 상태인데도 2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제공하고 임모라는 장관급 거물을 서울에 잠입시켜가면서까지 金씨를 지원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북한의 절박한 사정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사업당 2백만 달러를 지원해 준 것은 대남사업 중 처음 있는 일을 것이다. 북한은 해방 50주년이 되는 오는 95년을 통일의 목표 년도로 공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불과 몇 년 안 남은 상황에서 남한 내부에 북한의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통일전선세력의 골간을 구축해야 하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다.
  
  북한은 남한 내 재야와 운동권 학생 노동자 등을 지지세력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남한에서 민중 통일운동가에 떠오른 金洛中이 다시 연결된 것이다. 金씨가 북한을 지지하는 합법정당을 만들고 총선에서 국회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도록 대담하게 투자한 것이다. 막대한 자금이 주어지고 장관급 거물이 서울에 지원을 정도로 파격적인 것은 대남 사업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 金正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들이 군사적인 도발은 국제여건상 극도로 자제하지만 그렇다고 남한 내 자주적인 역량을 통한 통일전선전략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지상목표이며 정권유지를 위한 최대의 정당성이다. 더욱이 지금 남한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고 내년에 대통령은 각종 완화정책을 쓸 것이므로 북한은 최근 상황을 그 어느 때보다도 호기로 보고 대남사업을 적극 벌여나갈 것이다』 A씨는 4·19 직후에도 북한은 남한에 사회당이라는 합법적 정당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대선(大選) 후보에 테러 않을 듯
  
  A씨는 『북한이 심어놓은 합법정당은 통일전략상 金日成과 金正日에 대한 인신공격만 빼고는 북한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도 문제삼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A씨는 북한이 민중당에게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독자후보를 내지 말고 민주당을 지지하도록 한 데 대해 『북한은 민중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야당인 민주당을 지지하되 반드시 정치적 대가를 요구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A씨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들에 대한 북한의 테러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북한의 테러는 권력자에 대해서는 가능한 것이지만 권력을 잡기 전인 후보자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키 위한 전략적인 테러는 북한이 이미 저질러 왔다. 대표적으로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한 아웅산 사건과 서울올림픽을 막기 위한 대한항공 폭파사건 등을 들 수 있다』
  
  A씨는 이번에 임모라는 거물급 간첩이 강화도를 거쳐 침투한 것에 대해서는 『강화도는 대남사업 초기에 기장 많이 이용하던 루트이다. 한동안 이용하지 않다가 이번에 다시 택한 것이다. 강화도는 북한 땅을 마주 보고 있는 데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상륙과 탈출이 가능한 지역이다. 거물급 간첩과 막대한 자금이 이동한 것으로 보아 강화도 지역에 이들을 안전하게 안내할 수 있는 거점이 분명히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A씨는 金洛中 사건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자신의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북한을 과소평가 말라」
  
  『안기부 발표에 대한 언론의 회의적인 보도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북한의 의도를 모르고 있으며 북한의 대남 사업 활동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북한에서 대남사업은 정권유지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데 무엇 때문에 포기하겠는가. 대남사업의 조직만 봐도 알 수 있다. 노동당에서는 연락부(지금의 사회문화부) 통일전선부 대외정보 조사부 등 3개 부서가 있고 군에는 특수정찰국이 있다. 특수정찰국은 규모면으로는 최대이다.
  
  이밖에 사회안전부에 정보총국이 있다. 우선 당에는 3개 부서와 그 산하에 남조선연구소 강남연구소 등 12개 대남 사업 연구소와 남포 청진 등 8개 연락소가 있으며 인원은 통일선전부 소속이 약 1천명, 연락부 소속이 5백명, 대외정보 조사부 소속이 일선의 안내원과 공작원을 포함 1천 2백명에 달하고 있다. 군의 특수정찰국은 남한보다는 해외에서 군사정보를 빼내오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미수교국을 포함. 세계 모든 나라에 적어도 2∼3명의 공작원을 침투시켜 놓고 있다.
  
  외교관 신분인 해외주재 무관은 특수정찰국 소속이 아니다. 사회안전부의 정보총국은 경제 과학 기술 정보를 주로 취급하고 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대남공작 관련 기구들이 팔짱만 끼고 있겠는가. 조직 면이나 역량 면에서 볼 때 북한의 대남사업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그들은 지금 남한에서 통일전술 전략이 성공할 수 있는 토양이 배양돼 있다고 믿고 있다. 더욱이 주사파가 활동하고 있고 이번 金洛中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간첩을 신고하지 않는 분위기가 됐을 정도로 남한 사회에 취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북한측은 노리고 있다』
  
  A씨는 마지막으로 통일방안에 대해 남한측이 과거 서독이 한 것처럼 공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외교적인 고립과 어려운 경제여건에 처해 있지만 남한쪽에서 생각하듯이 쉽게 붕괴되지 않을 정도로 체제유지의 힘이 있다. 북한과의 경제합작을 적극 시도해 북한 내부에 남한의 자본주의 바람을 불어넣는 것이 더욱 북한 정권에 타격을 줄 것이다. 그래야 돈을 따라 남한의 생활양식이 북한으로 들어갈 것이 아닌가』
출처 : 월조
[ 2003-06-30, 21:5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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