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잠입한 北韓工作 지도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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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 창당에 관여하기 시작
  
  金씨의 생각이 바뀐 것은 90년 10월 중순, 서울 종로 2가 태을당 커피숍과 경기도 파주군에 있는 金씨의 옛 집에서 북한 공작원 임모를 만나고 나서였다고 한다. 임모는 金씨에게 『민중당에 입당해 당권을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90년 11월 초순 金洛中씨는 집으로 찾아온 김재오(李在五)씨를 만나 민중당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90년 11월10일 열린 민중당 창당 전당대회는 이우재(李佑宰)씨를 상임대표로 김낙중(金洛中)·김상기(金祥基)씨(경북대 교수)를 공동대표로 선출했다. 창당대회 이틀 후 金洛中씨는 집으로 찾아온 임모를 만났다.
  
  임모는 『당 대표로 취임한 것을 축하한다. 당 사업을 충실히 수행하라』며 미화 30만 달러를 주었다. 약 3개월 간 서울에 숨어있으며 민중당 창당대회 등을 지켜본 임모는 그후 북한으로 돌아갔다. 북한의 고위 공작 지도책 임모가 다시 서울에 나타난 것은 91년 10월 하순이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애용해 온 강화군 양도면으로 침투해 왔다(침투과정을 沈今燮씨에게 털어놓았음). 그는 이모라는 공작원을 대동하고 왔다. 간첩 사건을 수사하는 안기부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내 여러 지점 중 간첩이 가장 많이 침투하는 곳 중의 하나가 강화도라고 한다.
  
  안기부의 한 대공 수사관은 『북한 공작원들은 「강화도 루트를 너무 자주 사용하면 안된다. 이 루트는 아껴야 한다. 가끔 다른 곳도 사용해야 강화도 루트를 들키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다」는 말까지 할 정도』라고 말했다. 91년 11월 초순, 金洛中씨는 태을당 커피숍에서 임모와 이모를 만났다. 金씨는 「당 대표 李佑宰와 사무총장 李在五에게 자금을 지원하면서 우리가 의도한 대로 당을 끌어가고 있다. 잘 하면 총선에서 원내 진출에 성공해 사업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보고를 하였다는 것이 안기부 발표문의 내용이다.
  
  임모는 金씨에게 『당에서 金선생의 활동에 지대한 관심과 경의를 표하고 있으니 보다 열심히 사업을 추진하라. 이번에 내려온 목적은 민중당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 온 것이다. 꼭 원내에 진출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라. 곧 거액의 자금이 내려올 것이니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를 집중 지원하라』고 말했다.
  
  『민중당 선거 지원하러 왔다』
  
  91년 11월 중순, 임모와 이모는 沈今燮씨를 찾아가 沈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강화군 양도면 돌곶이산으로 갔다. 돌곶이산 왕겨 야적장 인근엔 비밀리에 물건과 연락문 등을 전달하는 드보크(무인 포스트)가 있었다. 이들은 드보크에서 권총, 소음기, 독약앰플, 미화 1백50만 달러, 탄창 두 개 실탄 48발 등을 캐내어 가방 세 개에 담아 서울로 돌아왔다. 임모는 미화 1백50만 달러를 金洛中씨에게 주면서 『원래 1백만 달러를 지원할 계획이었는데 金日成 주석이 특별히 50만 달러를 더 주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임모는 沈씨에겐 권총과 소음기 등을 건네주었다.
  
  91년 12월 중순 임모는 金씨를 통한 민중당 당권 장악이 가능해 졌다고 판단했는지 金洛中씨에게 온양 온천에 가자고 제의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북한의 A-3방송 암호지령을 함께 들었다. 방송 내용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남조선에서 통일투쟁에 지대하게 공로가 큰 金洛中 동지에게 민족통일장을 수여하였습니다」였다.
  
  세 차례에 걸쳐 金洛中씨가 북한 공작윈으로부터 받은 미화(美貨) 는 모두 2백10만 달러였다(1차 최모로부터 30만 달러 2차 임모로부터 30만 달러 3차 임모로부터 1백50만 달러. 이중 金洛中씨는 60만 달러를, 沈今燮씨는 50만 달러를 서울 남대문시장 암달러상들을 통해 환전하였다고 한다. 안기부 대공 수사요원들은 金씨와 沈씨가 어떤 경로로 암달러상과 거래를 시작했는지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을 회피했다. 그러나 이들은 金씨가 10여명의 암달러상과 얼굴을 익혀 놓아서 전화 한 통화만 해놓고 가도 손쉽게 1만 달러를 원화로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91년 말과 92년 초는 14대 총선(1992년 3월24일 실시)을 앞둔 때라 각 정당은 저마다 분주했다. 金洛中씨는 민중당 선거대책본부장 겸 전국구 후보 1순위자가 되었다. 金洛中씨는 민중당 후보 중 당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李佑宰(서울 구로을) 장기표(張淇杓)(서을 동작갑), 송경평(宋炅平)(인천 북을), 裵진(강원 태백)씨 등 18명을 선정해 李佑宰씨에겐 2천만원. 張琪杓씨에겐 1천 5백만원, 宋炅平씨에겐 1천만원. 배진씨에겐 5백만원 등 총 7천 9백만원을 18명에게 지원하였다고 안기부는 밝혔다.
  
  안기부는 또 金씨는 또 민중당 대변인 정태윤(鄭泰允)씨와 노동위원장 김문수(金文洙) 씨에게 활동비조로 각각 5백만원씩을 주었고 민중당 특별당비와 그 자신의 전국구 후보 등록비조로 2천5백만원을 내놓는 등 모두 1억1천4백만원을 민중당 관계자에게 제공했다고 밝혔다. 金洛中씨는 돈을 받은 민중당 관계자가 『이게 웬 돈이오』라고 물으면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준 것이다』고 받아넘겼다고 한다. 金씨는 李佑宰씨에게 북한 공작원 임모를 『우리를 도와주는 분』이라고 소개인사를 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金씨는 민중당 지원 외에도 자신이 만든 「평화통일연구회」에 5천만원을 기금으로 내놓았고 沈今燮씨 활동비로 7천만원을 지원하였다. 또 진보정당이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를 내세울 경우를 대비해 은행에 7천만원, 부동산 매입에 3억3천 8백만원, 사채놀이에 1억2천만원 등 5억3천여만원을 투자해 두었다는 것 이 안기부의 주장이다.
  
  서울 봉천동에 아지트 마련
  
  이번의 안기부 수사에서는 북한 공작원 임모와 이모가 서울 관악구 봉천6동 산 81번지 임진환씨 소유 가옥(대지 12평, 건물 8평)의 방 칸을 보증금 2백만원. 월세 12만원에 세내 입주했던 것이 드러났다. 이들이 임진환씨 집에 사글세로 입주한 것은 봉천동 소재 우일부동산을 통해서였다. 이때 임모는 「경기도 광명시 소화2동 324번지」에 사는 「홍순진」이란 명의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안기부 수사 결과 홍순진씨(洪淳辰·59)는 광명시의 같은 주소에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洪씨는 1978년 4월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사실이 있었다. 임모 는 洪씨의. 주민증을 습득해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모가 사글세방 계약서에 찍은 도장에는 洪淳辰 대신 洪淳珍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수사결과 밝혀졌다. 임모와 이모는 봉천동 사글세방에서 92년 2월까지 살았다. 이때 옆방에 살았던 이모씨(55·노점상)는 『그들이 부자지간인 줄 알았다. 한번은 아들(이모)을 만났는데 그는 「나는 운전수로 일하면서 한달에 1백만원 번다」고 하더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임모와 이모는 92년 2월경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며 우일부동산에 방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방은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어 한동안 복덕방 장부에 기재된 채로 있어야만 했다. 두 공작원이 이 집에서 나와 4월 4일에 북한으로 귀환할 때까지 어디서 묵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진보세력을 재집결시켜라』
  
  91년 3월24일 실시된 14대 총선에 민중당은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의석획득에 실패한 민중당은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해산해야만 했다. 92년 3월 하순. 金씨는 종로2가 태을당 커피숍에서 임모를 만나 사후대책을 의논했다. 임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금번 총선에서 한 석도 얻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최선을 다한 것으로 평가한다. 민중당이 해산되더라도 진보적 정치세력을 재집결하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곧 북한으로 복귀하니 차질없이 과업을 수행하라』
  
  임모가 살았던 봉천동 집의 방이 나간 것은 92년 5월이었다. 이때 심금섭(沈今燮)씨는 우일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사글세 보증금을 「농협 통장 901-01-278613 이흥배」 앞으로 넣어달라』고 했다. 우일부동산 측에선 본인이 직접 와야 돈을 줄 수 있다며 거절했다. 이흥배 명의의 농협 통장은 북한 공작원 이모가 92년 3월28일 부산 광복동 농협지점에서 1만원을 입금하며 개설한 것이었다.
  
  당시 이모는 沈今燮씨와 임모와 함께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위미리 제주 수산시험소 양어장 부근의 또 다른 드보크 장소를 확인하러 가기 위해 부산에 들렀을 때였다. 통장을 개설한 이모는 沈씨에게 『봉천동 집 보증금을 받아달라』면서 「이름: 이흥배, 주민등록번호: 591209-******* 주소: 인천시 남구 용현동 85-19. 비밀번호: 4321」이라고 알려 주었다. 안기부 조사 결과 이 주민등록번호와 주소지엔 이홍배(李弘培)라는 실존인물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모는 李弘培씨의 인적사항을 도용하며 고의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이름을 이흥배」라고 한 것이었다.
  
  92년 4월4일 임모와 이모는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沈今燮씨의 차를 타고 강화도 전등사로 향했다. 沈씨는 차안에서 『金洛中 선생과 상의한 것인데 우리 신변에 위험이 있을 때 북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북한 공작원들은 ①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돌곶이산의 드보크 지점 ②제주도 수산시험소 양어장 부근의 드보크 지점. ③인천에 사는 沈今燮씨 친구인 윤모씨의 집. ④팔당댐 하류 3백∼4백m 지점 등 네 군데를 접선장소로 지정한 후 위급사태를 북한으로 알리려면 이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태국에 있는 「로얄양윤」사로 「당신이 부탁한 샘플을 신속히 보내주시면 제작하여 보내주겠다.
  
  청해실업. K·S·SHIM」이라는 내용을 영문으로 적은 다음 희망접선 장소의 번호를 기재해 팩시밀리로 보내라. 팩스를 보낸 후 48시간이 지난 후에 맞는 첫 번째 밤 12시쯤 접선장소로 나가면 안내원이 나타날 것이다. 안내원이 나타나면 먼저 손뼉을 두 번 쳐라. 그러면 안내원도 두 번 손뼉을 친다. 이어서 金洛中은 「무두봉 11(金洛中씨의 암호명)이다」, 沈今燮은 「임진강 100「沈今燮씨의 암호명)이다」는 인식신호를 보내라. 안내원이 「대동강」이라고 하면 안전한 것으로 보고 서로 접선한다. 이후 안내원의 지시로 북으로 오면 된다』
  
  沈今燮과 임모. 이모는 강화도 전등사 주차장에 도착해 관광객처럼 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밤 8시30분쯤 임모와 이모는 沈씨에게 작별을 고하고 어둠이 깔린 산속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沈씨는 평양방송을 통해 「휘파람」이란 노래를 들었다. 「휘파람」이란 노래가 방송되는 것은 이모와 이모가 무사히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리는 암호였다.
  
  92년 4월 중순, 沈씨는 자신의 차에 金洛中을 태우고 제1 접선지점인 강화도와 제3 접선지점인 인천의 윤모씨 집을 사전 답사하였다. 비슷한 시기 沈今燮씨는 발각될 것을 우려해 소지하고 있던 권총, 무전기, 독약 앰플 등을 플라스틱통에 담아 경기도 하남시 청현동 산51번지(팔당댐 부근) 검단산 중턱에 땅을 파고 숨겨두었다.
  
  은서(隱書), 송신기 등으로 연락
  
  민중당 해체 이후 재야인사들은 「민주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한 협의회」(약칭·민사협)를 결성하고 회장에 장기표(張琪杓)씨, 고문에 김낙중(金洛中)·이재오(李在五) 씨를 선임하였다. 이때 金씨는 자신 이 민사협 고문이 된 사실을 은서(隱書)를 통해 북한에 알렸다. 金씨는 이 보고를 위해 민족통일촉진회 회보인 「민족통일」 5·6월 합본호를 이용했다. 그는 이책 11쪽에 다 은서를 쓸 수 있는 분말 잉크를 이용, 「구 민중당계는 민사협으로 출범했다. 나는 고문에 취임했다. 민사협을 차츰 진보정당으로 전환하겠으며 앞으로 대선 정국을 맞아 적절히 대응하겠다」 고 쓴 다음 이 책을 홍콩 구룡우체국의 지정된 사서함으로 발송하였다.
  
  金洛中씨와 沈今燮씨는 메모리식 송신기를 이용해 보고내용을 북한으로 보내기도 했다. 메모리식 송신기란 보고내용을 난수로 바꾸어 차례대로 입력·기억시킨 다음 원 터치로 일순간에 송신하는 기계이다. 송신시간이 워낙 짧기 때문에 우리 수사기관이 남한 어디서에선가 북한으로 송신되는 전파를 감지한다고 해도 역추적이 불가능하다.
  
  임모 등 북한 공작원이 돌아간 후 金씨는 A-3 방송을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 그는 짝수달 셋째 목요일 밤 12시와 그 다음날 밤 12시에 북한의 지령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92년부터는 둘째 목요일로 변경). 金씨는 A-3 방송을 통해 여덟 번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안기부 조사에서 진술했다. 이중 金씨는 여섯 번째까지의 난수표를 소각했으나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난수표는 난수해독용 방법서와 함께 한약 병 속에 감추고 있다가 안기부 조사에서 한약방이 있는 장소를 털어놓았다.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밀어라」
  
  안기부는 이 두 건의 난수표를 이미 녹음돼 있던 92년 6월12일까 및 8월14일자 A-3 비밀지령 방송과 대조하면서 金씨가 숨겨두었던 난수 해독용 방법서로 풀었다. 6월12일자 지령문은 이렇게 해독되었다. 「련락대표 무사히 도착. 잘 돌봐주어 감사함. 주사핵심 의거 광범한 민주세력 포용 새 정당 건설 추진에 헌신하는 동지의 로고 높이 평가함. 대선시 모든 민주세력이 민주당 후보 밀어주며 민중 독자 후보론은 바람직하지 못함. 각종 악법 철폐 양심수 석방 비핵 군축 련방제 등을 그것에 대한 지지카드로 리용할 것임. 대선시 국민련합에 모 든 세력 집결, 대렬의 통일단결 할 것. 침체된 대중투쟁 활성화시키도록 종용 바람. 권두영(權斗榮)이 당 자금 지원 확보 위하여 본부에서 자기 기업 거래확대에 지원요청한 바 있음. 본부에서 지원하는가 안 하는 가 결심할 수 있게 사서함으로 보내는 책자에 간단히 은서로 회답 바람. 경의」
  
  이 지령문에서 안기부는 신사당 위원장과 민중당 고문을 지낸 권두영(權斗榮)씨 (63)가 金洛中씨 등과 연계한 것을 감지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조사 결과 權씨는 미국 영주권을 갖고 2차례 방북한 바 있다. 金洛中씨는 權의 이러한 경력을 이용. 權씨를 북한과의 자금루트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8월14일자 지령문도 같은 방법으로 해독되었다. 옮기면 이렇다. 「은서보고 받았음. 가능하면 10월경 혁신정당 재건정형을 서로 알려주기 바람. 대선 투쟁공간 리용하여 핵심 골간 튼튼히 꾸리며 새 혁신 정당 재건에 전력 바람. 타이 회사와 거래 및 련계중지 바람. 건투 바람」
  
  김낙중(金洛中)씨와 심금섭(沈今燮)씨가 국내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동안 안기부 대공수 사단은 金洛中씨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안기부의 한 대공수사관은 金洛中씨를 주목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보다 양비론적으로 북한을 평가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 북한엔 대해 양비론적인 사람은 북한을 비판하는 듯 하면서도 주한미군 철수 북한 핵시설 폭격 반대 등을 주장합니다. 두 번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1955년 金洛中이 월북했을 때 인민경제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金洛中이 용암포병원에 장기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민경제대학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 붙었습니다. 그러자 金洛中이 암달러상과 자주 접촉하며 거액의 달러를 환전하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또 그가 수출실적이 미미한 청해실업과 얽혀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청해실업 사장 沈今燮이 태국을 오고간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감이 느껴진 것이지요』
  
  1955년 6월25일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金洛中씨가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 월북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당시 金씨는 직접 작성한 「통일독립 청년고려공동체안」이란 통일안을 들고 북한에 간 것이었다. 1950년대 후반의 남북한 대치상황은 지금과 달랐다. 북한의 경제 현실이 남한보다 나았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것이 수월했던 때였다. 金洛中씨의 월북은 이런 상황 속에서 단독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金洛中씨는, 북한 체류기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저서인 「굽이치는 임진강」과 월간조선 90년 9월호의 인터뷰 등을 통해 『미제의 간첩으로 몰렸다』 『예심처(북한의 경찰서) 감방에 있다가 건강이 나빠져 용암포병인에 장기간 수용되었다』고 설명했었다.
  
  1956년 서울에 돌아온 金씨는 국보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을 때도 이러한 주장을 계속해 1심에서 징역 1년, 2심에서 집행유예, 3심에서 무죄 판결을 선고받는 데 성공했다. 안기부 대공수사단은 익명의 북한 공작원의 진술이 있기 전부터 金洛中씨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金씨가 무죄로 방면된 후인 1961년 安행엽의 월북을 방조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金씨는 3년 6월의 징역형을 살았다. 金씨는 10월유신이 선포된 1972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에 있으면서 비밀조직인 NH(National Humanism)회를 조직, 반유신 유인물인 「민우」지를 제작·배포하다가 적발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살기도 했다.
  
  金洛中씨의 연행
  
  지난 8월25일 오전 6시50분쯤 金씨의 간첩협의에 대해 확증을 품은 안기부 수사관들은 자기 집 앞을 쓸고 있던 반바지 차림의 金洛中씨를 차에 태워 연행했다. 金洛中씨를 데려왔던 한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金洛中은 차안에서 「집안에 들어 와 신분을 밝히고 같이 갑시다 하면 될 텐데, 왜 반바지 차림의 나를 불법으로 끌고 가느냐」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그렇게 하면 당신이 따라 왔겠느냐」고 응수했습니다. 우리가 金씨를 살짝 데려온 것은 그의 가족들이 金씨의 연행 사실을 안다면 난수표와 간첩장비 등을 모두 소각할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金씨를 연행한 안기부는 오전 7시쯤 다시 金씨 집에 가 증거를 찾기 위한 가택수색을 했다. 金씨 부인과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진 이 조사에서 안기부는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다. 안기부는, 수사관들이 철수하면 金씨 가족들이 숨겨놓은 증거물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판단, 金씨 가족을 함께 연행해서 돌아갔다. 이때가 오전 8시쯤이었다. 안기부는 곧 沈今燮씨 등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도 성공했다.
  
  金洛中씨와 沈今燮씨 등은 과연 안기부에서 혐의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을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한 안기부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공범이 두 명 이상 잡힌 경우는 수사하기가 쉽습니다. 양쪽 진술이 다를 경우 번갈아 가면서 추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무리한 방법을 전혀 쓰지 않아도 빠른 시간 내에 범행 윤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안기부 수사관들에 따르면 金洛中씨는 처음엔 암달러 교환 등 안기부가 확인한 사실만 시인할 뿐 자세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다. 반면 沈今燮씨는 체념한 듯 증거물을 숨긴 곳과 金洛中씨와의 관계를 쫙 털어놓았다고 한다.
  
  안기부의 한 수사관은 이런 말을 했다. 『56년 월남한 沈今燮은 경찰에서 위장귀순 여부를 조사 받았을 때 무지하게 맞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번에도 많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법대로 때리지 않자 뜻밖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암달러 교환 사실을 추궁하자 협조적으로 진술하기 시작했습니다. 沈今燮은 「내가 한 대로 진술하겠다. 나에겐 변호인도 필요 없다」 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沈씨의 진술을 토대로 金洛中씨를 추궁하자 金씨도 하나씩 증거를 숨긴 장소를 말하기 시작했다 한다.
  
  8월 25일 오후 안기부 수사팀은 재차 金씨 집을 찾아가 뒷뜰에 묻혀있는 항아리를 꺼내고 그 밑에 파묻어 둔 1백만 달러 뭉치를 발견했다. 지하의 金씨 서재에서는 한약 병 속에 들어 있는 난수표 등의 통신문건을 찾아내었다. 지령 수신용 단파라디오와 메모리식 송신기 등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안기부 수사팀은 沈今燮의 진술대로 팔당댐 옆 검단산 드보크에서 권총과 소음기, 실탄, 독약앰플 등이 든 플라스틱 통을 발견하였다. 안기부는 이러한 증거 발굴 장면을 사진기와VTR로 모두 촬영했다.
  
  대공 수사만 40여년간 해왔다는 안기부의 한 수사관은 『金洛中 간첩사건은 합법 정당을 통해 북한측 동조 인사의 원내 진출을 꾀했다는 점에서 통혁당 사건을 능가하는 간첩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안기부 또 다른 요원은 이 사건 수사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북한의 거물공작원 임모를 잡지 못한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金洛中과 沈今燮의 진술로 봐서 임모는 한국을 제 집 드나들듯이 다니는 거물간첩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임모는 서울에 머물면서 金洛中 등만을 지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간첩조직과도 만나 여러가지 지시를 내렸을 것입니다. 임모는 다시 서울로 오겠다고 했답니다.
  
  우리는 임모가 金洛中을 찾아오길 기다렸다가 잡을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金洛中을 연행해오자 각 언론이 이 사실을 보도해 버렸습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언론이 金洛中의 연행을 보도한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우리는 잡을 수 있었던 거물 간첩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언론자유와 국가이익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안기부의 다른 고참 수사관은 金洛中 사건 수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金씨가 통일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고 각종 단체에 가담해 있어 자칫 재야단체의 강한 반발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金洛中은 통일원이 연간 3천만 원의 국고 지원을 하는 민족통일촉진회 정책실장으로 매달 열리는 세미나 주최와 봄·가을 통일토론회 개최에 관여했습니다. 이 단체는 통일원의 통일정책 자문에도 응하는 단체입니다. 이른바 보수적 통일단체에 金洛中은 가입해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는 진보정당 재건 모임인 민사협의 고문이었고 반핵평화운동연합 (공동의장 : 손병선 등, 고문 : 계훈제 등)이란 재야단체의 고문이었습니다. 국보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 투쟁본부에는 공동대표로 있었고 그가 실제적으로 설립한 평화통일연구회(회장: 김윤환)에서는 부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중도 사회운동단체인 경실련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金洛中의 발은 이렇게 넓었습니다. 진보와 보수 중도 진영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金洛中을 수사하면서 자칫 「간첩조작 사건」이란 시비에 말려들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민중당 관계자를 제외한 다른 단체에서의 金洛中씨 접촉자를 아직 조사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상의 샴페인 일직 터뜨렸다』
  
  고참 안기부 대공수사관은 이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요즘 각종 대표단이 평양에 갔다 와서 견문기를 쓰는 것을 보면 평양에서 대단한 환대공작을 받았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金日成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金日成은 지금도 공작원을 만나 직접 공작금을 주는 사람입니다. 金洛中 간첩사건은 金日成의 대남 전략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예입니다.
  
  어떤 사람은 안기부가 간첩사건을 또 조작했다 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대공수사요원들은 국내 정치의 세세한 움직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대공수사에만 전념한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안기부는 수사발표 며칠 전부터 각 언론사에 金洛中 간첩사건 수사발표를 하겠다고 예고했었습니다. 이때는 아직 한준수(韓峻洙) 전 연기군수사건이 커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韓 전 군수사건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습니까.
  
  金洛中 간첩사건은 교과서적인 간첩사건이었습니다. 안기부는 金洛中이란 인물의 지명도가 높기 때문에 물증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랫만에 큰 일을 해낸 우리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있다니 가슴 아픕니다. 최근 대공상담소의 신고 건수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것이 아닐까요』
출처 : 월조
[ 2003-06-30, 22: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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