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잠입한 北韓工作 지도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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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잠입한 北韓工作 지도부
  
  北韓 고위층 인사, 서울에 잠입, 상주하면서 지하당 조직 결정지휘
  「대선(大選)때 민주당후보 지지하라」는 암호 지령문도 또 확인
  안기부, 학원·재야·종교·예술·언론계로 수사 확대
  강화도에서 반 잠수정 타고 북한 들락거리고…
  
  김낙중(金洛中) 간첩사건 계기로 사상최대의 비밀 지하당(地下黨)조직 노출
  
  「4개 지역에 지하노동당 조직, 가입자 수 천명 추정」 정부 고위 당국자 설명
  
  <1992년 10월 월간조선>
  
  전국적 지하당 조직 확인
  
  지난 9월12일 月刊朝鮮은 안기부의 金洛中 간첩사건 발표 이후, 은밀하게 확대되고 있는 「남한 내 북한 지하조직」 수사에 관해 정부 고위당 국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사는 익명을 요구한 뒤 『金洛中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단서를 발견하여, 휴전 이후 최대규모의 지하당이 최근에 조직되었고 학원·언론·종교·재야세력·예술계 등 사회 각계각층으로 침투했음을 파악, 이 조직의 적발에 나섰다』 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유명한 북한 노동당 의 대남공작 간부가 서울에 장기간 상주하면서 이 지하당의 조직결성을 지휘했음이 드러났다』고 했다. 이 북한 고위층 인사는 북한 내의 권력 서열에서 손꼽힐 정도의 상위자이며 金洛中을 지휘하기 위해 서울에 장기간 잠복했던 장관급 공작원 임모보다도 상급자인데 그 역시 강화도 부근의 해안을 통해서 서울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당국자는 이 북한인사를 포함하여 적어도 4개조의 북한 공작원이 지난 3년간에 걸쳐 강화도 부근의 서해안을 통해 서울로 잠입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정부 고위당국자는 또 『이 지하당의 고급 간부들은 북한 노동당에 가입했으며. 남한 내 지하당의 성격은 노동당과는 별개의 조직으로 위장하여 남한 내에서 장차 연공(聯共) 정권의 수립을 추진할 때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金洛中이 민중당과 같은 합법적인 정당을 통해서 노출된 활동을 하려고 했던 것을 감안할 때 북한은 지하당과 합법당을 결합시킨 본격적인 대남공작에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그는 『북한의 대남공작 부서는 서울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이 지하당을 통해서 학원·언론·종교·재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현재까지 소음 권총, 북한공작금 유입, 무전기·난수표, 공작장비의 매몰처(드보크)를 확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국자에 따르면 이 지하당은 북한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1995년 통일」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김낙중(金洛中)처럼 오는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라는 지령을 암호방송을 통해 접수했음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또 『지하당 조직원으 로 포섭된 사람 이외에도 포섭을 거절한 인사가 많은데도 단 한 사람의 신고도 없었다』면서 『북한 공작원들이 들락거린 강화도 해안의 경비상태와 연관시켜 볼 때 우리 사회의 대북(對北) 경계태세에 큰 구멍이 나 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안기부에서는 강화도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공작원들과 함께 북한에 갔다온 지하조직원의 신병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식통은 이런 사례를 하나 들었다. 『지하당의 한 조직원이 포섭대상자에게 접근, 「나는 김일성 수령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면서 가입을 종용했다. 대상자는 「내가 뭘 믿고 가입하느냐」고 하자 이 조직원은 북한의 암호방송을 들으면 내 이름이 나온다』면서 이를 확인시켜주니 그 대상자는 가입하게 되었다. 골수 운동권이 아닌데도 이런 식으로 쉽게, 또는 적극적으로 포섭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는 이런 간첩을 신고하는 것을 마치 옛날에 독립투사를 고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깔려 있고 북한은 이런 토양에 스며들고 있다.
  
  1995년 통일 겨냥
  
  이 고위공직자는 『金洛中 조직에 2백 10만 달러란 거금을 제공하고 북한 노동당의 고급간부를 서울로 밀파하여 현지 지휘부를 구축한 점 등으로 미루어 과거의 통혁당, 인혁당과는 차원이 다른 대대적인 혁명기지를 구축, 1995년 통일을 겨냥하고 대통령 선거를 활용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고 『북한이 공해상을 멀리 우회하여 남해안으로 침투하던 방식을 바꾸고 해주에서 출발, 강화도로 침투하는 최단 코스를 잡고 있는 점과 남한에 장기간 지휘부를 상주시킨 점 따위는 우리의 경계태세를 아주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고 지적했다.
  
  이 고위당국자는 『우리는 金日成 체제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생각 하지만 金日成은 이러한 남한의 상황을 유리하게 해석하여 오히려 대남 적화에 자신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좀처럼 뿌리 뽑히지 않는 친공 세력이 엄존하고 있는 것은 체제안보의 면에서 판단할 때 북한의 빈곤이 金日成 체제에 던지는 위협보다도 더 큰 위협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공개적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보다 양비론적인 통일론을 주장하는 세력이 북한의 사주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면서 『북한에 대해선 「경제발전이 더디다」는 식의 완곡한 비판을 가하고 남한에 대해선 본질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양비론 속에다가 친북적인 주장을 묻어놓는 통일론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북한에 의해 조종되는 세력은 북한을 비판하면서도 金日成 부자와 주체사상, 핵개발문제, 인권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 공통점이다』고 주장했다.
  
  경인·중부·영남·호남 4개 지역에 지하당 조직, 수천 명 가입
  
  이 정부 고위 당국자는 9월15일의 추가적인 배경설명에서 수사진행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 안기부는 15일 현재 50여명을 연행, 신문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수사대상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북한 공작부서는 조선노동당 경인지역당, 중부지역당, 영남지역당 호남지역당의 네 개 지부를 조직하고 지역별 책임자도 임명했는데 현재 안기부가 수사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경인지역당으로서 여기에만도 수백 명이 입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국적으로는 적어도 1천 명 이상이 가입한 듯하며 애국동맹으로 불리는 산하조직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조직결성을 저울에 와서 현지 지도했던 북한의 고위층 인사는 1960년대에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지낸 60대로서 남한 출신이며 노동당 부장급 이상의 대우를 받는 인물인데 남북한을 여러 번 들락거리며 수년 동안 이 지하당 조직을 지도했다는 것이다. 이 당국자에 따르면 연행된 50여명은 간첩 또는 국가보안법상의 반 국가단체 가입혐의로 구속 기소될 것이라고 한다. 이 당국자는 『북한의 지하조직과 그 조직의 조종을 받는 합법·비합법 세력을 상대로 한 결전이 벌어질 것이다. 정치적 고려를 일체 배제하고 국체수호의 차원에서 엄정한 수사를 하겠다고』고 예고했다.
  
  숨가쁜 南北첩보 전선(戰線)
  
  강화도로 드나들면서 김낙중(金洛中)을 조종한 北韓 거물공작원 임모와 金洛中을 체포, 임을 유인하려 했던 안기부 수사국의 긴박했던 첩보전쟁 전모
  
  月刊朝鮮 취재반 / 이정훈(李政勳) 기자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지난 9월 7일 안기부가 발표한 「북한 고정 간첩 金洛中 일당 사건 중간수사 결과」 자료와, 월간조선 취재반이 이 사건을 맡았던 안기부 수사관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종합하여 다큐멘터리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구멍 뚫린 해안
  
  안기부 발표문과 안기부 수사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1990년 2월(날짜 미상) 북한의 해주항을 출발한 반(半) 잠수정은 물위로 몸체를 드러낸 채 쾌속으로 달리다가 강화도 근해에서 반잠수했다. 안기부 수사관들에 따르면 잠수정은 길이 9m, 폭 1∼2m 정도인 일종의 소형 잠수함으로 물위에서는 쾌속(40노트)으로 항해할 수 있고 우리쪽 가까이에서는 수면 바로 밑으로 잠수할 수 있는 간첩 침투용 특수선박이다. 잠시 후 반 잠수정은 강화도 앞 바다에 나타났다. 간첩들의 해만 침투원칙은 달 없는 밤, 밀물 때를 이용, 경계가 가장 허술한 곳으로 상륙하는 것이다. 반 잠수정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해안에서 안내원과 북한 공작원 崔모(35세 가량)·李모(27세 가량)를 하선시켰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은 최모와 이모는 해안에 설치된 장애물들을 소리 없이 넘어 부근 산으로 올라갔다. 산7부 능선쯤에서 최모와 이모는 비트(비밀 아지트)를 판 다음 침투복(잠수복)을 벗어 감추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모는 안내원에게 안전신호를 건넸다. 안전신호는 공작원의 침투 상황을 북한 공작당국에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암구호. 보통은 「계획했던 곳으로 안전하게 상륙했다」는 의미의 암구호와 「계획 지점까지는 못 갔지만 일단 침투에는 성공했다」는 암구호 등 두 가지 이상의 암구호로 구성되어 있다. 안전신호는 북한의 공작 당국과 간첩(공작원) 사이만의 약속이어서 안내원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북한 공작당국은 북한으로 돌아온 안내원으로부터 안전신호를 건네 받으면 「공작원의 침투 상황이 어떠한지」와 「안내원의 안내 능력이 어떠한지」를 한눈에 알게 되는 것이다. 다음 날 인근 마을로 내려온 최모와 이모는 시외버스를 타고 강화도를 빠져 나와 서울로 들어왔다.
  
  『당(黨)은 金선생을 높이 평가한다』
  
  최모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김낙중(金洛中)씨(61·호적 나이는 57) 집에 나타났다. 金洛中씨 집에는 평소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고 한다. 金씨가 출타했을 때는 집 안에 들어와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최모가 찾아갔을 때 金洛中씨는 밖에 나가고 없었다. 최모는 金씨 가족에게 부산에서 왔다며 金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잠시 후 시내에 있던 金洛中씨가 별일 없느냐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가족은 부산에서 온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며 전화를 바꿔주었다. 金씨는 『종로2가에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최모는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으니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날 밤 9시쯤 金洛中씨와 최모는 金씨의 서재에서 단독으로 마주 앉았다. 먼저 최모가 정체를 밝혔다. 『그 동안 우리 당에서는 金선생님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선생님의 자서전 「굽이치는 임진강」도 열 번쯤 읽었고 북경으로부터도 말을 들었다. 민족통일을 위해 더욱 힘차게 통일운동을 하자』 「북경으로부터도 말을 들었다」는 말은 金洛中씨가 정책실장으로 있는 통일원 산하 등록단체인 「민족통일촉진회」(이사장 서영훈(徐英勳))가 88년 말 개최한 통일문제 강연회와 관계가 있다. 당시 이 강연회에 북경 사회과학원의 李상문 교수가 참석했었다. 金씨는 李상문 교수를 만나 자신의 저서 「굽이치는 임진강」을 주면서 『내가 지금도 북한을 통일의 주체로서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북한 당국에 전해달라. 민족통일촉진회 주관으로 8·15에 남북의 항일운동 원로 교환 방문을 실현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한 바 있었다는 것이다.
  
  A-3방송 수신 세트 전달
  
  金씨는 90년 2월 초 다시 방한한 李상문 교수로부터 『남북의 항일운동 원로 교환 방문사업을 중국 주재 북한대사가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본국(북한)에도 보고하겠으니 정식공문으로 교류 제안서를 보내달라고 하더라. 「굽이치는 임진강」과 金선생의 입장을 북경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전달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金씨는 재차 최모의 정체를 확인했다고 한다. 『당신이 북한에서 왔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최모는 『이번 사업이 잘못되면 죽을 각오를 하고 독약까지 준비했다』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자살용 독약 앰플(1회용 주사약이 든 작은 병) 두개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1955년 金洛中씨가 단신 월북했을 때 초대소(간첩양성소)에서 보낸 생활과 金日成에게 충성맹세문을 제출한 사실 등을 이야기했다. 金씨는 최모의 결연한 태도와 과거 월북시의 행적을 소상히 아는 것 을 보고 최모가 북한에서 온 대남 공작원임을 믿게 되었다고 안기부에서 진술했다고 한다. 최모는 『동조자를 포섭. 지하망을 구축해달라』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기부의 한 대공 수사요원은 金洛中씨가 최모를 만나 한 순간에 믿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고 했다. 『金洛中은 55년 월북해서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고 위장귀환을 했습니다. 그는 61년 본색을 드러내 안행엽을 월북시킨 바 있고 72년엔 학원간첩단 사건으로 실형을 산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金洛中은 친 북한 사람입니다. 북한의 공작 당국은 金洛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80년대엔 그와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金洛中에 대한 한국 수사기관의 감시가 강력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90년 들어 진보정당 창당 움직임이 있자 북한은 이젠 金을 접선해도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더구나 金은 남한에서는 통일운동가로 알려져 있어 영향력이 클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약 20여일 후인 90년 3월 최모는 金씨를 다시 만나 『우리와 같은 뜻을 갖고 있는 동지 두 명 정도를 포섭, 지하망을 구축하라』는 지령을 다시 전하고 미화 30만 달러를 현금으로 주었다.
  
  90년 4월 초순, 金洛中씨는 최모에게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의 만수무강을 삼가 비오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1990년 4월 초순 김낙중 드림」이란 충성 증표문을 주었다고 한다. 90년 4월 중순 金씨와 최모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 수국사 부근에 상호 연락용 무인 포스트(드보크)를 설치하기로 했다. 崔모는 이날 도장(印章) 속에 감춘 독약 앰플을 金씨에게 주었다. 1990년 9월 하순, 최모는 북한산 골짜기에서 金落中씨를 만나 북한의 난수(亂數· 0에서 9까지 숫자를 늘어놓는 것. 암호통신에 사용) 방송을 들을 수 있는 A-3방송 수신용 라디오 한 대와 난수표 한 조, 해독용 음어표 한 조 등을 주며 A-3지령 방송을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약 7개월 간 서울에서 머문 최모는 그후 북한으로 돌아갔다.
  
  장관급 북한 공작원 임모
  
  1990년 10월 하순. 최모는 장관급 대우의 북한 공작원 임모(65세 가량·임과장으로 호칭)와 함께 1차 침투 때와 같은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해안으로 침투해 서울로 들어왔다. 안기부의 한 수사관은 북한 공작 당국이 임모를 보낸 것에 대해 『이는 金洛中씨의 나이(61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金씨보다 나이가 많은 임모를 보내 지휘를 보다 쉽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임모는 金洛中씨에게 이런 지시를 했다고 한다.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권을 장악하고 합법정당을 통해 혁명사업을 추진하라. 민족통일촉진회등 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단체의 인사를 포섭, 대정부 투쟁을 지속하라. 당신에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당신을 대신할 인물을 조속히 물색하라』 金洛中씨는 먼저 구명조끼 제조업체인 청해실업 사장 심금석(沈今燮)씨(58·호적 나이는 63세)를 포섭대상자로 정했다. 金洛中씨가 沈今燮씨를 첫 번째 포섭대상자로 삼은 것은 두 사람이 36년 동안 호형호제하면서(金씨가 형) 지내온 절친한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金씨와 沈씨가 처음 만난 것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金洛中씨는 단신 월북했다가 돌아와 서울 대방동의 미군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이 무렵 함경남도 단천이 원적지인 沈씨는 북한군 공병여단 소속 병사로 있다가 상관과 불화를 빚게 되자 동료 북한군인 두 명을 죽이고 56년 5월 중동부 전선으로 귀순해 이 수용소에 들어오게 되었다. 혈혈단신의 沈씨는 비슷한 연배이면서도 머리가 좋은 金씨(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월북했다)를 형으로 여기며 따라 다녔다고 한다. 1956년 당시 한국 정부는 귀순자에게 정착금을 제공하지 않았다. 수용소 생활을 마친 沈씨는 서울에서 막노동과 야채행상을 하며 어렵게 지냈다. 金洛中씨는 수용소에서 나온 후 沈씨를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보살펴 주기도 했다. 金洛中씨의 부친은 沈씨의 처지를 이해해 아들처럼 잘 대해 주었다 한다. 1960년 沈씨는 대한귀순자동지회 부회장이 되어 반공을 외쳤고 1976년엔 귀순자 단체인 멸공의거단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 동안 재산을 모은 沈씨는 1980년 이온정수기 생산업체인 「청산」을 경영하다 이태 후 구명조끼 제조업체인 청해실업(주)을 설립했다. 1960년 2월 金洛中씨는 청해실업에 6천만원을 투자하고 이 회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심금섭(沈今燮)을 포섭
  
  金洛中씨와 북한 고위 공작원 임모가 沈씨에게 접근한 방법은 신중했다. 1990년 10월 하순, 임모는 태국의 무역업자로 가장해 沈今燮씨를 만났다. 임모는 제품 구입 의사가 있는 듯이 하면서 청해실업의 팩스번호 등을 받고 『추후 연락하겠다』며 헤어졌다. 임모는 남파 3개월만에 북으로 돌아갔다. 1991년 3월8일, 金洛中씨는 A-3방송을 통해 「沈今燮에게 초청장을 보냈으니 출국토록 지원하라」는 내용의 지령을 받았다. 金씨가 沈씨를 찾아갔더니 沈씨는 『태국 방콕의 로얄양윤사에서 「구명조끼 2천 세트의 구입상담을 하고 싶으니 방콕으로 오라」는 팩스가 왔다』고 했다. 金씨는 沈씨에게 태국으로 가보라고 부추겼다. 91년 4월1일. 沈今燮씨는 구명조끼 견본 50개를 들고 방콕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태국 무역업자로 위장한 임모가 마중나와 있었다. 임모는 沈씨를 방콕 소재 「슈다 파레스」호텔 커피숍으로 데려가 간단한 상담을 한 다음 보다 상세한 이야기를 하자며 그들의 아지트로 안내했다.
  
  아지트에는 북한의 대남공작 담당 부서인 사회문화부 부(副)부장(차관급) 리원국과 북한에 남아 있던 沈씨의 둘째형 심호섭씨(64·전 북한 정치보위부원)가 기다리고 있었다. 沈今燮씨는 당황했지만 이미 그들의 아지트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沈씨는 이들에게 대들었다. 그러자 정치보위부 출신의 형 심호섭은 沈씨를 간곡하게 설득했다. 『북한에는 1백세가 된 어머니(김원현)와 누님(심계원), 큰형님(심준섭)이 아직도 살아 계시다. 어머니가 걱정되지도 않느냐. 이렇게 무정하게 나를 대할 수 있느냐」 둘째형의 눈물어린 설득에 沈씨는 자포자기했다고 한다. 북한에 살아 계시다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린 그는 형에게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심호섭은 『서울로 돌아가 너의 회사 부사장 金洛中의 지시를 잘 들으라』고 했다.
  
  (재북)在北 어머니를 볼모로
  
  沈씨가 마음을 돌리자 리원국이 나서서 『金日成·金正日에 대한 충성 맹세문을 작성 제출하라』 『한국에서 발행되는 문제서적을 수집. 홍콩의 구룡우체국 사서함으로 발송하라』 『심금섭의 고유 암호명은 「임진강 100」이다』 『당신을 방콕으로 다시 부를 땐, 청해실업 앞으로 「샘플과 카다로그를 속히 보내달라」는 팩스를 넣겠다』는 등의 지시를 하였다. 4월2일 沈씨는 다음과 같은 충성 맹세문을 작성 제출했다. 「저는 젊은 나이에 순간적으로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큰 과오를 범하고 남조선으로 탈출한 심금섭입니다. 오늘 수령님과 지도자 동지의 크나큰 은혜로 인하여 형님을 이 머나먼 타국에서 상봉하게 해주신 데 대하여 감사드리며 머리를 숙여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금일 평화통일을 위하여 저의 남은 일생을 다하여 투쟁하겠사오며 앞으로 다시는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1991년 4월2일. 심금섭 올림」
  
  沈今燮씨는 마음을 정하면 주저하지 않고 실행하는 과단성 있는 성격의 사람이라고 한다. 沈씨는 리원국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권총과 독약을 달라고 했다. 리원국은 만년필에 감춰진 독약 앰플 두 개와 미화 3천 달러를 주었다. 4월6일 서울로 돌아온 沈今燮씨는 金洛中씨를 만나 방콕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다. 91년 9월 하순, 沈今燮씨는 방콕으로부터 「샘플과 카다로그를 속히 보내주시오」란 팩스를 받고 金洛中씨에게 알렸다. 金씨는 자신이 미국 카네기재단에서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폭격 불가를 주장한 연설 내용과 민주당과 민중당의 합당 여부에 대해 중앙당이 지침을 하달해 줄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리원국에게 전하라고 했다.
  
  91년 10월8월. 방콕으로 간 流씨는 북한 공작원에게 金洛中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북한 공작원은 沈씨에게 「金正日 지도자의 혁명투쟁 지침」 등 8권의 책으로 사상학습을 시켰다. 10월15일 沈씨는 은서(隱書)를 쓸 수 있는 분말 잉크와 은서를 현상 할 수 있는 시약, 공작금 2천 달러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편 金洛中씨는 70년대 고려대 노동문제 연구소에 함께 있었고 72년 학원 간첩단 사건으로 함께 수감되기도 했던 평화통일연구회(金洛中씨가 만든 연구소)의 사무총장 노중선(盧重善)씨(52)를 90년 10월부터 포섭해 남북한 통일정책 자료 수집 임무와 북한으로의 무전연락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90년 후반기는 88년 말 장기표(張琪杓)·이우재(李佑宰)씨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진보정당 결성 움직임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金洛中씨는 애초에는 진보정당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90년 6월21일 민중당 창당발기인대회가 열렸을 때에도 『나는 정당생활보다 각계를 두루 다니면서 남북 통일문제에 대한 강연과 저술을 하는 게 생리에 맞다』고 말했다는 게 안기부측의 주장이다.
출처 : 월조
[ 2003-06-30, 22: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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