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행복과 김일성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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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그때 그 사람 박정희. 나는 박대통령의 죽음을 어느 여대생 피살사건수사현장에서 들었다. 박대통령의 철권통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였지만 그의 유고(有故) 소식에 접하는 순간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부가 다 그렇게 가다니…하는 인간적인 동정심과 함께 한 시대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역사적 비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박정희라는 이름 그 자체가 우리의 한 시대였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10.26사건은 이제 11년 전의 역사가 되었다. 역사란 흔히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10.26사건을 1985년 현재의 감각으로 분석하는 것과 1990년 현재의 시각으로 평가한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삼국지를 10대 때는 누가 가장 싸움을 잘 하는 장수인가라는 관점에서 주로 읽게 된다. 40대에 읽으면 정치나 권력투쟁의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삼국지를 그렇게 이해할 만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10.26사건에 대해서 몇 권의 책과 많은 기사를 썼던 나도 시간이 흐를수록 관심의 방향이 바뀌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초기에는 그 사건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집중적으로 취재했었다. 사실관계에 대한 규명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하는 요즈음에는 '10.26사건이 없었다면…' 하는 가상을 자주 하게 된다. '자동차가 없었다면…'하고 가장해볼 때 자동차의 영향력을 실감 있게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다.
  
  '10.26사건이 없었다면 사태는 어떻게 발전되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추리해볼 만큼 최근 몇 년 사이의 경험이 쌓였다. 역사적 가상론을 풀어가는 중요한 힌트인 그 경험이란 10.26사건 뒤 11년간 우리사회가 겪었던 변화이다. 괄호의 앞뒤에 있는 문맥으로써 괄호안에 숨어 있는 단어를 찾는 것과 같은 풀이법이다. 그런 추리의 결론은 10.26사건이 박정희란 개인을 위해서도,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이 1979년에 권력구조의 개편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박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려는 준비였다고 확대해석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손질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경신이 형식상 가능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큰딸 근혜(槿惠)씨에 따르면 박대통령은 최규하(崔圭夏) 당시 국무총리를 후계자로 검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박대통령이 진정으로 권력을 인계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문약한 최씨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도 박정희가 살아 있는 한 실권은 그의 손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12.12사태 뒤에 우리가 알 수 있었듯이 법률적인 권한과 물리적 권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대통령은 5.16쿠데타, 3신개헌, 10월 유신으로 세 번이나 집권기한을 연장했던 혁명가였다. 그런 변칙의 부담 때문에 혁명가는 절대로 스스로 물러갈 수 없는 것이다. 10.26사건이 없었더라면 박대통령 정권은 민중봉기나 군부쿠데타에 의해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10.26사건 열흘 전에 터진 부마사태는 박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점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의 한 핵심간부는 '1980년 봄에는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런 시위에 대한 진압은 군을 동원한 강경책이었을 것이다. 국민의 군대인 한국군이 시위군중을 상대로 작전을 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루마니아사태의 예에서 보듯이 결국에는 군도 국민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대통령이 차우세스쿠와 같은 종말을 맞았을 가능성도 높다.
  
  김재규(金載圭) 당시 정보부장이 박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데는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을 감싸고도는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가장 큰 동기로 작용하였다. 그외에 약간의 정의감과 민주주의적 신념도 끼여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부하의 손에 죽음으로써, 또 그 부하가 대통령에 충성하는 사람들에 의해 체포. 단죄됨으로써, 박대통령은 대다수 국민들의 애도 속에서 한 시대를 이끌고 무덤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뒤 여덟 달의 혼란기를 거쳐 한국의 1980년대는 전두환(全斗煥)이란 새 기수의 손에 의해 개막되었던 것이다. 박대통령의 행복은 민중의 손에 죽지 않고 부하의 손에 죽어 영웅이 되었으며 시대적 사명이 끝남과 동시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는 점이다. 1960년대요 70년대의 견인차역할을 하였던 박대통령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발전에는 짐이 되었을 것이다. 권위주의체제의 경직성, 중화학공업의 과잉투자, 물가고, 민주화욕구의 분출을 그는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가 지도자를 추월하여 앞서 달리기 시작하면, 지도자는 하차하든지 그 시대를 후진시켜야 한다. 박대통령의 위대한 영도력에 힘입어 눈부시게 성장한 한국사회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대통령이 자신을 개혁하여 기민하게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대통령이 배고픔의 욕구를 해결해주자 민중은 정신적 자유에 눈뜰 만큼 여유를 갖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이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적합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성공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박대통령이 비록 부하의 총탄에 갔지만 역사는 그가 김일성보다도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고 국민을 위해 유익하였다는 평가를 내릴 것이다. 김일성의 비극은 시대적 사명과 역할을 무시하고 시대를 지배하려 한 데 있다. 김일성이 1970년대에 퇴장했더라면 오늘날이 북한은 좀더 나은 상태일 것이다. 김일성은 장기집권으로써 시대의 부담이 되었고 그 시대를 후진시키는 역작용을 하게 되었다.
  
  시간의 지배를 받게 돼 있는 인간이 시간을 지배하려고 용을 썼으니 그 폐해는 북한 동포에게 전가되고 만 것이다. 정치인이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스스로 물러가는 결단일 것이다. 혁명가나 독재자일 경우, 구조적으로 그런 결단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 정치인이 물러나야 할 결정을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서 대신 해준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한 지도자가 시간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폐륜아, 또는 의인으로 엇갈려 있다. 그런 평가는 결국 주관적인 문제이겠는데, 역사의 거친 손길은 악인을 통해서도 선행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이다.
  
  박대통령의 절약생활
  
  고 박정희 대통령은 공짜를 매우 싫어하였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통령 경호차가 요금을 내지 않고 지나가면 경호실장을 혼냈다. 그 뒤로는 반드시 경호 선도차에서 대통령 일행의 통행료를 한꺼번에 지불하곤 했다. 박대통령은 옷가지와 구두를 꼭 돈내고 맞추어 신고 있었다. 와이셔츠는 삼도물산, 트레이닝복은 한일합섬, 양복은 세기양복점, 구두는 금강제화의 제품을 썼다. 박대통령은 말년에 축농증 수술을 받고 담배를 끊었다. 몸무게가 4kg쯤 불어 64kg쯤 되었다. 헌바지의 허리쪽을 늘리는 수리를 해서 계속 입고 다녔다.
  
  꼼꼼한 성격의 박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자로 허리를 잰 다믐 부속실 직원을 불러 『요 만큼만 늘리라』고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단순한 스타일의 복장을 좋아했다. 양복 웃옷은 뒤에 한 줄로 가른 것을 입었으며 구두도 고전적인 투박한 형식이었다. 늘 국산시계를 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박대통령은 칼국수를 즐겨 먹었다. 점심의 태반은 국수로 때웠다고 한다. 반찬이라야 김치, 깍두기 정도로 단출한 칼국수점심이었다. 박대통령에게 초대받아가면 배고프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요리사들이 칼국수에 새알크기의 쇠고기덩어리를 서너개씩 넣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어린 시절 선산에서 즐겨 먹었던 비름나물 비빔밥을 그리워하였다. 청와대직원들은 비름나물을 구하기가 어렵자 청와대 터밑에 비름나물을 심었다. 박대통령은 간식을 거의 먹지 않았으나 커피를 좋아했다. 박대통령은 우유나 스테이크 같은 양식을 싫어하였다. 우유를 마시면 설사를 했다. 그의 체질이나 취향은 너무나 한국적이고 농촌적이었다. 박대통령이 최후의 반찬자리에서 양주를 마셨기 때문에 시바스 리갈과 같은 양주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오해다.
  
  박대통령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 양조장에서 만든 빽빽한 막걸리를 가장 즐겨 마셨다. 대통령부속실직원들은 대통령이 막걸리를 과음할까봐 신경을 썼다. 대통령이 『더 가져오라』고 하면 『준비한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박대통령은 아쉬운 듯 『거, 좀 더 받아놓지. 지금 차 보내면 안 되나?』라고 불만스레 했다. 부속실 직원은 내친 김에 『지금 차를 보내도 두 시간 기다려야 합니다. 교통도 막히고요』라면서 버티었다. 물론 대통령의 건강을 위한 고집이었으므로 통했을 것이다.
  
  박대통령은 말년에 가서는 골프를 자주 치지도 않았다. 대통령 행차 때문에 교통이 통제되고 수십명의 직원들이 후일에 동원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베드민턴으로 바꾸었다. 박대통령의 에너지 절약은 몸에 배어 있었다. 집무실에 붙은 화장실의 전등을, 화장실 사용시에만 켰고 변기 물통 안에다가 벽돌 한 장을 집어 넣게 하였다. 벽돌 한 장 만큼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1979년에 제2차 석유파동이 밀어닥치자 박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의 에어컨 가동을 중단시켰다. 그 더운 한 여름에도 창을 열어두고 부채와 선풍기로 견뎠다. 겨울의 청와대는 대통령의 지시로 난방기 가동이 제한되어 늘 한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박대통령은 생활의 지혜를 알고 있는 이였다. 1979년 6월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부속실 직원과 함께 집무실을 회담장으로 바꾸는 의자배치를 직접 했다. 탁자를 옮기니까 탁자에 눌려 있던 카피트가 보기 흉하게 흔적을 드러냈다. 직원들이 난감해하고 있으니까 박대통령은 물주전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카피트의 눌린 자국을 따라 물을 주었다. 조금 있으니까 물을 먹은 카피트가 되살아나 보기 흉한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의 몸가짐도 늘 절제돼 있었다. 차를 타고 갈 때도 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집무실에서도 소파에 잘 앉지 않고 ㄴ자 모양의 회의용 의자에 꼿꼿이 앉아 일을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대통령의 머리에는 자나깨나 국정에 관한 구상이 들어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건설, 포항종합제철 건설, 그린밸트 설치, 경주개발 등은 순전히 박대통령의 개인적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이었다. 우리는 지금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건설에 반대했던 정치인들의 과오에는 관대하고 박대통령의 치적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한 그런 분위기에 살고 있다.
  
  6.25 전쟁으로 잿더미에만 남은 국토에다가 이 정도의 스케일과 통찰력으로 현대한국의 터를 듬직하게 잡아놓은 박대통령의 개발전략을 요사이는 동구권에서 더 열심히 연구하고 배우려 한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탐모원려(探謀遠慮)의 인간이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고민을 진지하게 했었다는 점이다. 어떤 주제를 붙들고 고민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고 길도 뚫리게 된다. 절약생활도 쇼로서가 아니라 진실되게 함으로써 보통사람들의 애환을 같이 느껴보려고 애썼다.
  
  한국 민중의 정서에 늘 밀착돼 있었던 박대통령은 단점도 공유하였다. 그 단점을 용기있는 지식인, 학생들, 정치인들이 과감히 지적하였고, 그리하여 박대통령의 더 큰 실수를 막아주기도 하였다. 그런 견제가 없었던 북한에서는 「혼자만 즐겁고 만인이 괴로운」김일성신정(金日成神政)체제가 정치와 사회와 경제를 망쳐버렸다. 거의 10대 1로 벌어진 남북한의 국력격차는 바로 박정희와 김일성이 했던 고민의 크기 차이이기도 하다.
[ 2003-07-01, 15: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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