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코스모폴리탄, 오일맨 이길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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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코스모폴리탄, 오일맨 이 길원 씨 - 정글과 대륙붕을 누비며 천착, 천착, 정착…
  
  '이 세상의 갖가지 직업 가운데 가장 남성적인 직종은 무엇일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석유 개발 현장 기술자라고 말할 것이다. 군인이라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군인은 전장에서만 사나이다워질 수가 있다. 평상시엔 가장 따분한 직업일 것이다.
  
  석유 개발은 전쟁 다음으로 재미있고 박력이 있는 게임이라고 한다. 석유 개발은 규모면에선 '지상 최대의 사업'이라고 한다. '최대의 도박'이라고도 한다. 석유 개발 가운데서도 해저 석유 개발 현장이 더 야성적인 일자리일 것이다. 해저 석유 기술자 가운데서도 구멍을 뚫는 굴착 기술자가 가장 정수일 것이다. 남성다움의 모든 요건을 그는 갖추고 있다.
  
  망망대해의 해상 성채에서 해저 밑 수천 미터를 돌관(突貫)하는 집념, 하루에 1억 원을 날리는 거창한 규모, 성공률 2퍼센트의 대도박, 폭발·침몰의 위험과 늘 벗하는 극한 상황, 범지구적인 기동성, 분·초를 다투는 임기 응변의 문제 해결 방식, 첨단 과학의 종합 전시장, 기술자의 의지가 아직도 조직을 주무를 수 있는 인간적인 작업…
  
  이 해저 시추의 고급 기술자 세계는 또 흑인들이나 동양인이 가장 끼어들기 힘든 직종으로도 꼽히고 있다. 싱가포르의 한국인 이 길원 씨는 바로 이 해저 굴착의 빼어난 기술자다. 작고 단단한 몸매에 번득이는 눈매를 가진 40대 초반의 그는 미국의 종합 석유 개발 회사인 드레서 사의 싱가포르 지사 굴착 상담역(Drilling Adviser)이다.
  
  인하 공대 광산과를 나와 스웨덴에서 유학한 뒤 이 회사에 취직, 10여 년 동안 그는 필리핀 근해, 자바의 정글, 남태평양, 인도양, 벵갈 만, 네팔, 태국, 말레이시아 등의 시추 현장을 누비며 살아왔다. 시간의 반은 싱가포르, 나머지 반은 바다나 ㅁ?속 시추 현장에서 보내고 있다.
  
  그의 회사가 시장으로 삼고 있는 동남아시아에는 '81년 말 현재 76척의 시추선(세계 전체의 약 20퍼센트)과 2백6기의 육상 굴착 기계가 가동하고 있다. 이들 시추 현장에 그의 회사가 대거 참여하고 있고 끊임없이 사고가 생긴다. 구멍이 막혔다, 갱정 순환 이수(泥水)가 지층 속으로 유실되고 있다, 구멍 속으로 기계가 빠졌다, 가스가 폭발했다 등등.
  
  현장에서 이런 사고가 터지면 싱가포르 시내 쇼 빌딩 19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 온다. '어떻게 하오리까?' 대부분의 경우 이씨는 상황 설명을 듣는 그 즉석에서 대책을 해답해 준다.
  
  '자료를 찾아보겠다느니, 연구해 보겠다는 식의 대답은 안 통합니다. 시추 경비의 지출은 시간제인데 하루 10만∼15만 달러나 됩니다. 해답을 늦추면 수백, 수천만 원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10년간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에서 즉석 응답이 바로 나와야 합니다. 정히 어려우면 즉시 헬기를 불러 현장으로 뜁니다.'
  
  인도의 오지에서 남태평양의 시추선까지, 그는 수십 군데의 현장을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그에게 있어서 출장이나 외출은 보통 몇 개의 국경과 바다를 건너뛰는 것이다.
  '동양인으로 백인들과 대등하게 놀려면 갑절을 더 일해야 할 겁니다. 다행히 한국인의 강점은 인내심 많은 아내입니다. 외국 석유 기술자들은 이혼을 당하거나 아예 독신인 경우가 매우 많아요. 시간의 반을 아내와 떨어져 보내야 하니 그렇게 되는가 보아요. 가정이 없는 그들은 뭍에 내리면 술을 퍼마시며 세월을 보내지요.'
  
  싱가포르는 동아시아 시추 현장의 전방 지휘소로서 대부분의 개발 회사들이 여기서 인력, 자재, 정보를 모아 현장에 대주고 있다. 한국의 대륙붕, 포항 시추 때도 싱가포르에서 기술자들과 자재를 조달했다. 싱가포르에는 세계의 방랑자들인 이런 오일맨이 독특한 계층을 이루고 있다.
  
  싱가포르의 오일맨은 5천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석유 기술자 협회를 만들어 임페리얼 호텔의 '페트롤리움 클럽' 등에서 끼리끼리 어울리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보가 교환되지요. 석유 지질 정보는 극비 중의 극비라고 합니다만 그것도 결국은 인간을 통해 주고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에 앉아서 지난해 7소 구역 시추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읽고 있었습니다.'
  
  석유 산업은 조직이나 투자액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에선 '인간의 사업'(People's Business)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인간 관계를 통한 공작이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싱가포르에는 석유 회사의 보급 기지들이 많은 탓으로 해서 관련 산업도 번창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조선소들은 중형 선박들과 갑판 승강식 시추선을 전문으로 만들어 떼돈을 벌고 있다.
  
  '81년 말 현재 싱가포르에서 건조중인 시추선은 모두 36척으로 일본(35척)을 누르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중공과 북한에서도 여기에서 석유 개발 장비들을 사가고 있다. 지난 '79년에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에드나스타'라는 갑판 승강식 시추선을 2천7백만 달러에 사들여 서해 북쪽에서 자력 시추를 하고 있다. 초기에는 싱가포르에 지사를 둔 미국의 업쇼어 굴착회사에서 미국인이 아닌 서양 기술자들을 북한에 보내 굴착을 지도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독자 시추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석유 개발 장비의 판매를 금하고 있어 북한은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북한이 해저 갱구에 설치하는 폭발 방지 기계(BOP)를 싱가포르에서 사가려 했으나 뜻대로 안 되자 일제 중고품을 구입하려 한다는 얘기가 나돌아 관심을 모았다. 해저 시추에 경험이 많은 이곳의 '도사들'은 북한이 주문한 폭발 방지 기계가 고압 가스층을 뚫을 때 필요한 것임에 주목하여 북한이 고압 천연 가스층을 발견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이 길원 씨는 10여 년 동안 열대 생활을 한 탓으로 피부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처럼 새까맣게 타 한국에 오면 외국인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한 달 관리비가 2천5백 달러인 7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이씨는 싱가포르에서 성공한 대표적 한국인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골프 시합에서 '홀 인 원'(단 한 번에 공을 구멍에 집어넣는 것)을 기록, 신문에 나기도 했다.
  
  그는 국적 때문에 중공의 시추 현장엔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비가 가장 많이 온다는 앗삼 지방의 현장에선 '이 지방에 온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기자의 인터뷰를 당한 적도 있다. 이씨 이외에도 굴착 기술자 서 승철 씨가 드레서의 말레이시아 지사에서 일하고 있고 김 영렬 씨가 에소의 말레이시아 현지 회사에서 장기 계획 담당관으로 뛰고 있다.
  
  <1982년 6월 마당>
출처 : 마당
[ 2003-07-01, 15: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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