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통일, 민주 - 한국 민주주의 3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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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8일 주한 미국 대사 워커 씨는 한미 수교 1백주년 기념 강연을 조선 호텔에서 했다. 제목은 '한미관계―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 이 강연에서 워커 대사가 한국의 국수적 민족주의 성향을 '도전적'으로 비판했다 하여 문제가 되었다. 몇몇 논객들은 '민족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민정당 국회의원 남 재희, '조선일보' 10월1일치), '반민족주의의 반세계성'(서울대 교수 김 학준, '서울신문' 10월1일치)등 격앙된 제목의 워커 대사 비판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체로 워커 대사 비판세가 대중 매체를 휩쓰는 가운데 경희대학교 김 성식 교수는 '동아일보'(미국 공보원과 함께 그 강연회의 공동 주최자)에 '올바른 한국 민족주의'란 제목의 글을 썼다. '독선적, 소아병적,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해 경고한 내용으로써 워커 대사의 강연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때 아닌 '민족주의 토론'은 국회 본회의의 질문과 답변(총리)에서도 몇 차례 등장하기도 했다. 워커 대사의 속셈이 처음부터 그랬었는지는 모르나 그의 강연은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이나 찬반 견해를 새삼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제 값어치를 다한 셈이 되었다. 문제의 그 연설 대목은 외교관 특유의 '애매성'을 무기로 감싸고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풀 수도 있고, 이 쪽을 가리킨 것 같기도 하고 저 쪽을 가리킨 것 같기도 하고, 현실론 같기도 하고 가상론 같기도 하여 빠져 나갈 구멍도 매우 넓은 그런 연설문이었다.
  
  몇 마디 안 되는 이런 연설문을 놓고 우리끼리 '옳다'그르다'고 말싸움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아니,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내용 같기도 하다. 다만 워커 대사의 그 발언이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면 그는 의미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 되겠다. 실제로 워커 대사의 연설에 대한 한국 식자들의 찬반론 속에는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이견(異見)보다는 공통된 문제 의식이 더 뚜렷하게 눈에 띄고 있다.
  
  김 학준 교수는 국제 관계의 상호 의존성만을 내세워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태도는 '강대국 중신의 국제 정치, 국제 경제, 국제 법 질서에 대해 그대로 묵종하라는 오만한 권고와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또 '민족 건설의 작업도 끝내지 못한 전(前) 통일의 단계에 있는 우리 겨레를 향해 민족주의를 버리라고 하는 것은 민족적 자살을 권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지적한 그는 '우리 겨레는 통일 지향적 민족주의의 정열을 깊이 간직한 채 자주 민족 국가의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역사 발전의 단계에 있다'고 했다.
  
  김 성식 교수는 '아무리 민족주의가 분단국의 통일을 위해 불가결의 요소라 해도 그것이 민주적이 되지 못하고 통치자의 전유물이 될 때 그 민족주의는 독재 정치의 유효 적절한 방편이 되기 쉽다'고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동의어이며, 소수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다수의 시민적 민족주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의 견해는 결코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선 안될 것이다.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김 학준 교수는 강대국 중심의 논리―그것도 결국은 그들 나름대로의 민족주의이지만―가 가진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강조했고 김 성식 교수는 한국 민족주의가 품고 있는 위험성을 강조했을 뿐이다. 두 사람은 결국 한국 민족주의의 안과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도전'을 지적한 데에서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의 글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민족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과 과제가 부각된다. 그것은 자주, 통일, 민주의 세 마디 말이다.
  
  자주는 국제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독자적인 행동 능력을 갖추는 것을 뜻하지만 이것이 국제주의를 부정하는 폐쇄적 고립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통일은 아직도 반쪽 상태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민족주의를 온전한 것으로 재탄생시켜 줄 산모의 힘을 가졌지만 그것(민족주의)를 위해 민주주의가 희생될 수 없음도 분명한 이치다. 자주와 통일의 성취로 한국의 민족주의가 완성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민족주의에 월계관을 씌어 주지 않는 한 그것은 진짜 민족주의로서 공인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60년대와 '70년대에 민족주의란 낱말의 홍수 속에서 살았다. 민족주의는 때론 우상으로, 때론 구호로, 때론 정치(또는 외교)의 도구로 이 땅에 범람하였다. 민족주의는 평범한 우리 서민들이 공감하기엔 너무 벅찬 것이었다. 너무 거창하고, 너무나 관념적이고, 너무나 애매하고, 너무 뜨겁기만 하였다. '애국심'하면 충무공을 떠올리듯 '민족주의'하면 플래카드의 물결, 규탄 대회의 함성, 데모대의 화형식을 연상하며 살았다. '민족주의'라 하면 열(熱).혈(血).극(極)과 같은 글자들이 생각 나는 것은 웬일일까?
  
  우리의 민족주의가 처한 좌표를 읽기 위해서는 어려운 정치 이론이나 사상 체계까지 등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글자 그대로 '민족'이 중심이 되는 민족 위주의 사사일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군주가 곧 국가였던 절대 국가 시대의 유물이 아니며 국가가 민중을 압도했던 파시즘식의 국가주의와도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민족주의의 중심엔 민족이 도사리고 있으며 각 민족주의의 성격은 이 '민족'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19세기의 민족주의처럼 '민족'이 '부르조아지'와 동일어로 쓰였을 때 그것은 일부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에 머물러야 했다. '민족'이 그 국가의 다양한 구성원을 모두 포괄할 수 있을 때만, 그 다양한 구성원의 이해 관계를 민주주의 방식으로 조화시킬 수 있을 때만 그 민족주의는 진짜가 될 것이다. 자주와 통일이 민족주의의 대외적 필수 조건이라면 '민주'는 그것의 대내적 필수 조건인 것이다.
  
  민족주의는 국가라는 조직체가 아니라 민족이란 인간의 집단을 그 대상으로 삼는 사상인 만큼 집단적 인도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다. 즉, 민족주의의 목표는 인간이며 인간의 존엄성이며 인간다운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민족주의는 우리의 위에서 군림하는 게 아니고 우리 곁에서 공존하는 것이라야 한다. 민족주의의 정의가 이럴진대 민족주의가 서민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엄청난 그 무엇'으로 인식되어져 왔다는 것은 그 사회의 민족주의가 정도를 벗어났다는 얘기와도 통할 것이다. 민족주의가 소수 집단의 전유물이었던가, 민족의 공유물이었던가? 민족주의가 흥분제로 쓰였는가, 각성제로 쓰였는가? 민족주의가 우상으로 인식되었던가, 민족 이념의 실체로 공감되었던가?
  
  남한과 북한의 대결을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본다면 우리의 무기는 민족주의일 터이다. 이 민족주의는 국민의 꿈과 삶의 가치를 수렴할 수 있는 구체적 힘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민족주의는 미래의 꿈속에서 뿐 아니라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자연스런 행동과 생각의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민족주의는 구호, 함성, 흥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어야 할 것이다. 이 민족주의는 허공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터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민족주의가 '민주'에 바탕해야 한다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론에 속할 것이다. 흔히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일 독립 운동의 과정에서 성장하여 저항성이 강하다고 한다. 이 저항성이 국제주의와 이성적 사고(思考)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 실례로써 같은 외국어라도 영어는 허용하면서 일본어나, '철학(哲學)'과 같은 일본식 한자어에 대한 한국인의 기피태도가 강한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우리 것을 사랑함으로 너희를 미워해야겠다'일 수는 없다. '우리 것을 사랑하기에 남의 것도 존중한다'는 것이 진짜 민족주의의 정신일 것이다. '가장 순수한 지방성은 곧 가장 순수한 세계성으로 통한다'는 말도 같은 표현이 될 터이다. 이런 툭 터진 민족주의는 물론 우리의 이상이다. 그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세 가지 과제―자주.통일.민주―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런 현실의 조건이 아무리 각박하더라도 우리의 지향점인 저 민족주의의 이상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우리는 내일의 꿈을 위해서 오늘날은 편협해도 좋다는 유혹을 끊임없이 뿌리쳐야 할 것이다.
  
  <1982년 11월 마당>
출처 : 마당
[ 2003-07-01, 15: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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