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마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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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출근길의 택시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택시 운전사가 뒷자리에 앉은 나를 향해 느닷없이 물었다.
  '손님 교회 다니십니까?'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교회에 열심히 나갔었고, 나의 가족들은 지금도 교회에 다니고 있으므로 '교인이 아니요'라고 말하기도 뭣했다.
  '그런데, 왜 묻지요?'
  '선생님께서 찬송가를 부르셔서 교회에 다니는 줄 알았어요.' 아하, 비로소 나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나는 '마이 웨이'(My Way)를 흥얼거렸던 것이다. 그때 나는 한 '유명한 무명가수'가 지정해준 이 노래를 연습하는 데 심혈을 다 쏟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이 웨이'를 찬송가로 알아들었다니…. 나는 슬퍼졌다. 노래로 해서 내가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겠지…'하는 자만심이 막 생기고 있을 때였기에 운전사의 코멘트는 나의 여린 심성을 강타하였던 것이다. 나의 '노래 역정'을 뒤돌아 볼 때 이만한 수준까지 내가 묵묵히 더듬어 올라온 것이 그래도 대견스럽게 생각되던 때였는데 나는 다시 쓴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두 가지 공포에 가위눌리며 때로는 노예적인 굴종의 순간들을 보내어야 했다. 술과 노래. 소주한 잔, 맥주 한 병은 나에겐 치사량에 가깝다. 이 한계를 넘어버릴 때는 위경련이 엄습하여 한 여섯 시간 동안 나를 떼굴떼굴 뒹굴게 하고 고통으로 울부짖게 한다. 6·25 전란 직후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우리 세대가 거의 그렇듯, 나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해 '콩나물 대가리'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 돼버렸었다. 술자리에 따라가든지, 납치돼 가든지 했을 때 남은 흥에 겨워하는데 나는 불안에 떨면서 몇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권하는 술잔을 피하고, 억지로 받아 둔 술?살짝 쏟아 붇고, 술잔이 돌아오면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슬쩍 떠넘기고… 이런 비열한 짓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 소굴에서 생활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다.
  
  여기에다가 노래를 억지로 시키는 분위기로 흐르면 나는 정말 초죽음이 되는 것이었다. 나의 노래 차례를 기다리는 심정은 꼭 교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그것과 같았다.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가슴은 뛰고, 얼굴은 벌개지고, 다리에서는 힘이 빠지고… 꿈꾸듯 몽롱한 상태에서 앞으로 나가서 발악적으로 한 곡 뽑기 시작하면, 노래 부르는 그 1~2분이 왜 그리고 길고 긴지. 그리고 노래를 끝냈을 때 터지는 웃음과 야유와 '열창이다!'는 거짓찬사 속에서 나는 '휴유!'하며 비로소 안도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었더라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어느 날 신문 사회면에서 '노래 못 부르는 데 비관, 투신자살'이란 제목의 기사를 읽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오욕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결코 좌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후천적 음정 조정기능마비증세'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한라산을 기어오르는 신체 불구자처럼, 불가능에 도전해보기로 하였다. 어느 야당 정치인이 입버릇처럼 뱉아내던 '나는 무엇이 되는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에 더 무게를 둔다'는 말은 나를 고무하였고, 국민학교시절에 읽었던 헬렌 켈러의 이야기도 내 마음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렇다. 인간은 더 나빠질 수 없는 한계상황까지 떨어졌을 때 비로소 불굴의 용기가 살아나는 법이다. 나는 노래를 익히기로 하였다. 그 결심은 1978년 여름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먼저 노래 테이프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양희은의 테이프를 다 사들였다. 그리고는 틀기 시작했다. 등대지기, 세노야, 아침이슬, 그리고 나의 18번이 될 운명이었던 상록수…. 나는 양희은의 거침없는 목소리와 청량한 창법에 감동하고 말았다. 언젠가 양희은을 인터뷰하여 멋진 기사를 쓰고 싶은 충동이 용솟음쳤다. 특히, 상록수는 3절로 되어 길지만 들을수록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환희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79년 10월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뒤 민주화의 꿈이 이루어질 것 같았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손으로 뽑은 새 대통령이 취임식을 할 때는 꼭 이 노래를 양희은이 부르도록 취임준비팀에게 건의해야겠다고. 듣고 듣고 들은 뒤 나는 부르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핍박은 먼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내는 정색을 하고 '소음공해'를 끝내달라고 요구했다. 나의 두 딸도 아빠 편이 아니었다.
  '아빠, 거위 소리 그만 내세요!'
  나중에는 아이들이 나를 '조일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경말씀의 '선지자는 고향에서 핍박받는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나는 이 첫 번째 난관을 우회전법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우선 나는 목욕탕을 연습장소로 택했다. 노래책을 갖고 들어가 수세식 변기에 걸터앉아 수돗물을 틀어놓고서 짧으면 30분, 길면 한 시간쯤 목놓아 노래를 불렀다. 이런 식으로 연습을 거듭했지만 원체 기본이 안 돼 있어 전혀 늘푼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86년 여름 서울에서 한 여가수를 만나면서 나의 노래실력이 혁명적인 비약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이미 상세히 기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든 지금은 어느 자리에 가든지 누가 노래를 안 시켜 주나 하고 은근히 기회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변했다. 우리 회사 안에서는 내가 주동이 돼 뽕짝 클럽을 조직, 월례발표회를 석촌호수 근방에서 개최하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음치라고 부르지 않는다. 가수로부터도 박수를 받을 정도가 되었다. 불가능한 것처럼 뵈던 것에 도전하여 드디어 승리했다는 성취감에 도취하여 자만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나다. 인간은 사람을 만나듯 노래를 만난다. 살다가 보면 숱한 노래들 가운데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노래가 나타난다. 인연이 있는 노래가 있는 것이다.
  
  정훈희가 1967년에 처음 불렀던 이봉조 작곡의 안개. 나는 그때 경북의 어느 산꼭대기에 있는 공군 부대에서 일등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1월의 추운 날 영주로 외출을 갔다가 군트럭을 타고 부대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 사병이 이 노래를 되풀이, 되풀이 부르는 것이었다. 어두워지는 싸늘한 하늘가로 울려 퍼지던 '안개'의 애잔하면서도 청아한 가락은 오들오들 떨고 있던 한 졸병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이 안개는 곧 우리 부대의 주제곡처럼 되었다.
  
  해발 1천2백m의 산꼭대기에 있는 우리 부대는 구름 속에 있거나 구름 위에 있는 수가 많았다. 안개 속에 휩싸인 산꼭대기의 초소에서 고향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부대내 확성기를 통해서 정훈희의 유명한 음성이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로 이어지면서 점심시간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면서 그리워지는 얼굴들이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안개 속막?퍼져가던 '안개'의 감촉은 졸병들의 심신을 어루만져 주고, 포근히 감싸주었다.
  
  나는 작곡가 김민기씨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를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1970년대는 '아침이슬'로 열리고 '그때 그사람'으로 끝을 맺었다. '아침이슬'은 우리 대중가요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천재의 작품이다. 천재란, 남이 닦아놓은 탄탄대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것보다는 길이 없는 산속에서 오솔길이라도 직접 만들며 남이 한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데 더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아침이슬'이 닦아놓은 오솔길을 그뒤의 대중음악인들이 고속도로처럼 넓혀갔던 것을 우리가 목격한 것은 이 시대를 산 행복이었다. 아침이슬은 찬송가처럼 힘을 솟구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노래다. 비장한 결의를 다지게도 한다. 이 노래가 시위현장에서 그토록 애창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에 이르면 세상사에 집착해 왔던 삶을 훌훌 털어버리고 저 높은 곳으로 비상하는 큰 새의 마음이 된다. 나의 꿈이 있다면 '아침이슬만은 세계에서 가장 잘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겐 아직 도전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프랑크 시나트라가 불렀던 '마이 웨이'(My Way)다. 부를수록 어려운 노래, 그럴수록 더욱 좋아하는 노래다. 나의 음역(音域)에는 좀 무리한 고음부분이 있어 늘 중요한 고비에서 실수를 하곤 한다. 이 노래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가수' 미스 조가 나한테 18번으로 지정해준 곡이다. 미스조의 성의를 봐서도 꼭 나의 노래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날마다 다짐하면서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연습을 거듭해도 제자리 걸음인 것은, 역시 나의 한계를 실감케 하는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오르다가 오르다가 보면 언젠가는 정상에 설 날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잃지 않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마이 웨이'를 계속 부르고 있는 것이다.
  
  <1989년 4월 1일 恒心會報>
출처 : 항심회보
[ 2003-07-01, 15: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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