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해야 소신껏 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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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정직
  
  며칠 전 오후에 시간이 비어 사무실에서 3백m쯤 떨어진 덕수궁에 갔다. 텅 비어 있었다. 나목과 고궁과 빈자리들 속에서 나는 한 40분쯤 있다가 왔다. 혼자서 조용한데 있다는 것이, 서울에서 기자로 생활하고 있는 나에겐 매우 드문 경험이다. 늘 사람들을 만나고 전화를 걸며 복잡한 장소에서 머리를 번잡하게 굴려야 하는 나는 덕수궁에서의 40분간이 속골을 씻어주는 신선한 느낌으로 와 닿았다.
  
  관심의 방향이 주로 남이나 바깥으로 향하던 것이 오랜만에 「나」로 향했고, 흔히 말해지듯 「나를 잠시 되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아온 것이 주로 남을 의식해서, 남을 위해서였던 것 같고 그러다가 보니 남의 시선에 맞추어 행동하는 연극적 생활을 해왔다는 자괴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덕수궁을 나올 때는 『1990년에는 나 자신에 좀더 정직해보자』는 다짐을 하였었다.
  
  사람의 정직성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숫자와 반비례하는 것 같다. 혼자 있을 때보다는 두 사람이 있을 때 조금 덜 정직해지고, 수백명의 청중 앞에서 연설할 때는 그 수백명의 비위를 다 맞추려다가 보니 상당히 덜 정직해지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를 정치인과 종교인을 비교해서 확인할 수 있다. 종교인은 늘 혼자 있는 사람이다. 종교인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절대자(神)란 관계를 기축으로 삼고 행동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과 신의 관계에 종속된다.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정직할 수 있는 직업인은 인간으로부터는 홀로 될 수 있고 神 한분의 눈치만 보면 되는 종교인인 것이다.
  
  정치인은 철저하게 다중을 상대해야 한다. 수백만, 수천만 명을 상대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자니 눈치볼 사람이 워낙 많다. 그러니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사람의 기분을 맞추어주기도 힘든데 무슨 재주로 수백만, 수천만 명의 비위를 다 맞추어줄 것인가. 정치인은 직업적인 숙명으로서 거짓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거짓은 정치인이 종교인 비슷한 이야기를 할 때이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백담사에서 참회하고 있다』고 자랑했지만 지난해 말의 국회증언 때 보니까 참회한 것이 아니라 참고 있었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김영삼 민주당총재는 87년 12.16 대통령선거 전에는 『나는 (권력에 대해) 마음을 비웠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고, 김대중총재도 『나는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좋은 말씀들을 자주 했었다. 대권을 코앞에 두고 동시출마를 하여 국민들이 만들어준 밥상도 차버린 뒤 두 김씨는 그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 모양이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다. 「나는 이렇게 잘났다」는 뜻의 말을 직설적으로 자주 하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되는 사태를 맞고 마는 것이다. 요 몇 년 사이에 나는 「많이 배운 것」과 「사람됨」이 꼭 비례하는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오히려 지식이 많을수록 사기술만 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지난 87년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지역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식인을 나는 단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훈련받은 교수나 변호사나 기자나 지역감정의 포로가 되는 데서는 시정의 서민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지역감정은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능을 자극하는 것인데, 그 본능 앞에서는 논리나 이성이 무력화되는 것이었다. 지식인들이 더 나쁜 것은 자신의 비이성적 행동을 이성적으로 보이게끔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논리화하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지식이 사기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못배운 사람 같으면 『내가 김○○를 좋아하는 것은 고향이 같기 때문이다. 그게 뭐 나빠?』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지역감정을 싫어하지만 김○○님이야말로…』식으로 논거를 세워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를 설득하려 드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문제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불리기를 가장 싫어하고 진보적이라고 분류되기를 바란다. 사석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때는 아주 보수적으로 이야기하면서(그것이 본래의 그이니까) 글을 쓴다든지, 강연을 할 때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듯 엄청나게 진보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만나 그 지식인에게 『사람이 그렇게 2중적일 수 있느냐』고 따지고 들면 한다는 소리가 『분위기 때문에…』이다. 지식인이란 것은 분위기에 관계없이, 또 인연에 관계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해야 제 값을 다하는데 정치인을 닮아 청중과 친구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지성인이 아니라 지식기능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에 가서 이민 와 있는 한국교포들을 많이 만나 보았더니 『미국생활이 고생이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한가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는 것이었다. 『미국에선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배짱대로 살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 즉,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겠다. 이런 점이 미국사람들의 관상에 나타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외국여행 때 외국인들의 관상을 눈여겨 보는데, 미국사람들의 관상은 「어리숙하면서 정직하다」는 인상이었다. 간단히 줄이면 「우직」이다.
  
  일본사람들은 사물을 좁게 깊게 보는 듯하여 진지한 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본 나리다공항의 대합실에서 여러나라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한국인들의 관상에서 「맑지 못한」느낌을 공통적으로 받았다. 얼굴에 내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한 얼굴이니 솔직성이나 정직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한국사람들처럼 일상대화에서 「솔직하게 말한다면」이란 전제를 자주 붙이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솔직하지 못했던」이야기를 평소에 많이 했다는 뜻이겠다.
  
  한국사람들의 가장 큰 단점은 정직하지 못한 점일 것이다. 정직이야말로 모든 도덕률의 기본이다. 정직하지 못한 것에 바탕을 둔 경제발전이나 민주화는 하체가 허약한 운동선수와 같다. 한 외국인은 『한국사람들이 도덕성을 정립하지 못하면 절대로 근대화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거창하게 사회의 도덕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정직성」을 벽돌로 하여 만들어진 건물이다. 그러니 사회적 도덕회복은 「나에 대한 정직」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수백만, 수천만 명을 속일 수 있지만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있으니 「그건 나」이다.
  
  <1990년 2월 동국 사보>
출처 : 동국
[ 2003-07-01, 15:3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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