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의 폭탄증언 15시간(상) - 은하수 실체를 밝힌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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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魯甲 의원의 발언은 능력 있는 호남출신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것』
  
  ―「선거 때만 되면 간첩사건이 터진다」는 것이 당시 金大中씨측의 반응이었습니다. 鄭차장의 설명으로 이해가 되는 것은 북한이 선거철을 이용해 간첩들을 활용하는 바람에 오히려 간첩사건이 선거철에만 터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해하는 측면에서 보면 야당의 입장으로서는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정보와 사건의 배후를 알지 못하고 여야의 불신풍토 속에서라면 야당으로서는 당연히 일리있는 주장일겁니다. 그러나 간첩사건은 절대 시기를 이용해 조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權魯甲의원의 주장대로 안기부의 모든 비밀을 다 빼낼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약 그것이 선거때 마다 조작되었다면 벌써 폭로되었을 겁니다. 저는 權의원의 발언에 대해 무엇보다 지역감정을 탈피해야 한다고 말씀躍??싶습니다. 저의 妻家도 호남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호남지역의 사람들을 발탁하는데 안기부 내에서도 심혈을 기울여왔던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제가 기획판단국장에 있을 때는 제 측근으로 전남대 출신의 요원을 핵심중의 핵심인 행정과장으로 두었습니다. 權의원의 발언은 호남지역 출신으로 안기부내에서 진짜 일 잘하는 사람들의 설 땅을 없애는 것입니다. 호남지역 출신의 훌륭한 인재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상호간의 불신을 퍼뜨리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朴대통령이 죽었을 때 北韓은 조문했습니까?』
  
  ―최근 金大中씨가 조문론(弔文論)을 이야기했습니다. 金大中씨는 여기서 金日成이 죽었을 때 우리가 외교적인 제스낮關?조문을 안한 것이 큰 실수였고, 앞으로 남북관계를 복원시키려면 우리측이 모종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현재 정치판에 논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조문론에 대해서는 그 당시 안기부 1국장으로서 직접 이 문제에 관여하고 계셨을 땐테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저는 하필 이 시점에서 金大中씨 같이 철두철미한 분이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에 대해 얼른 납득되질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작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金大中씨를 초청, 조찬강연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어느 記者가 조문론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金大中씨는 웃으면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그렇게 신중한 자세를 보이던 분이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좋은 뜻으로 본다면 남북한이 경색되고 대화가 단절이 되고, 상호 접촉이 끊어진 마당에 뭔가 실마리를 풀기 위한 발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분의 입장은 아마도 우리가 맏형으로서 경색된 남북관계의 실마리를 풀기 위한 충정의 발로라고 저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절대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봅니다.
  
  金日成 부자는 아웅산테러를 통해 우리의 많은 국가 지도자들을 살해했고, 중동에서 피땀흘리며 일하다 뭬틸윱?우리의 노동자들을 공중에서 폭사시킨 민족의 원수이며, 또 그것을 떠나서라도 金日成은 동족상잔의 비참한 6·25전쟁을 도발했던 戰犯입니다. 그런 戰犯에 대해서 조문을 해야한다는 것은 민족정서나 민족정기상 전혀 맞지 않는 겁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북한은 스스로가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합니다. 조문을 하지 않아서 남북대화가 경색됐다고 보는 것은 틀린 시각입니다. 만약 남한이 조문을 한다면 그것으로 북한이 대화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북한을 정말로 모르거나 아니면 다른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저는 조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부연한다면 조문론을 주장하는 그와 같은 정치지도자들은 왜 朴正熙대통령이 죽었을 때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조문을 오라고 주장하지 않았는지 묻고싶습니다. 과문의 소치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그 분들이 朴正熙 대통령의 빈소에서 과연 진정으로 조문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질을 망각하고 실체를 잃어버린 경우』
  
  ―金大中씨의 최근 이야기 중 특이할 만한 내용 중 하나는 우리가 북한을 안심시켜주기 위해서는 국회차원에서 흡수통일 의사가 없음을 결의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일종의 不戰 결의인 셈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어떤 문제를 깊이 연구를 하고 파고 들다 보면 두 가지 현상 중 하나에 직면하게 된다고 봅니다. 첫째는 그 문제에 대한 본질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그 문제 자체에 도취, 심취되어 본질을 망각하고 실체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분은 남북문제를 잘 아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문제에 너무 심취하다 보니까 북한의 실체를 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은 한번도 적화통일을 포기한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저는 우리가 흡수통일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자는 우리가 강하게 나올 때 항상 꼬리를 감추고 굴복합니다. 공산주의자는 우리가 강하게 나올 때 항상 꼬리를 감추고 굴복합니다. 우리가 약할때는 절대로 우리와 대화하지 않으려 하고 우리를 깔보고 밀어붙입니다. 6共 말기 때 정상회담을 굉장히 시도했지요. 그러나 당시 북한은 盧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간다고 보고 회피했습니다.
  
  정상회담 제의에서는 우리 대통령의 임기가 5년이기 때문에 항상 불리합니다. 全斗煥 대통령 때는 재야 세력과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난리였지만 북한에 대해 강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때는 북한에서 먼저 정상회담을 하자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북한은 남한이 강한 정부와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을 때만 아무 조건없이 정상회담에 응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정치 지도자는 민방위, 예비군을 더 강화하고 북한의 노동1호에 대응해서 朴대통령 때 시도됐던 미사일 개발을 서두르고,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우리도 「대응 核」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키는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산주의자를 제압하려면 우리가 강한 힘을 갖고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공산주의자의 전략전술은 변치 않는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공산주의를 제압하는 전술도 똑같이 고전적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민족감상주의로 대응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李仁模 노인을 보면 잘 알겁니다. 李仁模 노인을 보내면서 누구 한사람 넘어 왔습니까. 아니면 북한 당국에서 남한에 감사표시라도 했습니까. 남북어부가 돌아왔습니까. 게다가 남북협상 과정에서 文益煥을 풀어 달라고 저 쪽에서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석방시켰습니다. 그러나 석방된 文益煥씨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리고 남한 정부가 얻는 것은 뭐가 있습니까. 북한을 제대로 아는 정치지도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국가보안법과 북한 헌법을 같이 폐지하면 우리만 무장해제 당하는꼴』
  
  ―상대와 대담을 할 때 피해야 할 치명적인 전술은 『내가 ○○는 안하겠다』는 약속이라고 닉슨이 말했습니다. 예컨대 상대에게 「나는 주먹은 안쓰겠다」든지 「욕을 하지 않겠다」는 등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먼저 하는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라는 겁니다. 정작 필요할 때가 되면 스스로의 약속에 의해 발이 묶여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흡수통일 안하겠다는 것은 우리의 손발을 다 묶어버리겠다는 겁니다.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 바에야 국가보안법도 있을 필요가 없고, 마찬가지로 군비지출을 할 필요도 없다면서 무장해제로 지향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한미군이 주둔할 이유도 사라져버리게 되겠지요.
  그러나 金大中씨의 발언 중에서 언론의 지지를 받은 발언도 있습니다. 金大中씨는 북한의 형萱?개정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식으로 맞바꾸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金大中씨의 조문론에 비판적이었던 언론들도 이 대목에서는 찬성을 표시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은하수」를 공개하면 좀 더 알 수 있겠지만, 북한은 법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북한엔 약 20만명이 수용된 정치범 수용소가 있습니다. 완전통제구역은 한번 들어가면 평생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법을 형식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 형법은 인민들에게 비밀로 돼 있습니다. 얼마 전에 북한은 형법을 개정했습니다만 우리도 아직 북한의 개정된 법전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경로를 통해 알아보면, 전 세계에서 가장 유화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내용도 인민의 복지를 위한 것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해외 선전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형법은 별도로 갖고 있는 겁니다. 그나마 법대로 하지를 않음은 물론이고요.
  
  따라서 金이사장의 발언은 이러한 북한의 형사제도, 형벌제도, 교화제도, 수용소 제도 등 북한의 통치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우리나라는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국가보안법이 없다면 북한의 간첩에 대해서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하는 셈입니다. 우리의 형법으로는 간첩을 처벌할 수가 없는 겁니다. 법전에는 간첩에 해당하는 조항은 敵國이란 개념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법적으로 敵國이 아닙니다. 법적으로 북한은 국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당에 국가보안법을 없애면 간첩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대처하겠습니까? 그리고 북한은 그런 요구조건을 대번에 받아들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 언론들도 모두 찬성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유감스럽습니다』
  
  ―鄭차장이 그만 두신 데 대해서는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안기부장과 당시의 국장이 그만둔 것을 보고 정치工作의 인책이란 시각이 있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鄭차장이 그만 둔 것을 두고는 對共수사체제를 약화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측도 있습니다. 특히 지난 93년에 북한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李東馥 안기부장 특보가 야당의 공세로 안기부에서 나와야 했고, 그 다음으로 鄭차장이 또 다시 야당의 폭로로 나와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가장 잘 아는 두 전문가가 현직에서 물러나게 된 셈인데요….
  
  『정보책임자로서 그런 것이 누출된 것에 대한 보안책임입니다만, 제가 어떤 계기로 안기부에 들어와 對共수사만을 십 수년간 하다보니 우리나라에서 對共문제에 권위자로 평가받게 됐을 겁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안전을 걱정하거나 對共에 종사한 사람들이 저를 하나의 정신적 지주로 생각해주었습니다. 제가 이 어렵고 참담한 對共의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한번 對共수사계의 현실을 재건할 것이라고 많은 분들이 기대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 분들의 기대를 채워드릴 기회가 박탈됨에 직면해서는 오히려 많은 분들의 격려와 아쉬움을 느낍니다. 현재 對共전문가들이 자꾸 그만 두고 있습니다. 정년, 또는 명예퇴직으로 그만두고 있는 겁니다. 과거에는 우국충정의 심정으로 지원하는 젊은 요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기부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더 이상 가라앉을 수도 없다』
  
  ―수사국장이 되신 것이 1988년 6월 배명인(裵命仁) 안기부장이었을 때입니다. 말하자면 사실상의 문민정권으로서 盧泰愚정권의 안기부장으로 취임하셔서 안기부를 상당히 개혁할 때입니다만, 당시 안기부의 사정과 수사국장으로 취임하게 된 배경 등을 개괄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당시 5共 정부의 張世東』 부장이 朴鍾哲 사건으로 물러나고 安武赫 부장이 오셨습니다. 6共 출범 뒤 그분은 朴哲彦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여러가지 견제와 횡포에 못이겨 자진해서 사표를 내고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법무장관 출신인 裵命仁부장이 오셨지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6공화국 문민정부의 초대 부장이 裵命仁 부장인 셈입니다.
  
  그 때 안기부는 굉장히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우선 다른 수사기관이 안기부에 대해 견제를 하고, 협조요청을 기피하고 정치권에서는 안기부의 기능을 축소하려 하고, 야당에서는 안기부와 국가보안법에 대한 공세를 계속하던 시절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이어서 심지어는 안기부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지하실에 데려오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가 主思派 학생 두 명을 조사하다가 아주 큰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간첩사건들은 모두 조작이라며 연일 신문에 나곤 했지요. 그리고 간첩죄로 구속된 가족들이 몰려다니며 대공수사요원들을 고소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 때문에 대공수사요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對共에 종사한다는 것이 창피하다는 풍조가 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文益煥 사건이 터지게 된 겁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안기부가 이제는 밑바닥에 갈때까지 갔기 때문에 더 이상 가라앉을 데가 없다고 봅니다. 튀어올랐으면 올랐지 더 이상 어떻게 망가지겠습니까』
  
  ―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있었고 그래서 對 테러에 신경을 많이 썼고, 미국 CIA의 테러 전문가들이 한국에 와서 상주하면서 많은 협조를 했었지요. 그리고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안기부에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명단을 주어서 출입국자 관리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수사국장으로서 올림픽 기간을 어떻게 지냈습니까.
  『올림픽이 제대로 안되도록 金正日의 협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뮌헨 올림픽 때의 테러사건처럼 유사한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곳곳에 암약중인 고정간첩들을 철저하게 커버하고 해안에 대한 간첩 침투를 점검했습니다. 주사파 학생들이 마라톤 코스에서 최루탄을 던지겠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애를 먹었던 적도 있습니다』
  
   文益煥씨 방북사실도 몰랐던 안기부
  
  ―제 생각으로는 89년은 좌익세력이 최근년에 와서 가장 강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고, 또 거기에 대한 보수층의 대응도 격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반체제 세력의 체제에 대한 강한 도전에 대해 체제를 수호하는 측에서의 강한 응전이 만나 하나의 결전이 이뤄졌던 해입니다. 그 결전은 좌익세력 약화의 분수령으로 기록될 것으로 봅니다. 89년에 있었던 중요사건들 중 좌익과 우익의 충돌을 극적으로 만든 것이 몇 개 있습니다. 文益煥씨 밀입국 사건이 1989년 3월이엇고, 그 다음이 徐敬元 간첩사건, 그리고 연이어서 임수경(林秀卿), 문규현(文奎鉉) 밀입북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이 시기에는 여소야대로 盧泰愚 정권이 국정을 이끌기가 곤란하다 해서 야당의 어느 정파와 손을 잡아 다수 세력을 확보할 필요성이 절샐했던 때입니다. 그때 朴哲彦씨가 金大中씨와 접촉해서 중간평가를 안하는 식으로 결정을 봤던 것이지요. 그래서 金大中씨와 盧泰愚씨가 상당히 가까워졌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文益煥씨가 밀입북했다는 것이 북한 방송을 통해 남한 사회에 알려졌습니다. 그때까지 안기부도 몰랐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文益煥씨가 방북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저도 그 방송을 듣고는 아주 놀랐습니다. 그 뒤에 여러가지 추적을 해 보니까 알 수 있는 징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감쪽같이 나갔던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李善實이 간첩인 것을 알았지만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文益煥씨도 북한에 간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文益煥 사건이 났을 그 무렵에는 주사파들이 극성을 이루고, 全大協이 한번 모이면 5만명내지 10만명이 일시에 모이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거기다가 근로자들의 시위에서도 점점 붉은 띠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심지어는 저는 文益煥 사건과 徐敬元 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나라가 떠내려가다가 赤化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때 徐東權부장이 오셔서 하신 말씀이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적화될 가능성이 많아서 결정적인 시기에 비행기표를 끊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에 나 자신을 먼저 질타하고 질책해 본다」고 했습니다.
  
  ―그때 文益煥씨가 외국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출국 이유를 몰랐던 겁니까, 아니면 출국 사실조차 몰랐던 겁니까.
  『출국사실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가는 것으로 알았지 북한으로 갈 줄은 몰랐습니다』
  
  ―그 뒤에 수사에서 밝혀졌지만 文益煥씨는 金大中씨를 만나 북한으로 간다고 밝혔고, 文益煥씨와 거의 동시에 입북했던 소설가 황속영(黃晳永)씨도 李鍾贊씨, 金相賢씨 등을 만나 북한에 간다고 얘기를 했고, 유원호(劉元琥.중원 엔지니어링 대표)도 정치권의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안기부에서 감지하지 못했다면, 당시 안기부는 상당히 둔감해져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정권교체기엔 안기부가 위축됩니다』<다음호에 계속>
  <기록·李東昱자유기고가>
  
출처 : 월조
[ 2003-07-02, 13: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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