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의 근대화와 국민 下(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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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지도부의 정보 오판은 재앙을 초래한다.
  
  이스라엘에서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 우수한 정보기관들이 왜 1973년 10월 전쟁을 미리 감지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개전(開戰) 직전에 여러번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군은 비상을 걸었으나 훈련으로 밝혀졌다. 비상이 걸리면 예비군이 동원되고 산업활동이 큰 타격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오판은 정보수집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해석의 잘못 때문이었다. 군정보기관은 여러 징조를 접하고서도 전쟁은 아니란 판단을 했으나 모사드는 전쟁임박이란 판단을 내렸다. 골다 메이어 수상과 엘라자르 참모총장 등 지휘부는 군정보기관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개전 이틀 전인 10월4일 군정보기관은 거의 결정적인 첩보를 수집했다. 이집트 최고사령부가 예하부대에 대해 라마단 금식을 중단하라고 지시한 통신문을 가로챘던 것이다. 이슬람교도에都?가장 성스러운 의식인 라마단 기간의 금식을 중단시키는 것은 비상사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4일 밤엔 소련 수송기가 날아와서 시리아와 이집트에 있는 군사고문단 가족들을 철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그래도 이스라엘 정부는 이것이 전쟁을 의미한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전쟁 전야인 10월5일 오후5시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非아랍 어느 나라의 통신을 감청, 이집트-시리아 양 전선에서 곧 기습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국가지도부로 보고되지 않았다. 6일 새벽 비로소 유럽에 급파된 모사드부장(部長)은 고급 정보요원으로부터 전쟁이 6일 오후 6시에 개시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개전은 6일 오후1시55분이었다. 이스라엘 국가 지도부의 오판은 전사 2천5백명, 부상 7천5백명의 인명손실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10월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군사적 승리는 거두었으나 외교전선에선 수세에 몰려 결국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게 된다. 6·25때도 일선에 있던 국군정보부대는 전쟁을 정확히 예측했으나 육군본부와 경무대는 판단기능이 마비돼 있었다. 국가 지도부가 국가적 대사(大事)에서 오판을 하면 나라가 망할 수가 있다. 국가 지도부의 정보능력은 그 지도부의 총체적 직무능력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낸다. 金泳三정부의 정보능력은 北核위기때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1993년 초 기자가 만났던 안보·외교팀의 핵심인물들은 모두 북한이 미국의 압력에 연내(年內)로 굴복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金泳三 청와대는 그들이 장기로 삼고 있는 국내정치 부문에서도 오판을 했다.
  
   전쟁 위험성의 고조
  
  6·27 선거 전야에 청와대 참모들은 정원식(鄭元植)서울시장 후보가 「당선유력」이란 판단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도 그런 보고를 받았던 것 같다. 당시에 대부분의 여론조사기관은 조순(趙淳)후보의 당선을 예상하고 있었다. 청와대의 오판은 친여(親與)성향의 조직이 한 非과학적인 여론조사를 선호했기 때문이기도 構憫嗤?대통령에게 아무쪼록 좋은 소식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갤럽은 1지역당 5백명에 대한 전화 여론조사로서 15개 광역단체장 선거의 당선자를 득표율 3% 이내의 오차로 정확히 맞추었다. 갤럽의 수만 배나 되는 자원과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청와대가 너무나 엄청난 오판을 했다는 것은 金대통령의 국정수행능력에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핵심적 사항이다.
  
  6·27선거 직후 金대통령은 일단 발표했다가 취소한 담화문을 통해서 지역감정이 여당 참패의 원인이라는 식의 분석을 했다. 이 분석도 선거 직전의 오판,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또다른 오판이었다. 지역감정은 한국인의 정치감각에 물이나 공기처럼 항상 있는 것이다. 그 지역감정을 6·27선거처럼 폭발시킨 것이 진짜 선거패인(敗因)인데, 그 뇌관은 金泳三정부의 국정운영 실패와 보수층의 이반이었던 것이다. 국가 지도부의 의사결정이 정확하려면 그 주변에서 정확한 정보가 교류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주적인 리더십下에서만 가능하다. 나쁜 소식을 듣기 싫어하는 지도자와 아부에 능한 참모가 있는 지휘부에선 왜곡된 정보가 춤을 춘다.
  
  문제는 金泳三정부가 對北정보판단에 있어서도 6·27 선거 때처럼 오판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다. 주한미군 정보부에선 북한의 재남침 위험성이 올해 겨울과 내년 겨울에 최고조에 달할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50년간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쌓아올린 군사력이 2∼3년 뒤부터는 급격히 쇠퇴해 버리고 마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고 있는데다가 金正日 자신도 개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전쟁에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이란 논리이다.
  이런 정보에 접한 일부 한국 군인들의 반응은『또 미군이 무기 팔아먹으려 장난치는 것 아냐』라는 것이었다.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이런 발언은 국군 지휘부의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주권국가가 필요로 하지 않는 무기를 강압에 의해서 살 수 있으며, 그런 장난에 속아넘어가 쓸 데 없는 무기를 살 정도의 군대라면 국방 임무 자체를 회수해야 할 일이다.
  
  金泳三정부의 행태를 보면 남북관계는 전쟁으로부터 안전거리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연 그러한가를 자문(自問)해봐야 할 이유를 삼풍(三豊)백화점 붕괴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安保의식과 안전(安全)의식은 근본이 같다. 확률이 아주 낮은 미래의 사고가능성에 대비하여 돈과 시간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보의 대상은 국가와 국민, 안전의 대상은 개개 인간이란 차이는 있지만 안보의식이 약한 나라에선 안전의식도 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안보의식이나 안전의식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과 직결된다.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곳에선 안보나 안전을 위한 투자는 낭비로 여기질 것이다. 자신의 생명만 귀중하고 남의 생명은 소중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안보와 안전에 대한 투자는 어렵게 된다.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항상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보다는 낮기 때문에 안보와 안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승산이 별로 없고 늘 욕을 먹게 돼 있다. 일부 민주계 및 야당 정치인들은 과거 정권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다 본질적인 측면은 과거정권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북한이 남침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서울 포위 하의 결사항전은 가능한가?
  
  이스라엘은 10년 뒤에나 현실로 나타날까 말까 한 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과 핵개발 징조를 벌써 제1의 위협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외교·군사·정보 등 다방면의 대책을 수립, 실시하고 있다. 한국도 1980년대 초에 이미 북한의 핵개발 의도를 감지했으나,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처럼 그 위협을 과장하기는커녕「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지」하는 자세로 침묵해 버렸었다. 그때 일찍 손을 썼더라면 지금과 같은 對北 저자세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40억 달러의 지출도 필요 없게 되었을 것이다. 40억 달러는 安保의식 태만의 대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우리 군이 실시한 워게임(War Game) 결과에 의하면 인민군이 철원방면에 주공(主攻)을 놓고 기습 남침할 때 우리 군은 의정부까지 밀린다고 돼 있다. 개전 한 달 뒤에 미군의 증파로 반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개전 한 달 안에 한국군은 전사 약 10만, 부상 약 50만의 피해를 입을 것이란 계산도 나왔다고 한다. 한 주한미군 정보관계자는『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2차세계대전 때의 독일과 소련군 사이의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병력과 화기의 밀집도에 비추어 동부전선보다 더 심한 파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자가 만난 한국-미군 군사전문가들은 거의가 북한이 또 전쟁을 어?때는 화학무기까지 쓸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학무기를 쓸 배짱이 없으면 전쟁을 애초에 결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는 분석이었다. 對北군사정보 전문가인 P씨(예비역 장성)는『군사적인 계산만으로는 북한이 남침하더라도 이길 수가 없다』면서『다만 정치적인 변수가 하나 있다』고 했다.『북한이 기습남침할 경우 서울을 포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강 이남으로 진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국군이 미군의 증파와 함께 반격을 개시하면 통일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이 서울을 포위한 다음 휴전을 제의했을 때 남한 정부가 결사항전을 포기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인민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럴 경우에 미군이 우리를 도울 명분도 상실됩니다. 장군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남한의 유권자들은 그런 정부를 선출하지 않도록 눈을 비벼둘 필요가 있다. 한 여당 ㅇ국회의원은 『지금의 나라 분위기라면 북한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국민 모두가 자신이나 가족이 무사한 쪽으로 선택할 것이다』라고 했다.
  
  기습남침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 가장 먼저 백기를 들자고 주장하는 것은 권력기생적인 기득권층 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많은 보수세력은 자유민주주의가치관이 아니라 권력의 향방을 자신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좌익세력보다도 더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金正日치하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기회주의 때문에 한국의 보수층은 소수의 좌익세력에 의하여 휘둘려지고 있으며 위선자들과 선동가들의 공세에 주눅이 들어있는 것이다.
  
   중동(中東)의 탈(脫)냉전이 이스라엘 평화공세의 배경
  
  이스라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점이 있다. 모두가 소신에 차 있어 語法이 단순명쾌하다. 「그런 면도 있지만…」식의 양시론·양비론적 話法은 없다. 그들은 또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30초 질문에 답변은 30분이다. 그들의 대화에는 많은 교양이 있다. 그래서 折訣平幣求? 기자가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홀리데이인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외무부 정보센터의 분석관 엘리 아비단씨도 그러했다. 그는 한 시간 반 가량 기자를 앞에 놓고 설명이 아닌 웅변을 했다. 주의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큰 소리로 그랬다. 그는 이스라엘이 PLO, 요르단, 시리아와 평화협상을 감행할 수 있던 근본 이유를 中東지역의 탈냉전에서 찾았다. 소련의 붕괴 이후 시리아와 PLO는 가장 중요한 배후세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특히 시리아는 소련식 무기체제를 채택하여 소련의 부품공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로 시리아의 무기체제는 지금의 북한처럼 고철화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확실한 對러시아 군사력우위를 확보,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공격적인 평화공세를 펼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6일전쟁 때 쟁취한 골란고원(高原)을 시리아에게 돌려주되 이곳을 비무장지대화 하고, 더 나아가서 현재의 시리아 국경 너머에서도 비무장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깔고서 평화협상에 임하고 있다. 이처럼 공격적인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사력이다. 이스라엘이 1977년에 숙적인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6일 전쟁에서 빼앗은 시나이반도를 반환했기 때문이다. 즉 병사들의 피로써 확보한 땅을 평화와 맞바꾼 것이다.
  
   역사의 감동적 역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 그리고 요르단江의 서안(西岸)지역을 빼앗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지금 수상 라빈이었다. 라빈 수상은 지금 자신이 빼앗은 땅을 팔아 평화를 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감동적인 역전이다. 평화협상의 실무책임자인 페레스는 核무기 개발의 책임자이기도 했는데 이스라엘이 보유한 그 核무기가 또 과감한 평화공세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對아랍투쟁에서 선봉에 섰던 라빈과 페레스가 평화를 부르짖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들은 오히려 안심하고 있다. 닉슨 대통령이 對중국 접근 등 과감한 데탕트 외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는 강경론자·현실주의자·보수주의자에 의하여 성취된다는 것은 역사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金泳三대통령도 통일문제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려면 먼저 확실한 반공(反共)과 보수의 입장에 서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고 북한당국의 환상을 깨뜨려야 할 것이다.
  
  제2차 한국전쟁이 터진다면 그것은 북한의 기습에 의해서 비롯될 것이다. 기습은 항상 성공한다. 문제는 한국이 최초의 강타를 당하고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삼풍백화점처럼 그 길로 붕괴해 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서울이 북한 방사포와 일제사격과 스커드미사일의 화학탄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우리 국민들은 과연 사생결단의 의지로써 결사항전(抗戰)을 결의할 수 있을까. 그만한 자기희생 정신이 과연 있는가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지금처럼 미국이 지켜주겠지, 安保는 공기처럼 공짜이다, 나와 가족만 무사하면 만사 OK이다 하는 식으로 대처할 때 한국군의 초기 패퇴는 후방의 붕괴-대한민국의 종언으로 이어질 것이다. 삼풍백화점 소유주의 형편없는 안전의식을 비난하지만, 수도권 1천5백만 인구를 북한의 장거리포와 스커드미사일 사정권 안에 인질처럼 노출시켜 놓고도 그 방어망 설치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국가 지도부의 안보의식은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북한에 대해 장거리포의 후진(後進)을 요구하고 듣지 않을 경우엔 예방폭격으로써 위협을 제거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아웅산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김일성 부자를 암살했을 것이고, 對北경수로·對北 쌀 지원 대신에 F-16편대를 보냈을 것이다.
  
   대통령의 거듭남
  
  불행 중 다행히도 하늘은 6·27선거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로써 우리에게 반성과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金泳三대통령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王의 회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모든 교만한 인간은 망한다」는 메시지임도 잘 알 것이다. 金대통령은 지난 2년 반 동안 자신이 과연 한국의 역사 앞에서 얼마나 겸허했던가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6·27 선거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 주류층의 反YS 성향은 바로 그들이 3년 전엔 金대통령을 만들어냈던 지지층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때가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이 여론을 돌려놓는 유일한 방법은 金泳三 대통령 자신의 「거듭남」이다. 그것은 역사와 국가의 잘잘못을 한 덩어리로 끌어안는 결단이다. 민주계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로 자신의 스케일을 키우는 것이다.
  
  거듭남의 시작은 아들 김현철(金賢哲)씨의 국정개입을 차단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金賢哲씨의 국정개입은 단순한 부자(父子)간의 상담이나 건의 수준이 아니라 제도적 개입이 되고 있다. 정부 출범기에 金씨가 추천한 많은 인사들이 정부 내 요직에 들어감으로써 그들과 金씨 사이엔 자연스러운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특수관계에 의하여 안기부의 정보는 金씨에게 흘러가고 있고 많은 요인들이 金씨를 찾아가 국정을 상담하고 있으며 金씨 또한 인사에 개입하고 있다. 대권(大權)을 쥔 사람의 아들에 의한, 이처럼 광범위한 국정개입은 한국 역사상 어느 왕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공(公)과 사(私)를 구별하는 것을 공직자의 제1덕목으로 치고 있는 유교 정치 문화의 전통에 비추어도 이런 행태는 한국인 특유의 정의감정에 反하는 것이다.
  
  金대통령이 아들에 의존하게 된 데는 민주계의 보좌가 충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金대통령은 민주계도 아들도 아닌 한국의 유능한 관료조직을 활용하면 된다. 전란의 잿더미 위에서 GNP 세계 12위의 경제력을 쌓아올린 한국의 관료 수준을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문제는 그 엄청난 인재(人材)의 풀(Pool)을 넓은 마음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현대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측근실세가 희생양으로 제물 바쳐지는 상황을 되풀이하였다. 朴대통령이 사라진 다음에 김종필(金鍾泌)씨가, 전두환(全斗煥)정권이 물러나자 장세동(張世東)씨가,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청와대를 물러나자 박철언(朴哲彦)씨가 속죄양이 되었다. 金泳三대통령이 물러난 뒤에도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면 한국은 멕시코 수준의 정치를 하는 나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지금 金대통령이 결단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극동(極東)과 극서(極西)의 악수
  
  아쉘 나임 駐韓 이스라엘 대사에게 기자가 물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과 평화를 약속한 이후 오히려 진짜 위기를 맞게 되지 않을까요?』『그렇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인간이 늘 긴장 상태 하에 있어야 자신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천재(天才)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이지요. 우리는 오늘이 항상 생애의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나임 대사의 이 말은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란 도전이 있었기에 남한 사람들은 태만하지 않고 항상 긴장하면서 자신의 정열을 불태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둑 아래 사는 사람들처럼 하루하루를 맹렬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자가 이스라엘에 가서 느낀 감정도 그런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전류처럼 통하는, 같은 주파수대의 감응이 있었다. 비슷한 과거뿐 아니라 비슷한 오늘을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極東과 極西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이스라엘엔 입국하기도 어렵지만 출국하기란 더욱 어렵다. 벤구리온 공항에서 짐을 부치기 전에 실시하는 보안 검사를 시간 내에 마치려면 세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보안검사를 하루 전에 받는 제도가 있을 정도이다. 보안요원이 승객과 일일이 일문일답을 하는데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짐을 다 풀어야 한다. 기자는 귀국행을 텔 아비브-프랑크푸르트(이스라엘 국영 엘 알 항공사 편)-서울(대한항공 편)로 잡았다. 엘 알 여객기의 기내지(機內紙) 첫 장엔 「여행자의 기도문」이 실려 있었다. 「…하늘을, 바다를, 육상을 여행하는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강하게 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주소서.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만이 우리의 안식처이나이다. 아멘」
  
  지중해를 종단하는 네 시간 반의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안착(安着)하자 승객들은 조종사를 위해 박수를 쳤다. 엘 알 항공기는 공항 탑승구에 바로 붙지 않고 외딴 곳에 정지했다. 기관총을 탑재한 세 대의 장갑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의 국경 수비대였다. 장갑차의 엄호 아래 기자는 버스에 타고 공항 건물로 향했다. 6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던 독일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나마 그들에게 속죄하고 있는 듯했다.
  
   이스라엘 특공작전 약사(略史) - 아이히만 납치에서 엔테베 작전까지
  
  ● 1960년 5월 이스라엘 해외담당 첩보기관 모사드는 하렐 부장의 현지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 국영항공회사 엘 알(EL AL)편으로 데리고 왔다. 유태인 학살의 한 주역(主役)인 前 나치 비밀경찰 간부 아이히만은 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5월3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형법은 다른 범죄에 대해선 사형을 금지하고 있으나 유태인 학살 범죄만은 예외이다. 아이히만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에서 사형된 유일한 인간이다.
  
  ●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우호·협력관계는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알제리아 독립운동 조직에 대한 정보를 프랑스에 제공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核무기의 비밀개발에도 두 나라는 협력했다. 이집트의 나세르에 대한 공동전선도 형성했다. 그러나 드골의 재집권 이후 알제리아가 독립해 버린 뒤 협력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1967년 6월 전쟁 전야 드골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으로 대승하자 드골은 對이스라엘 무기 금수조치를 취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합동공작을 벌여 스위스가 만들고 있던 프랑스의 미라즈 전투기 설계도를 훔쳤다. 이것을 바탕으로 만든 전투기가 케피어(Kfir)이다. 1967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이스라엘군의 무기조달처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의 쉘부르그 항구에 있던 미사일 발사함 5척을 공해상으로 빼돌려 1970년 새해 첫날에 이스라엘 하이파 항으로 몰고 왔다. 이 배들은 對이스라엘 금수조치에 의하여 주문국인 이스라엘로의 인도가 거부돼 있었다. 이스라엘은 노르웨이 석유회사가 구입하는 식으로 위장한 다음 특공대를 선원으로 변장시켜 승선시킨 뒤 배 5척을 소매치기한 것이다.
  
  ● 1969년 12월 이스라엘 공수부대의 특공대 66명은 세 대의 헬기에 나눠타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영토 내로 약 60km쯤 진입했다. 사막에 착륙한 그들은 소련제 P-12 레이다 기지를 습격, 2.5t 레이다를 해체하여 헬기에 싣고 돌아왔다. 소련정부는 최신무기가 이스라엘 손에 넘어간 데 화가 나서 이집트에 대한 최신 고급무기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
  
  ● 1976년 7월 이스라엘 특공대는 네 대의 허큐리스 수송기에 나눠 타고 아프리카 깊숙이 날아갔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납치한 에어프랑스 여객기엔 2백4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고 그 중 77명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다.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6일째 억류돼 있던 이들 인질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은 기발한 착상(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으로 변장한 이스라엘군인이 수송기에서 지프차를 타고 내리는 바람에 공항경비병들은 외국 순방중이던 아민이 귀국한 것으로 착각했다)과 대담한 공격, 그리고 최소의 인명손실로 하여 그 뒤에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완벽한 드라마였다.
  
  ●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은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용으로 건설중이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했다. F-16, F-15 편대는 사우디 아라비아 상공으로 우회하여 이란쪽으로부터 공습을 단행하였다. 이라크 측에선 한동안 이란 공군기의 공습을 받은 것으로 착각했다.
  
  ● 1985년 10월1일 이스라엘 공군 F-15 편대는 튜니시아에 있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본부 건물을 폭격, 75명이 죽었다. 공중급유를 받아 가면서 1천9백km를 날아와 폭격한 이스라엘 편대는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귀환했다. 이 폭격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사이프러스에서 세 명의 이스라엘人을 죽인 데 대한 보복이었다.
  
  ● 1986년 10월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는 이스라엘의 비밀核개발에 참여했던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의 증언을 게재하여 이스라엘이 이미 核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모사드는 미인계를 써 바누누를 로마로 유인한 뒤 선박편으로 데리고 왔다. 바누누는 반역혐의로 재판에 넘어가 징역 18년을 선고받아 지금도 복역중이다. 변호인들은 바누누의 폭로를 反核양심선언으로 몰고가려고 했으나 이스라엘 언론이 납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유력 일간지 하아레츠의 칼럼은 「민주국가라 하더라도 그런 폭로를 한 인물은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바누누가 아직도 송환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정부에 대해서 왜 그를 내버려 두고 있느냐고 추궁해야 한다」고 했다.
  
  ● 1988년 4월16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튜니시아의 해안에 상륙,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주요인물인 아부지하드를 그의 집에서 암살한 뒤 철수했다. 이스라엘 군은 이 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전자전 통제기를 지중해 상공에 띄웠다. 당시 이스라엘군 참모차장 에후드바락(뒤에 총장)이 이 비행기에 타고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자 정보기는 특공대가 침투한 지역의 전화 및 무전시설을 마비시켜 특공대의 탈출을 도왔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3: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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