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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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의 군부(軍部)
  
  광주사태 진상조사와 전두환(全斗煥) 비리 수사는 군부를 자극하는 시한폭탄이 될 것인가. 한국은 과연 [쿠데타도 민중혁명도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는가. 군 수뇌부가 최초로 털어 놓은 [정치와 사회에 대한 별들의 솔직한 생각]
  
  <1988년 6월 월간조선>
  
  국민 없는 군대가 무슨 필요가 있소
  
  {그때 군인 한 사람이 군경가족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읍니다. 10여명이 우루루 몰려 나갔지요. 이들이 빠져나가자 군인들이 골짜기 주변을 뺑 둘러섰어요. 그때 내 옆에 있던 문판대씨(당시 40세)가 손을 번쩍 들더니 고함을 질렀읍니다. [대장님, 죽어도 말 한 마디하고 죽읍시다. 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 군인들은 문씨를 향해 총을 놓았읍니다.
  
  문씨는 맞지 않고 그의 열 여섯 살 먹은 딸이 맞고 쓰러졌어요. 이어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며 총알이 우리를 향해 쏟아집디다}(생존자 임분이 할머니의 증언). 1951년 2월 국봇?의하여 집단학살 된 거창 양민 7백19명 가운데 세 살을 밑도는 젖먹이가 1백 명, 4∼10세 어린이는 1백91명, 11∼14세 어린이가 68명이었다. 즉, 14세 아래인 어린이가 모두 3백59명으로서 전체 피살자들의 꼭 절반이었다.
  
  한국의 민군(民軍)관계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으로 꼽히는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국군이 공비토벌을 하면서 공비출몰지구 안에 살던 양민들에게 분풀이를 한 사건이었다. 그 현장에서 터져 나왔다는 절규―{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는 결국 {국민 없는 군대가 무슨 소용이 있소?}란 뜻의 항변이었다. 그러나, 4·19때 계엄군으로 진주한 국군은 이승만(李承晩)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을 방관함으로써 [국민의 군대]임을 실증하였다.
  
  5·16 쿠데타 이후 군은 정치담당세력으로 등장, 국민과 직접 부대끼는 위치에 서게 되었으나 반군(反軍)감정은 심하지 않았다. 기자가 사병으로 복무求?1960년대 말 서울 시내버스 안내양들은 사병들로부터는 차비를 받지 않았다. 주는 차비를 슬며시 되돌려주는 안내양의 눈길엔 동병상련의 따뜻함이 있었다.
  
  그때는 군복이 국민들을 상대로 어리광을 부릴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열차나 시외버스에 무임승차를 해도 어른들은 눈감아 주었고, 휴가 나온 병사들은 [고생하는 졸병]이란 단 한가지 이유로써 가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칙사대접을 받곤 했다. 기자는 이 무렵 내무반 동료3명과 함께 휴가를 나와 나흘간 동해안을 무전 여행하였다. 손자를 군에 보낸 할아버지는 잠을 재워주고, 오빠를 군에 보낸 처녀는 감자를 삶아오고…
  
  이런 식으로 푸짐한 대접을 받아 그때 쓴 여행경비가 1천 원에도 미달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1972년 10월17일 10월 유신 선포를 계기로 국군은 계엄군으로서 다시 거리에 나타났으나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증오감만큼 군대에 대한 반감은 강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군대는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매도당하던 경찰과는 다른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16∼20일의 부마사태는 군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을 반감으로 돌리는 최초의 계기였다. 당시 朴正熙 대통령은 초장에 과감한 진압을 한다는 방책을 써 공수부대 3개 여단을 내려보냈다. 이들은 개머리판과 몽둥이로써 시위자뿐 아니라 무고한 행인들을 무차별 구타하였다. 부산의 경우, 공수부대원들 에게 얻어맞아 다친 시민들의 약 80%가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뇌좌상, 뇌진탕, 전두부 파열상, 후두부 파열상, 안면열창, 안면부 내부열창, 전신타박상, 뇌경막 손상….
  
  부마사태가 호감을 반감으로
  
  거창 양민학살사건 이후 처음으로 국민들은 살기 띤 군인들을 보았다. 적을 상대로 가장 어려운 전투를 하도록 훈련시킨 특수부대를 비무장시민들 사이에 풀어놓음으로써 국군이 국민을 상대로 작전(?)을 하는 사태가 빚어졌고, 그것은 일곱 달 뒤 광주에서 일어날 비극의 예고편이 되었다. 1979년 12월12일의 사태는 군부 내 유혈하극상을 연출하였다. 육군참모총장은 영장 없이 연행돼 물 고문을 당했고 그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다친 한 대령은 하반신을 못 쓰는데도 소장까지 진급했고 전역 뒤에는 골프장을 선물 받았다. 이 사건은 군의 명령체계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국민의 뇌리 속에 심었다. 이듬해의 광주사태는 민과 군 사이에 협곡을 팠다. 이 사태를 취재한 몇 안 되는 경상도 기자 중 하나였던 나의 광주 사태론은 이런 것이다.
  
  5·17계엄 확대 이후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은 부마사태 때보다도 더욱 과감하게 진압작전을 폈다. 시민들은 겁에 질려 달아났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가혹행위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보자 시민들은 쫓기던 쥐가 고양이에게 대어들듯 들고일어났다. 이런 동물적 분노가 광주사태의 기폭제였다. 광주사태를 무력으로 수습한 국군은 정권을 차지하였다. 국민들 눈에는 12·12사태도, 광주사태도 군사쿠데타를 위한 전 단계 상황으로 비쳐졌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돈독한 한국의 민군 관계는 [상관에게 총질하는 군대] [국민에게 총검술 하는 국군]으로서 낙인찍히면서 급전직하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군부의 개방 정책
  
  1985년 6월 말 국회에서 광주사태가 재론돼 시끄러울 때였다. 서울 잠실의 큰 거리에서 한 청년과 한 사병이 싸우고 있었다. 몇 대 얻어맞은 청년이 돌아서 가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는 갑자기 돌멩이를 들더니 그 사병을 향해 던졌으나 빗나갔다. 사병은 청년을 추격했다. 청년은 차도로 뛰어 들어갔다. 택시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청년을 살짝 들이받았다. 청년은 뒤뚱뒤뚱 일어서더니 앞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자빠지고 말았다. 슬로우 비디오 같은 장면이었다. 이때 두 40대 남자가 달려가더니 그 사병을 붙들어 엉덩이를 걷어차고 뺨을 갈기기 시작했다.
  
  어디서 모였는지 10여 명의 행인들이 우루루 몰려가 합세하여 그 사병을 집단 구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사병은 {졸병이 무슨 죄가 있읍니까?}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들에게 어리광을 피울 수 있게 했던 군복이 어느새 증오심을 폭발시키는 징표가 돼버린 것을, 이 [작은 광주사태]를 목격했던 기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해의 6월 사태는 군에 대한 민의 거부감이 총체적으로 표출된 결과였다. 부마사태나 광주사태에 적용한 공식대로라면 수백 개 공수여단을 풀어놓아도 시원치 알았을 터인데 우리 국군은 굉장한 인내심으로 자제하였다. [또 다시 국군의 손에 피가 묻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군의 발목을 붙잡았을 것이다. 어쨌든 6월 사태 때 국군이 보여준 자제력은 참으로 오랫만에 군에 대한 호감의 소재가 되었다. 노사분규 때 울산시내가 중장비로 중무장한 노동자들의 독무대가 되어도 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 나온다. 모레 나온다. 하던 군은 끝내 나서지 않았고 대통령선거는 치러졌으며, 정권의 정통성 시비는 한 고비를 넘겼다.
  
  이런 전환기를 맞아 군에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지난 4월20일 수도방위사령관은 국방부 기자들을 부대로 초청, 1시간30분간에 걸쳐 상당히 솔직한 간담회를 가졌다. 국외의 언론에 의해 군부의 강경파의 대표라느니, 쿠데타설의 장본인이라느니 하여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던 수방사령관은 {정치적 시각에서 수방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는 {내가 외신에 86회에 걸쳐 언급되었고 쿠데타를 일으킬 후보자라고 지적을 당했는데도 계속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니 더욱 궁금한 모양이다}고 농담도 했다. 그는 자신을 {합리적 정의파} {역사를 거스르는 강경파는 아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령관은 {우리 군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고 싶지 않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 다음날엔 특전사령관이 역시 국방부 기자들을 초청, 테러방지 훈련상황을 보여준 뒤 기자들과 한담을 했다. 사령관은 {특전사가 머리에 뿔이라도 난 집단인 듯 인식되어 온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오늘의 만남이 오해를 씻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우리도 할 말이 있다}고 했고 {군인은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을 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집단이다}고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국군 보안사령관도 국방부 기자실에 찾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정권 안보에 가장 중요한 보안사, 수방사, 특전사 등 이른바 3사(司)의 사령관들(모두 중장)이 보여준 이런 적극적인 태도는 달라져 가는 군의 언론 및 국민관(觀)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군기법 개정 움직임도
  
  언론에 대한 적극적 자세는 지난해 여름에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했던 정호용(鄭鎬溶)씨로부터 비롯되었다. 鄭씨는 지난 2월 노태우(盧泰愚)대통령 당선자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군이 개방적 자세를 취하겠다고 보고했었다. 그 직후의 간담회에서 국방부 기자들이 {군사기밀보호법의 개정도 고려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생각중이다}고 답했다. [군기법 개정검토]라는 기사가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움직임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오자복(吳滋福)신임 국방장관도 새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군기법 개정을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군기법 개정은 군에 대한 보도의 활성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군의 필요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민군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군대의 실상을 알려야겠는데, 그러자면 언론활동을 크게 제약하고 있는 현행 군기법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군기 법은 보호해야 할 [군사상 비밀]을 엄청나게 넓게, 또 모호하게 규정해 놓고 있다. 국방부 보도규정(84년 1월28일 제정)은 한술 더 떠서 [군 출입 기자는 공보관의 승인 또는 안내 없이 기자실·공보관실 및 편의시설을 제외하고는 국방부 청사를 출입할 수 없다]고까지 규정, 출입기자가 아니라 [보도자료배달부] 역할밖에 할 수 없도록 해놓고 있다. 그러나 육군본부 등 실병 지휘관들은 군기법 개정움직임에 대해서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이다.
  
  육군의 한 고급지휘관은 {법을 개정하지 않고 운영의 묘를 기하면 된다. 우리는 적의 사단장 이름도 다 모르는데 이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노출되어서야 되겠는가}고 말했다. 그 동안 군기 법은 부대내 사고 등 지휘관 개인의 문제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된 면도 있어 군기법 개정에 대한 현역장성들의 태도는 소극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민정당에서도 대통령선거 때의 득표전략의 하나로 행정직 사관 특채제도(이른바 유신사무관 제도)를 폐지하고 보안사의 민간사찰을 축소하는 등 군의 사회참여를 규제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유신사무관 제도를 통해서 1977∼87년 사이 11년간 행정부로 들어온 장교출신들은 5백86명이었다. 행정고시 출신자들의 약 3분의 1을 차지, 관료세계에서 뚜렷한 맥을 형성한 제도였다.
  
  군부의 반발이 거세었지만 정호용(鄭鎬溶)장관이 단안을 내려 이 폐지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민정당의 한 간부는 {예산의 3분의 1을 쓰는 군에 대하여 그 동안 효율적인 통제가 없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 엄청난 예산을 국회에서 심의할 때 보면 국방부에선 예산 자료를 국회의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가 30분 뒤 회수해가 버리는데, 5조 원이 넘는 예산을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파악하겠는가. 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통제는 언론에 의한 것이다. 아울러 군의 정치개입에 있어서 제도적 장치로 존재했던 보안사의 정치기능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육사 34기 출신 장교들(대부분이 소령)은 지난 5월7일 오후에 육군사관학교 회관에서 임관 10주년 행사를 가졌다. 이들은 이 자리에 정승화(鄭昇和)씨를 초청했다. 鄭씨는 34기 생도들이 2∼4학년을 거칠 때 육사교장으로 근무했었다. 지난 5월13일엔 재향군인회가 예비역 장성들에게 북한의 최근동향을 보고하는 자리에 鄭씨를 초청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3일 국무회의에서 병역법 개정안을 의결, 국회에서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정승화(鄭昇和), 김계원(金桂元)씨와 같이 유죄판결을 받고 보충역으로 계급이 강등된 전직 장교들에게 계급복권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에 따라 재향군인회에서 발행하는 장성회원 명부에도 이들의 이름이 실리는 등 장군 대접을 다시 받게 되었다. 이것은 군이 민군관계 뿐 아니라 군내부의 갈등 해소에도 전향적 자세로 임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달라지고 있는 건은 군과 여전뿐이 아니다. 김대중(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이번 13대 총선 때의 부재자 투표가 공정했음을 인정하고 군을 높게 평가하는 발언을 했고, 김영삼(金泳三)씨도 [성숙한 국군]이라고 추켜세웠다. 어차피 새 국회는 국정조사·감사권을 가진 데다가 야당연합세력이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군도 더 이상 성역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돼 있는 것이다.
  
  군대는 늘 대통령 편이다
  
  지난 4월 말 기자는 수도권에 배치된 한 육군 부대의 지휘관 집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기자가 신분을 밝혔더니 부관은 바로 그 지휘관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기자가 용건을 이야기했더니 그 장성은 아주 간단하게 {좋습니다. 만납시다}고 했다. 다음날 오후 그의 사무실에서 기자는 2시간동안 인터뷰를 했다. 장군다운 몸집에 늘 웃음 띤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매를 지닌 50대 초반의 그는 {저는…}이란 말로써 운을 뗀 뒤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설명했다.
  
  {몇 달 전에 어떤 기사에 저의 이름이 나온 적이 있었어요. 일본에서 퍼진 루머를 인용하는 등 잘못된 내용이 많은 기사였읍니다. 제가 중간에 사람을 넣어 그 기자에게 이야기하도록 했읍니다. [우리가 외국인 사이도 아니고 같은 서울의 하늘 아래서 사는 데 최소한 나를 만나고 써야 할 것 아닌가] 그 기자는 [군 장성들 한테 접촉을 하려고 해 보았자 될 것 같지가 않아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랍니다. 그런 일도 있었고, 조기자께서 민군관계의 재정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저도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인터뷰에 응한 것입니다. 제가 너무 쉽게 응해서 놀라셨죠?}
  
  익명을 전제로 하고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사견(私見)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서 오해가 없어야 한다. 군은 늘 대통령 편이다.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서 군의 통수권자로 돼 있다. 통수권자란 표현이 좀 어려운데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국군총사령관이요 원수(元帥)다. 국군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 충성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적 중립이다}
  
  -지난 총선 때 군의 부재자 투표가 공정했다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에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농부들이 농정을 잘 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나 군인이 국방을 잘 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나 같은 맥락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부재자 투표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과잉충성 때문이었다. 군의 교육수준에 맞게 홍보를 해야 하는데 드러내놓고 누구를 찍으라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오는 법이다. 나는 어느 교수가 신문에 쓴 정치인의 자질에 대한 칼럼기사를 부하들에게 홍보하도록 하는 것으로써 그쳤다}
  
  광주사태는 이미 역사이다
  
  -최근 수도방위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이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부대로 초청하여 군의 입장을 설명해 주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노태우 대통령도 군 지휘관들에게 여러 번 언론과의 벽을 허물고 대화의 창을 트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군 쪽에서도 언론과 접촉을 하고는 있으나 언론사 사장들,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 상층부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나 치는 정도로 끝나 별 무 효과였다. 언론에서는 계급이 아니라 현장에서 뛰는 일선기자들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언론과 군, 그리고 민과 군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와 논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집단의 기준으로써만 상대를 저울질해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내가 대위 때 어느 군 출입기자가 내가 모시던 상관(장성)에게 말을 놓는 등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다 못해 항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기자는 이에 대해 기자의 행동논리, 즉 기자는 당신 같은 대위를 대하는 자세나 참모총장을 대하는 자세가 같아야 한다. 기자는 위계질서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언론의 생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오늘날의 장교는 옛날처럼 기자들에게 지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치부나 열등감을 덮어두기 위해 대화를 꺼리던 그런 장교들이 아니다. 대통령께서도 이제는 우리 군이 덮어둘 치부가 없으니 터놓고 언론을 대해 보라고 당부했다. 앞으로는 군의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광주사태의 처리가 새 국회와 주요쟁점이 될 것 같은데….
  
  {민간인만 죽은 것이 아니라 진압군인들도 많이 죽었다. 이제는 화합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언론이 국민의 과격한 요구를 자제시켜야 한다. 그것은 역사적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일본의 가등청정을 불러다가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라고 할 수 없듯, 이제는 광주사태를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 거기서 교훈을 발견하도록 애써야 할 때다}
  
  -광주사태를 깊게 다루면 군이 자극을 받는다는 뜻인가?
  
  {우리 군은 그런 문제로 자극을 받을 만큼 덩치가 작지 않다. 지난 총선 때 군이 그토록 수모를 당했지만 누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던가}
  
  -군내의 실권을 소위 하나회 인맥이 장악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데….
  
  {과거에 하나회가 있긴 했으나 과장된 면이 많다. 육사 11기 생도들 중에 북한 출신생도들이 사조직을 만드니까 거기에 대항해서 대구 출신들이 중심이 돼 하나회를 만든 것이다. 인맥은 어떤 조직에서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인맥이 어떤 일을 했는가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4: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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