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8군 사령부(하) -용산 합중국의 내막(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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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철군론·연합사 개편론
  
  『못 갈 줄 아느냐』
  
  이번 취재를 통해서 알게 된 한 주한미군 소속 문관은 30년간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인데 어느 날 싱글벙글하며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워싱턴에서 연락이 왔는데 미 국에서 근무하기를 원하면 신청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계급이 낮아져도 좋으니 본국으 로 돌아갈 생각이다. 점점 한국에서는 정이 떨어진다. 나는 나름대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썼다고 생각한다. 2년 전에 「말지」사건이 났을 때 이런 언론탄압을 미국정부 핵심에 알리기 위해서 노력도 했다. 그 「말지」가 요사이는 주한미군을 계속해서 비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면 덜 섭섭하겠지만…』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높아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 측에서도 주한 미군 철수론과 연합사 개편론 및 한국 측에 대한 방위비 분담 증액요구가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두 나라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한국의 국력이 커지고 그런 한국을 보는 미국의 자세가 달라지고 있는 것, 즉 양국관계가 재정립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론과 연합사 개편론은 미국정부의 견해를 대변하는 미국의 학자들에 의해 먼저 제기되고 미국 당무자들이 이 학문적인 문제제기를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회 자료조사실의 아시아 문제 연구원 래리 닉스씨는 지난해 7월 미국문화원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한반도의 긴장」이란 강연을 했다. 그는 『미국인들은 한국이 일본 방어의 방패 역할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는 더 이상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계속하지 않을 것이다. 한미 두 나라가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데 적합한 새로운 논리가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천년까지 주둔 희망
  
  최근 들어 주한미군과 미국관변측 학자들 사이에는 『한국에서의 미군 주둔이 미뮌?국가이익에 그 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이는 『당신네들이 자꾸 가라고 하면 못 갈 줄 아느냐』는 엄포용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주한미군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국인들 중에는 필리핀에서 클라크 및 수박기지의 사용료를 미국으로부터 받아내려는 움직임을 예로 들어 주한미군으로부터도 기지사용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요구를 공식으로 한번 해보면 용산 기지 등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필리핀 기지는 일본기지와 마찬가지로 태평양의 해상수송로를 보호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전략기지인 데 비해 한국 내 기지는 그 보다 중요성이 훨씬 떨어지는 전술기지일 뿐이다』고 했다.
  
  지난해 6월에 발표된 미 해군 대학원의 한 보고서(「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지원의 시작」는 「역사적으로 봐서도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미국의 이익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한국을 절실하게 원하지도 않지만 적이 한국을 영향권 안에 두는 것도 방관할 수 없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한국전쟁에 미군이 개입,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반도가 공산화되면 한반도는 생긴 모양 그대로 일본의 심장을 겨냥하는 단도가 된다는 미국 측의 공포가 한국이 가진 전략적 가치의 요체라는 얘기였다. 한국 측 군 정보기관의 한 책임자도 이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면서 『미군이 1949년에 한국에서 물러났고. 1951년에 중공군이 밀고 내려올 때도 철수를 고려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지난 6월9일 20차 한미안보회의에 참석한 오자복(吳滋福) 한국 국방장관과 칼루치 미 국방장관은 공동기자회견을 가졌었다. 이 자리에서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칼루치 장관은 도착성명에서 주한 미군은 한국정부가 요구하고. 한국 국민이 원하는 한 계속 주둔할 것이라고 했고, 이번 공동성명서에서도 같은 언급을 했다. 이미 잘 알려진 이런 방침을 성명서에 또 포함시킨 배경은 무엇인가」 『한반도에 군사적 불균형이 있고, 북한이 위협적 태도를 버리지 않고 한국인들이 미군의 주둔을 원한다면 우리는 계속 머물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칼루치 장관의 이 답변은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를 미국 측 입장에서 명료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같은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吳장관은 이렇게 답했다. 『한국이 자주국방태세를 것은 2천년 상반기까지는 불가능하므로 주한미군은 그때까지 주둔할 필요가 있다』 이 기자회견에서 吳장관은 『우리 양쪽 대표들은 작전권 문제를 포함한 한미연합사의 장래구조 변경에 대해 공동연구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연구 결과는 다음 연례 안보회의에 보고될 것이다』고 말했었다. 주한미군의 한 소식통은 1990년대에 가면 주한 미 지상군의 감군이나 철수와 연합사의 개편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연합사의 개편 방향
  
  주한미군에서 근무한 적이 잇는 한 예비역 미군 장성은 최근 연합사의 개편방향에 관한 연구를 위해 한국에 들러 기자와 만났다. 그는 연합사의 지휘체제를 개편하는 데는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하나는 일본의 예에 따라 한국군과 미국군이 별도의 지휘체제를 갖는 것이다. 이럴 경우 북한에 대한 통합전략을 어떻게 지속시켜나가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또 다른 방향은 한국군장성이 연합사령관이 되어 주한미군까지 지휘하는 것이다. 이 경우엔 미국국내법과는 상충되지 않으나 미국의 여론이 이를 받을 것인가와 한국 장성의 전략 능력이 문제로 남는다는 것이다. 연합사의 개편에서 한국군의 역할은 지금보다 훨씬 강화될 것이다. 이에 따라서 한국군 지도자들의 자질도 함께 향상되어야 한다는 지적들이 많다.
  
  전략문제에 밝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외교안보연구원장 임동원(林東源)씨 (합참 및 육본의 전략기획처장 역임. 예비역 육군 소장)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군장교들은 미군장교들을 별 것 아니라고 가볍게 보려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직업의식에 투철하고 새로운 전략·과학 기술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한국군장교들은 매년 그 질이 높아지고 있으나 너무 일찍 군에서 물러나야 하는 게 안타깝다. 6·25 초전에 우리가 밀린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장교들이 너무 젊었고, 북한 장교들이 열 살쯤 높아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전략 부대 규모의 큰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적다는 것도 한국군 장교들의 약점이다』 연합사의 한 미군관계자는 더 혹독하게 이야기했다. 『연합사의 미군장교들은 미군 중령 이 한국의 준장과 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국 장교들의 시야는 너무 좁다. 미군 장교들은 외국에서 복무한 경험이 많아 국제적 시야의 전략적 사고 방식에 길들여 있다』
  
  일선 연대장을 지낸 뒤 연합사의 참모로 근무했던 정규육사 출신의 한국인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군의 정치화가 한국 장교들의 자질 향상에 장애가 돼 왔다. 부패를 어떻게 훈련·관리하느냐가 장교의 인사고과 및 승진의 잣대가 되어야 할텐데 정치적 인맥에 의하여 좌우되었으므로 장교본연의 일에 소홀하게 되었다. 장교가 정치나 인맥에 신경을 쓰면 전투력향상은 뒷전의 일이 되기 쉽다』 작전통제권과 대북 전략의 책임을 미군에게 맡겨놓은 타성으로 한국 장성들은 넓은 시야의 전략 경험·지식이 부족하고 사물을 좁게 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연합사의 개편. 미군의 역할축소에 따라 한국군의 독립성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하여 한국군 장성들의 작전·지휘능력도 높아져야 할 것이다.
  
  막강했던 본스틸 사령관
  
  루이스 메네트리 주한미군사령관은 제 21대 8군사령관이다. 8군사령관 중에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워커, 미국 전사에 남을 만한 명장으로 꼽히는 리지웨이, 미국군부 엘리트의 상징적 인 물인 맥스웰 테일러, 5·16을 막지 못해 군복을 벗었던 매그루더, 초급장교 시절에 38도선을 그었던 본스틸, 도끼만행사건을 겪었던 스틸웰, 주한미군 철수를 자기 직책을 걸고 반대했던 베시, 그리고 격동기에 시달렸던 위컴 장군처럼 한국인의 귀에 익은 인물들이 많다. 리지웨이, 테일러, 개시, 위컴, 렘니처 사령관은 미 8군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까지 올라갔던 엘리트들이었다.
  
  이들 사령관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어 왔다. 한국전쟁 때의 미 8군사령관은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이승만(李承晩)정권에 대한 한미군 합동 쿠데타를 계획했고 한국군의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인사에 개입할 정도였다. 5·16때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은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반미적 성향이 강한 박정희(朴正熙)대통령 휘하에서 한국군부는 적어도 인사·정치적 면에서는 미군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었다. 한때 한국 장교들의 후견인이었던 미국 군사고문단의 역할과 규모도 축소돼 지금은 대한(對韓)무기판매 때 미국정부를 대신하여 창구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유병현(柳炳賢) 전 합참의장에 따르면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으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1968년 전후에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재직했던 찰스 본스틸 대장이 아마도 5·16이후에는 가장 발언권이 강했던 사령관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1945년에 미국무성 관리인 딘 러스크 (뒤에 미국무장관)와 함께 38도선을 그은 실무자였던 본스틸씨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본스틸은 초급장교시절부터 종전 대책반에 근무하는 등 워싱턴의 파워 그룹과 친했다. 서울에서 직접 미 국무장관실로 전화를 걸어 퍼스트 네임을 불러가며 통화를 하곤 했다고 한다. 주한 미 대사도 이런 영향력을 잘 알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본스틸 사령관에게 부탁을 하곤 했다.
  
  당시 서울에는 주한 미국 고급관리들의 모임인 「칸츄리 팀」(Country Team)이 정례 모임을 갖고 있었다. 주한 미국 대사가 소집책임자이고 주한 미군사령관 유솜 대표가 정회원 미국 문화원장과 주한 미 CIA지부장이 준회원으로 참석했다. 본스틸씨가 사령관으로 있을 때에는 부사령관을 참석시키고 자신은 불참할 정도로 격이 다르게 행동했다고 한다. 유병현(柳炳賢) 전 합참의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67년에 월남에서 맹호사단장으로 있다가 돌아온 뒤 합참의 전략기획국장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본스틸 사령관과는 옛날부터 업무상 친숙하게 지냈어요. 본스틸 사령관이 월남 전선을 시찰할 때는 저의 부대에 와서 자고 갈 정도였어요.
  
  1·21사태 푸에블로호사건이 터지자 정부측에선 미군과의 협조체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청와대의 결정에 따라 제가 접촉점(Contact Point)이 되어 본스틸 사령관과의 대화창구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본스틸 장군도 한국군에 전달하고싶은 메시지나 장차 시행할 계획을 나에게 통보하여 자연스럽게 우리 쪽에 전달되도록 했어요.
  
  미군 측 전결사항인데도 결재하기 전에 부하에게 저의 의견을 물어보도록 지시하곤 했지요. 한미군의 작전체제에 한국군의 발언권을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한미연합기획단을 1971년에 만들고, 이어서 연합사 창설 준비위원회를 조직, 제가 위원장이 되었다가 1978년에 초대 연합사 부사령관이 된 데는 그런 인연이 있었습니다』
  
  한미군의 합작 도끼사건 대응전략
  
  1976년 8월에 판문점에서 일어났던. 북한군인들에 의한 미군장교 2명 살해사건은 휴전 이후 한반도를 전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게 한 위기였다고 일컬어진다. 당시 합참본부장이던 유병현(柳炳賢)씨에 따르면 대응책은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이 보좌관을 물리치고 柳장군과 협의, 기안했으며 거의 그대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 대응책은 朴대통령에게도 보고돼 승인을 받았고 스틸웰 사령관은 『박대통령도 찬동했다』고 상부에 재촉 쉽게 결재를 받았다.
  
  당시 미군은 위기관리체제(Contingency Management Procedure)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의사결정체제는 보고채널을 간소화한 것이었다. 즉 판문점 경비를 맡고 있는 미군대대장이 사단장을 생략하고 직접 스틸웰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스틸웰 사령관은 미 태평양지역 사령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 합참의장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대대장→사령관의 보고 때는 사단장이, 사령관→합참의장보고 때는 미 태평양지역 사령관이 수화기를 들고 보고를 같이 청취하지만 「듣지만 침묵한다」(Listening Silence)는 원칙에 따라 중간에 끼여들 수는 없다고 한다. 이런 보고체제는 현장의 대대장이 바로 미국 정부의 중심부에 보고할 수 있는 전달방법으로서 유사시의 기동성 있는 대응의 한 예이다. 미군의 비상체제에 대응하여 한국 측에서도 합참의 본부장이 주한미군 사령부 지휘소에 스틸웰 사령관과 동석, 사태진전을 국방장관과 청와대로 직통 보고하였다. 미군의 정치 외교적 영향력은 지구의 어느 곳에 위기가 발생하면 단시간에 공군과 해군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또 다른 기동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1976년 8월의 위기 때 미공군과 해군은 한반도를 그런 초점으로 삼고 병력을 집결시켰다. 괌도에서 이륙한 B-52 전략폭격기 편대가 북쪽으로 넣어갈 듯 휴전선까지 직진했다가 마지막 순간에서 옆으로 비켜나는 위협비행을 한 것도 이때였다. 이 B-52 폭격기가 당시에 핵 폭탄을 싣고 있었느냐가 궁금하다. 유병현(柳炳賢) 전 합참의장은 『핵 폭탄을 실은 B-52을 한반도 위로 비행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고나 사격에 의한 추락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핵 폭탄을 실은 B-52였다면 남해안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항적을 그렸을 것이다』고 했다. 도끼만행사건은 76년 8월 21일에 미군이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 문제의 미류나무를 잘라버리는 상징적 보복행위를 함으로써 위기의 고비를 넘겼다.
  
  이 작전은 한반도에서 북한을 상대로 한 전략이 거의 완전하게 미군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미류나무를 자르고 있던 순간 휴전선 위에는 3대의 B-52전폭기가 북괴의 레이다망을 교란시키기 위해서 금속 부스러기를 뿌리며 선회 중이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한반도로 긴급 배치 된 F-l11. F-4폭격기도 굉음을 내면서 공중 패트롤을 하고 있었다. 오끼나와에서 날아온 E-3A 공중통제기와 적의 방공 레이다 및 미사일 유도용 레이다의 교란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특수비행기도 떠 있었다. 한반도 주변에는 엔터프라이저. 미드웨이, 레인저호 등 석 대의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한 수십 척 함정과 수백 대의 함재기가 집결 중이었다.
  
  柳 당시 합참 본부장은 『지상에서는 한미군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임진강 남쪽에서 대기 중이었고, 1개 여단 병력이 임진강 북쪽으로 급파돼 미류나무 절단작업 중 충돌이 있으면 즉각 전투에 돌입할 태세가 돼 있었다. 우리는 판문점에 압도적 군사력을 집중시킴으로써 북한이 감히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무력만이 김일성과의 유일한 통신수단인 것이다. 1·21사태에 우리가 미지근하게 대응, 울산·삼척 공비침투사건을 자초했고. 푸에블로호 납치에 대해 보복을 하지 못해 1년 뒤 EC-121기 격추사건이 났던 교훈을 되살려 우리는 북한에 대해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한국군의 공수1여단소속 64명의 장병은 미군 측 미류나무 절단작업반을 경호하는 임무를 띠고 공동경비구역 안에 들어갔다. 이때 미군 측은 무기 휴대를 금지시켰다. 이에 항의하는 한국군 장교에게 미군 측은 『당신들은 태권도를 잘하지 않는가 몽둥이를 갖고 들어가는 것은 좋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희도(朴熙道) 여단장의 단독 결정으로 이들 64명은 몰래 수류탄과 권총 및 M-l6 소총을 숨겨 갖고 들어갔었다. 이 사실이 뒤에 알려지자 스틸웰 사령관은 책임자의 문책을 한국 측에 요구하여 두 명의 장교가 형식적 처벌을 받았다. 스틸웰 사령관은 주한미군사령관을 물러나는 송별연에서 박희도(朴熙道) 여단장을 만나자 정색을 하고 『당신은 군법회의에 회부됐어야 했다. 당신이 내 부하라면 군복을 벗겼을 것이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직책 걸고 철군 막은 베시 사령관
  
  1976년 10월∼79년 8월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베시 대장은 미네소타 미니어폴리스 에서 났는데 1941년에 사병으로 입대, 군인으로서는 최고직인 합참의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재임 중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의 한국군 발전계획을 높게 평가하여 친하게 지냈다. 鄭장군이 10·26 뒤 계엄사령관이 되자 미 육군참모차장으로 있던 베시 대장은 조문사절로 한국에 와서 鄭장군을 예방, 군의 정치적 중립을 당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카터의 철군정책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미군장성이었다. 미8군 사령관시절에 그는 다음 육군참모총장 후보로 내정돼 카터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카터 대통령은 후보자와의 면담을 통해서 직접 총장을 뽑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 자리에서 베시 사령관은 철군의 부당성을 강력히 제기하여 카터를 불쾌하게 했고, 그 때문에 총장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었다.
  
  1979년 6월에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도 베시 사령관은 대통령 승용차에 동승, 강력히 철군 반대론을 주장했었다고 한다. 베시의 단호한 건의가 카터로 하여금 철군을 중지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베시의 후임인 위컴 사령관의 역할은 전편에 소개하였다. 여기서는 12·12 뒤부터 그의 상대역이었던 유병현(柳炳賢) 당시 합참의장의 증언을 듣는다. 1980년 5월18일에 광주사태가 터졌을 때 柳炳賢대장은 위컴 연합사 사령관과는 대화창구역할을 했다고 한다. 연합사 사령관을 상대하는 한국군의 공식창구는 전략문제일 땐 합참의장, 정책일 때는 국방부장관이다. 柳씨는 『거의 매일 위컴 대장과 만나 광주사태에 관하여 논의하였다』고 시인하고 『그러나 광주탈환작전을 미군 측의 승인 하에서 시행하였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고 했다.
  
  『나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계엄군을 광주시내에서 일단 철수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했습니다. 광주 탈환작전의 시기는 광주시민들이 질서회복을 원하는 분위기로 돌아설 때로 잡기로 했습니다. 20사단의 이동에 대해서는 내가 위컴 사령관에게 통보했습니다. 20사단은 연합사 작전 통제권 바깥에 있는 부대임으로 통보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부대의 이동임으로 알린 것입니다. 연합사의 작전통제권은 북한의 남침에 대응하는 전략에 국한되므로 치안유지를 위한 병력동원에 대해서는 미군 측이 반대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반대한다면 주권침해가 되니까요』 1987년 초에 워컴 사령관을 인터뷰하였던 주한 미국인 선교사 피터슨씨에 따르면 위컴씨는 인터뷰 당시에도 자신이 20사단의 이동을 허가할 수 있는 권한을 1980년 5월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말투를 쓰더라는 것이다.
  
  법률상으로는 20사단의 광주 이동이 연합사령관의 승인사항이 아니지만 한국군 측에서 위컴 사령관에게 접근하는 자세가 허가를 구하는 것 같았기에 위컴 대장이 권한 문제에 대해 착각하게 된 것 같다는 것이 피터슨씨의 추측이었다. 최근 월간조선이 입수한 육군 전투교육사령부(광주사태 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의 광주진압작전 보고서에는 1980년 5월22일 오후3시에 2군사령부의 작전참모는 육군참모총장에게 「23일 새벽 2시에 충정작전(광주탈환)을 개시하겠다」고 보고했다고 적혀 있다. 참모총장은 「한미간 협의사항이므로 24일까지 연기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 법률상의 임무한계에 관계없이 미군이 광주사태진압에 대해 한국군과 논의했음은 사실인 듯 하다.
  
  이제 주한미군과 한국의 관계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용산 기지 및 AFKN채널 이전 요구 연합사 개편, 철군론 등 일련의 변화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자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자각은 커진 국력의 뒷받침을 받고 있으므로 국가규모에 걸 맞는 새로운 관계정립은 필연적일 것이다. 한국전쟁, 무역, 방위공약, 무기체제께 의하여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이어 있는 두 나라의 국민들은 변화에 따른 갈등을 통해서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국에서 바보짓은 많이 했지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란 하소연이 우리에게 검을 던져주곤 했던 미군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주한미군의 위상을 상징하고 있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4: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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