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8군 사령부(하) -용산 합중국의 내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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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美)8군(軍) 사령부(하) -「용산(龍山) 합중국」의 내막(內幕)
  
  미(美) 무기체제에의 종속성
  미국의 반한(反韓) 감정과 철군론
  오산 미 7공군의 전략
  한미(韓美)의 약속-핵(核)사용 지침
  
  지방 이전이 확실해진 주한미군 사령부의 오늘과 내일
  
  <1988년 9월 월간조선>
  
  제5장 용산기지의 장래
  
  「말」지 대 미8군의 공방
  
  서울 용산의 주한미군사령부 기지 약85만5천 평은 일제시대에는 제국 일본의 조선군사령부가 주둔하였던 곳이다 1945년 9월 미국 제7사단은 한국에 상륙, 용산 기지에 있던 일본군 시설들을 접수, 미군 기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조선군사령부 시설의 많은 벽돌 병영이 그대로 미군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1949년 여름 미군이 철수한 뒤 1959년 여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기간을 제외하고 용산 기지에는 줄곧 주한 미군이 주둔하였다. 1953년 9월15일 미8군사령부는 관악산 기슭에서 용산 기지로 옮겼다.
  
  1957년 7월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곳에서 발족했고, 도오쿄에 있던 유엔군 사령부도 이곳으로 옮겨왔다. 1978년 11월 7일에 연합사가 발족, 서양식 구조에 한국식 지붕을 얹은 2층 연합사 건물이 용산 기지의 중심점이 되었다. 지난 142회 임시 국회에서 민주당 최기선(崔箕善)의원은 본회의 질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도 중심부에 미군사령부를 두고 있는 나라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뿐 아니라 85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용산 미군 기지가 서울의 교통문제, 주택문제에 주고 있는 피해는 막대한 것이다. 5백억 원의 예산을 들인 동작대교를 남대문까지 연결하려던 계획이 미군기지에 가로막혀 반신불수가 된 모습을 볼 때 일어나는 국민 감정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일제 조선군 사령부가 주둔하던 바로 그 자리에 미군사령부가 있다는 점이 더욱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기지를 서울 외곽으로 이주하려면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가』
  
  지난 8월12일 정부는 한미 양국간에 용산 기지의 지방이전에 대한 협의가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방한한 미국 슐츠 국무장관과 칼루치 국방장관에게 용산 기지 이전을 요청,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고, 이에 따라 실무위원회가 양국간에 수시로 회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용산 기지 이전의 필요성은 주한미군사령부와 긴밀하게 협조해야 할 한 국군 지휘부의 이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용산 기지의 이전 후보지를 중부지역으로 점치는 이들이 많다. 일부에선 『철군할 때까지 용산 기지를 쓰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전과 동시에 철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란 말도 나오고 있다. 군사시설의 이전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겠지만 골프장, 야구장 등 위락시설은 빨리 한국 측이 인수, 시민공원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이로써 용산 기지가 서울을 떠날 것임은 확실해졌다. 용산 기지는 민족적 자존심을 자극하는 상징적 시설로 여겨져 왔다. 사실상의 치외법권 지대였다. 「용산 공화국」행세를 해온 이 기지는 일부 한국인에겐 피난성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5·16 쿠데타 직후엔 몇몇 장교들이 이곳에 숨어서 미군정보기관의 비호 아래에서 박정희(朴正熙)와 그 측근의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었다. 12·12사태 등 국내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용산 기지로 은신해오는 한국인들도 있었다.
  
  이곳이 요사이는 언론의 도마 위에 부지런히 오르고 있다. 민주언론 운동협의회의 월간지 「말」은 지난 6월 호에서 「용산 미8군기지」와 「미8군 출입하는 한국인 고위층들」이라는 기사를 실어 용산 기지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주한 미군 측에서는 「말」지의 용산 기지관련 기사를 반박하는 자료를 만들어 놓고 있다. 양쪽의 쟁점을 소개한다.
  
  「말」지의 기사요지 : 이 금싸라기 벌판이 「잃어버린 땅」이라는 증거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미군기지 철조망 담벼락에는 「미 군용시설, 무단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있고 철조망이 침을 돋구고 있다.
  
  미군자료 : 철조망은 한국의 상업지구, 농촌, 도시, 그리고 한국군부대 따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말 : 우리 땅인 미군기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미8군 당국이 발행한 출입증소지자에 한한다. 미군과 그 가족들은 신분증을 가볍게 내보이며 녹색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데, 정작 서울시민들은 미군기지 주변을 걷게 되면 의기소침해진다.
  
  미군 : 한국민간인들도 한국군 부대에 대한 출입을 금지 당하고 있다. 미국인도 용산 미군부대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다. 미국인들도 자신이 주한미군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시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동작대교, 사전 협의 없었다
  
  말 : 미국육군 용산 위수사령부(Army Garrison Yongsan)의 땅값은 평당 1천만 원씩 계산하여 무려 8조5천억 원에 상당하며 한국 예산의 절반에 가깝다.
  
  미군 : 미국 측 한미행정협정 담당자들에 따르면 이름난 한국부동산개발 전문가는 용산 부지의 땅값을 1에이크 당 1백20만 달러, 즉 용산 부지전체의 가격을 약9억7백만 달러(약7천억 원 상당)로 추산한다고 한다.
  
  말 : 지난 84년 11월에 완공된 동작대교는 길이 1천3백30m, 너비 40m 로서 전철복선과 왕복6차선의 차도·보도를 갖추고 있다. 용산 기지를 관통하여 남산 기슭으로 빠지는 너비 50m의 도로를 건설 이 다리와 연결시키려 했으나 미군당국이 도로개설협의에 응하지 않아 반신불수가 되었다.
  
  미군 : 미국 측 한미협정 담당자에 따르면 지난 79년에 후암동에서 용산 기지를 지나 한강에 이르는 55m 너비의 도로 건설문제에 대해서 서울시 당무자는 미군 측에 비공식적으로 문의해 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시 당무자들은 용산 부지가 한국으로 반환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주한미군 당국에서는 구두로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정부당국에서는 더 이상 주한미군과 상의하지 않고 동작대교 공사를 진행했다(편집자주 : 동작대교의 북쪽끝이 용산 기지로 뻗지 못한 채 잘려 있는 모습을 보고 한 미군은 「갈 곳 없는 다리」(The Bridge to Nowhere)라고 빈정댔다).
  
  말 : 용산구를 지나는 4호선 지하철도 직선으로 뻗지 못하고 용산 기지를 피해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빠져나가고 있다. 용산 기지는 단순히 교통불편을 주는 것만으로 그 치지 않고 용산 발전 자체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있다. 서울시민의 교통불편과는 달리 미군영내 군용도로는 사통팔달이며 문이 40개나 된다.
  
  미군 : 미국관리들은 용산 기지가 서울의 지하철 노선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주한미군은 지하철 노선의 계획이나 건설과 관련하여 한번도 상의를 받은 바 없다. 용산 기지 주변에는 40개가 아니라 17개소의 문이 있다. 용산 기지가 밀집된 아파트단지에 의해 대체된다고 해도 교통체증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말 : 용산구 통계연보에는 서울시 통계연보의 항목에는 없는 「지역별 건축규제 상황」이 별도로 적시되어 있다. 즉, 이태원로, 원효로, 한남로, 청파로, 백범로, 한강로에서는 3층 이상, 소월길, 강변로는 1층 이상을 높이제한하고 있다.
  
  미군 : 용산 기지 주변에 있어서의 건축제한은 주한미군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정책이다. 말 : 해방촌 미군기지 담벼락 옆에 사는 이상호 씨 등 7가구 주민들은 매년 여름이면 미8군부대 하수도에서 흘러 들어온 물 때문에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미군 : 해방촌 지역은 용산 기지의 상류에 해당한다. 해방촌에서의 하천범람은 한국인주거지역에서 생긴 쓰레기가 용산으로 들어가는 수로를 틀어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용산 기지의 오물처리는 최신기술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국의 공해방지기술자들은 오수처리장에서 나오는 배수의 수질이 좋아 대부분의 공공급수체계에 재사용이 가능할 정도라고 말했다.
  
  혼혈아의 책임은?
  
  말 : 미군장교주택은 지난 주택공사에서 지은 것이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5·3인천사태 등을 시발로 반미기운이 높아지자 서초동 미군장교주택지에서 쫓겨나(?) 미8군부대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 한다. 주한미군들은 한국인이 내는 전기요금의 43%만 내면 된다. 그들의 휘발유 구입비는 한국인들에 비해 4분의 1밖에 안 된다. 또한 사적으로 소유하는 차량들도 한국의 도로세를 면제받는다. 부가가치세는 물론 특별소비세도 물지 않는다.
  
  미군 : 주한미군 가족들은 1986년 5월의 인천폭동 1년 전에 지금의 용산 기지 영내로 옮겼다. 건설과 이사는 그 훨씬 전에 계획되었다. 「특혜」에 대해서 말한다면 주한미군은 한국의 최 우대 고객에게 적용되는 산업용 전기료를 내고 있다. 이 전기료는 한국정부에 상당한 이익을 남겨줄 만한 정도다. 비슷한 경우로서 주한미군은 한국인 공급자로부터 휘발유를 사고 있는데, 그 공급자는 이익을 남기고 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과 나토국가에서도 미군은 기지용 토지 사용료를 내지 않고 있다. 한미행정협정에 의하여 주어지고 있는 많은 혜택은 다른 해외지역에서 미군이 받고 있는 것들과 같다.
  
  말 : 미군은 또한 한국에 이른바 「혼혈아」와 「양공주」를 만들어냈다. 1946년 이후에 태어난 혼혈아의 숫자는 정확히 조사된 적은 없지만 약7만명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미군 : 아시아계 미국인과 고아문제에 정통한 한 미국관리는 혼혈아가 7만 명이나 된다는 주장은 엄청나게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여러 조사들은 혼혈아의 숫자를 5천∼7천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양자나 이민의 방법으로써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시아계 미국인 혼혈아들이 한국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사회의 한 현상이지. 주한미군의 존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전 경비는 한국정부가 물어야』
  
  용산 기지는 연합사, 주한미군사 건물 등 사무실 건물이 몰려 있는 메인 포스트지구, 장교숙소와 골프장 및 갖가지 위락시설이 있는 사우스포스트, 그리고 501 정보여단과 신병교육대가 있는 캠프 코이너 등 3개 지구로 돼 있다. 군인 약 5천, 그 가족 약 5천 등 약 1만 명이 이 지역 안에서 살고 있다. 공교롭게도 용산 기지의 모양은 남한지도와 흡사하고 육군본부와 국방부건물을 품고 있는 듯한 자세이다.
  
  「말」지는 이를 두고 「군사종속의 상징-분단모습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사우스 포스트 지구 안에서는 지난 해 10월부터 2백77실을 가진 9층 규모의 호텔형 군인 숙소가 건설되고 있다. 용산 기지에 근무하는 장교들은 심한 숙소 난을 겪어 내자호텔, 가든호텔 등을 빌어 쓰고도 모자라 보조금을 주어 한국인의 집에 세 들거나 전세를 얻도록 하고 있다.
  
  약 3천만 달러가 들어갈 이 숙소건설과 약 5천5백만 달러가 들어갈 병원(예산확보) 및 지난 7월에 문을 연 1천4백만 달러 짜리 식품백화점은 미군이 용산 기지를 쉽사리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징표라고 생각되었으나 이전이 확실해진 지금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궁금하다. 몇 년 전부터 한국군 지휘부의 이동소문이 나돌자 미군 측에선 이 이동이 용산 기지의 이전에도 압력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한국정부측에 『정말 옮기느냐』고 묻곤 하였다. 주한미군의 한 고위 당무자는 『한국 정부가 옮기라고 하면 그러는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기지이전에 따른 경비는 한국 측에서 부담해야 할 것이다.
  
  용산 기지의 땅값이 엄청나니까 이사 경비는 쉽게 빠질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군들에게는 그것이 「미군은 나가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까 걱정이다』고 했다. 한 재야언론매체에서 주한미군사령부 홍보실에 이런 질문을 서면으로 했다. 「동작대교를 지나는 한국인들은 미 8군 골프장에서 미국인들이 한가롭게 골프를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귀하의 견해는?」 「위락시설을 미군기지에는 흔하다 스포츠는 군인들의 육체적, 신체적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여기에 와 있는 미국인들은 한국인들과 꼭 같이 스포츠를 즐긴다」
  
  문화전통과 가치관이 한국과는 다른 나라의 한 분신이 한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잡음으로써 빚어지는 갈등은 처음부터 예견돼 온 것이었다. 그런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기보다는 한국 측의 힘이 세어지고 민족의식이 날카로와 지면서 그런 갈등에 대한 자각이 예민해진 것이다. 국방부의 한 고위간부가 출입증을 보이지 않고 용산 기지로 들어가려다가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아 약간의 마찰을 빛은 뒤 돌아가야 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의 국방부출입이 통제되었다든지, 디켈(Decal)이라는 차량출입증을 한국인들에게 팔아먹은 미군헌병장교가 미 군사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고, 서울시내 식당보다 나을 것이 없는 미군장교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을 사회적 신분의 과시라고 알고 있는 한국인들이 용산 기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적 반응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목요골프모임이라는 것이 있다. 정일권(丁一權) 전 국회의장 민복기(閔復基) 전 대법원장 홍성철(洪性澈) 현 대통령비서실장. 민(閔)기식 전 육군참모총장 장성환(張盛煥) 전 공군참모총장 이치업(李致業) 예비역 육군 준장 그리고 주한미군사령관과 참모장 및 미국대사 등이 회원들이다. 지난 70년대 초에 조직돼 목요일마다 용산 기지 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한때 이 모임을 친미파들의 모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고, 회원들 중에는 미국 측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스스로 과시하는 이도 있었다. 한 미군 당무자는 『한국 측에서 이 모임의 성격을 오해하고 과대 평가해서 입장이 난처하다. 주한 미군 사령관은 잘 나가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한 카투사가 본 용산 미군
  
  용산 기지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일들은 민족감정의 프리즘을 통해 각색되는 수가 많다. 주한미군에는 약 7천3백 명의 한국인 카투사(KATUSA=Korean Agumentation to the U.S. Army) 사병들이 근무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강(姜)응천씨(26·서울 관악구 신림동 거주)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재학 중 지난 85년 5월에 카투사로 입대 2년3개월간 용산 기지의 헌병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군대생활을 편하게 보내겠다고 카투사 시험을 쳤다. 논산 훈련소를 거쳐 평택의 캠프 험프리에서 3주간 카투사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미군의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대학생 때 반미, 반미 했지만 그때의 미국은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했었다. 어마어마한 기지의 규모, 그리고 교관이 한 말-「너희들은 더 이상 한국 육군이 아니다. 미군에 예속, 통합되는 것이다-을 통해서 미군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용산의 헌병대에 배치되어 미군사병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어느 날 군목의 정신 교육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군목이 한·미군 사병들에게 「당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조국의 재통일이다」고 답했다. 이때 어느 미군사병이 나즈막하게 「빨갱이 같은 자식!」이라고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목사의 표정도 굳어지고 교육장의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헌병이기 때문에 이태원에 나가는 일이 잦았다. 1985∼86년 무렵부터 반미감정이 부각되자 그때까지 주로 미군들의 행패를 감수하고 있던 한국인들이 저항하면서 패싸움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한국인에게 행패를 부린 미군들은 미군 헌병대로 넘어오면 거의가 「공소유지 불가능」 등의 이유로 풀려났다. 미군 범죄자가 구속돼 한국의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있을 때는 미군 측에서 거의 매일 면회를 가서 한미행정협정이 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1986년 5월의 인천사태 직후에 이태원에 외출 나갔던 연합사 의장대 소속 사병 4명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가 수십 명의 주민에게 얻어맞아 중상을 입고 입원한 사건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치료 중 죽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네 명은 흠씬 두들겨 맞았었다. 이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직후 리브시 사령관은 이태원에 외출을 삼가 하도록 지시했고. 「그런 싸움터에선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도 했었다. 차량출입증(디켈)을 둘러싼 한국인들의 추태는 민망할 정도였다.
  
  미국인 고급장교의 추천과 미 헌병대의 신원조회를 거쳐 출입증을 얻고서 하는 일은 좋지도 않은 미군부대의 식당과 골프장 이용이라니…. 지난해 가을에는 민정당 모 고위인사의 차가 용산 기지 안에서 정차위반으로 딱지를 떼인 적도 있었다.
  
  나의 동료 미군헌병 병장은 영화배우처럼 잘 생겼는데 그의 한국인 아내는 영화에도 몇 번 출연한 한국인 여배우였다. 두 사람이 이태원을 함께 걸어가다가 각목을 휘두르는 고등학생들로부터 봉변을 당할 뻔했다. 파출소에 잡혀온 한 고등학생은 파견 근무 중이던 나를 보고는 「아저씨 카투사죠. 아저씨 심정 다 알아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예쁜 한국인 여가가 미군과 함께 가는 것에 기분이 상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이들의 행동을 찬성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 그런 감정이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카투사 생활을 하면서 훨씬 반미적으로 변모하였다. 어느 동료 카투사는 「전쟁이 나면 미군부터 쏴 죽이겠다」고 말하곤 한다. 미2사단에서 근무하는 카투사에 따르면 2사단의 일부 미군들은 북한군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할 뿐 아니라 한국의 민중에 대한 경멸감도 심해 상당한 갈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군들은 한국인의 반미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생각이 강하다. 운동권의 미국을 보는 시각에도 문제가 많다. 허황된 정보에 근거하여 반미주의로 흐른다든지 미국을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전제한 뒤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미국에 그 책임을 덮어씌우는 식이 되어선 곤란하다. 억압을 받는 자뿐 아니라 억압하는 자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한미관계가 지금처럼 감정문제로 되면 피차의 인간성이 왜곡되고 만다. 양국의 참다운 친선관계를 위해서도 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다운 우호관계는 그런 분리 이후에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4: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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