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의 근대화와 국민 上(4)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미국의 원조도 떳떳하게 받는다
  
  ―이스라엘은 매년, 30억 달러(18억 달러는 군사원조, 12억 달러는 민간 부문 원조)의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습니다(이집트와의 평화협정 체결에 의해 시나이 반도를 반환한 대가로 이스라엘의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명목하에서 1970년대 말부터). 이스라엘 정부는 미국을 어떻게 설득했길래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그처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켰나요.
  
  『정부 對 정부 관계도 중요하지만 미국의 여론을 움직였습니다. 의사결정 관계자뿐 아니라 언론 등 중요부문에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많이 확보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미국은 냉전시대에 소련의 영향력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이스라엘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주적이고 친서방적이면서도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유일한 중동 국가입니다. 종교적, 문화적으로도 미국은 아랍국가들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친밀감을 느끼지요.
  
  ―이스라엘 군대는 겉으?봐서는 아주 질서가 없는 것 같은데 실전에선 굉장한 효율성을 발휘해 왔습니다. 독창적인 조직 편성과 전략, 그리고 왕성한 사기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동기부여가 잘 돼 있습니다. 왜 싸워야 하느냐, 싸우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정신무장이 확고합니다. 둘째, 이스라엘 군인들은 교육수준이 높습니다. 셋째, 유태인 대학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전쟁에 지면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는 경고가 있습니다. 넷째, 군수산업이 튼튼합니다. 1967년 6일전쟁까지 우리는 프랑스에 무기구매를 의존했습니다. 드골은 6일전쟁 직후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판매를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은 또 다시 우리 이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우리는 방위산업을 발전시켜 나갔고 결과적으로는 드골의 무기금수 조치가 이스라엘을 도왔습니다』
  
  캄 박사는 IDF의 또 다른 강점으로 「작전 계획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신축성」을 들었다. 『작전계획은 실전에서 절대로 그대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변화된 상황 속에서 현장지휘관이 자발적으로 유연하게 작전계획을 적용하도록 재량권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 장교들의 특징입니다』
  
   무기체제의 독립이 자주국방의 요체
  
  이스라엘은 국내총생산(GNP)의 4.5%를 연구개발에 쓰고 있다(미국은 2.7%, 일본은 2.6%).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 연구개발비의 50%가 방위산업에 투입된다는 점에서도 세계 최고이다. 하이테크 부문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이스라엘 과학기술의 모태가 방위산업이란 얘기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무기금수조치 이후 미국에 매달려 무기공급을 받으면서도 주요무기의 자체 개발을 통해 對美 의존도를 줄이려 애썼다. 미국이 제공하기를 거부한 관성유도장치, 대용량컴퓨터, 우주로켓, 인공위성 부분의 기술은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스라엘이 자체 제작한 전투기, 미사일, 인공위성의 성능은 특정 분야에선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스라엘은 또 1970년대 초에 핵무기개발에 성공하여 수백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이스라엘軍 소요무기의 40%를 국내에서 생산하며 무기 수출액은 연간 16억 달러나 된다. 이스라엘 정부는 「주요무기 체제의 생산을 외국에 의존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은 무기개발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미국과는 이제 상호의존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이집트, 시리아 등 아랍국가들은 소련의 무기체제와 군사고문단의 직접 주둔을 허용했지만 이스라엘은 한 번도 그런 직접적인 무기지원을 어느 나라로부터도 받은 적이 없다. 자주국방의 비결은 「나 이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다짐에서 우러나오는 국민들의 투지와 정보 및 무기체제의 독자성 확보에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1967년 6월5일은 이스라엘 공군 역사상 최고의 날이었다. 이날 오전 7시10분 이스라엘 공군은 전투기 12대만 지상에 대기시켜 놓고 나머지 전투기 전부를 출동시켰다. 지중해 상공으로 나아간 뒤 저공비행으로 이집트를 향해 접근해갔다. 이집트 공군 기지의 교대시간을 틈탄 기습이었다. 대부분의 이집트 공군 장교들은 출근 도중에 있었다. 이집트 전투기들은 활주로와 격납고에서 기습을 당했다. 이날 오전 두 차례의 기습으로 이집트 전투기 3백9대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19대가 격추되었다. 이집트 공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사막전에서 공군의 엄호 없는 기갑·보병 부대는 무용지물. 6일 전쟁은 개전(開戰) 30분만에 사실상 그 승부가 끝나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6년 뒤 4차 중동전쟁 때는 상황이 달랐다. 1973년 10월6일 오전 5시 이스라엘 군대는 開戰 9시간 전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을 결심했다는 판단을 하고 공군에 선제공격 준비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메이어 수상은 선제공격명령을 취소시켰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가하면 침략자로 몰릴 것이고 미국이 對이스라엘 무기금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기공급을 외국에 의존할 경우 결정적 시기에 심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좋은 사례이다. 4차 중동전쟁 18일간 이스라엘 공군은 적기 4백50대를 격추시킨 반면 1백4대를 격추당했다.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은 약 2천5백명의 사망자와 7천5백명의 부상자 등 1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인구가 3백만 남짓하던 이스라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
  
   이스라엘의 일선 골란고원(高原)
  
  뻔히 알면서 기습당한 이스라엘 전선에서 가장 급박했던 곳은 종심(국경에서 이스라엘인 거주지까지의 거리)이 20∼30km에 불과한 골란高原이었다. 종심이 깊어 방어하는 데 여유가 있는 시나이 사막의 對이집트 전선보다도 골란고원의 對시리아 전선방어에 이스라엘이 주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신문 국제면에 그 이름이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골란고원을 향해 떠난 것은 이스라엘 도착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프라 여사가 모든 밴에는 정보장교(대령) 출신으로서 라파엘社의 정보 시스템 동부 영업담당 이사인 헤지 나훔氏가 동행했다. 예수가 세례 받은 요르단江과 예수가 베드로를 제자로 포섭하고 물위를 걸었다는 갈릴리 호수 주변은 풍요로운 옥토였다. 들판은 밀밭, 해바라기, 올리브, 포도나무로 덮였고 하늘은 광명(光明)했다. 갈릴리 호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바라본 골란고원은 거대한 장벽처럼 솟아올라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6일전쟁 전 골란고원이 시리아 손에 있을 때는 수시로 포탄이 갈릴리 주변에 키부츠로 날아왔다고 한다. 골란고원으로 오르는 급경사 길 주변은 요르단과 국경선으로서 우리나라의 DMZ를 닮은 분위기를 풍겼으나 일단 고원에 도달하면 확 트인 평야가 시야를 메우는 것이었다. 남북 약 50km, 동서의 폭이 20∼30km인 골란고원은 서울의 두배쯤 되는 면적이다(1천1백76㎢). 북단엔 백두산과 거의 같은 높이를 가진 헤르몬山. 그 봉우리를 한라산으로 잡는다면 제주도 산간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1967년 이후 골란고원에 22개 마을이 생겼고 1만1천명이 살고 있다. 도로 바로 옆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노란 표지판에 「지뢰 위험」이라고 쓰여진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시리아軍이 두고 간 기관총좌를 잡고 바로 눈 아래로 보이는 갈릴리 주변 마을을 겨냥해 보니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는 것이었다. 지금 이스라엘 정부는 이 골란고원을 시리아에 반환하되 비무장지대로 만드는 방안을 가지고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에 임하고 있다. 이 고원을 옥토로 가꾼 이스라엘 농민들을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 국론 분열의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골란고원을 달려보니 이스라엘 측이나 시리아 측이나 이 전략 요충지를 상대방한테 주고서는 잠이 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원에 서면 서쪽으로 이스라엘의 갈릴리, 동쪽으로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가 내려다보인다.
  
  전략적으로 가히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 지역인 것이다. 이스라엘軍의 포진 방식은 우리와 달랐다. 우리는 DMZ를 따라 병력을 골고루 배치시켜 놓고 있지만 이스라엘 군은 국경지대 후방 20km쯤 지점에 기갑 부대를 여러 거점에 집중시켜 놓고 있었다. 전방경계는 소수의 병력과 <정찰기+전자정보기지>로 구성된 조기경보시스팀에 주로 맡겨 놓고 있었다. 좋은 정보시스템은 군병력의 감축과 효율적 배치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성력화(省力化) 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스라엘은 인구의 10%가 현역 아니면 예비군이다. 40여만 명의 예비군이 경제활동에 종사하도록 해야지 수시로 비상이 걸리고 동원령이 내려서는 경제가 제대로 가동될 수 없다.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조기 경보시스팀이 불침번 역할을 맡아야 인력이 생산부문에 제대로 투입될 수 있다는 얘기다
  
   위대한 스파이 엘리 코헨의 유해 송환이 외교 현안
  
  1973년 10월 골란高原에서 예비군으로 싸웠던 나의 안내자 토니 리트먼氏는 『그때 사상자를 철수시키는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요사이도 그 참혹한 장면들을 애써 잊으려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는 부상자가 땅바닥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도록 돼 있다』고 했다. 전사자·부상자·실종자·포로들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와 군대의 끈질긴 관심은 유별나다. 지난 5월21일은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의 전설적인 스파이 엘리 코헨이 시리아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의 추모식에 참석한 이자크 라빈 수상은 코헨의 유골을 이스라엘로 송환해줄 것을 시리아 측에 요구했다. 라빈 수상은 앞으로 열릴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에서도 유골송환이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헨은 이집트에서 출생한 유태인인데 시리아계(系) 아르헨티나 실업인으로 위장하여 시리아 권력층 깊숙이 침투, 고급정보를 모사드로 타전(打電)하였다. 특히 골란高原의 시리아 측 병력 배치 상황에 대한 정보는 1967년 6월의 6일전쟁 때 이스라엘 군이 골란고원을 점령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6일전쟁 때 참모총장이었던 라빈 수상은 30주년 추도식에서 코헨이 보낸 정보가 이스라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얼마나 유용했는가에 대해서 강조하기도 했다. 코헨은 1965년에 신분이 탄로 나서 공개처형 되었다. 그의 유언은 이스라엘에 묻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기자가 만난 사람들마다 코헨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듯했다. 토니 리트먼氏는 『코헨은 죽을 때도 이스라엘을 향해 눈을 뜬 채 죽겠다고 해서 머리에 용수를 쓰지 않고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했다. 조국을 위해 희생된 간첩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고 기념하는 곳이 이 세계에서 또 한 군데가 있는데 바로 북한이다. 귀국하여 전직 안기부 간부에게 코헨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한국에는 임무수행 도중 죽은 간첩도 없고 기릴 만한 위대한 공작원도 없다』고 말했다.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던지려는 사람들이 별로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국사회란 뜻인데, 국민의 정신력을 탓하기에 앞서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할 일을 다했는가부터 따져 볼 필요가 있겠다.
  
   국민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다한다
  
  이스라엘의 경우, 포로가 된 조종사 1명과 5명의 실종자에 대해서 정부와 언론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95년 편 연감에는 이들을 구출, 또는 발견하기 위해 취했던 노력들이 2페이지에 걸쳐 언급되고 있었다. 테러에 자국민이 희생되면 꼭 보복을 감행하고, 승객이 납치되면 엔테베 작전을 벌여 찾아오고, 죽은 포로나 간첩의 유골까지도 반드시 조국으로 가져오겠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집념은 용감한 국민들에 대한 국가의 당연한 보호책임일 뿐이다. 1·21 청와대 습격, 육영수(陸英修) 암살, 아웅산 테러, KAL858편 폭파 같은 선전포고의 사유에 준하는 공격을 당하고도 북한에 대해서 총 한방 쏴보지 못한 대한민국은 8년 전 납북된 동진호 선원이나 지난 5월에 납북된 우성호 선원에 대해서도 마지못한 관심 정도만 보이고 있다.
  
  한국의 품에 안기려고 목숨 걸고 탈출한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꼭 장사꾼이 주판알 튕기듯 정보 가치에 따라 선별 귀순시키고 있다. 국가 지도층부터가 국가의 본질이 무엇인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정권 담당자부터가 국가를 사회단체시하니 종교계에선 성당과 사찰에 대한 합법적 경찰 투입까지도 규탄하고 나온다. 이스라엘은 순전히 자신들의 피로써 국가를 건설하고 황무지를 옥토로 바꿨다. 그들에게 「국가」란 관념이 아니라 실체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공짜로 주어진 것이었고 미군이 지켜준 것이었다. 국가를 세우고 지키는 데 주인의식이 부족하였기에 국가의 기본 행태가 어찌 되어야 하는지를 대통령부터가 모르는 것이다. 외국에 대하여 자존과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국가만이 자기 국민들을 제대로 보호해 줄 원칙과 힘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모세는 왜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나
  
  갈릴리와 골란고원을 여행한 다음 날 기자는 알론 기보니씨의 승용차(日製 수바루)를 타고 死海쪽으로 달렸다. 텔아비브-예루살렘-제리코-死海-마사다-텔아비브 코스를 택했다. 예루살렘은 해발 7백m쯤 되는 고지대인데 여기서 해면 아래 3백96m인 형국이었다. 군데군데 베드윈족(族)의 천막과 양떼가 보일 뿐 미국 아리조나주의 풍경과 흡사한 돌산, 모래산, 물이 마른 와디(Wadi) 그리고 사막의 연속이었다. 전날에 본 갈릴리-골란고원 지역의 녹색지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 성경에서 여리고로 표기되는 제리코市 남쪽에서 좌회전하여 死海의 동안(東岸)은 해면을 시커멓게 그늘지게 할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그 절벽 위가 요르단 땅이고 그 너머로는 삭막한 돌산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시나이 사막을 헤맨 뒤 바로 저 요르단 쪽 네보山 근처에 당도했다. 그는 네보山에 올라 제리코의 오아시스와 가나안땅의 풍요로움을 구경한 뒤 그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기보니씨는 유태교의 하느님이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모세는 노예의 아들이었습니다. 새 땅에서 새 역사를 시작하려는 마당에 노예의식에 물들었던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신 것이죠』
  모세는 구약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노예로 태어난 이의 의식은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새 술은 새 부대에」란 지침에 의해 용도폐기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말하자면 시대가 이미 모세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리라.
  
  死海의 西岸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30분간 달려 도착한 곳이 마사다(MASADA)였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2분의 1로 줄여놓은 것 같은 주변 풍경 속에서 마사다는 제주도의 일출봉처럼 요철 모양으로 솟아 있었다. 지상에서 높이가 약 3백m되는 천연의 요새. 그 북쪽 절벽을 깎아 신약 성경에도 나오는 헤롯王이 별장용 궁전을 지었다. 서기 66년 신앙의 자유를 위협당한 유태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던 마사다를 탈취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반란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서기 70년 로마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마사다 요새에서는 9백67명의 유태인들이 끝까지 버티었다. 서기 72년에 로마군은 실바 장군의 지휘하에 예루살렘에 주둔하던 제10군단 1만5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 마사다를 포위했다. 기자 일행은 케이블 카를 타고 마사다 요새로 올라갔다. 실바의 로마 공성군(攻城軍)이 흙으로 댐을 쌓아올려 서쪽으로 기어올라왔다는 그 흙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사다 요새는 5백×3백m모양의 타원형이다. 1960년代 초에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 출신인 야딘 장군(그는 사해문서(死海文書)발굴도 지휘했다)의 지휘하에 발굴작업이 벌어졌다. 성벽, 수영장, 창고, 교회당, 저수조 같은 시설이 드러났다.
  
  『마사다는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
  
  마사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반란군 9백60명(7명은 생존)이 집단자살로써 강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유태인 반란군의 한 지휘자였던 조세푸스 플라비우스는 로마軍에 투항, 공격자의 입장에서 「유태인의 전쟁」이라는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이 책에서 그는 마사다의 최후를 극적으로 묘사했다. 반란군 지휘자 엘라자르는 로마軍의 공격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반란군과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연설했다는 것이다.
  
  「이제 새벽이 오면 우리의 저항은 끝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지금 갖고 있다…우리의 손이 자유롭고 아직도 칼을 잡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우리의 적에 의해 노예가 되기 전에, 우리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을 떠나자」
  
  이들의 자살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9백60명의 유골은 1960年代의 발굴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나 유태인들은 마사다를 대학살박물관과 함께 하나의 성지(聖地)로 여기고 있었다. 기갑부대 신병훈련생은 수료식을 여기에서 한다. 절벽길을 걸어서 올라와서 이들은 저 멀리 요르단 땅과 死海를 내려다보면서 구호를 외친다.
  『마사다는 두 번 다시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마사다에서 내려온 우리는 기보니氏를 따라 死海연안의 한 호텔로 갔다. 기보니씨는 『내 장인이 휴가차 이 호텔에 투숙하고 계신다』면서 객실로 전화를 걸었다. 장인은 큰 버스회사의 경리책임자로 일한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전쟁엔 히로이즘이 있는데…
  
  조금 있으니 기보니씨와 장인이 다가 오더니 인사를 청하는데 두 팔이 모두 잘려나간 老人이었다. 그는 쇠손을 내밀었고 나는 차가운 금속을 잡고 악수를 했다. 6일전쟁 때 기보니씨의 장인은 예비군으로 소집돼 소령으로 복귀, 대대를 지휘했는데 요르단 전선에서 포격을 당해 부상했다고 한다. 1년 동안 수술을 수십 번 받으면서 온몸에 박힌 파편을 뽑아내느라 사경을 헤맸다고 한다. 그는 『전쟁에서는 모든 게 운이지. 내 직속 부하는 한 방에 날아가 버렸으니 그래도 나는 행운이었소』라고 쾌활하게 말했다. 기보니씨의 장모는 전형적인 「주이시 마더」(Jewish Mother)로서 한국에서 온 손님에게 대접할 것이 없나 해서 안달이었다.
  
  이 할머니는 이스라엘 독립전쟁 때는 유명한 여성. 戰士로서 그때 총을 잡았던 그 손으로 커피를 타서 주는데 남편은 두 쇠손으로 그 커피 잔을 부둥켜 안듯이 받았다. 폭격기 조종사 출신 사위, 상이용사가 된 장인, 독립군이었던 장모 그 세 사람의 정답고 밝은 모습에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전쟁은 한국의 전쟁과는 다른 의미와 해석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전쟁은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받아들이며 견뎌낸 적극적인 전쟁이었던 데 비해 한국의 전쟁은 강요된, 그래서 피하고 싶은 비극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엔 히로이즘과 영광이 있는데 한국의 전쟁엔 슬픔과 후회뿐이다. 올해 국방부에서 만든 6·25전쟁 포스터의 문구는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었다. 중학생 수준의 작문을 연상시키는 이 글에는 최소한의 국가관·역사관은 커녕 투지도 의욕도 없다.
  
  2차세계대전 이후 공산세력의 확장을 최초로 저지시킨 6·25의 의미를, 영광과 승리의 전쟁으로 해석하지는 못할 망정 마치 국군이 피붙이도 무시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선 것 같은 죄의식으로써 전쟁기피 풍조나 부채질하는 표현을 쓰고 앉아 있으니 우리 국군은 과연 어느 쪽의 군대인지. 내일이 있는 군대인지, 조국이 있는 군대인지…
  
출처 : 월조
[ 2003-07-02, 14: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