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육성증언 下(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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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담배 끊고 山行 몰두
  
  金泳三 총재는 1960~70년대에는 술, 담배, 수영, 승마를 즐기다가 1980년대부터는 그런 것들을 끊고 山行에만 몰두하는, 상당히 금욕적인 변신을 했다. 1987년 5월 8일 인터뷰에선 거기에 대해서 말했다.
  
  -술은 언제부터 절주를 하십니까?
  『포도주를 가끔 마시는데 15년쯤 전까지 먹었지요. 상당히 많이 먹었지요』
  
  -주량이 양주 두 병 정도시라면서요.
  『그럴 때는 늘 있는 것은 아니고 보통 한 병 정도. 담배도 다섯 갑 이상 피웠어요. 종교적인 의미로 끊은 거지요』
  
  -동시에 끊었습니까.
  『동시에, 아니지요. 담배를 먼저 끊었지요』
  
  -담배는 언제 끊었습니까.
  『담배가 18년 될 거고요』
  
  -그러면 40대 기수론 말씀하시기 직전에 끊으신 것입니까.
  『40대 기수론이 몇년도 일입니까?』
  
  -1969년, 70년….
  『40대 기수론 바로 이후입니다』
  
  -술은 전혀 안드시는 게 아니라 양을 확 줄여버리셨습니까.
  『그렇지요. 마주앙, 포도주 조금』
  
  -그러면 취할 정돈?잡수신 것은 그 뒤론….
  『없지요』
  
  -시간적으로도 밤 10시 이후에는 안 잡수신다고 들었습니다.
  『거의 그렇습니다』
  
  -술을 끊으니까 좋습니까.
  『좋은 거 같아요. 기분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거 같아요』
  
  -金총재님은 자기통제라고 할까 그게 아주 철저하신 분으로 알려졌는데 조깅하시는 거라든가, 그렇게 하시게 된 게 언제부터입니까.
  『그것이 제가 70년도 후반부터 그것을 강조해 온 사람인데요. 70년대부터 시간을 굉장히 지키는 편입니다. 그래서 지금 통일민주당이 창당되고 나서 우리 회의가 1분도 늦게 시작 안합니다. 내가 정시에 하는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지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처음부터 선언했어요. 누구든지 늦게 오는 사람 아무 관계 愎? 회의는 시작한다. 총재단회의 정무회의 의원총회 전부 다 그렇게 해요. 시간을 지킨다는 게 내가 전에도 얘기했지만 제일 중요한데요. 시간 안 지키는 사람은 다른 약속도 안 지켜요. 별로 바쁘지 않은 사람이 시간을 안 지켜요. 일이 덜 있는 사람이 말이에요』
  
  -이건 절대로 안한다고 이렇게 마음 속으로 정해 놓으신 게 있습니까. 나는 거짓말을 안한다든가 화 날 때도 상욕은 안한다든가.
  『그것도 그렇습니다. 안합니다』
  
  -「이 새끼 xx」하는 그런말….
  『그런 말 안 씁니다』
  
  -과거에는 안그러셨지요? 굉장히 성격이 급하셨다고 하던데요.
  『그렇지요. 화 나면… 지금은. 말이라는 게 한 번 뱉어 버리면 거둬들이기가 어렵거든요』
  
   시간을 타고난 사람
  
  金泳三대통령은 시간에 대해서 확고한 생활철학을 갖고 있는 분이다. 8년 前 1987년 6월 사태 직전(4~5월)은 통일민주당 창당준비, 창당 뒤의 시비, 그리고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 축소 은폐 폭로로 시국이 숨가쁘게 돌아가던 때였다. 이런 가운데서 金泳三총재는 단 한번도 기자와의 시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인터뷰를 끝내면 다음 인터뷰 시간을 약속하고 金총재는 수첩을 꺼내 적어둔다. 그 시간에 사무실(무교동 민족문제 연구소)에 기자가 나타나면 金총재?항상 방을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다. 손님이 있어 기자가 바깥에서 기다린 적도, 金총재가 외출했다가 늦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그런 시간 지킴은 상대방에게 성실하려는 태도로 비쳐져 감동을 줄 만 했다. 아침에 부친에게 전화를 거는 시간, 조깅시간 같은 것들도 金총재가 거의 평생 어기지 않는 「절대시간」이다.
  
  金총재는 자신의 뛰어난 정치적 感까지도 『결단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했다. 李承晩.朴正熙는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간 사람이다. 金泳三대통령은 자신의 시대를 창조했다기보다는 시대를 타고난 이로 봐야 할 것이다. 정치가의 가장 큰 大運은 시대를 타고나는 것인데, 金泳三총재는 그런 時運에 복 받은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시간을 그렇게 소중하게 섬기는 사람이니까 시간도 그를 비호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7년 4월25일 오후에 金총재는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일이 전도서처럼,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습니다. 찬스를 놓치면 영원히 기회가 안온다, 찬스는 그 꼴가 뒤에 달린 게 아니고 이마에 달렸다는 얘기처럼 찬스가 올 때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山行의 즐거움
  
  -요즘 산에는 한 번도 안 가셨지요?
  『못 갔어요. 내주 금요일은 갑니다』
  
  -이번에 장소는 결정하셨습니까.
  『예, 도봉산입니다. 산에 가면 참 즐겁습니다. 산에 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큰 즐거움이 있어요 마음이 편안하고요. 또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요. 산에서 밥을 먹으면 그렇게 맛이 있습니다. 천하에 성찬을 갖다 줘도 그런 게 없을 겁니다』
  
  -정치고 뭐고 다 그만두고 산에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안 들어요.
  『그런 생각 들어요. 산에 못 가니까 답답해서 죽겠어요. 지금 내가 바빠서 어머니 산소에 갈 건데, 하룻밤 자기 때문에 이틀을 잡아야 하는데 어머니 산소에, 총재가 된 게 큰 변화 아닙니까. 그래서 갔다 오려고』
  
  -큰 일이 있으면 꼭 가셨습니까.
  『예, 꼭 갑니다. 이번에 국회도 있고 인사문제 같은 것도 있고 지금 현재 바쁜 일들이 많거든요. 그 일차적인 일들 우선 처리하고』
  
  -하루에 金총재님만의 시간이 어느 정도 됩니까.
  『별로 많지 않아요』
  
  -식사를 혼자서만 하실 때는 있습니까.
  『거의 없지요』
  
  -앞으로 이 혼자만의 시간을 늘릴 생각은 없으십니까?
  『필요할 거 같아요』
  
  -보통 며칠 앞에까지 약속하십니까?
  『어떤 때는 열흘 전에 하는 때도 있고요. 대체로 사오일 전에까지 약속을 하지요』
  
  -이런 불안은 안 느끼십니까? 金총재님께서 굽히지 않으시고 죽 나가실 경우에 말하자면 당에서 같은 걸음걸이로서 쫙 따라와야 되는데 너무 빨리 나가시고 뒤를 돌아보면 혼자 이렇게 많이 나와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든지.
  『여당이고 야당이고 마찬가지지만 지도자 한 사람의 가는 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기자들하고 많이 만나고 이러시면 좀 피로하시지 않습니까?
  『기자들하고는 많이 안 만납니다. 그전에는 좀 만났는데 매일 가십에 오르내리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봐요. 지도자 얘기가 매일 신문에 나온다는 것이 보통 잘못된 게 아니지요. 또 지도자라고 하는 것이 걸음걸이가 조금 무거워야지요. 안 갈 데를 가도 안되고요』
  
  =기독교 집안이 된 이유
  
  1987년 5월8일 인터뷰에서 金총재는 집안에서 기독교를 믿게 된 동기를 들려주었다.
  
   해방 후 기독교 믿기 시작
  
  -기독교는 언제부터 믿으셨습니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계실 때,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해방되자마자 바로 믿었지요』
  
  -부친도 그때부터 믿으셨습니까?
  『그렇지요. 해방되고 바로』
  
  -그러면 가까운 친척중에 목사님이나 이런 분이 계십니까?
  『그때는 없었어요. 우리 집이 수산업을 하니까 미신이 굉장히 많거든요. 진수식을 해도, 어장을 시작하는 날도 떡 같은 걸 많이 해 가지고 바다에 내버려요. 그리고 무당이 와서… 어느 업종보다 미신이 많아요. 그랬는데 좌우간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그런 결심을 했어요. 우리집에 제사도 많고 그랬거든요』
  
  -온 집안이 믿는 데 무슨 큰 계기가 있었습니까?
  『아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딘가 큰 감동을 받았든가 또 목사님을 통해 가지고 상당히 세뇌를 많이 받았나 봐요. 정말 어려운 일이라든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 그때 내 동생이 셋이 있었습니다. 셋이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동생은 없고 누이동생만 다섯이 있습니다』
  
  -나이가 몇 살 때 죽었습니까?
  『다 어릴 때 죽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데 그런 것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독교를 결심하게 된 큰 이유였다고 생각해요』
  
  -병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요. 옛날에 마마』
  
  -세 분이 다 마마로?
  『예. 그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동네 교회에 가셨습니까?
  『교회가 坪릿歐?우리집에서 사랑을 내 가지고 전도사를 청해 가지고 했어요. 그 후에 우리 집 바로 앞에, 그러니까 우리 대문 바로 앞에 뽕나무가 심겨 있는 밭이 있었어요. 거기를 뽕나무 밭을 다 치우고 교회를 세웠지요. 조그마한 동네니까 전도사를 모시고 오고 그래서. 지금은 그 동네 40호 되는데 다섯 호 정도 빼고는 전부 다 믿을 겁니다』
  
  -지금까지 크게 아프신 적 없습니까? 삼사십일 정도 누워 계신 적은.
  『그런 일은 없지요. 물론 며칠 동안 무슨 독감이라든가 아픈 일은 있지요』
  
  -수술 받으신 적은?
  『있지요. 원내총무 때 말을 타다가… 말을 15년 정도 탔습니다. 그때 워커힐 쪽에서 둑을 뛰다가 어떤 애들이 장난해 가지고 구더기 파 놓은 거기에 풀을 덮어 놨는데 그것을 알길이 있나요. 말이 거기에 빠져 가지고 내가 붕 뜨는 바람에 떨어져가지고 죽을 뻔했어요. 쇄골(鎖骨.빗장뼈)이 부러졌어요. 그때 쇄골을 붙이기 위해서 적십자병원에 한 1주일인가 입원해 있었어요. 그래서 깁스를 하고 다녔지요』
  
  =5.16 직후의 두문불출
  
  金泳三의원이 5.16 군사쿠데타 뒤에 주체세력의 서명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공화당에 가담했더라면 오늘의 金대통령은 없었을 것이다.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되었다가 탈당하여 李承晩대통령을 반대하게 된 것과 함께 5.16 뒤에 지조를 지킨 것은 그의 생애를 좌우한 선택이었다. 이 대목에 대한 그의 증언은 이러했다.
  
  -그때 5.16 났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거제에서 들었어요』
  
  -소식 듣고 서울 올라오셨습니까?
  『올라왔지요. 그때 얘기를 내가 했지요?』
  
  -5.16 직후의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밤에 와서 자꾸 성명서를 만들라고 한 이야기 안했어요?』
  
  -안했습니다.
  『그래요. 그래 올라왔는데 원내에 있던 친구를 안 만났습니까. 만났는데 그때 군정에 대해서 일부 이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절대 군정에 협력해서는 안된다, 쿠데타한 세력과 협조해서는 안된다 그런 태도였어요』
  
  -그렇습니까?
  『예. 정치인들이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군인들이 쿠데타 해 놓고 절대 끌고 못간다, 나는 이런 신념이에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친구들이 그때 내 얘기가 옳다고 다 그랬어요. 이랬는데 그때 한번 밤에 늦게, 그 사람들은 꼭 밤에 다녀요. 이름은 그 사람 아직 살아있으니까 말 못하고 그 당시 서울시 정보부지부장입니다. 밤 12시나 되면 집에 와요. 참 기분 나쁩니다』
  
  -지프차 타고?
  『그래 오는데 와 가지고 나한테 저희들 혁명을 지지해 달라는 거지요. 안된다, 절대 협조하지 못하겠다, 이래 얘기할 때인데 꼭 12시가 넘어서 와요. 남 자는데 벨 울리면 참 기분 나빠요. 그 사람들 쿠데타도 밤에 했는데 꼭 밤에 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잠 안 자고 말이에요. 그 전에 한번은 내 친구들 딱 서명을 받아가지고, 군사혁명을 지지한다는 성명이 신문에 실린다고… 해 달라고 왔어요. 누가 할 거다 누가 할 거다 하지만 진짜 했다는 거야. 내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하고, 다 해도 나는 못하겠다 했어요. 참 그때 분하고 그럽디다』
  
  -서명한 이들은 소장층이었습니까?
  『소장층이지. 하루는 내일 같이 동아일보 광고로 낸다고 왔더라고요. 못하겠다. 최후의 순간이지요. 절대 못하겠다. 정보부에서 만들어준 것입니다. 내가 보니까 도저히 그런 데에 사인해서도 안되는 것이고 할 수 없는 성질이더라고. 그래서 거절해서 보냈더니 아니 진짜 그날 석간에 나왔어요. 아마 1면에 전단기사로 났지? 광고로. 쭉 연명으로 말이야』
  
  
  =고향과 어머니
  
  1987년 5월16일 인터뷰에서도 金총재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다.
  
   어려울 땐 고향생각.어머니 생각
  
  -김총재님은 마지막으로 울어보신 것이 언제입니까?
  『글세』
  
  -연금 중에는 우신 적은 없습니까?
  『그런 적이 있었지요. 연금 중에 몇번 운 적이 있지요』
  
  -평소에 눈물을 잘 보이시는 편은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내 마음이 약하게 되는 때가 있어요. 약하게 된다는 것은 남에게 비극적인 사태가 왔을 때. 눈물 안 보이려고 굉장히 애쓰지요. 눈물이 솟구치는 충격을 받는 때가 많지요. 그러나 그것을 손수건을 꺼낸다든가 하는 일은 좀체로 안하지요』
  
  -억지로 참으려고 하십니까?
  『예, 참지요』
  
  -구속자 가족들하고 만나면 그런 때가 더러 있겠습니다.
  『그렇지요. 들으면 마음이 뭉클해져 버리지요』
  
  -더구나 구속되고 어머니가 자살했다든가 이런 얘기.
  『그렇지요. 그리고 동물과 같이 취급되는 거. 그런 것을 개밥을 먹인다고 하는데 뒤로 묶어 가지고 개밥 먹인다는가 독방에다가 넣어 가지고… 감금방이라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는 거지요. 때로는 이상한 음악을 넣어 가지고 정신착란증이 오도록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든가 이럴 때 소름이 끼칠 정도거든요. 그리고 어머니들이 이야기 할 때는 피상적이 아니고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주거든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는 이렇게 고문하는 자들을 과연 다음에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안 들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세상에 제일 나쁜 일이, 인간이 인간을 고문하는 거지요. 아가 우리 어머니 얘기를 했는데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그동안 효도할 기회가 없었어요. 내가 어머니한테 어디 가서 따뜻하게 밥이라도 저하고 같이 먹읍시다, 외식을 한다든가 모시고 어디 구경이라도 시킨다든가 이런 일이 우리 어머니 살아 계신 동안 없었어요. 그리고 조용히 어머니하고 어디로 걸어 다닌다든가 이런 기회도 없었고』
  
  -단 둘만의 시간.
  『둘이 아니라도 말이야. 그래서 차를 이래 타고 가다가 젊은 딸이 나이 많은 할머니, 자기 어머니지요, 손을 붙들고 부축하다시피 걷는다든가 이런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럽고 그게 어떤 때는 눈물겨워요. 그래서 어떤 때는 내 차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분들이 가기에 불편을 주게 하면 내가 기사 보고 야단을 칩니다. 너 왜 차를 이렇게 하느냐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말이야.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도 효도하고 잘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누구든지 사람을 보면 부모한테 잘해라 하는 이야기를 반드시 합니다. 지금 그것이 보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마산에 계신데 이틀에 한 번은 반드시 전화를 합니다. 지금 그것이 보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마산에 계신데 이틀에 한 번은 반드시 전화를 합니다. 아침에 문안을 드려요. 그렇게 긴 얘기도 안하지요. 「건강하십니까. 어제는 뭐하셨습니까」오늘 주일날 같으면 「어느 교회 갑니까?」 정도에요. 이 양반이 거제교회 가셨다가 건어망어장이 옆에 있는 수정교회 가셨다가 만산교회 가셨다가, 세 군데로 가거든요』
  
  -전화 받으시면 항상 반가워하시지요?
  『그렇지요. 이 양반이 걱정을 해서 요새 「아이구 네가 왜 이렇게 복잡하냐」오늘 아침에도 전화했더니 「아이구, 왜 그리 복잡하냐」, 아이구 아버지 염려하지 마시라고, 하나님이 계신데 염려하지 마시라고 합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라고, 「전에 거제 온다고 그랬는데 이렇게 복잡해서 올 수 있겠나?」하면 「어떤 일이 있든지 갈 겁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합니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4:5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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