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기자의 몽골벨트 취재보고(5) - 우리는 누구인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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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쪽박을 깨지 않으려고
  
  거대한 현실로서 다가오고 있었던 누루하치의 후금(後金)을 오랑캐라고 경멸만 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의 선비들이었고 그대로 고민 끝에 등거리 외교를 통해서 국제정세의 변동기에 국체를 보존해 보려고 눈물나는 노력을 했던 이가 광해군(光海君)이었다. 이 光海君을 몰아낸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중요한 명분 가운데 하나가 光海君이 明에 대한 사대(事大)를 버리고 오랑캐와 친선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仁祖는 다시 친명(親明)정책으로 돌아섰고 그 결과는 두 차례에 걸친 호란(胡亂)이었다. 선비들은 사대명분론에 입각하여 오랑캐와 친교하면 안된다는 원칙론만 강조했지 국방을 강화하지도 않았다. 입만 가지고 충신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선비는 충신으로 길이 역사에 남으면 되지만 불쌍한 것은 백성이었다. 막을 수 있었던 전란을 자초한 선비들은 청(淸)에 잡혀간 여자들이 풀려나 돌아오자 가문의 수치라고 하여 받아주지도 않았다. 자살자들이 속출했고 일부는 몸을 파는 신세가 되었다. 남자들의 명분론에 여자가 희생된 것이다. 선비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淸이 중국을 통일하자 朝鮮의 선비들은 없어진 明에 계속 충성을 바치는 희대의 허구적 명분 놀음을 계속한다. 이미 사라진 明의 연호(年 )를 이어받아 썼으니 유령이 된 제국을 위한 일편단심이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오랑캐인 淸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 실학파였으나 朱子學의 족쇄를 풀어버리기에는 너무 약했고 너무 늦었던 것이다.
  
  김구(金九)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李承晩은 건국을 감행했다. 역사는 李承晩의 선택이 한국의 공산화를 막았고 오늘의 한국 번영을 기약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金泳三 대통령을 비롯한 현재의 집권세력 중에 金九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그것을 당론으로 할 때는 심각한 국가 이념의 혼란을 부르게 된다. 1996년 年初 신한국당은 신문광고에서 金九를 모델로 하여 『너희는 역사를 바로잡아라』는 문구를 크게 내세웠다. 金九의 역사관에 따라 역사를 바로잡으라는 뜻인데 그러면 대한 민국 건국을 부정하라는 뜻인가. 朝鮮王朝의 건국을 반대했던 鄭夢周를 朝鮮의 집권세력이 숭배했던 것과 같은 자가당착인 것이다.
  
  한국인의 이런 명분론이 위대한 위선이 아니라 위대한 보편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국가보다도 민족을, 권력보다도 지조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은 정권이나 국가를 뛰어넘는 인류공영의 도덕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철학자가 그런 고매한 도덕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집권세력이 보통사람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도덕률을 만들어놓고서 국가경영을 거기에 종속시켰다는 데 있다. 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가 큰 만큼 위선의 폭도 커진다. 한국 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의 하나가 민족과 국가의 동일시, 또는 혼동이다.
  
  金庾信과 李承晩을 매도하는 논리는 위선적인 민족주의이다. 국가란 그릇은 그 당시에 존재하는 민족을 다 담을 수는 없다. 현실적인 조건과 민족 역량의 한도 안에서 국가란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全민족을 다 품지 못했다고 애써 만든 그릇까지도 너무 작다고 욕하면서 깨버리려고 날뛰는 지식인들과 그것을 말리는 사람들의 실랑이 속에서 그래도 쪽박이 살아남은 것은 위대한 지도자들과 건강한 국민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우리 지식인들을 폄하하는 것인가.
  
  이런 지식인들에 비해서 朴正熙가 훨씬 더 근대적이고 진보적이었다는 것은 통일원을 민족통일원이라 하지 않고 국토통일원이라 이름지은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은 민족통일이 아니다. 민족통일을 하려면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와 차례로 전쟁을 하여 그곳에 사는 한민족을 다 데려오든지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빼앗아오든지 해야 한다. 히틀러가 바로 그런 민족통일을 하려다가 인류를 참화로 끌고 갔던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金庾信이 대강 선을 그었던 한반도라는 국토의 통일인 것이다. 민족은 관념이고 국가는 실체이다. 말로 하는 민족주의보다는 실천하는 국가주의가 더 정직한 개념이다.
  
   李承晩과 서재필(徐載弼)의 차이
  
  기자는 이번 몽골-투르크 문화권 취재를 통해서 미국이 세계를 정복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군사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어를 통해서, 소련의 붕괴는 러시아語 사용권의 축소를 의미했다. 소련 연방의 한 공화국이던 우즈베키스탄이 공용어로 쓰던 러시아語 대신 우즈베키스탄語를 공용어로 채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월남의 하노이와 사이공의 영어학원 앞은 항상 교통체증이 생길 정도이다. 이들 개발 도상국가에서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2∼5배의 월급을 더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영어를 언어통화(Linguistic currency)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7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로 된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언어는 사고방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언어구조 특히 문법의 구조가 같다는 것은 사고방식, 가치관, 관습에서도 유사성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어와 비슷한 언어구조를 가진 것이 일본, 몽골, 중앙아시아, 터키, 헝가리, 핀란드 사람들이다. 몽골-투르크 문화권에 속하는 민족이다. 이들과 만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하고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가슴과 가슴을 오고 가는 감정의 교환은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인자는 언어일 것이다. 투르크族의 분류 기준은 체질이나 혈통이 아니라 투르크語이다. 한국어를 잊어버린 교포들의 자제들을 과연 한국인으로 분류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언젠가는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유럽에서 고유의 언어를 갖지 않고서 국가를 세운 나라는 거의 없다. 언어는 민족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앞으로 이 그릇의 상당 부분은 영어로 채워질 것이다. 이런 영어화는 필연적으로 英美的 사고방식의 확산을 가져올 것이다. 이런 것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李承晩이다.
  
  1945년에 李承晩이 약 40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그의 한국어는 손상받지 않고 있었다. 이무렵 李承晩을 자주 만나 전기를 쓰고 있었던 시인 서정주(徐廷柱)씨에 따르면 그에 대한 첫인상이 『여기 순종 조선인이 있구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朝鮮에서보다도 미국에서 생활한 기간이 더 길고 서양여자와 결혼했으며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미국 고급 문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그가 어떻게 순종 조선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서재필(徐載弼)이 광복 이후에 美 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귀국했을 때 그는 우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徐廷柱 시인은 李承晩 전기에서 徐載弼과 李承晩을 재미있게 비교하고 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던 徐載弼은 10여 년 뒤 미국시민이 되어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고문관이 되는데 배재학당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학생으로 참석했던 李承晩은 徐載弼이 『미국인들은 이렇게 박수를 친다』면서 모범을 보일 때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李承晩은 미국인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을 때였지만 아무리 미국이 좋다지만 박수까지 따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반발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徐廷柱씨는 「이것이 이승만과 서재필의 차이였다」고 썼다. 영어를 아무리 잘 해도 미국인처럼 행동하고 싶지는 않다는 오기, 손자가 할아버지 보고 『하이』하고 부르는 것이 미국이지만 『나는 미국에서 안살면 안살지 그런 짓은 못하겠다』는 식의 반발심을 李承晩이 가졌었기 때문에 조선을 잃지 않고 견딜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漢字와 영어
  
  한국인으로 남아 있으려는 이런 본능적 부름, 이것을 촌스럽게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기 쉽게 된다. 그 첫 증상은 우리 말을 잊어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구촌 시대이니까, 세계화 시대이니까 하면서 민족적 개성을 벗어던지는 것이 선진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이것은 패션 추종형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할 가능성이 크다. 강대국에서 냉전이 끝났다고 하니까 한반도에서도 냉전이 끝났다고 착각하여 한국에서의 냉전적 思考를 舊시대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지식인들이 李承晩 같은 사람을 매도하는 데도 앞장서는 법이다.
  
  영어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되 민족혼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영어만큼 한자를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다. 한자를 통해 동양을 배우고 영어를 통해서는 서양의 합리와 과학성을 배운다면 우리 어린이들은 동, 서양의 교양을 일찍부터 섭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소학교 학생들은 한국의 고적을 구경하면서 한자로 적힌 설명문이나 표지판을 해독하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조상들의 발자취를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있는 오늘의 한글전용 교육이 계속되면 젊은이들은 점점 우리의 선조들과 멀어지고 미국인들과 더 가까워질 것이다.
  
  국제화는 민족과 문화 사이의 갈등을 더 심화시키고 있다. 외국인과 접촉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의 특수성과 차별성, 그리고 선진 문화에 대한 반발심과 열등감은 더 강렬해 진다. 그런 접촉 없이 우리끼리 살 때는 몰랐던 것이, 외국여행과 외국인과의 만남이 늘어날수록 『결국 이 세상이 그 바탕은 아직도 부족국가이구나』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문명의 충돌을 체험하는 것이다. 동양인 가운데서도 영어와 언어 구조나 문법이 가장 크게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 한국인과 일본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만큼 사고방식과 습관에서도 가장 크게 다르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다가 유교와 기독교라는 차이점이 또 있다.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과 영미권의 기독교 문화권이 21세기에 가장 첨예하게 충돌할 것이라는 예측이 유행인 것도 사고방식과 생김새에서 가장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미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취성의 배경은 강인한 체력
  
  몽골인종은 세계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고 있는 종족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시리아에서 살다가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古몽골족(옛 시베리아족)으로 분류된다.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인 新몽골인(새 시베리아족)과는 다소 인류학적인 차이가 있으나 비슷한 점이 더 많다. 이 古몽골족으로서 아직 일본에 남아 있는 것이 아이누族이다. 에스키모族도 古몽골族으로 분류된다. 古몽골族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연대는 대강 2만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인디언으로 불리는 이들은 南아메리카로도 이동하여 아즈텍, 마야, 잉카와 같은 찬란한 문화를 건설했으나 스페인에 의해 멸종의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잉카 문명의 요람이었던 페루에서 소수의 백인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던 인디오들이 新몽골족인 일본족 출신의 후지모리를 대통령으로 밀어 일대 개혁을 하도록 한 것은 古몽골족과 新몽골족의 연합에 의한 복수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몽골인들의 역사적 무대를 보면 아프리카(이집트를 수백년 통치했던 맘루크 무사들은 몽골系였다)와 동유럽에까지 뻗어갔다. 현재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중국)와 21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될 나라(인도),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국토가 넓은 나라(러시아)가 모두 몽골族의 지배를 받았다.
  
  남북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호주만 빼고는) 5대륙에 다 진출한 이런 진취성과 힘의 배경은 무엇인가. 말에 의한 기동성 이외에 이 종족의 강인한 체력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몽골, 한국, 일본, 월남, 미얀마, 티베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헝가리 같은 나라들이 아직도 몽골인종적 공통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나라들이다. 지난 애틀랜타 올림픽 때 여자양궁에서 4강에 오른 나라 중 두 나라가 몽골·투르크族 국가에 속했다. 한국과 터키. 활로써 세계를 정복했던 전통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은 國名에서 이미 몽골-북방초원-기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민족이 만든 나라라는 것을 확실히 한 나라이다. 大韓民國의 韓은 「크다」나 왕을 의미하는 알타이語 「칸(Khan)」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대한민국을 영어식으로 표기하면 Great Khan Republic이다. 韓은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서 지금의 남한 지방에 있었던 三韓(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辯韓))을 설명할 때 나타난다. 이 韓은 한국인의 인종적, 정신적, 언어적 고향이 중국이 아닌 북방의 초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인의 인종적 기원에 대하여 김정학(金廷鶴) 박사는 「한국상고사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옛 시베리아족의 한 갈래가 신석기 시대에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까지 이르렀고 그 뒤 청동기 시대에 새 시베리아족이 남하하여 역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이동하였다. 우리 민족은 이 두 계통의 부족이 혼혈, 정복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민족으로 된 것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순망(順望)
  
  기자는 1989년에 미국의 아이오와주에 있는 인디언 보호지역에 가본 적이 있다. 할머니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는데 꼭 시골 사랑방에 온 것 같았다. 그분들이 풍기는 분위기와 표정은 기자를 편하게 해주었다. 이들은 옛 시베리아族 출신이고 기자는 김정학(金廷鶴) 박사의 주장대로라면 옛 시베리아族과 새 시베리아族의 혼혈이니까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결코 비과학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마쓰모도(松本秀雄)라는 일본의 한 의과대학 교수는 몽골 인종에게는 Gmab3st라는 유전자가 혈청 중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 그 분포를 조사했다.
  
  그 결과 지금의 바이칼호(湖) 북쪽에 살고 있는 몽골族 뷰리아트가 1백명 중 52명이 그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가장 많았고 한국인은 41%, 일본인은 45%, 아이누族은 44%였다고 한다. 중국의 화북(華北) 지방 사람들은 26%였으나 화남(華南) 사람들은 9%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인은 0%였다. 이것은 몽골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질수록 몽골인종의 순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은 가장 순도가 높은 몽골인종으로 분류된다. 혈통적으로도 그럴 뿐만 아니라 언어도 알타이語이고 기마(騎馬)의 전통을 일본인보다도 훨씬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고구려(高句麗) 무용가(舞踊家) 벽화의 사냥 장면은 5∼6세기에 고구려 사람들이 고도의 기마술을 발전시켜 놓았음을 말해주는 물증이다. 특히 말을 탄 사람이 말이 달리는 방향과는 거꾸로 뒤를 향하여 활을 쏘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高句麗 무사들이 전형적인 몽골의 기사(騎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을 타는 사람을 안정시켜주는 발걸이도 보인다.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서기 407년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5만은 백제(百濟)와 왜(倭)의 연합군을 평양 근방에서 참패시켰다고 적고 있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참패의 원인은 왜군(倭軍)이 당시에 騎馬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도 비록 몽골인이기는 하지만 섬이란 점 때문에 북방 초원과 일찍부터 단절돼버렸던 데 비하여 한국은 북방 초원 문화와의 접촉과 교류를 이어갔던 것이다.
  
  우리가 중화적 세계에서 벗어나 해양문화권으로 편입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국호(國號)를 朝鮮에서 大韓(大韓帝國, 大韓民國)으로 바꾼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중화적 질서를 깨부수고 韓의 세계, 즉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초원의 야성으로 돌아가자는 순망(順望)이 이 개명(改名)에 서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1세기 전의 그런 원망은 이제 우리 눈앞에서 실현되어 이 韓, 干, 칸(Khan)의 세계, 즉 몽골 벨트는 한국인의 안마당이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번 취재의 결론적 보고인 셈이다. 이 취재에 협조해주신 현지의 한국공관과 대우 그룹의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5: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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