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7) - 학살의 해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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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보다 인권을 이야기할 때다
  
   미국 헌법의 기초에 중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제임스 매디슨이었다. 그는 서른 여섯 살의 젊은 법률가였다. 20년 뒤 대통령이 되는 매디슨은 몸이 허약하고 부끄럼 타는 사람이었지만 헌법기초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 있었다. 미국 헌법 기초위원들은 정부의 기본 구조와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했다. 정부는 국민들의 합의에 의하여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는 다수의 독재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 어떤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균형과 견제의 원칙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권력은 남용되게 마련이라는 것 등에 합의하였다. 매디슨은 국민들이 모두 천사라면 정부가 필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게 보이는 사람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면 정부는 인간의 선의와 덕성만 믿고서는 일 할 수 없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 조직이어야 한다고 매디슨은 말했다. 미국 헌법의 기초자들, 즉 건국의 아버지들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죄를 짓게 되는 인간들의 본성을 잘 다스려 이런 성향을 공중(公衆)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돌려놓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 헌법이 이상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현실과 실천력, 그리고 실용정신에 기초한 이상을 담았기 때문에 미국 헌법이 진실로 이상적인 것이다. 우리 헌법전문(前文)과 미국 헌법전문을 비교하면 우리 헌법전문이 훨씬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미국 헌법전문에서는 미국의 국가적 목표를 민주주의란 단어를 쓰지 않고 정의내렸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민주개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정의, 인도, 동포애, 세계평화, 인류공영 같은 좋은 말들이 많이 있지만 미국 헌법 전문에는 복지, 안전보장 같은 실제적인 단어들이 있을 뿐이다. 헌법 전문만 읽으면 미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하여 냉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무슨 하느님이나 되는 것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짖는 그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목숨을 걸 만한 종교적 신념이 아니다. 자유, 평등 같은 인간적 존엄성을 위하여는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가 있지만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위한 투쟁은 우상숭배가 될 위험성이 있다. 민주주의는 미국 헌법이 말한 대로 국민들의 복지와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는 제도이지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실지의 숭상」이란 말은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태도에 적용되어야 할 용어이다. 이제는 민주주의보다는 인권을 이야기할 때이다.
  
   20세기 최속(最速)의 학살
  
  기자는 1997년 봄학기에 하버드의 정치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에서 「미국 외교의 중심 과제」란 강의를 1주일에 두 번씩 들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 정부가 대응한 과정을 분석하여 쓴 「의사결정의 본질」이란 책으로 유명한 그래함 앨리슨 교수와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의 안보보좌관실 차석(次席)으로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로보트 블랙윌 전임강사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과목이었다. 이 시간에 르완다 학살사건이 주제 (主題)가 된 적이 있었다. 이런 학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미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는 시간이었다.
  
  1994년 4월 중앙 아프리카에 있는 르완다에서 학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클린턴 정부는 평화유지군을 보내야 한다는 유엔의 주장에 냉담하게 반응함으로서 50만 명 이상의 피살자가 생기는 사태를 방치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 강의시간에선 「대규모 학살의 방지」가 미국 외교의 목표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지침이 되는 「국익(國益)등급」중 최상위인 「사활적(死活的) 이익」(Vital Interest)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20세기의 학살사례 가운데 르완다 사태는 가장 큰 것은 아니지만 가장 빨리 이루어진 학살이다. 불과 석 달만에 50∼80만명이 동물들처럼 도살되었다. 이 르완다 사태도 학살의 가장 큰 책임자는 선동적인 정치인들임을 보여준다.
  
  르완다는 면적이 강원도 정도인데 인구는 약 7백만 명이나 된다. 인구의 85%는 후투족이고 14%는 투치족이다. 이 두 종족은 같은 언어, 종교, 역사를 공유하고 있어 단일민족으로 볼 만한 점도 있다. 그러나 다수종족인 후투족 정부는 「투치족은 외부에서 침입해온 종족」이라고 정의(定議)내려 놓고 있었다.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투치족을 가해자라고 낙인찍어두고서 후투족이 독점하는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후투족 정치인들의 계산이었다. 고구려 백제 지역 사람들은 삼국통일의 피해자이고 신라지역 사람들은 가해자란 식으로 정의를 내린 다음 정치적 선동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1990년 10월 소수종족인 투치족으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이 우간다에 기지를 두고 르완다로 들어와 반(反) 후투정부 게릴라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유엔은 평화유지군을 보내고 양쪽의 협상을 유도하여 1993년 8월에는 양(兩)종족이 권력을 공유하는 정부를 세운다는데 합의했다.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수도 키갈리 근방에서 격추되어 대통령이 사망했다. 후투족의 강경파가 투치족과의 공존에 동의한 온건한 대통령을 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로 죽일 이유는 없었다
  
  대통령의 피살을 투치족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후투족 정부내의 강경파는 수도에서부터 소수파인 투치족을 섬멸할 것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후투족의 민병대가 앞장서 투치족뿐 아니라 온건한 후투족까지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영방송을 통해서 학살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다음날 다수족인 후투족 출신의 야당 지도자이자 여자수상인 윌링기이마나가 군인들에게 피살되고 그녀를 보호하려던 열명의 벨기에 평화유지군 병사들도 죽었다. 벨기에 정부는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파견한 1개 대대를 철수시킴으로써 이 결정적인 시기에 유엔군을 무력화시켜버렸다.
  
  4월 29일 이미 학살된 투치족(族)은 20만 명을 넘어섰고 25만의 난민들이 이웃한 탄자니아로 밀려들고 있었다. 이날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갈리는 유엔 안보리(安保理)에 군대파견을 요청했으나 부결되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유엔의 발목을 잡았다. 5월31일 클린턴 대통령은 르완다 사태를 「학살(Genocide)」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6월 8일 유엔 안보리는 비로소 5천5백 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로 결의했으나 실제로 투입되기까지는 수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7월4일 소수파 투치족으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이 수도 키갈리를 점령,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학살선풍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약 3개월간 계속된 학살로 투치족의 절반이 죽었다. 투치족이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살육을 주도했던 쪽인 후투족 백만 명 이상이 보복을 피해 이웃한 자이레로 달아나 난민문제가 발생했다. 유엔난민구호의 상당부분은 난민촌으로 피신한 후투족 살육자 들에게 전해졌다. 1994년 11월8일 유엔 안보리는 르완다의 학살주범들을 처벌할 국제전범재판소의 설치를 의결했다. 르완다 정부는 이 전범 재판소의 규정에 사형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별도의 사법절차을 진행시키겠다고 선언, 최근에는 20여명을 공개 처형했다.
  
  르완다 학살 3년 뒤인 지난해 4월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유엔이 4월7∼21일 사이에 약 5천명의 평화유지군을 르완다에 투입하였더라면 대규모 학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엔이 평화유지군을 상비군으로 갖고 있어야 이런 사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반성도 있었다. 5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르완다 사태는 죽고 죽인 측이 그럴 만한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란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피부색깔, 언어, 종교, 역사가 같아 종족카드가 없으면 분간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현(現) 르완다 정부는 이 종족인식카드를 없애버렸다. 종족간의 감정은 순전히 정치적인 조작과 선동에 의해서 집단적 살의(殺意)로 변질된 것이다. 국민들을 선동하여 어떤 집단을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최악의 범죄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문민 정치인들이 유행시키고 있는 「내부의 적」 「기득권 세력」 「수구세력」「반동 세력」「가진 자들」「음해세력」「반(反)개혁세력」이란 섬뜩한 말들은 잠재적 위험성을 가진 용어들임을 알아야 한다.
  
   포로 처형의 상황
  
  전장에서 일어나는 학살은 정치적 선동에 의하여 비무장한 사람들을 살육하는 학살과는 성격이 다르다. 기자는 작년 6월 15명의 미국인들과 함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단체여행한 적이 있었다. 유태인들이 일곱 명이었다. 한 유태인은 『우리는 일할 때도 열심히 하지만 놀 때도 열심이다』고 했다. 유태인 7명 중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이 둘이었다. 샘이란 유태인 할아버지는 은퇴한 뒤 여행만 한다고 했는데 기자와 친해졌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군병사로 참전하여 1994년 12월 독일군이 아르덴느 반격전을 펼칠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난 이였다. 그는 『상관으로부터 전투 중에는 적을 포로로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적을 포로로 잡으면 후송하지 말고 사살해 버리라는 의미였다.
  
  전투중에 포로를 잡으면 그 포로를 감시하고 후송하는 데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울 때는 그런 조치를 취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잡은 포로를 놓아줄 수도 없다. 등뒤에 총부리를 갖다대는지 자기 부대로 돌아가 이쪽 정보를 알려줄 것이다. 간단한 방법은 죽여버리는 것이다.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한국군의 한 예비역 장교는 이런 말을 했다. 『부하가 무전으로 베트콩 포로 몇명 이라고 보고하면 저는 「포로는 무슨 포로, 포로는 없어!」라고 해버립니다. 포로를 처리하란 뜻이지요. 정글에서 포로를 후송해온다고 우리 편이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유태인 할아버지 샘은 다행히 독일 군의 보호를 받아 수용소에 갇혔다. 패전이 다가오자 포로수용소를 지키던 독일군은 미군측에 항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소련군이 워낙 빨리 들어와 수포로 돌아갔다. 소련군은 독일 군인들을 몽땅 쏴 죽여버리더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가장 용감했던 이유기 있었습니다. 가족중에 독일군들로부터 안 당한 사람이 없으니까 모두가 복수심으로 불타서 물불 안 가리고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없었던 미군들은 용감할 수가 없었지요』
  
  6.25 때 고지(高地)를 주고받는 쟁탈전으로 많은 인명손실이 있었다. 최후의 돌격으로 적의 진지를 점령하고 적병(敵兵)을 사로잡으면 흥분한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장교가 말릴 수도 없었다. 기껏 『칼로 찌르지 말고 쏴 죽여라』는 것이 고통을 덜어주는 인도적 조치였다고 한다. 적병에게 전우(戰友)가 죽은 뒤에는 동물적 복수심만 남게 되는 것이다. 1951년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물밀듯이 남쪽으로 내려올 때 육군은 유격대를 편성하여 강원도의 적진(敵陣)에 투입한 적이 있었다. 「백골병단」이라 불린 이 유격대는 60일간 작전을 하다가 귀대했는데 6백 47명 중 60%가 전사하고 2백60명만 살아 돌아왔다. 이 백골병단의 부대장은 뒤에 주월(駐越)한국군사령관이 된 채명신(蔡命新) 중령이었다. 채명신씨가 쓴 회고록 「死線을 넘고 넘어」와 참전동지회가 펴낸 「白骨兵團史」에는 인민군 포로를 사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命令線과 射線에서 빠져 있을 때
  
  이 유격대는 이동중인 인민군 소부대를 습격하여 50여명을 생포했다. 5명은 무장한 인솔자였는데 나머지는 무장하지 않은 보충병들이었다. 채명신씨는 회고록에서 인민군들을 모두 처치했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백골병 보충병들까지 죽여야 하느냐로 이견이 많았다. 한쪽에서는 「죽이지 않으면 인민군에게 알려 우리를 죽게 할 것이다」고 했다. 채명신 대장은 결국 강경론을 따라 50여명을 사살하도록 했는데 그날 밤에는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하느님께 기도도 드렸으나 그래도 허전하여 아픈 마음을 끝내 메울 수 없었고 회고록을 쓰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인민군 부대로 위장한 백골병단은 3월14일 새벽에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귀군리 곰배골이란 부락에 들어가서 공산당 세포원들을 소집해놓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우리는 남조선 괴뢰도당의 낙하산 부대가 이곳에 침투했다는 정보를 듣고 이곳을 보호하려고 왔으니 협조해 주시오』 이렇게 해놓고는 모든 기관을 접수한 뒤 내무서원 일곱 명과 공산악질분자 열다섯명 등 모두 스물두명을 처단 했다는 것이다. 이 백골병단은 길원팔 유격대의 대장인 길원팔을 체포했다. 강원도 인제군의 한계령 남쪽 필례라는 마을을 덮쳤을 때 외딴 농가에서 인민군 보초병이 서성대고 있는 것이 수상해서 집안을 수색, 환자 한 명과 여군장교 한 명, 그리고 소년 한 명, 보초병 한 명, 모두 네 명을 붙들었다.
  
  이들을 문초해보니 환자가 바로 김일성의 특명을 받고 남한에서 인민군 유격대을 지휘하러 남하하다가 병에 걸려 요양중인 길원팔이었다. 이들을 헛간과 창고에 분산 수용해 두었는데 여군장교가 탈출했다. 백골병단 대원들은 그녀를 추적했으나 붙들지 못했다. 이 인민군 여군장교가 틀림없이 대부대를 이끌고 길원팔을 구출하러 올 것으로 판단한 백골병단은 철수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그때 포로로 잡아두고 있던 길원팔을 비롯한 예순일곱 명의 공산당원들이었다. 적의 추격을 피해서 탈출하는 길에 이들을 데리고 가자니 자신들이 위험에 빠질 것 같고 해서 결국 대부분을 총살해버렸다 한다.
  
   전장에서도 틈은 있다
  
  전장에서의 피아(彼我)관계는 「내가 죽지 않으려면 네가 죽어야 한다」로 요약된다. 이런 상황에 인간이 놓이면 인도주의나 동포애가 들어갈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전쟁은 인간관계의 원리를 야수의 세계로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장에서도 틈은 있다. 군인이 명령선과 사선(射線)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때이다. 육사 8기 출신인 강영환(姜英煥) 중위는 6.25 기습남침 때는 수도사단 소대장이었다. 인민군에게 쫓기면서 기진맥진 상태로 오산 부근을 후퇴하던 때 일어난 일을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눈을 감고 졸며 앞에서 가는대로 발길을 옮겼다. 옆이나 앞뒤에 누가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자정쯤인데 우연히 눈을 떠보니 옆에서 누런 견장(肩章)을 붙인 북괴병들과 우리가 함께 걷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도 휴식을 하다가 우리 대열에 끼여든 모양이다. 서로 전투중인 적(敵) 사이인데 잠에 취해서 경계심도 긴장감도 들지 않았다. (中略) 청송전투에 참여하기 위하여 강행군을 할 때였다. 휴식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나 그렇듯이 길가에 앉아버린다. 자정쯤인데 앉으면서 보니 북괴병들이 우리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 병사들은 슬금슬금 걸어다니면서 앉을 자리를 찾고 있다. 기현상이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으로 지칠대로 지쳐서 피아간에 전투란 말이 떨어지지 않으면 긴장도 적개심도 발동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떠나가고 우리 병사들은 그 자리에 앉으며 눈을 감는다. 그들도 약간 놀라는듯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듯 우리를 스쳐 지나가 버렸다〉
  
  6.25동란 중 수도사단 대대장으로 싸웠던 이병형(李秉衡·육군중장 예편·전쟁기념사업회장 역임) 장군의 명저(名著) 「대대장」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북진중 강원도 창촌을 바라보는 어떤 산골마을을 지나가는데 청년들이 30세 가량의 한 사나이를 땅에 꿇어 앉혀놓고 집단린치를 가하고 있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부락민들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는 반죽음 상태였다. 나는 그 사나이의 처리를 맡겨 달라고 한 뒤 부하들에게 연행하도록 지시했다. 부락이 보이지 않는 위치까지 그를 끌고 온 다음 나는 무작정 데리고 갈 수도 없어 이쯤해서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마을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느냐고 물었다. 인민군의 강요에 의해서 했다고 변명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는지 얼굴은 창백했으나 비교적 또박또박 대답했다.
  
  나는 권총을 들이대고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을 팔자소관이라 하더라도 너의 판단착오는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니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렸다. 나는 그의 머리 위를 겨냥한 채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고요한 계곡은 총성으로 뒤덮였고 그가 살던 부락을 의식하면서 사격을 했다. 그는 총에 맞은 줄 알았는지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혹시 쇼크로 정말 죽은 게 아닌가 해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조용히 그에게 『이전의 너는 이미 죽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너가 탄생한 것이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길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말없이 헤어졌다〉
  
   중공군의 軍紀
  
  1951년 5월 동부전선을 지키던 9사단의 포병관측장교 조창호(趙昌浩)소위는 후퇴중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는 수기(手記)에서 중공군의 포로 관리방식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굶기지도 때리지도 묶지도 않고 소지품 검사에서 여동생 사진이 나오자 돌려주더라는 것이다. 조창호 소위의 고생은 동족인 인민군에게 넘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3사단장과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박정인(朴定仁) 장군은 6사단에 있을 때인 1950년 겨울 압록강 남쪽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그도 중공군의 포로대우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도 인민군에게 넘어가면서부터 고생하게 되었다고 했다.
  
  6.25 때 인민군은 포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면 미군한테 포로가 되려고 했고 국군은 중공군한테 포로가 되려고 했다고 한다. 동족이 동족을 무서워하며 피한 이 비극은 우리 민족성에 독한 그 무엇이 잠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박정인 장군은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 뼈아픈 지적을 하고 있다.
  
  〈나는 포로가 되어 북한의 여러 지역을 거치는 동안 북한 주민들의 국군을 보는 눈이 의외로 냉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군이 처음 북한 땅으로 진격해오자 많은 북한주민들은 국군을 구세주처럼 환영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주민은 국군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국군의 내면에는 일본군의 잔재가 깊게 깔려 있었다. 약탈과 강간이 있었다. 극히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범죄행위였지만 북한 주민들 사이에 소문으로 퍼졌다.
  중공군은 물론이고 인민군도 강간, 살인, 약탈에 대해서는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다. 남한 땅에서 이루어진 살인, 약탈, 강간은 주로 정치보위부, 내무서, 지방 빨갱이들의 짓이었다. 인민군과 국군 모두 상대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인심을 얻지 못했다. 국군도, 인민군도 한반도의 전역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역사의 당위가 아닌지 모르겠다〉
  
  세계전쟁사상 대민군기(對民軍紀)가 가장 깨끗하고 엄했던 부대가 한국전의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남한 점령지에서 민가에 잠을 잘 때도 안방을 쓰지 않았다. 사람을 부려 짐을 나르게 한 뒤 인민군은 비밀이 탄로난다고 죽이기도 했는데 중공군은 돈을 주었다. 중공군의 이런 군기(軍紀)는 모택동(毛澤東)이 부패한 장개석(將介石) 군대를 칠 때부터 강조해온 「인민은 물이고 우리는 물고기다」는 말을 실천한 때문이다. 중국사람들이 한국인들보다 원래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통제가 그런 차이를 만든 것이다.
  
   정치인이 더 전투적
  
  히틀러는 좀처럼 전선을 시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선의 비참함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20세기의 대 학살 1, 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 스탈린의 수용소군도(群島),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르완다 학살, 북한의 정치수 학살은 모두 군인이 아닌 정치인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맥아더의 말대로 군인들은 전쟁의 비참함을 알고 전쟁이 터지면 피를 흘려야 할 것은 자신들이란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평화를 갈구한다. 전쟁의 비참함을 모르는 히틀러 같은 정치인들은 「증오의 논리」를 개발하여 국가간, 종족간, 지역간, 세력간의 충돌과 학살을 부추겨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한국전에서 실증(實證)되었듯이 우리 민족의 핏속에도 살의(殺意)가 스며 있다.
  
  전쟁이나 경제불화 같은 사태가 오면 인간은 그가 받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어 복수를 하고 싶어진다. 이런 심리를 간파하고 「증오의 논리」를 구사하여 사람들을 선동하면 살의는 살인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살인 강도짓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념적인(또는 정치적인)살인은 의식화된 보통사람들도 할 수 있다. 인간의 이런 증오심과 야수성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는 정치인들을 가려내고 거세하는 눈이 독일사람들에게 있었더라면 6백만의 생명은 보존되었을 것이다.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들」이란 책의 첫 면에 골드하겐 교수는 명저(名著)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 학자 알레시스 드 토크빌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인간도 그가 태어난 시대의 정신과 나라의 분위기와 대항하여 이길 수는 없다. 그가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 하더라도 동시대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욕구와 배치되는 감정과 발상을 그들에게 주입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시대의 흐름과 나라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정치이다. 토크빌은 「아무리 양심적인 인간이라도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살벌한 「증오의 논리」를 없애버리려면 증오심으로 무장한 정치인들을 선거 때마다 낙선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6: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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