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7) - 학살의 해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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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
  
  1951년 2월 11일 거창군 신원면 박산골이란 골짜기에서는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서 양민 7백 19명이 학살되었다. 세 살을 밑도는 젖먹이가 1백 명, 4∼10세 어린이가 1백 91명, 11∼14세 어린이가 68명으로 14세를 밑도는 어린이가 피살자의 꼭 절반이었다. 60세 이상 노인이 66명, 80세 이상도 여섯 명이었다. 최고령자는 92세. 피살자들 가운데 공산당에 협력했을 가능성이라도 있는 20, 30, 40대의 청장년들은 1백 75명이었다. 결국 피살자의 약 76%가 노약자들이었다.
  
  11사단(사단장은 그 뒤 월북하여 북한에서 죽은 최덕신(崔德新) 3대대장 한동석 소령도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람을 전원 총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신원면에 들어왔으나 비(非)전투원들만 눈에 뜨여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었다. 사흘 뒤 연대장 오익경 대령으로부터 독촉을 받고 일을 저질렀다. 현장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세 사? 그 중 한 사람인 임분이 할머니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그때 군인 한 사람이 오더니 군경 가족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습니다. 10여 명이 우르르 몰려나갔지요. 이들이 빠져나가자 군인들이 골짜기 주변을 뺑 둘러섰어요.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문판대씨가 손을 번쩍들더니 고함을 질렀습니다.「대장님, 죽어도 말 한 마디 하고 죽읍시다. 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군인들은 문씨를 향해서 총을 쏘았습니다. 문씨는 맞지 않고 열여섯 살 먹은 딸이 맞고 쓰러졌어요. 이어 콩볶듯 하는 총소리가 들리며 총알이 우리를 향해 쏟아집디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주먹만한 돌멩이가 퉁겨 가슴을 때렸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초생달이 보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밝아집디다. 군인들은 조명탄을 쏘아가며 시체들을 확인하는 거였윱求?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더니 그냥 지나쳤습니다. 얼마 뒤 사람소리가 나면서 그들이 시체더미 위에 나무를 져다 날랐어요. 내 몸뚱이 위에도 나무를 올려다 놓았어요. 골짜기는 금새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내 옷자락에도 불이 붙었지만 혹시나 들킬까 봐 죽은 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라진 뒤 개울가로 기어가 허겁지겁 불을 껐어요. 남편과 친정어머니는 그 골짜기에서 죽었습니다』
  
  군인들은 나무를 져다 날랐던 부락민들에게도 총질을 했다. 심부름 해주면 살 줄 알았던 그들은 총알을 맞고 차례로 쓰러져 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신현덕씨와 문홍준씨는 군인들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군인들은 『지독하게 명이 긴 놈들을 보겠다』면서 살려주고는 노무대로 부렸다. 문홍한씨는 산기(産氣)가 있는 아내 덕분에 살았다. 학살장으로 끌려가기 전날 신원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을 때 아내가 몸을 뒤틀면서 괴로워했다. 군인들이 교장 사택으로 데려다 주었다.
  
  한 군인이 대야에 숯불을 담아다 주더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나갔다. 문씨의 아내는 새벽에 사내아기를 낳았다. 3∼4명의 군인들이 들어오더니 아기를 보고는 험상궂은 표정을 풀고 『당신네는 참 운이 좋다』고 쇠고기국을 끓여다가 갖다 주었다. 문홍한씨가 문틈으로 바깥을 살펴보니 부락민들이 군인들에 끌려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한 군인이 들어오더니 『나가면 죽는다』면서 꼼짝 못하게 했다.
  
  산모(産母)에게 쇠고기국을 끓여준 군인과 노약자들을 향해서 총질을 한 군인이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명령선상에 있는 군인과 그곳을 떠난 군인은 저승사자와 구세주만큼 다른 것이다. 이 명령선을 장악하는 것이 정치이고 권력이다. 초인(超人)도, 성인(聖人)도 아닌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이 명령선에 의해서 조종받게 되고 그 조종을 거부할 수 없다. 이 명령선을 장악한 정권이 악마 같으면 명령선에 매달려 있는 보통 사람들은 악행(惡行)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화낸 라빈 수상
  
  1995년 11월 3일 기자는 이스라엘 수도 텔 아비브에 있는 국방부 장관 집무실에서 이츠하크 라빈 수상 겸 국방장관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라빈은 그 다음날 암살되었으니 기자와의 대화가 마지막 인터뷰였다. 기자는 그때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실었던 북한정치수(囚) 수용소 기사의 영문번역판을 갖고 갔다. 누구보다도 집단수용소의 생리와 학살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공분(共憤)하고 있을 라빈의 입을 통해서 아우슈비츠를 방불(彷佛)케 하는 북한수용소의 문제를 부각시켜보려고 인터뷰 말미에 이런 질문을 했다.
  
  ―아우슈비츠는 50년 전에 없어졌지만 북한에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김일성(金日成)부자에 대한 비판을 했다가는 3대(代)가 다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그곳에서 살아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와 꼭 같은 (이때 라빈 수상이 질문을 제지하고 나섰다. 이 70대(代)의 근엄한 할아버지는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해둘 게 있습니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과 일반적인 인권문제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하지 말아주십시오. 유태인 학살은 나치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인종멸종정책입니다. 그러나 인권문제는 나라마다 사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중동평화협상에서 인권문제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에게 민주주의를 하라, 인권을 개선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선거를 통해서 민주화가 진행되면 인권문제가 저절로 개선되겠지요. 인권문제를 일률적으로 거론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유태인들이 당했던 살육을 일반적 인권문제의 하나로 본다든지 같은 수준으로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겁니다』
  
  ―북한수용소 문제도 인권문제가 아니라 생(生)과 사(死)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북한은 아우슈비츠의 관리방식을 모방해서 그대로 써먹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그래도 유태인 학살에는 절대로 비교하지 마세요. 절대로…』
  
  기자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기자는 북한수용소를 설명하면 라빈 수상이 흥미를 가질 것이고 그때 준비해간 영문 자료를 건네주면서 『유태인이 앞장서서 국제사회에서 여론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할 예정이었다.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로 불려지는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특수한 사건이었음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었다」는 점을 끊임없이 이 세계를 향해서 홍보함으로써 유태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원초적 죄책감을 갖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 르완다 학살이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든, 김일성 부자에 의한 독재대상 구역이든 감히 유태인 학살과 비교되는 데 대해서 그들은 질투심마저 느끼는 것이다.
  
  기자는 니만 프로그램의 기자들에게 북한정치수 수용소에 대한 영문자료를 주면서 취재를 촉구했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다. 우리나라 언론과 정부가 무관심한데 倂묽袖湄涌“?『좀 취재해주시오』라고 부탁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태인들은 끊임없이 세계를 향해서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할 때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손가락질을 한다. 남북통일 뒤 북한의 5개 정치수 수용소에서 약 20만 명의 수인(囚人)들이 풀려 나온다면 그들은 남한사람들을 향해서 같은 원망을 할 것이다. 황장엽(黃長燁)씨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정권의 가장 큰 약점이 인권문제 라면서 왜 남한에서 북한 동포들의 인권문제를 거론하여 세계여론에 호소하지 않느냐고 우리를 나무라고 있다.
  
   북한의 「유태인들」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투사로,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또 소위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행세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인권문제와 특히 북한판 아우슈츠에 대해서 침묵함으로써 스스로를 위선자로 만들고 경멸을 자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독일 교회가 유태인 학살에 침묵함으로써 도덕성과 지도력을 상실한 것처럼. 혹자(或者)는 말할 것이다. 우리에겐 정보가 없다고. 그것은 「우리는 유태인들이 도륙당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 했다」고 말하는 독일인들과 같은 변명이다.
  
  안혁(安赫), 강철환(姜哲煥), 안명철(安明哲). 수용소 생활을 경험한 이 세 인간이 물증(物證)으로 존재하며 그들이 산 총 30년이란 수용소의 세월이 증언(證言)으로 존재한다. 지식인의 의무는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것인데 그들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서도 눈과 귀를 닫으려 한다. 위의 세 사람들이 증언하는 북한정치수 소용소의 운영실태는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를 연구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할 만큼 비슷하다. 특히 수용된 사람들에 대해서 동정심이 아니라 적개심을 갖도록 하는 의식화가 그러하다.
  
  북한정치수용소를 관리하는 국가보위부 직원들 중 상당수는 6.25 동란 때 전사하거나 국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가족의 자제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짐승처럼 생활하도록 강요되고 있는 앙상한 수용자들을 대할 때 「계급의 원수」로 보도록 세뇌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을, 「예수를 죽인 기독교의 원수들」로 보도록 훈련되었던 독일사람들처럼 이들은 수용자들을 볼 때마다 동정심이 아니라 증오심이 샘솟을 것이다. 학살에는 반드시 「증오의 논리」에 의한 양심의 마취 현상이 따른다.
  
  위에서 기자가 인용한 유태인 학살 장면이 너무 참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월간조선(月刊朝鮮) 1995년 3월호에 실린 「임신者 비밀 처형과 生體실험의 내막-회령 22호 관리소 安明哲 증언」 제하(題下)의 기사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정치수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있다가 1994년에 귀순한 안씨의 증언은 유태인 학살보다도 더 처절하다. 즉, 북한 동포가 유태인들보다 더 참혹하게 도살되고 있다는 얘기다.
  
  『유방을 칼로 도려내거나 음부에 삽 자루를 박아 목까지 튀어나온 시체를 직접 보았습니다. 팔다리와 목이 떨어져 나가고 너덜너덜한 시체를 본 적도 있지요』
  『비밀처형 담당 보위원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마치 게임을 하듯이 사람을 죽인답니다. 정치수들을 세워놓고 「권총으로 왼쪽 눈을 쏘아맞추기 내기」같은 짓을 한답니다. 시끄럽게 발악하면 산 채로 땅에 파묻기도 했답니다. 구류장에서 정치수들끼리 서로 때리고 물어뜯게 해서 살해한 경우도 있다더군요』
  『우(禹)군의관이란 자는 정치수들을 상대로 수술연습을 했습니다. 수술할 필요가 없는 정치수들을 불러다가 배도 가르고 맹장도 자르는 연습을 했습니다』
  『사람의 급소를 가격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연구한다. 고무망치로 머리를 때려 얼마나 맞아야 사람이 죽는지에 대한 실험도 한다. 3국 보위원들은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 뛰어난 인간백정이다』
  
  안명철씨는 정치수들을 증오하도록 교육받은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죄수들은 지난 시기 동무들의 피땀을 빨아먹고 살찐 악독한 원쑤, 인민의 철천지 원쑤이고 반역자이다」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동정을 베푸는 요원은 정치범으로 간주하겠다.」 「실수나 사고로 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
  
  『우리가 죽어갈 때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안명철씨는 또 달달 외워야 했던 김일성(金日成)교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계급적 원쑤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야 한다. 종파분자들은 우리 혁명의 걸림돌이며 철저히 제거되어야 할 혁명의 대상이다. 종파주의, 계급의 원쑤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3대(代)를 몰살해야 한다」 북한 정치수 수용소에 수용된 20만 명은 우리의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북한 내의 정치변동으로 이들이 바깥으로 뛰쳐나온다면 그들은 노동당 지배층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주도할 것이다. 이들의 존재는 통일 이후 북한 지배층에 대한 전범(戰犯)재판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이들의 존榮?또한 남한의 좌익(이들 중 일부는 언론에 의하여 진보적 지식인으로 불린다)세력에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통일 이후 이들 정치수 출신들은 그동안 남한에서 김일성-김정일 세력을 옹호하고 북한의 인권문제에 침묵해온 남한의 위선적 지식인들을 단죄할 것이다. 지옥을 경험하고 살아 나온 이들이 예컨대 이런 글들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북한의 인권문제를 남한의 기준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 북한은 남한과 다른 발전단계에 있으므로 그 나름대로의 인권과 기준이 있는데 우리 식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북한 정치수 수용소에 대해선 안기부에서 제공한 정보 이외에 없지 않은 가. 객관적 정보가 나올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겠다」
  「북한 인권문제를 들고 나와서 무슨 효과가 있나.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유태인 학살을 방관한 서구의 기독교와 지식인들, 그리고 독일의 보통 사람들이 받고 있는 비난보다도 더한 비판을 남한 사람들은 받을 것이다. 동족의 고통을 뻔히 알고도, 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도가 많이 있었음에도 침묵한 남한 사람들은 무덤에서 걸어나온 해골 같은 사람들로부터 비수(匕首)와 같은 질문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죽어갈 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나』
  
  남한 내(內) 좌익세력과 위선적 지식인들의 문제는 이들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풀릴지도 모른다. 일제(日帝) 말기 식민통치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오판(誤判)한 지식인들은 순간적인 실수로 친일적(親日的)글을 남겼다가 대대손손 비난을 받고 있다. 분단이 영구히 계속될 줄 알고 진보로 위장된 친북(親北)활동을 계속해온 지식인들은 이 「북한의 유태인」에 의해서 사후(死後)까지 따라다닐 낙인(烙印)을 받을 지 누가 아는가.
  
  민족통일연구원에서 펴낸 「1997년 북한 인권백서」에 따르면 원래 열 군데였던 정치수 수용소는 근래 다섯 개로 줄었다고 한다. 한만(韓滿) 국경지대에 있어 위치가 탄로난 함북(咸北) 온성군의 2개소와 평양에 인접하여 보안(保安)이 어려운 수용소등 모두 다섯 군데를 폐쇄하고 5개소로 통폐합했다고 한다. 이는 북한이 국제언론·여론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황장엽씨의 말대로 이것이 바로 북한체제의 급소(急所)이다. 이 급소를 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지속적인 언론보도, 유엔인권기구에 호소, 앰네스티 같은 국제인권기구에 호소, 한국정부의 지속적인 관심표명, 한국 내 인권단체와 시민단체의 운동, 북한에 인도적 원조를 제공할 때마다 이 문제를 의무적으로 언급 등.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주장하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대한 지원은 외면하고 있다. 북한정권과 주민을 구별하지 않는 인도주의는 결과적으로 「악(惡)의 정권」을 연명(延命)시킬 뿐이다. 북한에 인권의 잣대를 들이댈 때 비로소 북한정권(가해자)과 북한주민(피해자)의 구별과 차별, 그리고 이간(離間)이 가능해진다.
  
   민주주의의 實質이 인권
  
  권위주의 정권 치하(治下)에서 민주화와 인권을 외치던 사람들일수록 북한 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냉담하다는 사실은 차라리 희극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해는 할 수 있다. 이들이 외치고 신봉했던 것은 민주주의라는 형식(주로 선거)이었다. 민주주의의 형식은 선거이지만 그 실질은 인권이다. 외래사상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대주의적으로 받아들일 때 형식주의로 흐르게 된다.
  
  주자학(朱子學)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건실한 행동윤리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형식논리로서 받아들여 교조화한 역사가 있다. 민주주의의 내용은 미국헌법 전문(前文)이 규정한 대로 「국가 안보, 복지, 자유」이다. 안보, 복지, 자유를 한 마디로 줄이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 즉 인권이다. 인권이라 하면 자유만 떠올리지만 자유만 가지고는 인권이 구현되지 않는다. 안보가 무너진 상황에서, 복지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자유는「거지의 자유」일 뿐이다. 인간다운 존엄한 생활을 영위하려면 국방, 경제, 민주적 정치제도란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안보, 복지, 자유를 구현하는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인 것이다.
  
  「민주주의〓자유(그것도 자기편의 자유)」란 도식을 진실인 줄 믿고 투쟁해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인권이 아닌 정의감도 분노도 의무감도 발동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남에게 요구한 사람은 민주화 운동가이지 실천가란 보장은 없다. 주장과 실천 사이에는 절벽이 존재한다. 한 미국 영화감독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미국 사람들이 발명한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세 가지는 헌법, 야구, 재즈라고 했다. 미국 헌법은 미국의 독립이 선포된 11년 뒤인 1787년에 기초되었다. 기초위원들은 일흔 세 명. 이들의 평균연령은 마흔 두 살이었고 농부, 장사꾼, 변호사, 은행가, 학자 등 직업이 다양했다. 이들은 존 로크와 몽테스키외 작품을 많이 읽었고 독립전쟁에 참여한 투사들이기도 했다.
  
  펜실베이니아주의 대표인 존 디킨슨 이란 사람은 헌법을 기초하는 데 있어서는 「경험이 우리의 유일한 안내자」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성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성이란 것이 엄청 고귀하게 보이지만 그것을 너무 믿어버리면 독선(獨善)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미국의 헌법기초위원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험을 이성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국에서 꽃핀 경험철학과 프랑스와 독일에서 발달한 관념철학의 차이를 여기서 보는 듯하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현실과 실천력과 실용정신의 중요성을 뜻하는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7: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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