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6) - 역사 散策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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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나마라의 주장과 반론
  
  월남정부의 국민들에 대한 도덕적 권위가 사라져 전쟁 지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미국이 월남의 전쟁을 「우리의 전쟁」으로 떠맡게 되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멀고 먼 이 정글에 미국의 사활적(死活的)인 국가이익이 걸려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미국의 바보짓, 그 단초를 연 것이 고 딘 디엠 축출인데 1995년 4월호 月刊朝鮮에도 소개된 맥나마라 회고록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
  
  1963년 8월21일 고 딘 디엠 대통령이 반(反)정부적인 불교를 탄압한다면서 불교사원을 습격하여 승려들을 연행하였다. 미국의 젊은 특파원들은 사이공에서 이 사건을 열정적으로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 언론의 가장 큰 뉴스가 되었다. 언론에 신경을 써야 하는 미국정부도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더구나 고 딘 디엠은 미국 정부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불교를 탄압하여 워싱턴의 고관들로 하여금 자존심이 상하게 만들었다.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로 막 임명된 로즈 힐즈맨은 8월24일 「고 딘 디엠을 대체할 만한 지도세력을 모색하라」는 요지의 전문(電文)을 신임 주(駐) 사이공 대사 헨리 캐보트 롯지에게 보낸다. 군부 쿠데타를 암시한 이 전문(電文)을 기안했을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휴가 중이었다. 국무차관 조지 볼로부터 전화로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고위 보좌관들이 이 전문에 동의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이때 워싱턴에는 월남 문제를 담당하는 고관들이 모두 출장을 가고 없었다. 이들과 전화로 협의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고서 이 중요한 전문이 힐즈맨의 주도로 현지로 내려가는 바람에 쿠데타 모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맥나마라의 주장이었다.
  
  맥나마라는 힐즈맨과 롯지 대사가 쿠데타 모의를 주도했고 자신과 합참의장 맥봉?테일러는 반대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내키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에 이끌려 갔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한 힐즈맨의 반론(反論) 「맥나마라의 전쟁-진실에 대하여」는 1996년 봄호「정치과학회지」에 실렸다. 이 논문에서 힐즈맨은 맥나마라가 중요한 진실을 고의로 묵살하여 왜곡하였다면서 몇 가지 비화(秘話)를 털어놓았다. 즉, 신임 롯지 대사가 사이공에 도착하자마자 월남 장군들이 접근하더니 『우리가 고 딘 디엠과 동생 고 딘 누를 제거하면 미국은 우리를 지원할 것인가』라고 물어왔다는 것이다. 롯지는 힐즈맨에게 이 정보를 알리고 훈령을 요청하여 문제의 전문(電文)이 하달되었다는 것이다.
  
   고 딘 디엠의 실수는 人事
  
  이 전문은 고 딘 디엠을 대체할 만한 세력을 모색해보라는 지시를 하면서 동시에 「고 대통령을 만나서 장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은 동생 고 딘 누 때문이니 그를 미국대사로 보내버리도록 하라」는 제의를 하도록 덧붙였다. 롯지는 이 전문을 받고 항의했다. 이 전문대로 고 대통령을 만나서 귀띔을 한다면 월남 장군들은 당장 체포되어 처형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8월26일 케네디 대통령이 주재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고 딘 디엠 대통령을 만나지 말고 군부 쿠데타 모의를 지원하라」는 방침이 결정되었는데 맥나마라도 이 방안에 찬성했다고 힐즈맨은 폭로했다.
  
  힐즈맨은 이어서 「이 쿠데타 모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일부 장군들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11월1일의 쿠데타는 별개의 쿠데타였다」고 말했다. CIA와 미국 국무부 요인들은 언젠가는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하고 있었고 누가 주동자인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서 힐즈맨은 11월1일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날 미 태평양사령과 펠트 제독은 사이공을 방문한 길에 롯지 대사와 함께 고 딘 디엠 대통령을 예방(禮防)했다. 이때가 오전 11시였다. 이때 쿠데타 부대는 이미 대통령궁을 향하여 이동중이었다. 이 부대들은 정오를 지나서 대통령궁 앞에 집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날도 보통 때처럼 고 딘 디엠 대통령이 말을 많이 했더라면 롯지 대사 일행은 대통령과 함께 쿠데타를 맞을 뻔했다는 것이다. 펠트 제독은 대통령과의 짧은 면담을 끝낸 뒤에 곧장 공항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월남군 합참의장 대리 트란 반 돈 장군은 초조해 보였다. 시계를 자주 보고 있었다. 껌을 씹고 있었다. 펠트 사령관은 비행기에 오른 뒤에 『그가 껌을 씹는 것은 처음인데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힐즈맨은 미국이 쿠데타에 대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주모자측에서 CIA 사이공 지부의 연락관인 루시엔 코네인을 자신들의 사령부로 불렀을 때라고 했다. 코네인이 알았을 때는 이미 부대들이 이동중이었다는 것이다.
  
  맥나마라와 힐즈맨의 상반된 주장을 읽은 다음에 기자는 이 군사 쿠데타의 가장 중요한 주모자인 트란 반 돈의 회고록 「우리의 끝없는 전쟁 : 월남의 내막」을 읽었다. 「디엠은 가야했다」란 장(章)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고 딘 디엠의 가장 큰 실수는 가장 유능한 장군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한직(閑職)을 준 것이었다. 그들은 한이 맺혔을 뿐 아니라 그 많은 시간을 쿠데타를 생각하고 계획하며 작전을 갈고 닦는 데 썼다. 그 결과가 그의 제거로 나타났으니 그는 농촌 주민들을 다루는 데 실패하였듯이 민, 킴 장군, 그리고 나를 다루는 데도 무능하였다」
  
  이 회고록을 읽어보면 고 딘 디엠 제거계획은 인사에 불만을 품은 장군들이 고 딘 디엠과 그의 동생 고 딘 누가 불교를 탄압하여 국민들과 미국측으로부터 고립되고 있는 틈을 타서 꾸미고 결행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미국측의 조종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을 이용하였다. 쿠데타 계획의 진행상황은 트란 반 돈 장군이 CIA 사이공 지부의 연락관 코네인을 통해서 롯지 대사한테 통보했으나 문서를 주지도 결행일시를 알려주지도 않았다. 이들 월남 장군들은 미국이 반대하지만 않으면 되었고 미국측으로부터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쿠데타의 구경꾼이 된 미국
  
  월남군 합참의장 대리로 있던 트란 반 돈은 1963년 10월2일 나트랑 기지로 출장을 가서 코네인을 만나 쿠데타 계획을 통보해준 뒤에 미국이 지지해줄 것인가의 여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코네인은 상부에 보고하여 알려주겠다고 했다. 사흘 뒤 트란 반 돈 장군은 군부 쿠데타의 지도자였던 민 장군과 코네인을 만나도록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도 코네인은 확답을 피하고 상부에 보고하여 알려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트란 반 돈 장군은 「당시에 우리는 미국측에서 내부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썼다. 롯지 대사와 코네인은 군사쿠데타를 지원하고 있었으나 미 군사고문단장인 폴 하킨스 장군과 CIA 사이공 지부장 존 리처드슨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리처드슨은 쿠데타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죄다 월남의 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고 딘 누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10월22일 트란 반 돈 장군은 영국대사관 무관이 주최한 파티에 갔다가 하킨스 장군을 만났다. 미군 고문단장 하킨스는 트란 반 돈 장군을 옆으로 끌더니 쿠데타에 관한 소문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는 『나는 이 쿠데타에 반대한다. 만약 쿠데타가 실패하거든 당신은 가족들을 데리고 나한테 오기 바란다. 그러면 피난처를 제공해 주겠다』고 말했다. 배신감을 느낀 돈 장군은 다음날 코네인에게 연락했다. 코네인은 미국 정부가 쿠데타를 지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었다. 돈 장군은 10월28일에는 공항에서 고 딘 디엠을 수행하고 있던 롯지 대사를 만났다. 여기서도 롯지 대사는 미국의 입장을 재확인하여 주었다. 그러면서 『언제 결행하느냐』고 물었다. 돈 장군은 답변을 거부했다. 돈 장군은 이렇게 썼다.
  
  「미국측은 우리의 음모를 중지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거사(擧事)에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코네인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도움을 제의하였지만 우리가 거절한 뒤에는 주로 관객, 또는 보고자의 입장에 머물러 있었다. 11월10일 사이공에 있는 코네인의 집에서 나는 CIA의 고관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부탁하기를, CIA가 쿠데타 계획서를 입수하지 못한 사실을 제발 언론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정치발전을 쿠데타로 해?
  
  코네인으로부터 쿠데타 음모의 진행 과정을 밀착하여 관찰하고 있었던 미국정부는 이 정보를 고 딘 디엠에게 알리지 않고 음모자들에게는 계획을 중단하도록 설득하지도 않은 방법으로써 소극적인 지원을 한 셈이었다. 10월30일 롯지 대사는 미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쿠데타를 지지하여야 할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이 중세국가를 20세기 국가로 발전시키려고 군사적, 경제적으로 노력해 왔는데 이제는 정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정치발전을 군사쿠데타란 방법으로 하겠다는 모순에 대해서는 아무런 갈등이나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롯지 대사는 「우리는 쿠데타를 중지시킬 힘이 없다」면서도 「장군들은 반대자들을 매수하기 위하여 돈이 필요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럴 경우엔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건의했다(월남 장군들은 이 제안을 거부하여 돈을 받지 않았다). 10월30일자의 다른 전문(電文)에서 미국 정부 내의 월남사태 긴급대책반 담당관은 국무부 극동문제 담당 차관보 힐즈맨에게 「트란 반 돈 장군은 쿠데타 결행 네 시간 전에 통보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보고했다. 돈 장군은 그 전에는 「쿠데타 이틀 전까지 롯지 대사에게 쿠데타와 관련된 작전계획과 정치계획서를 보내 검토를 받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갑자기 번복했다는 것이다.
  
  10월30일 미 군사고문단장 하킨스 장군은 이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 내키지 않은 태도를 보여온 맥스웰 테일러 합참의장에게 보낸 전문에서 「고 딘 디엠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끝까지 가야지 중간에서 말을 바꾸어 타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는 취지의 불평을 하고 있다. 이날 케네디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 맥 조지 번디는 롯지 대사에게 지침을 내린다.
  
  「쿠데타가 발생하면 어느 쪽으로부터의 지원 요청도 거절할 것. 승부가나지 않을 경우에는 양측이 동의하는 범위 안에서 어떤 행동이라도 취할 수 있다. 쿠데타가 실패할 때는 주모자들에게 망명처를 제공해줄 수 있다. 우리 대사관 이외에도 다른 대사관을 이용하는 것이 오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쿠데타가 믿을 만한 지도자 아래에서 시작된다면 성공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합치된다」
  
  「맙소사!」
  
  11월1일 사이공 시간으로 오후 4시30분 고 딘 디엠 대통령은 롯지 대사를 전화로 불렀다. 두 사람의 대화도 비밀등급에서 해제되어 공개되었다.
  
  「고 딘 디엠 :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미국정부의 입장을 알고 싶다.
  
  롯지 : 나는 충분한 정보가 없어서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사격소리를 들었지만 상황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워싱턴에서는 새벽4시30분이기 때문에 미국정부가 어떤 입장을 가질 수도 없다.
  
  고 딘 디엠 : 그래도 대사는 일반적인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닌가. 어쨌든 나는 국가원수이다. 나는 내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내 의무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나는 의무를 그 무엇보다도 무겁게 생각한다.
  
  롯지 :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는 각하의 용기와 공헌을 존경한다. 나는 지금 각하의 안전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 지금 사태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각하와 동생이 사임하면 국외로 안전하게 내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들은 적이 있는가.
  
  고 딘 디엠 : 없다. (잠시 시간을 둔 뒤) 귀하는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겠지.
  
  롯지 : 그렇다. 만약 내가 각하의 안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전화해달라.
  
  고 딘 디엠 : 나는 지금 질서를 회복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쿠데타에 반대하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 하킨스 장군은 테일러 합참의장에게 보낸 전문에서 「그들은 네 시간, 또는 이틀 전에 미리 알려주겠다고 해놓고서 4분전에 알려주었다」고 불평부터 하고 있다. 이 전문의 끝에서 하킨스 장군은 「추신 : 조용하더니 탱크가 발포한 것 같다. 맙소사(Oh me!!)」라고 적었다.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있던 쿠데타 부대가 대세를 잡아가고 있던 시각에 워싱턴에서는 케네디 대통령 주재로 고위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회의기록도 공개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고민부터 털어놓았다.
  
  『우리는 온두라스 정부를 전복시킨 쿠데타가 합헌정부를 뒤집어 엎은 것이기 때문에 승인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는데 똑 같은 합헌정부를 전복시킨 월남의 군인들을 어떤 논리로 승인할 수 있겠는가』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말했다.
  
  『스탈린은 민간인이고 아이젠하워는 군인이었습니다. 만약 월남정부의 부통령이 지금 보도되고 있는 대로 군인들 편에 선다면 그를 국가원수로 임명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합헌적 정권교체라는 위장(僞裝)을 그런 식으로 하면 여론에서 별로 문제를 삼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것이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가 아니란 것을 분명히 밝히시오. 지난 두 달 동안 쿠데타에 대한 보고는 많이 받아왔다고 하고』
  
   형제 피살
  
  그 이튿날 케네디는 월남 사태를 토의하기 위하여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도중에 국가안보회의의 한 참모가 황급히 뛰어들어와서는 상황실에서 가져온 긴급전문을 대통령에게 보였다. CIA 사이공 지부에서 보낸 전문인데, 월남측에서 통보하기를 「고 딘 디엠과 그 동생 고 딘 누가 사령부로 오는 차안에서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카톨릭 신도인 케네디는 카톨릭 신도인 고 딘 디엠 형제가 자살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트란 반 돈 장군은 자시의 회고록에서 고 딘 디엠 형제가 피살된 경위에 대해서도 자세히 털어놓았다.
  
  「고 딘 디엠 형제가 어디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혁명위원회는 민 장군의 주재로 회의를 열었다. 나는 맨 처음 발언했는데 두 사람을 국외로 추방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다른 장군들도 동의하는 듯했다. 나는 두 사람이 묵을 숙소를 준비하려고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나중에야 두 사람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민 장군에게 따졌다. 민 장군은 『그들이 죽었다 한들 그것이 어쨌다는 거냐』고 말했다. 민 장군의 보좌관인 콴 대통령은 창백한 표정을 하고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때 경호책임자이자 고 딘 디엠 형제의 호송책임자인 환 장군이 뛰어들어오더니 내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는지 경례를 붙이더니 불어(佛語)로 두 마디를 했다. 『임무 완수!』」
  
  이 두꺼운 교재를 다 읽게 한 교수들은 「누가 고 딘 디엠을 암살한 책임자인가」란 제목으로 수필을 써내도록 지시했다. 기자는 「민 장군+롯지+힐즈맨+케네디+도덕의 붕괴」란 제목을 붙여서 이런 요지의 한 쪽짜리 보고서를 썼다.
  
  「민과 월남 장군들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들이다. 이 반란극에는 두 사람의 자칭 코치(롯지, 힐스맨)와 결단력이 없는 지도자(케네디)와 약간 양심적인 정책입안자(맥나마라, 테일러)가 있을 뿐이고 선인(善人)은 없다. 미국의 고관들은 권력을 탐하는 월남 장군들에 의해서 하나의 방패와 가면으로 이용되었다. 월남 장군들은 자신들의 이기적 목적을 애국과 정의로 위장하여 미국 고관들을 속였다. 나는 관련 기록을 읽으면서 구토증을 느꼈다.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이 다른 주권국가가 원수(元首)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양심의 갈등을 보인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맥나마라는 회고록에서 월남의 역사와 월남 사람들의 민족성을 모르고 전쟁에 개입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고백했으나 이것은 진실된 고백이 아니다. 진정한 역사의식은 건전한 양식이 밑바탕에 있어야 하는데 이 기록들에서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도덕적 뒷받침이 없는 전략은 전술에 불과하고 그것은 음모, 속임수, 파멸, 그리고 쓰레기로 전락될 가능성이 있다」
  
  무임승차의 代價
  
  고 딘 디엠 제거 쿠데타에 대한 진실은 트란 반 돈 장군의 회고록에 거의 다 들어 있었다. 맥나마라와 힐스맨은 서로를 공격하기 위하여 전모(全貌)의 일부만 강조하고 있거나 자신들이 월남 장군들에게 이용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미국은 월남 장군들의 쿠데타 모의에 대하여 구경꾼과 보고자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성공하면 무임승차하려고 했다. 쿠데타는 성공했지만 고 딘 디엠보다 나은 대체(代替) 지도세력을 만드는 데는 실패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고 딘 디엠만한 민족주의적 지도자를 월남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월맹의 호지명(胡志明)이 남북 월남인 모두의 마음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때서야 미국인들도 호지명(胡志明)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을 민주주의란 명분으로 스스로 말살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호지명(胡志明)과 모택동(毛澤東)도 고 딘 디엠을 상당히 평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맥나마라는 회고록에서 하나의 암시를 남겼다. 고 딘 디엠이 미국으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자 동생을 시켜서 비밀리에 하노이와 접촉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이 첩보를 입수하고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의 역할을 되찾아보겠다는 심산(心算)이 있었던지 갑자기 월남의 재통합과 중립화를 들고 나왔다. 워싱턴에서는 고 딘 디엠의 이런 행동을 미국을 향한 위협용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약소국의 강대국에 대한 위협에 대해서 강대국은 쿠데타 지원으로 대응한 것인가. 1970년대 후반기에 비슷한 처지에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미국의 인권압력에 대한 「위협용」으로 소련 및 중국과 관계 개선을 모색한 흔적이 있다. 민족주의자에 의한 이런 시도는 상당히 위험한 장난이 될 수 있다.
  
  사라진 고 딘 디엠의 지도력을 메우고 들어간 것은 미국의 물량이었다. 그러나 물질만으로써는 민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미국은 더욱 깊이 수렁에 빠져 들어갔고 정글의 전쟁은 「월남 대(對) 베트콩」에서 「미국 대(對) 전(全) 월남」으로 성격이 바뀌고 말았다. 무임승차의 대가(代價)는 너무 비쌌던 것이다. 고 딘 디엠 형제가 피살된 20일 뒤 케네디 대통령도 달라스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10년 뒤에 미국은 월남에서 손을 뗐고 그 2년 뒤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월맹의 전차가 철제문을 쓰러뜨리면서 돌입하여 통일이 완수되었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7: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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