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6) - 역사 散策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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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 기자의 하버드 연수 보고(6) - 역사 散策-히로시마 원폭투하와 고 딘 디엠 피살
  
  트루먼의 원폭 투하 결정은 과잉이었나. 고 딘 디엠은 과연 누구 손에 암살되었는가
  역사를 일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준 두 사례연구. 트루먼의 원폭 투하결정은 미군의 인명뿐 아니라 일본사람들의 인명을 구했고, 고 딘 디엠 축출 쿠데타는 월남 장군들이 주도하고 미국은 구경만 한 것이다. 미국은 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입장에서 방관만 함으로써 그 책임을 뒤집어썼다. 케네디 정부는 월남장군들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하여 합헌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비호함으로써 무임승차를 꾀했으나 그로 해서 월남전의 수렁에 빠져드는 값비싼 代價를 치렀다.
  
  <1998년 2월 월간조선>
  
   천황제를 유지시켜 준다면…
  
  기자는 1996년 가을학기에 하버드 대학교의 행정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에서 「역사로부터의 추론(推論)」이란 과목을 수강(受講)하였다. 대통령학의 태두(泰斗)로 알려진 리처드 뉴스타트, 유명한 전사(戰史)학자 어네스트 메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출신 필립 젤리코의 세 교수가 같이 가르치는 인기 과목이었다. 수강생이 약 1백명이었다. 첫 시간에 교수들은 1995년 8월에 방영된 ABC방송의 다큐멘터리 「왜 원폭이 투하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이 프로그램은 대체로 트루먼 대통령의 원폭 투하 결정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원폭 투하 전에 이미 일본 정부안에서는 항복론이 제기되고 있었으며 일본의 군사력은 거의 붕괴되어 어차피 항복은 시간문제였고 특히 소련이 참전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원폭(原爆)을 쓸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을 많이 소개하고 있었다. 정통학설에 이견을 제기하는 수정주의 학자들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 필름은, 스팀슨 국방장관이 1945년 7월 초순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우??일본에게 천황제도를 유지시켜주겠다고 하면서 항복을 요구하면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이다』고 건의했다고 주장했다. 7월6일 트루먼 대통령은 미(美) 해군의 아우구스타호를 탔다.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열리게 되어 있는 처칠, 스탈린과의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하여 출발한 것이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스팀슨 장관이 준 「최후통첩 초안」이 들어 있었다. 이 초안은 일본이 항복하면 천황제를 유지하도록 허용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트루먼의 옆자리에는 막 임명된 제임스 번스 국무장관이 앉아 있었다. 그는 『만약 대통령이 일본과 타협을 한다면 정치적인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이 정상회담에서 소련이 대일(對日)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종전의 약속을 재확인 받으려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포츠담에서 스탈린과 맨 처음 만난 트루먼은 그날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잡담을 했다. 건배를 하고 후정(後庭)에서 사진을 찍었다. 중요한 사항은 거의 다 합의를 보았다. 스탈린은 8월15일에 참전할 것이다」
  
  7월16일 뉴 멕시코에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트루먼은 중요한 카드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일기에 썼다.
  「스탈린은 이 사실을 모른다. 나는 지금 내 손에 에이스를 쥐고 있고 하나를 더 준비해두고 있다. 그가 두 개의 페어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나는 안심하고 즐길 수 있다」
  
  이제는 트루먼이 일본이나 소련에 대해서 무리한 양보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번스 국무장관은 대일(對日) 최후통첩문안에서 「천황제를 유지시켜주겠다」는 항목을 빼버렸다. 트루먼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이 무기는 오는 8월10일 이전에 사용될 것이다. 나는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다. 군사시설과 군인들과 수병들이 표적이 되도록 해야지 여자들과 아이들이 다쳐서는 안 된다고. 일본인들은 잔인하고 광신적이지만 우리는 미리 경고할 것이다. 항복하여 생명을 구하라고. 물론 나는 그들이 이 경고를 무시할 것이라고 믿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기회는 주어야 한다」
  
   도심에 투하할 필요는?
  
  트루먼이 이 일기를 쓰고 있을 때는 이미 원폭 투하 장소 선정위원회에서 폭탄을 도시 한 가운데에다가 투하하기로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미군은 원폭 투하 전에 경고하지도 않았다. 트루먼은 일기에서 또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스탈린에게 말했다. 우리는 굉장한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그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썼다. 이때 스탈린은 미국의 원폭개발 연구소 단지 안에 간첩을 두고 있었다. 트루먼보다도 먼저 스탈린은 이 비밀계획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트루먼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한 뒤에 대통령직을 인수하고 나서야 이 계획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스탈린이 모른 것은 미국이 이 신무기를 일본에 대해서 쓸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왜 이 신무기 개발에 대해서 우방인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따질까 염려하여 서둘러 포츠담을 떠났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해설자로 나온 ABC 방송의 간판 앵커맨 피터 제닝스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왜 아무도 그 시점에서 「왜 이렇게 서두는가, 차분히 앉아서 생각해보자, 원폭 투하 계획을 재검토해보지 않겠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맥 조지 번디(케네디 대통령의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역임)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런 문제를 제기하였더라면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여러 가지로 검토를 했고 도시에다가 원폭을 투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 이왕 갈기려면 빠를수록 좋다」고. 포병 대위 출신인 트루먼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피터 제닝스는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한다.
  
  『트루먼은 일본이 항복요구를 거절한 뒤에 원폭 투하 명령을 포츠담에서 내렸다고 말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기 하루 전에 그런 명령이 내려갔고 대통령은 그 명령서에는 서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원폭 투하 명령서는 원폭개발업무 책임자인 그로브 장군이 기안했고 스팀슨 국방장관이 서명했다. 8월6일 오전 8시15분에 히로시마 도심부 상공에서 폭발한 원폭으로 7만5천 명이 즉사했다. 이틀 뒤에 백오십만 소련군이 만주에서 일본의 관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이판 바로 옆에 있는 티니안 섬에서는 두 번째 원폭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폭은 우라늄으로 만든 것이었고 두 번째 원폭은 플루토늄 폭탄이었다. 8월11일에 떨어뜨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일기예보는 그날 일본 전역이 구름으로 덮일 것이라 했다. 원폭 책임자 그로브 장군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플루토늄 폭탄을 실전(實戰)에서 실험해보기를 원했다. 이틀을 앞당겨 8월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피터 제닝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러시아의 참전이 있은 후 일본 ㅊ括?강경파들은 비로소 항복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는 연기하거나 중지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원폭 투하를 위해서 또다시 대통령의 재가를 받도록 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1백만명의 인명을 구했나?
  
  미국은 2주일 안으로 세 번째 원폭을 투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본의 항복 결정을 알기 전에 트루먼 대통령은 원폭 투하 중지를 명령했다. 그는 『더 이상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원폭 투하 결정에 대해서 일부에서 비판이 일어나자 트루먼은 『원폭 투하가 백만 명의 미군 생명을 구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 다큐멘터리의 해설자 피터 제닝스는 『그런 계산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1995년 8월의 원폭(原爆) 투하 50주년에 맞추어 원폭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까지 실어 날랐던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 특별전시를 기획했다. 미국 재향군인회에서 들고일어났다. 전시내용이 일본인 희생자들을 너무 부각시켜 미국을 죄인시 한다는 항의였다. 박물관측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고 말했으나 재향군인들은 이 문제를 의회에 들고 갔다. 81명의 의원들이 재향군인회를 지원했다. 약 2년간 실랑이를 벌인 끝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는 전시기획을 수정하여 에놀라 게이만 보여주고 희생자들의 사진이나 해설은 붙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끝내면서 피터 제닝스는 이렇게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재향군인회와 몇 정치인들이 우리의 이 권위 있는 박물관을 위협하여 히로시마의 전모를 알리지 못하도록 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와 우리에게 정정당당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토론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싸웠고 죽어간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피터 제닝스입니다. 굿 나잇』
  
  3명으로 구성된 「역사로부터의 추론(推論)」 과목 교수진은 이 필름을 보여준 다음 오후 3시까지 한 페이지의 논평을 써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기자는 케네디 스쿨의 1층에 있는 식당에서 2.5달러 짜리 점심을 먹고는 이런 요지의 수필을 썼다.
  
  「트루먼이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한 것의 타당성을 지금의 시각에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또 일본의 동향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없는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던 트루먼의 입장에 서 보아야 한다. 피터 제닝스는 사후(事後)에 모든 사실이 밝혀진 상황, 즉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시각에서 50년 전의 결정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려 하고 있다. 원폭을 쓰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원폭 투하 결정을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현실감각이 부족한 견해이다. 전쟁에서 지휘관은 항상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행동해야 하지 희망 섞인 기대로 작전을 할 수는 없다」
  
   어린이가 죽창을 들고 나온다
  
  이 과목의 다음 시간까지 학생들이 읽고 가야 하는 교재는 약 4백 페이지 분량이었다. 기자는 트루먼 대통령의 원폭 투하 결정에 비판적인 수정주의 학자들의 논문을 읽었다. 원폭 투하 직전 미군이 작성한 일본 본토 방어 병력에 대한 정보분석 보고서를 통해서는 그 당시에 미군이 어떤 상황판단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미군이 일본 본토침공 작전계획(암호명 올림픽)을 짜고 있을 때는 오키나와 점령작전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4월초부터 6월말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미군은 1만2천5백2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3만6천6백31명이 부상당했다. 일본군 7만명이 전사했고 오키나와 민간인 3만명이 죽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옥쇄하거나 자살했다. 그래서 일본군 포로는 7천명에 불과했다. 36척의 해군함정이 카미카제 자살공격에 의하여 침몰되었고 3백68척이 파괴되었다.
  
  미군은 보급선이 끊긴 상태에서도 이렇게 지독하게 싸우는 일본군에 대하여 겁을 먹고 있었다. 서울의 한 구(區) 정도 면적에 지나지 않은 사이판 섬 공방전에서 일본군 3만명이 전사했고 1천명의 민간 노무자들은 자살했다. 포로는 1천명에 불과했다. 타라와섬 상륙전에서 미군은 일본군 5천명 가운데 1백50명만 생포할 수 있었다. 미군은 일본 상륙작전에서 어린이가 죽창(竹槍)을 들고 싸우는 이런 옥쇄작전을 예상하고 있었다.
  
  미군 정보 보고서를 읽어보니 1945년 7월, 즉 원폭 투하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에 일본은 본토방어를 위해서 사력(死力)을 다해서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군은 일본군이 오는 11월이 되면 일본 본토의 병력이 1백86만5천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이미 7월에 그 수준에 달한 것을 확인하였다. 일본군이 미군의 상륙지역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규수에는 약 45만5천의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7월22일 포츠담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마샬 합참의장으로부터 「일본 상륙작전에서 우리는 최소한 25만, 최대한 1백만명의 병력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일본군도 그 정도의 피해를 볼 것이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폭 투하 명령이 태평양 사령부에 하달된 것은 바로 이날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에 미군은 자신들의 정보판단이 과소평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8월 초 규슈 방어에 동원된 병력은 90만이었다. 육해군 소속의 전투기 8천 대가 대기중이었고 그 대부분은 카미카제 자살특공용이었다.
  
  둘째 시간에는 주로 이 교재를 읽은 소감을 가지고 한 시간 반 동안 토론을 했다. 교수들은 다시 한번 원폭 투하의 정당성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써내라고 했다. 기자는 처음에 썼던 보고서의 뼈대를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이 두 번째 보고서에서 「몇 가지 사실을 보충하겠다」고 했다.
  
  「수정주의 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일본제국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전에는 항복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이란 두 번의 타격을 당하고도 어전(御前)회의에서는 항복에 대한 찬반의견이 동수(同數)였다. 천황이 개입하고서야 항복을 결의할 수 있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일본군은 붕괴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상륙하는 미군에 대해서 세 배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2백만의 병력이 죽음을 각오하고 친숙한 지형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고사령관은 근거 없는 낙관론을 믿고서 행동할 수는 없다. 원폭 투하는 오히려 일본정부 내의 온건론자들 입장을 강화시켜주었다. 요나이가 말한 대로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은 하늘로부터 온 선물이었다. 경제적인 계산으로도 원폭은 더 많은 인명을 구했다」
  
  이 사례연구에 참여하면서 기자는 1984년 일본 가와사키역 근방의 음식점에서 만났던 모리타 요시오씨(森田芳夫)가 떠올랐다. 기자는 그때 月刊朝鮮에 실을 「조선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를 취재하고 있었다. 그때 72세이던 모리타씨의 아버지는 군산에서 한약방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에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철수하는 일을 돌보아주던 경성(京城)세화회에서 사무를 보았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가 쓴 「조선종전(朝鮮終戰)의 기록(記錄)」은 일본인들의 철수 과정을 다룬 것이기 하지만 광복전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책이다.
  
  모리타씨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외무부 관리가 되었다가 한일국교가 정상화되기 1년 전부터 주한(駐韓)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75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있었다. 그 뒤에는 성신대학교 교수로 일하여 한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길었다. 그는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이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일본의 지식인들 가운데 한반도 분단이 일제 식민통치와 태평양전쟁의 전후 처리,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던 때였다. 모리타씨는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항복을 결정한 어전(御前)회의가 8월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8월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기회를 놓치고 38선 분단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반대로 이 어전회의가 결사항전을 결의하였더라면 소련의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南下)하였을 것이고 미군은 인명손실을 막기 위하여 한국상륙전은 포기하고 한국을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겨주어 한반도 전체가 적화(赤化)되었을 것입니다』
  
   맥아더의 誤判
  
  과연 그랬을까. 8월6일에 일본이 항복을 결의했더라도 소련은 북중국과 만주 및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군사력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소련의 시각에서 한반도를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이 반도는 일본의 가슴에 들이댄 단도(短刀)와도 같아 보인다. 일본과 중국을 동시에 제어할 수 있는 이 전략적 위치에 탐을 낸 제정(帝政) 러시아는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다가 일본과 충돌하여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진 것은 그 12년 뒤에 공산혁명이 일어나도록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소련으로서는 그런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미국의 지도층을 속이거나 설득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어전회의가 결사항전을 결의했더라면 남한까지 적화(赤化)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육상전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산까지 남하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말 화가 나는 일은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다른 나라의 결정에 완전히 매달려 있었다는 점이다.
  
  트루먼은 6·25 남침 소식을 주말휴가를 보내러 내려갔던 고향인 미주리에서 듣자마자 미군의 파견을 결심한다. 이 결정으로 4만명이 넘는 미군이 이름도 잘 알지 못했던 나라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동시에 트루먼의 이 결정은 소련 공산주의의 종말을 예약한다. 진주만 공격이 미국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처럼 金日成의 남침은 군비축소와 사회복지 향상 쪽으로 국정(國政)의 방향을 돌리려고 하던 트루먼을 군비증강과 냉전강화 쪽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역사로부터의 추론(推論)」 시간에 우리는 6·25 동란의 사례연구도 했었다. 중공군의 개입을 부른 맥아더의 무리한 북진(北進)에 대한 반성을 주제(主題)로 한 공부였다. 트루먼이 미군을 투입하였을 때의 전략 목표는 남침한 인민군을 38선 이북으로 쫓아낸다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에서 성공하여 인민군이 붕괴해버리자 전쟁목표가 한반도의 통일로 수정되었다. 워싱턴의 군지휘자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맥아더의 눈부신 승리가 자연스럽게 그런 대세를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언론과 의회가 현지 사령관의 연전 연승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사이 맥아더는 「중공군이 어찌 감히 개입하겠는가」하는 오만에 빠지게 된다. 미국 국무부도 중공으로부터의 경고를 무시해 버린다. 이때 만약 맥아더가 평양-원산 선에서 북진(北進)을 중단하고 전선(戰線)을 강화하였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중공군은 개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김일성은 북쪽 산악지대에 몰려 약체화되든지 망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으로 나온 것이고 그때는 아무도 맥아더의 독주를 만류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잘 나갈 때 조심하라」는 말은 맥아더나, 한때 인기 90%대를 달리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도 통용될 수 있었던 만고(萬古)의 진리이지만 오만과 독선을 천성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인간에게 그런 자제가 쉬운 것 같지는 않다. 중공군의 개입은 한 부수적인 효과로서 대만을 살렸다는 데는 우리 교수진의 전사(戰史) 전문가 메이씨도 동의하였다. 모택동(毛澤東)은 대만으로 쳐들어가려고 중국 남부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가 북한 지원으로 방향을 틀었고 미국도 대만해협에 함대를 배치하여 중공의 상륙전을 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만이 지금은 한중수교(韓中修交) 이후 우리나라를 원망하고 있으니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論과 觀보다 중요한 것
  
  「역사로부터의 추론(推論)」 수업은 거의 모든 미국의 대학수업이 그러한 것처럼 교수가 설교를 하지 않고 사회를 본다. 미리 읽어오라고 한 수백 페이지의 교재를 다 읽었다는 전제하에서 몇 가지 화제를 제시한 다음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유도하며 시험도 친다. 이것이 옳다, 저것은 틀렸다는 식으로 판단을 하지 않는다. ABC의 다큐멘터리 「왜 히로시마에 원폭은 떨어졌는가」가 좋은 작품인가 졸작인가에 대한 평가도 하지 않는다. 교수가 자신의 논(論)과 관(觀)을 강하게 내세우는 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사실파악을 잘하여 스스로 어떤 생각을 갖도록 유도만 해주는 식이다. 사실 대부분의 쟁점(爭點)에서는 사실관계만 명확해지면 평가는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 평가는 쉽고 사실파악은 어렵다. 논설은 쉽고 특종은 어려운 것과 같다.
  
  많은 한국의 기자 교수 정치인들은 이 어려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또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사실확인 작업에는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거창하고 화려한, 열광적이고 근사한 주장, 논평, 무슨 무슨 관(觀), 무슨 무슨 설(說)을 전파하기에 열심인 것이다. 이러니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고, 사실은 없고 구호만 있는, 그리하여 소란스러운데 남는 것은 별로 없는 논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주장들이 또 다른 사람들의 성과를 말살하기 위하여 무기로 동원되기도 한다. 민족사관으로써 김부식(金富軾)을 작살내버리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한 권의 책」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읽지 않는 분위기가 확산된다.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쓴 책이란 꼬리표가 붙어버린 것을 굳이 읽을 마음이 학생시대에 생길 리가 없다. 민중사관(民衆史觀), 식민사관(植民史觀)이란 말도 흉기가 되어 귀중한 노작(勞作)을 읽는 훈련이 아니라 경멸하는 훈련부터 먼저 받게 된다.
  
  「역사로부터의 추론(推論)」수업의 두 번째 주제는 「누가 고 딘 디엠을 죽였는가」였다. 교재(敎材)는 미국의 외교문서, 월남전을 지휘했던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회고록, 이 회고록에서 고 딘 디엠 당시 월남 대통령을 제거하는 쿠데타를 지원한 것으로 묘사되었던 국무부 차관보 힐즈맨의 반론, 그리고 쿠데타의 지도자 트란 반 돈 장군의 회고록이었다. 월남전에 왜 미국이 말려 들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논쟁에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1963년 11월1일에 있었던 이 쿠데타다. 미국이 지지한 이 쿠데타의 명분은 고 딘 디엠 대통령의 인권탄압에 대한, 「애국적이고 민주적인」월남 군부에 의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이 쿠데타 이후 월남은 쿠데타에 쿠데타가 꼬리를 무는 대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승만(李承晩)이나 박정희(朴正熙)처럼 민족주의자였던 고 딘 디엠이 제거되자 그 보다 훨씬 못한 저질 인간들이 베트콩을 때려잡겠다고 나섰으나 월남 지도부는 모두 미국의 괴뢰로 보이게 되었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7: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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