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5) - 대한민국 죽이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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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親王 李垠의 고백
  
  선비집단이 어떻게 나라를 망하게 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우리나라에서 부족한 이유는 역사학자들이 군사에 대해서 거의 무지(無知)하여 군사적 측면의 요인 분석을 소홀히 하고 있는 데다가 같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朝鮮朝 선비들을 과대평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조선조의 마지막 왕자 영친왕(榮親王) 이은(李垠)은 그의 조상들이 어떻게 해서 나라를 망쳤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한 적이 있다. 1945년 8월16일 일본군 대위로 있던 이형근(李亨根)씨(전 육군참모총장·대장)는 도쿄에 있던 李垠공을 찾아갔다. 그 전에도 李대위는 가끔 英親王을 방문했는데 자신을 일본어로 상대하여 느낌이 좋지 않았다. 李대위는 비록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충성을 바칠 대상으로서 英親王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다음날인 이날 李垠은 유창한 한국말로 열렬하게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李亨根씨는 지금도 李垠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다 같이 유교국가이면서 일본은 예부터 武를 숭상하는 전통을 계승하고 武士道를 이어갔습니다. 한국은 武를 천시하고 文에 치중하는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폐습을 이어왔던 까닭에 조야(朝野)가 문약(文弱)에 흘러 결국 일본에게 병탄당하고 말았소. 나는 어려서부터 나라에는 그 독립을 수호할 수 있는 국방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통감해왔고 언젠가는 우리 동포들에게 나의 조상, 즉 역대 왕들이 문약의 풍조를 없애지 못함으로써 망국(亡國)을 초래케 한 잘못을 깊이 사과할 생각이었소. 그러니 李대위는 급히 귀국해서 국군 창설에 힘써주기를 바라오. 국군의 창설에는 無에서 有를 창조한다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오』
  
  李亨根씨는 『그분의 이 절규는 나의 인생을 통하여 잊지 못할 교훈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민족적 양심의 고백이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영친왕 李垠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귀비엄씨(貴妃嚴氏). 순종과는 이복형제이기도 한 그는 1926년에 순종이 죽자 왕위 계승자였으나 日帝에 의해서 귀국이 저지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나왔고 육군 중장까지 올랐다. 군사에 대해서 무식했던 朝鮮朝의 왕실과 尙武정신으로 충만한 일본의 지배층을 다 경험해본 그로서는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다.
  
   군인들을 죽이는 문화
  
  咸秉春씨는 1981년에 영문으로 발표한 「한국의 근대와 국가발전」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한국의 역사는 강력한 군인지도자가 나와서 나라를 세우면 문관(文官)들이 그 나라의 정치를 독점하면서 군인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 흐름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의 역사는 군인들을 죽이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중에 해군사령관인 이순신(李舜臣)을 모함하여 고문하고 강등시킨 것을 전형적인 사례로 꼽았다.
  
  「젊고 유능한 장교들은 조직적으로 제거되었다. 군대는 열등한 위치로 격하되고 중요한 군직(軍職)은 민간인들이 차지하였다. 명문(名門) 집안에서는 무과(武科)로 나아가는 가족이 있을까 걱정했다. 武科로 등용된다는 것은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咸秉春씨는 이 논문에서 중요한 암시를 하나 던지고 있다.
  
  「서기 1170년에 일어난 고려의 무신(武臣)반란으로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만약 몽골의 침략이 없었다면 무신정권으로 확립된 군사독재는 그 뒤의 한국역사를 바꾸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武士정권이 성립하여 봉건제도를 발전시키면서 그 뒤 7세기 동안 일본을 지배하였다. 고려의 최씨(崔氏) 무신정권은 일본의 무사 지배체제와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咸秉春는 몽골의 침략이 없었다면 한국에서도 일본처럼 무사집단이 지배세력이 되어 봉건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동양으로 밀고 들어올 때 우리도 일본처럼 자주적인 근대화(近代化)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던지고 있다. 말하자면 고려 무신란이 한국의 정체된 문민 우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전기(轉機)를 마련했으나 몽골침략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는 얘기이다. 요사이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도 무신정권을 높게 평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무신정권 1백년 동안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농민과 천민(賤民)의 반란이 일어나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하였다. 왕과 문신들이 허수아비가 된 대신에 지배세력의 범위가 넓어졌다. 지방의 귀족과 관리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고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다양한 책들이 보급되었다.
  
  무신정권은 또 간단치 않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역사상 최대의 군사강국 몽골을 상대로 30여 년간을 항전했다. 우리 역사에서 비장한 승부를 한 무사집단은 통일신라기의 花郞과 대몽항전기(對蒙抗戰期)의 삼별초(三別抄)뿐이다. 이런 항전이 가능했던 것은 무신정권의 통제력과 동원능력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신정권의 자주적 항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朝鮮朝의 문약한 선비집단이 보여준 사대적, 위선적 대처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관군과 관리들은 달아나 버렸다. 明軍과 의병, 그리고 李舜臣이 일어나 국가의 붕괴를 막았을 뿐이다. 三別秒는 고려조정(이때는 무신정권이 타도된 이후)이 항복하여 개경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강화도를 떠나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다니면서 몽골군대를 상대로 영웅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이런 항전이 가능했던 것은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친위부대로서 그 구성원이 몽골군대에 포로로 붙들려 갔던 전력(前歷)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몽골은 고려를 점령한 다음에도 그 조정을 없애버리지 않고서 왕실끼리 통혼하는 등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이런 예외적 대우는 고려의 무신정권이 자신들을 상대로 영웅적인 항전을 했다는 데 대한 존경심에 기인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고려군대가 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아직 주자학(朱子學)이 우리 역사 속에 들어와 문존무비(文尊武卑)의 씨앗을 뿌리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金泳三의 사대성
  
  무신정권의 대몽(對蒙)항전은 우리 역사에서 자주노선을 추구했던 이들은 대체로 군인들이고 사대노선의 추종자들은 대체로 문관들이었다는 하나의 법칙을 새삼 확인해준다. 「金庾信 - 고려 무신정권 - 朴正熙」와 「조선조 선비 - 한민당 - 金泳三」으로 이어지는 문민정치집단과 비교해 보라. 金泳三 대통령에 의해서 저질러진 최악의 실정(失政)인 IMF 구제금융 사태를 언론은 경제예속, 半식민지, 경제국치(國恥)란 말로 표현했다. 이런 표현의 뒷면에는 대한민국의 자주성에 크나큰 타격을 입힌, 야당식 표현대로라면 나라를 판 매국노(賣國奴)가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朴正熙 全斗煥과 같은 군인출신 지도자들이 이룩한 자립경제를 예속경제로 만든 사람이 문민지도자였다는 사실은 咸秉春씨가 간파한 우리 역사의 한 법칙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그런데 金泳三 대통령은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서 약 1조원의 돈이 들어가는 옛 중앙청 철거를 단행한 사람이다. 「풍수정권」이란 비판을 들어가면서도 日帝가 박았다는 쇠말뚝을 뽑는 일에 국가기관을 동원한 사람이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말을 한 사람이다.
  
  이런 용감한 언동으로만 판단한다면 그는 한국 역사상 가장 자주적인 정치지도자였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일본에 달러를 구걸하는 신세로 이 나라를 전락시켰는가. 정치에서 동기는 참고사항이고 결과로써 평가된다. 결과로만 보면 그는 사대적 정치인이다. 우리 국내문제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왜 「민족정기 회복을 외친 대통령이 사대적 지도자가 되고 말았는가」하는 이 질문에 답할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번의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병(病)이 중하다고 해도 진단이 정확하면 치료는 쉽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 민족사의 주자학적 후진성에서 찾을 수가 있다.
  
  즉, 金泳三 대통령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나라를 망친 주자학적 지배층의 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 文民 지배층은 주체성이 없었다. 국가도 주체성이 없어지고 큰 나라에 빌붙는 사대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국방을 중국에 맡기니(우리가 지금 미국에 맡기듯이) 사대주의자들은 적(敵)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견하여 치졸한 권력투쟁으로 빠져들었다. 사대주의자들이 나라를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점, 즉 적을 외부에 두지 않고 내부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金泳三 대통령이 文民이란 말을 쓴 배후에는 무인(武人)들과 상인(商人)들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민정부란 말을 쉽게 설명하면 먹물 먹은 사람들이 독점적으로 다스리는 정부란 뜻이 된다. 金泳三 대통령의 의식구조는 朝鮮朝 양반정치의 후진적 사고방식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내부에서 敵을 찾은 대통령
  
  金泳三 대통령의 참모들은 실제로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을 음해세력이니 기득권 세력이니 하는 식으로 표현했고 「내부의 적」이라 하기도 했다. 그는 또 한국 현대사를 송두리째 부정함으로써 군출신 지도자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 전 대통령들을 사실상 적으로 돌렸다. 이 「내부의 적」이란 사고(思考)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돈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사회가 되도록 하겠다』는 말을 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反자본주의적인 이런 말을 한 金泳三 대통령 자신은 평생 생계비를 스스로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땀흘린 돈이 아닌 공돈을 주로 만진 사람이었다.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 공돈은 아까운 줄 모르고 쓰게 된다. 한국의 경제적 對外예속을 부른 것은 金대통령이고 돈벌이의 엄숙함과 돈의 무서움을 모르는 그의 특성인 것이다. 그는 국가예산을 아무런 양심의 부담 없이 썼다. 1조원이 들어가는 옛 중앙청 철거뿐 아니라 1천5백억원이 들어간 남산 외인 아파트 철거와 역대 대통령 집무실 철거, 그리고 경부고속전철의 사업비 팽창과 부실공사는 金泳三 대통령이 국가예산까지도 대선자금처럼 공돈이라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까지 부르게 한다.
  
  이런 경제관을 가진 사람이 IMF 구제금융사태를 자초하였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남산 외인 아파트는 개발년대(開發年代)에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머물도록 만든 아파트였다. 이 건물을 지으면 남산의 경관을 해친다는 것을 朴正熙 대통령도 알았지만 그때는 우선 한 푼의 달러가 아쉽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하여 건설된 멀쩡한 건물을 폭파시키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방영되었고 많은 구경꾼들은 환호하였다. 많은 언론은 이런 건물을 지은 前 정권의 무식을 비난하였고 철거의 용단을 내렸던 金泳三 정부의 위업을 칭송해마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굿판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기성세대의 고민을 이제 좀 잘 살게 되었다 하여 이런 식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과연 죄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울분을 느꼈던 것은 기자 한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골목대장
  
  적을 내부에서 찾는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 진짜 敵에 대해서는 비굴하다. 당파싸움에 그렇게도 용감했던 朝鮮朝 선비들은 왜 일본과 청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무력했던가.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과감했던 金泳三 대통령은 북한정권과 IMF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도 굴욕적이었던가. 최근의 부부간첩사건에 의해서 金正日의 전처 성혜림(成蕙琳)의 조카인 이한영(李韓永)씨를 암살한 것은 북한정권이 보낸 공작원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북한정권은 우리나라 고교생 다섯 명을 납치해 가서 간첩교육기관의 교관으로 부리고 있음도 밝혀졌다. 우리의 전직 대통령을 잡아넣는 데는 그렇게도 용감하던 金泳三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자신이 보호할 의무가 있는 자국민이 납치 살해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정상적인 국가관계에서는 보통 선전포고로 연결되기도 한다. 金泳三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로서 양심의 가책도, 분노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국민들에 대한 애정이 애당초 결핍되어 있는 것인가. 1995년 쌀을 북한에 실어다 준 우리 선박의 한 선원이 호기심에서 사진을 찍다가 북한당국에 연행되어 이 배의 선원들이 모두 억류되었던 적이 있었다. 金泳三 정부는 이 선원들을 돌려받기 위하여 「귀측의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을 사과한다」는 취지의 공문서를 북한에 보냈다.
  
  우리 헌법이 반란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북한의 법을 지키지 않은 점을 사과하다니… 국가가 무엇인지, 주권이 무엇인지, 정통성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정부의 행동이었다. 자기 집 부근의 골목에서만 큰 소리 치고 정작 실력과 용기가 필요한 대결에서는 쪽을 못쓰는 사람을 우리는 골목대장이라고 한다. 또는 구들목대장이라고 한다. 우리가 왜 50억 달러나 들여서 북한에다가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고 있는가. 북한이 핵무기개발을 하는 것을 일전불사(一戰不辭)의 의지로써 막지 못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金泳三 정부는 미국 정부와 공조만 잘 했더라면 북한을 국제적으로 봉쇄하여 북한 스스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할 수가 있었다. 미국이 그런 강공책으로 나오려니까 金泳三 정부는 북한을 자극한다고 반대했다. 그리고는 朴正熙 대통령의 자주노선을 견제하기 위하여 한국에 대해서 위선적인 인권론을 제기해온(그러나 그 수십배나 악독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 카터 前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중재를 받았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 수 있었던 북한에게 비상구를 열어주었고 그 대가는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인 것이다. 공갈범에게 돈을 주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나라가 잘 살 때이다.
  
   미국의 더 강한 내정 간섭 요청했던 金泳三
  
  金泳三 대통령은 우리 것은 경멸하고 외국 것은 추종하는 행태를 보인 사람이다. 우리 세대의 위대한 성취인 건국, 호국, 근대화의 의미를 부정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에는 일말의 의문도 보이지 않았다. 1979년 10월에 그가 의원직에서 제명된 것은 정치탄압이라 하여 넘어갔는데 무슨 말을 했기에 朴正熙가 발끈했느냐 하는 점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金泳三 총재는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내가 주한 미국 대사관 관리들에게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에 의해서만이 (박 정권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그들은 그런 행동은 내정 간섭이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넌센스이다. 주한미군 3만 명은 간섭이 아니란 말인가」
  
  이 회견기사가 말썽이 되자 글라이스틴 駐韓 미국대사는 「金泳三은 워싱턴에서도 잘 아다시피 우리 대사관으로부터 상당한 배려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에 이 가사에 대해서 논평을 하게 되면 그와 부딪치게 되므로 金泳三의 말을 반박하라는 권유를 거절하였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金泳三 총재의 발언을 미국 대사관이 나서서 반박하면 그에게 타격을 주게 되므로 가만히 있기로 했다는 의미이다. 미국 대사관이 金총재를 상당히 보호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며칠 뒤에 金泳三 총재의 신민당 대변인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金총재의 인터뷰는 에드워드 케네디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을 도와주기 위하여 카터를 공격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유정회(維政會)는 공개질의를 통해서 「주한 미군의 성격을 내정간섭으로 본 것은 북괴의 상투적 주장과 일치된다고 보지 않는가, 궁극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미국 통제하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미국 정부가 직접적인 압력으로 한국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은 확신인가 실언인가」라고 따졌다.
  
  金泳三 총재는 미국이 더 강하게 朴正熙 대통령에 대해 압력을 넣지 않는다고 미국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강대국에 대해서 자국의 내정에 간섭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런 압력을 왜 더 강하게 넣지 않느냐고 강대국 정부를 비판하는 정치지도자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주한미군을 내정간섭의 도구로 이해하는 것도 그렇다. 북한이 바로 駐韓 미군을 제국주의적 지배의 도구로 보고 있는 것이다. 金泳三 총재의 이 발언은 정치지도자로서 그의 외세의존적 국가관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IMF의 내정개입을 자초(自招)한 것은 그의 이런 思考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장원리의 우상숭배
  
  오늘의 금융위기를 부른 데는 金대통령의 맹목적 「외래시장」추종이 1차적 요인이었다. 그가 내세운 세계화, 시장원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조건의 정비(금융구조개편, 금융거래의 시장화, 정경유착의 단절, 법령정비 등)가 선행(先行)되지 않으면 강대국을 위해서 자국(自國)의 국익을 무방비 상태로 내어놓게 만든다. 구조조정 같은 내부개혁에는 전직 대통령 구속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 金대통령은 어려운 내부정비를 하지도 못하면서 입만 있으면 되는 세계화, 시장원리를 외쳤다. 반복적으로 구호를 외치다가 보면 어느새 정책이 되고 실천이 된다. 金대통령은 한보사태, 기아사태 때 이 시장원리를 적용하여 정부의 개입 포기를 선언했다. 외국의 금융기관은 한국정부가 기업들에 대한 지급보증을 포기한 것으로 해석했다. 우리 기업들의 엄청난 부채비율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외국은행이 돈을 빌려 준 것은 정부가 기업을 망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믿음이 사라지니 한국의 신용도 떨어지고 외국은행은 빌려준 돈을 회수해가기 시작하여 오늘의 사태가 빚어졌다. 金泳三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조건이 조성되지 않은 한국에 그것을 실천하려다가 파국을 맞은 장면(張勉) 정부와 같은 실패를 이번에는 금융부문에서 되풀이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원리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대적, 선동적, 위선적, 맹목적 추종은 국가이익을 배신한다. 시장원리 이전에 필요한 것이 국익화이고 세계화 이전에 필요한 것이 한국화이며 이는 주체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내부에다가 적을 두게 되면 정치인은 이기주의자가 된다. 국가와 민족, 또는 외세, 안보 같은 큰 主題와 큰 敵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곁에 있는 경쟁자를 가장 미워하게 된다. 金泳三 대통령의 主敵은 북한정권이지 지나간 군사정권도, 전직 대통령도, 金大中씨도 아니었던 것이다. 드러난 것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金泳三 대통령은 다가오는 금융위기보다도 자신의 李仁濟 후보 지원설에 대해서 더 신경을 썼고 자신의 유일한 실적이라는 실명제 방어에 더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선거 때만 되면 되풀이되는 흑색선전을 국가적 위기로까지 표현하면서도 정작 다가오는 국가의 위기에는 소홀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대통령 직속의 국가정보기관인 안기부(安企部)의 경제정보기능과 해외정보기능을 잘만 활용했어도 금융위기를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변명과 보복도 하지 말자
  
  한국경제의 위기와 외세에의 예속은 불가피하게 북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약화시킴으로써 통일의 기회를 놓치게 할 가능성마저 있다. 지금 한반도 정세를 흡수통일이냐, 분단고착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한국 경제력의 약화는 북한정권을 고무시켜줄 것이고 한국 내 흡수통일론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며 분단고착을 원하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이다. IMF를 실질적으로 조종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의존이 강화된다는 것은 미국이 우리의 對北정책에 대해서 더욱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이 주도하여 북한체제를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흡수합병시키려면 우리 손에 달러가 많아야 한다. 그것을 거의 바닥낸 金대통령은 對北우세의 근거를 무너뜨린 셈이다.
  
  우리 경제력의 약화는 또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다. 벌써 국방비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경제력이 약화되면 국방력도 따라서 약화된다는 이 불변의 법칙은 경제를 망친 사람은 국방을 망친 사람이 되고 결국은 나라를 사대(事大)로, 예속으로 가져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위기는 또 우리의 민주화에도 타격을 줄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칙들이 경제회생을 위해서 유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金泳三 대통령의 언동에 나타난 反현대사적, 反대한민국적, 反자본주의적, 反군사문화적인 성격은 드디어 反통일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나라 지식인층의 문제는 이런 金泳三 대통령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아부하고 부채질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옛 중앙청 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金種泌, 金大中, 李會昌씨가 모두 사석에서는 문제를 제기했으나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마녀사냥식의 분위기에 억눌려 그들의 소신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관이 확립된 엘리트 집단이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金泳三 실패의 교훈에서
  
  한 사람의 권력남용을 막지 못하는 엘리트 집단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오합지졸이다. 한때 金泳三 찬양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지금은 또 金泳三 대통령 공격에 앞장서고 있다. 중심이 잡혀 있지 않은 배는 바람에 나부끼고 주체성이 약한 인간은 시류(時流)에 크게 흔들린다. 왜 한국인들이 권력 이동기에 극단에서 극단으로 표변하는가 하는 이유도 주체성의 결여로 중심(重心)을 제도로 잡지 못한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金泳三의 실패는 그러나 하나의 기회를 주고 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유일하게 나라를 망친 주자학적 문민 정치문화를 청산함으로써 후진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선진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려면 金泳三 대통령에 대한 철저한 탐구가 지금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金泳三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청문회, 대선 자금과 잔금에 대한 취재와 수사는 그런 탐구의 한 가지 방법에 속한다. 우리 정치문화는 전직 대통령을 수사함으로써 임기중의 문제들을 사후적으로 정리해 가는 것을 이미 하나의 전통으로 확립하였다. 그런 전통은 힘있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힘이 빠졌을 때는 칼을 들이댄다는 점에서 정의 감정상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정치가 정상화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지만 그때까지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는 나름대로의 효용성이 있다.
  
  金泳三 대통령이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에 못지 않은 규모의 대선 자금과 잔금을 모집하고 관리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아무도 그에 대한 면죄부를 주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金泳三 대통령의 실패 교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또 다시 그와 닮은꼴의 지도자를 갖게 될 것이다. 마치 임진왜란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朝鮮朝 선비들이 그 뒤 40년도 안되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교훈을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는 것은 변명의 논리와 보복의 논리에 지배당할 때이다.
  
  조사 당하는 쪽이 될 金泳三 전 대통령과 이른바 가신(家臣)그룹, 그리고 민주계 인사들은 변명을 말아야 하고 조사나 수사, 또는 취재의 칼자루를 쥔 쪽에서는 보복심리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후진적, 사대적, 위선적, 선동적, 문약한 정치문화의 모든 문제점들을 똘똘 말아서 金泳三 대통령과 함께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물에 띄워보낼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는 선진통일조국 건설의 제1단계 공사인 주체성 확립을 위한 성공적인 첫 삽을 뜨게 될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7: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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