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5) - 대한민국 죽이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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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빌의 미국 紀行
  
  토크빌은 유럽의 왕정하(王政下)민주주의의 조용함과 미국의 소란스러운 대통령 직선제를 비교하면서 後者의 장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열광적인 정치참여에 따른 소란스러움을 혼란으로 보지 않고 활력(活力)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1996년 미국 대선(大選)의 투표율은 40%였다. 1930년대 이후 가장 낮았다. 이것을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로 해석하는 평가도 많았다.
  
  기자는 메인州의 포틀랜드市에서 「외국기자가 본 미국선거」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기자가 자랑한 것은 한국 대통령 선거의 열광적 분위기와 높은 투표율이었다. 1990년대의 한국 정치 풍토는 1830년대의 미국과 닮은 점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참고로 클린턴이 재선(再選)에 성공한 것은 여자표와 흑인표 덕분이었다. 남자 유권자 중에서는 밥 돌과 클린턴이 비슷했고 백인들 가운데서는 돌이 46%, 클린턴이 43%였으나 흑인들에게선 클린턴이 83%, 돌이 12%를 득표했던 것이다.
  
  기자가 하버드에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미국 사회에서 시민의 참여가 줄어들고 있다」는 걱정이었다. 퍼트남이란 교수는 「혼자 하는 볼링」이란 제목의 책에서 미국사회의 인간접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종국적으로는 경제적 위기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퍼트남 교수는 인간관계가 끈끈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정부나 기업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다는 이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北이탈리아와 한국을 그런 나라로 꼽기도 했다. 인간적 접촉이 많은 사회에서는 신뢰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조직의 기능이 효율적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연(地緣) 학연(學緣) 혈연(血緣)을 따지는 지나친 私的 인간관계가 公的인 윤리를 저해하고 있는 면이 있다. 인간접촉의 빈도도 중요하겠지만 그 인간관계가 어떤 가치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할 것이다.
  
  토크빌이 관찰한 미국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기자는 오늘날의 한국인에 대해서 쓴 글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가끔 했다. 물질적인 목표를 향해서 물불 안가리고 매진하는 점에서 19세기 초반의 미국인과 20세기 후반의 한국인은 닮은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의 한가운데에서 행운을 누리면서도 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장관(壯觀)이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만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항상 조급한 법이다. 그들이 그 좋은 것들은 찾아내고 차지하며 즐기는 데는 항상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인생이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미국사람들이 끊임없이 (인생의) 진로(進路)를 수정하는 것은 행복에 이르는 최단거리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咸秉春의 주자학 비판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젊은 시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는 『왜 이렇게 날이 더디게 밝는가』하고 하늘을 향해서 신경질을 내곤 했었다고 한다. 일하고 싶은 욕심과 충동으로 안절부절 못했다는 「왕회장」형(型)의 사람들이 19세기초의 미국에도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서부개척시대가 열리고 산업이 발달하여 나라가 온통 용광로처럼 뜨거운 활기를 보이고 있을 때 소로우와 에머슨은 고독 속에서 국민들의 주체성과 미국의 知的인 자주성을 강조하고 다녔다. 물질적인 풍요와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칫 놓치기 쉬운 가치관과 철학적 기조를 이들은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윤리와 청교도 정신의 통합을 통해서 상호견제하되 생동하면서 부패하지 않는 미국식 발전 모델을 만들어내게 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항산(恒産)과, 종교와 철학이 만들어내는 항심(恒心)을 균형 있게 결합할 수 있는 나라나 사람은 주체성의 소유자여야 한다. 기자가 하버드 생활중에 모처럼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얻어 하나의 화제(話題)로 삼았던 단어가 이 주체성이었다.
  
  미국에서 기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년에게서도 주체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주체성의 한 잣대는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발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 소년들은 도무지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이런 주체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기주의처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하지 않고 모일수록 큰 힘을 내는 것이다. 주체성을 가진 인간은 자존심이 강한 만큼 남을 존경할 줄 안다. 자만한 인간이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자만은 교양이 부족한 자존심이라 할 것이다. 우리 문화에 왜 주체성이 부족하고 사대성이 지식인들의 핏줄 속에서 고질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았는가 하는 의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한 世代 전에 꼭 같은 고민을 했던 한국인을 발견했다.
  
  그는 1983년 金正日이 지령했던 아웅산 폭파사건으로 다른 16명의 정부 요인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씨였다. 그가 駐美 대사일 때 「전환기의 한국 정치」(에드워드 R 라이트 편집. 1975년 워싱턴 대학교 출판부)에 게재한 「한국정치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전통적인 요인의 재조명(再照明)」이란 제목의 영어로 쓴 논문을 읽어보았다.
  
  이 당시 咸秉春 대사는 자주노선을 추구하는 朴正熙 대통령에 대해서 인권 탄압을 문제삼아 압력을 넣고 있던 미국정부와 이를 엄호하는 미국 언론을 상대로 고독한 설득과 반론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무렵 하버드 대학에 와서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는 강연회를 가졌다. 이 강연회에 참석했던 나의 친구 안(安)모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시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咸秉春 대사는 유창한 영어로써 논리적으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미국적 잣대로 개발도상국의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가슴이 뿌듯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질문시간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咸대사를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미국인들 앞에서 한국인이 한국인을 공격하고 자기 나라 정부를 경멸하듯이 하는 것이 보기에 민망하여 내가 일어나 함병춘 대사를 옹호하는 말을 했다. 그 뒤로 나는 우리 유학생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하버드, 예일, 콜롬비아 대학에서 한 5년간 법을 공부하여 누구보다도 미국식 민주주의와 법치정신을 잘 아는 咸秉春씨로서는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로 우리 정치문화를 역사적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주자학이 한국 정치문화에 끼친 악영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는 또 다른 논문에서는 한국의 군사문화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끼친 긍정적인 점을 극찬하고 있었다. 咸대사는 주자학을 신봉한 朝鮮朝 학자들은 정치의 이상형을 덕치(德治)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어떤 강제력도 동원되지 않는 교화(敎化)에 기초한 정치만이 정통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폭력이 빠진 정치란 환상이고 위선인데도 주자학 선비들은 그런 환상적 정치상(政治像)을 하나 만들어 놓고 이에 배치되는 정치, 즉 권력주의적인 현실정치를 경멸하고 부정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폭력의 불가피성을 모른 주자학
  
  이런 주자학적 정치관은 심각한 모순을 배태하고 있었다. 즉, 그런 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란 완벽한 인격을 가진 선비여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격의 소유자들은 정치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좋은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이라 비판하기만 했다.
  
  이러니 자연히 한국의 정치는 일류급 인사들이 아닌 무자격자들의 손에 놀아나게 되었다. 주자학 선비들은 정치를 순결하고 신성한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는 조금이라도 손때가 묻은 사람들이 거기에 손을 대려고 하면 마구 욕을 해대니 종국에 가서는 시커먼 손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치를 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자가당착은 주자학이 정치에 필수적인 폭력의 문제를 정직하게 또 실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위선적 명분론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학적 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취약점은 폭력을 무조건 부정하고 도덕만으로써 인간에 대한 통치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만든 데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도덕성을 내세우려는 위선적(僞善的) 행동이 현실에서는 지옥을 만들고 만 것이다. 함병춘 대사는 이 논문에서 이런 취지의 지적도 하고 있다.
  
  「정치와 관련된 일체의 폭력을 싫어하다가 보니 그런 폭력을 다루는 전문가인 군인들을 천시하게 되었다. 국방임무까지도 비판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국방을 강화하는 것이 조정의 덕치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빚을 것 같으면 차라리 군사적 패배를 감수하고 침략자들에게 아부하는 쪽을 택하였다. 이것은 외교적 자살행위이다. 상무(尙武)정신을 가진 문화권에서 보면 이런 주자학적 정치문화는 경멸스럽고 맥빠지며 정체적이고 퇴보적이며 병적인 형상인 것이다. 선비들은 두 가지 길을 걸었다. 한 부류는 정치에 참여하여 대대손손 기득권을 지켜가려고 했다. 다른 부류는 재야(在野)에 남아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자신들이 정치인들보다도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이런 在野 선비들의 비판은 조정 권력자로부터 가끔 역모라는 누명을 쓰게 되고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부르기도 했다」
  
  咸秉春 대사의 이 논문을 읽으면서 기자는 몇 가지 장면들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어느 대학 총장 출신 인사는 자신이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직 제의를 받고도 거부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자랑하였다. 많은 기자들은 기자출신들이 정치계로 나가면 무슨 더러운 곳으로 몸이 팔려나가는 것처럼 욕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인들의 자질을 높여야 한다고 열을 올린다. 너무나 이상적인 政治像을 그려놓으니 모든 정치행위는 부도덕한 것이 되어버리고 그러니 1류 인물은 정치를 할 생각도 못하게 되고 2류급 인사들만 정치를 하도록 하여 정치인들이 사회의 평균수준보다도 떨어지도록 만들고 있다.
  
  세계 일류 국가의 공통점은 경찰관에 대한 국민들의 외경심이다. 경찰관에게 삿대질하는 사람들이 무사한 나라는 2류 국가 아니면 3류 국가이다. 경찰관이 행사하는 폭력은 국가가 행사하는 정당한 폭력으로서 공권력으로 불린다. 이런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허용되고 있는 것도 폭력을 수반하는 정치를 정통성이 없는 것으로 보는 주자학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자학과 사대주의
  
  일체의 폭력을 저주하고 굴욕적인 평화까지도 감수하려는 주자학적 政治觀은 사대주의로 기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자학적 정치관에 內在된 군사력에 대한 경멸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그 군사력을 지탱하는 경제활동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허약하면 힘이 센 나라에 빌붙는 사대주의적 對外정책을 쓰게 된다. 이것이 나라가 주체성을 잃는 경우이다.
  
  왜 우리는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외교정책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성해놓고도 그 이후에는 중국에 대해서 사대적 경향을 보이다가 朝鮮朝시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공식적이 외교정책이 되어 버렸나. 이것은 우리 역사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문이다. 이런 사대화는 샤머니즘 및 불교의 쇠퇴와 한족(漢族)중심 가치관인 유교의 발흥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주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은 尙武정신을 잃어가는 과정, 그리고 문민통치의 정착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명상 - 자아의 발견 - 개인의 주체화 - 나라의 주체화 - 상무 국가건설」의 과정은 「유교적 명분론-타인에 대한 지나친 의식(意識)과 일체의 폭력 부정-자아의 상실-주체성 없는 개인 - 나라의 문약화 - 사대화」로 전환된 것이다.
  
  東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무사도(武士道)는 화랑도였다. 일본에서 무사집단이 정권을 잡은 것은 서기 12세기이므로 화랑도보다 수백 년이 늦다. 그런데 화랑도는 통일신라의 후반에 들어서면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유교의 영향이 커진 것과 관계가 있다는 해석이 있다. 유교가 민족 주체성을 약화시키면서 그 주체성을 구현하는 도구였던 무사집단도 사라진 것이란 풀이이다. 東아시아 역사를 보면 유교의 발흥은 尙武정신과 민족 주체성의 약화를 가져온다는 법칙이 있다.
  
  아시아에서 제국주의시대에 식민지가 되지 않고 나라의 주체성을 지킨 두 나라는 일본과 타이이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불교와 무사들의 지배이다. 일본은 샤머니즘에 뿌리를 둔 國敎로서의 神道와 불교가 한덩어리로 되어 있는 종교적 바탕을 갖고 있다. 이런 일본에 들어간 주자학은 朝鮮朝에서처럼 압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토착적인 신앙의 바탕을 흔들지 못했다. 기자는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일본이 더 커보이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류 국가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일본의 저력을 「일본은 없다」는 식으로 낮추어 보는 것은 자위(自慰)행위에 불과하다. 2류의 눈에는 1류됨의 이유가 보이지 않지만(그래서 영원히 2류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1류의 눈에는 2류의 이유가 보이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보는 한국의 2류성, 그 원인은 「지도층의 국가관 부족」이다. 기자는 일본이 일류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지배층의 주체성이라고 믿게 되었다. 외국의 先進문물을 받아들일 때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거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변형시키고 소화하는 능력이 우리보다 앞선 것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동양의 가치관을 깔고서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토착시킨다는 자세는 지도층의 주체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
  
   孔孟을 포로로 잡아라!
  
  朴正熙 대통령이 1975년에 청와대를 방문한 대구사범 시절의 은사 키시 요네사쿠씨에게 한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가 대구사범 때 배운 것 중에서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옛날 에토의 학숙(學塾)에서 야마자키라는 선생이 공자맹자를 강의하는데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공자 맹자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쳐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학생들이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막바로 공자 맹자의 군대를 맞아 싸워서 두 사람을 포로로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맹(孔孟)의 진짜 가르침이다」 저는 학문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자묘(孔子廟)를 만든다는 등 형식적으로 배우고 있을 뿐 유교의 핵심은 죽어버렸는데 일본에서는 공자 맹자가 정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자학 선비들에게 야마자키와 같은 질문을 던졌더라면 『공자 맹자에게 당장 항복해야지』라고 대답했을 것이 분명하다. 광해군(光海君)을 타도한 인조반정(仁祖反正) 주모자들의 명분은, 우리가 사대노선을 따르지 않고 실리외교로써 淸과 明 나라 사이에서 독자 노선을 취한 데 대한 규탄이었다. 공자 맹자보다도 국익(國益)을 앞세운 일본 지식층의 주체성이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철학적 바탕이었다. 이런 주체성은 신라의 고승 圓光이 승려의 행동윤리보다도 신라국민으로서의 시민윤리를 더 존중하여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지었던 것과 같은 정신이다. 일본과 한국의 지배층 사이에 존재하는 주체성의 有無가 자율적 근대화와 타율적 근대화, 1류 국가와 2류 국가의 차이를 낳았음을 자각하는 것이 우리의 핏속을 흐르고 있는 이 사대성을 극복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 등이 주동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일본 군대의 힘을 빌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개혁을 목적으로 했지만 외세를 업었으니 이것이 성공한들 주체적 근대화를 이룰 수는 없었다. 문약한 양반정치가 군사력을 워낙 약화시켜 놓으니 쿠데타에 필요한 군사력까지 외부에서 빌어올 정도였다. 이 쿠데타의 실패는, 개화파는 친일세력이라는 등식을 만들었다. 이 사건에 대한 반동으로서 수구세력이 뭉쳐서 개화에 저항하게 되었으니 사대적 쿠데타는 역사를 후퇴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갑신정변은 自力에 의한 개혁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朝鮮 지배층의 사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IMF 구제금융 사건도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시점에서 외세가 들어와서 개혁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갑신정변과 비슷하다. 이런 외세의존형 개혁은 성공하더라도 비싼 대가(代價)를 치러야 하는데 그 代價란 결국 강대국에 대한 종속의 강화로 나타날 것이다.
  
  朴正熙는 金庾信이 對唐 결전으로써 신라통일을 완성했던 서기 7세기 이후 처음으로 세계적 강대국을 상대로 자주노선을 걸으려는 일대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이다. 기자는 朴正熙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의 이런 주체성은 그가 받았던 일본식 교육(대구사범학교,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교육)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일본식 교육은 기본적으로 일제(日帝)의 통치수단이었지만 무사도(武士道) 정신과 함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국가관, 그리고 주체성을 심어준 면이 있다. 朴正熙란 인물은 전통적 한국 정치문화의 토양만으로는 만들어지기 어려운 인간형이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군대나 전쟁에 대해서는 놀라운 無知를 드러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디서 가져온 통계인지 외침을 수백 번 받은 고난의 민족으로 우리를 묘사하고 한민족은 원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세계 역사에 드문 긴 평화를 누린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의 비극은 침략을 많이 당해서가 아니라 너무 긴 평화를 누리느라고 전쟁과 군대의 중요성을 잊어버린 점이다.
  
  韓民族 역사상 나라가 망한 경우는 딱 한번 있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서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선 것은 정권교체로 봐야 한다. 이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朝鮮이 망한 뒤에는 민족국가가 아예 없어져버리고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나라를 망친 최악의 지배집단이 양반정치의 주인공들인 주자학 선비들이란 얘기이다. 이 주자학의 세뇌가 어찌나 강한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나 文民이란 말이 경멸이 아닌 존경을 부르는 단어로 되어 있다(다행히 金泳三 문민정부의 실패로 언어감각이 달라지겠지만).
  
출처 : 월조
[ 2003-07-02, 17: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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