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2) - 주인이라도 물어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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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라도 물어라
  
  金庾信이 1천3백년 만에 다시 나타난다면 이런 말을 할 것이다.
  
  {金日成 유령과 金正日 아들과 그 졸개들은 우리의 적이다. 대한민국의 곧은 것(直)으로 敵의 굽은 것(曲)을 치면 이긴다. 미국과 중국이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겠다면 그들을 물어뜯어라. 그럴 만한 각오가 없고 희생이 두렵거든 꼬리를 내리고 조용히 살아라. 비굴한 평화와 고귀한 전쟁 사이에서 우리 신라인은 전쟁을 선택했고 이때 흘린 피로해서 후손들이 한반도를 보금자리로 삼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가. 벌겋게 익어 있는 저 통일의 과일을 따먹을 용기가 없거든 입이라도 닥치고 있으라.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고 해서 과일이 그 속으로 떨어지겠는가}
  
  金庾信과 꼭 같은 통일의 논리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물론 朴正熙였다. 그는 1976년 1월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깥에다가 내어놓고 할 소리는 아니지만 요사이 미, 일, 중, 소 4대 강국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나는 그 다 소용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관계는 어떤 객관적인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간의 실력 차이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남북간의 실력 차이로 결판을 낼 만한 객관적인 상황이 이미 조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상황을 자기 것으로 잡아챌 만한 지도력이 대한민국에서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통일에의 열정과 그에 따른 희생을 국민에게 요구할 수 있는 지도자의 존재 여부인 것이다. 통일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통일을 어떤 과정으로 하느냐이다. 이 과정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 수도 있고 3류 국가로 전락시킬 수 있다. 희생을 각오하면 선진국민이 될 것이고 공짜로 먹겠다면 무책임한 3류 국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신라통일의 교훈이다.
  
  唐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백제 땅에다가는 웅진 도떵罐?두어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扶餘隆)을 도독으로 임명하였고 평양에다가는 안동 도호부를 두었다. 唐은 또 일방적으로 문무왕을 계림(鷄林) 대도독에 임명하고 扶餘隆과 만나 화친을 맹약하게 하였다. 전승국을 패전국과 같이 취급하여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수작이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신라가 한 일은 백제 고구려 유민(遺民)들을 포섭하여 唐에 대한 저항에 동참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로써 한민족이란 동족의식이 생겨난 것이었다.
  
  金庾信이 평화공존론을 선택했다면 당대의 백성들은 편안하게(그러나 비굴하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한민족이란 단위는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인(新羅人)이 피를 뿌려 건설한 통일신라의 국력과 문화적 수준은 당시 세계에서는 서구나 이슬람圈에 비해서 손색이 없는 1류였다. 국가와 개인이 함께 손잡고 나아간 이 시대야말로 한국사의 로마인 것이다. 같은 논리로 다가오는 통일은 한국사와 한민족의 체질을 바꾸어 1류 국가가 될 수 있게 하는 최후의 관문이 되어야 한다. 2류 국가의 조건만 갖고 있는 대한민국이 통일이란 단련과 시험을 잘 치른다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선진과 통일을 한 개념으로 묶는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통일이 없으면 선진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NSC 68]
  
  통일은 자주국가를 만드는 것이고 그 집단적 경험을 통해선 책임의식과 주체성이 있는 일류시민이 태어나게 된다. 통일을 매개로 하여 국가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이 분리할 수 없는 숙명적 관계로 정립될 때에만 국가와 개인이 항상 엇갈린 길을 걸어온 朝鮮朝 이후 한국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역사상 통일을 위해서 전쟁을 결심했던 사람으로 두 金씨가 있으니 金庾信과 金日成이다. 金庾信은 통일전쟁에 이겨서 민족의 원훈이 되었고 金日成은 실패하여 민족의 원수가 되었다. [통일을 위하여 전쟁을 결심했다]는 자부심이 아직도 북한노동당지휘부가 남한 지도부를 깔보고 있는 심리적 근거가 되고 있다. 강요된 전쟁을 한 남한은 통일과 전쟁의 상관관계를 직시할 만큼 자신들의 체험을 내면화시키지 못했다. 우리가 경제력의 對北 우세를 군사적 정신적 우세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우리 지도층의 전쟁을 무조건 회피하려는 태도가 북한 당국에 간파된 때문이다. 말하자면 氣에서 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현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언어를 통해서이다. 북한당국은 우리를 향해 적화통일 무력통일을 공언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저들을 향해서 흡수통일이란 말도 못할 정도로 눈치만 보고 있다.
  
  기자가 하버드 대학에서 수강한 [국익의 추구]란 과목에서 교재로 쓰인 [NSC 68]이란 유명한 문서가 있다. 1949∼50년 사이에 입안된 백악관 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문서이다. 이것을 기초한 사람은 폴 니츠, 당시 국무부의 정책기획부장이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후원을 받아 작성되어 트루먼이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대소(對蘇) 기본전략으로 채택된 이 문서는 그 뒤의 냉전과 역대 美 대통령의 思考에 큰 영향을 끼쳤다. [NSC 68 때문에 미국은 냉전에서 이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이 문서가 작성되고 있던 때 트루먼 대통령은 군비를 감축하고 국내 복지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려고 했다. 폴 니츠는 NSC 68에서 소련이 서구문명을 파괴하려는 세력이라고 단정한 뒤에 對蘇 강경론을 주장하고 군비증강을 요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4월7일에 이 문서에 서명은 했지만 군비증강 건의에 대해서는 냉담했다.
  
   군사력은 방패, 인권은 창
  
  그러다가 두 달 뒤에 6·25 남침이 일어났다. 폴 니츠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트루먼은 다시 이 문서를 꺼내보고는 당장 다음 회계연도의 국방예산을 세 배로 늘리도록 했다. NSC 68과 한국전쟁의 이런 타이밍이 미국의 본격적인 냉전 전략을 출범시켰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냉전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 통일은 그 냉전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킬 것이다. 소련 공산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非문명적, 非서구적 이단 세력이란 것이 이 문서가 서두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는 도덕적 관점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부른 근거가 여기에 있다. 폴 니츠는 소련의 침략노선으로부터 방어해야 할 미국의 가치를 개인주의에 두었다.
  
  [자유로운 사회는 개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본다. 개인의 자율(自律)과 자중(自重)만 있으면 개인과 개인의 권리 사이에는 층돌 없이 공존할 수가 있다. 이런 자유사상에서 놀라울 정도의 다양성과 깊은 관용, 그리고 법치의 전통이 생겨난다. 이것이 자유 사회의 통합성과 활력을 조성하는 것이다] 폴 니츠는 또 [공산주의는 이런 장점을 악용하여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인간의 非이성적인 측면을 선동하여 사회를 파괴하려고 드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가치관이다]고 단정했다. 그는 자유세계의 약점은 불가피한 최후 수단으로서가 아니면 전쟁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따라서 對蘇 전략도 이런 약점을 직시한 바탕에서 저들의 군사적 모험주의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유사상의 우월성을 과시함으로써 [러시아 인민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니츠는 [소련 체제의 본질적인 성격을 바꾸어놓는 것이 승리의 첩경]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본질적인 성격변화가 외부로부터 강요되어서가 아니라 [소련 내부의 자체적인 동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라고 니츠는 강조했다. 그는 군사력을 방패로 보고 인권을 창으로 해석한 것이다.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하여 소련의 침략을 저지한 다음에는 자유세계의 강점인 인권을 무기로 삼아 전체주의의 反인간성을 폭로함으로써 적의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金庾信이 말한 신라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의 [우리의 곧은 것]을 니츠는 개인주의의 인권존중으로 보았고 [적의 굽은 것]을 공산주의의 反인륜성으로 해석한 것이다. 金庾信과 니츠의 대전략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를 한반도 상황에 적용하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인권의 3대 조건-평화 복지 자유
  
  우리는 군사력을 방패삼아 敵 북한당국의 도발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단계의 공격은 인권이란 창으로써 적의 사령부를 찔러 북한 주민들을 우리 편으로 돌려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인권을 어떻게 창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는가. 우리의 통일 원칙은 [인권의 원칙] 하나로 족하다. 인권, 즉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3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통일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3대 조건이란 평화, 즉 한반도에 동족상잔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것, 복지, 즉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의 확보, 자유, 즉 인간의 정신적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 3대 조건으로 갖추어진 인권의 원칙은 남북한에 동시에 차별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친북세력이 흔히 말하는 논리-[북한은 우리와 발전단계도 다르고 체제의 성격도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인권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말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차별대우이다.
  
  이 인권의 원칙을, 북한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공격무기로 이용하려면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종국적으로는 북한 지배층을 약화시키고 주민들을 우리 편으로 돌려놓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자선적(慈善的)인 의미의 원조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연장시킬 뿐이다.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는 평화, 복지, 자유의 3대 조건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가 있다. 식량원조의 조건으로서 북한 인민군의 군비축소를 요구하며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도모하고, 생산성이 낮은 집단농장을 사유화하도록 유도하며, 아우슈비츠보다도 더한 인간 도륙의 현장 정치범수용소의 폐쇄를 주장할 수가 있다. 이 모든 요구 조건은 북한 지배층과 체제의 약화를 목표로 한다. 이런 전략적 思考가 결여된 식량 원조나 경수로 건설은 북한 지배층을 연명시켜 흡수통일을 지연시킬 뿐이다.
  
  인권의 무기화가 가능하려면 한국 안에서 먼저 위선적 평화론과 사대적 현상유지론이 정리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지금 북한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식량지원을 주장하고 있는 종교계 일부 지도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해왔던 사람들이다. 북한 지배층에 대해서 인권의 창을 들이댈 수 없는 사람들이 북한 주민의 인도적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겠는가. 인도만 알고 인권을 모르는 사람이 부르짖는 인도란 것도 알고 보면 기만적 선의(善意)이다. 우리나라는 朝鮮朝 이후 상무정신이 거세된 탓으로 침략전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희한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런 전통의 나라에서 자위적 목적의 전쟁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전쟁을 부추기는 국수주의자]로 몰아서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집단이 있다. 거세된 남자를 강간범으로 몰아버림으로써 자신의 금욕성을 강조하려는 식의 이런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굽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 굽은 것을 우리의 곧은 것, 즉 인권이란 창으로 쳐서 바로 편 다음에야 적의 굽은 것을 제대로 칠 수 있을 것이다.
  
   2, 3류 지식인들
  
  대한민국의 현재 지식인들이 2, 3류라고 생각될 때가 있었다. 金庾信, 世宗大王, 李舜臣, 朴正熙 같은 민족사의 1류 지식인들에 비해서 그렇고 선진국의 지식인들에 비해서 그러하다. 1류와 2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쟁의 본질에 대한 이해 여부(與否)이다. 특히 무력대치의 분단국가에서 지식인 노릇을 하겠다는 사람은 모국어처럼 전쟁을 알아야 한다. 이 전쟁에 대한 기본상식조차 없으니 전략이 나올 수가 없다. 전략은 전쟁의 원리를 국가나 기업경영에 응용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미국의 사회과학은 그 기저에 전쟁에 대한 이해와 전쟁 원리의 응용을 깔고 있다. 전쟁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직운용방법론이 미국의 기업경영에 응용되고 이것이 다시 행장의 현대화를 위해서 도입되었다. 駐韓미군을 통해서 한국군에 전해진 현대적 조직운영법은 5·16 후에 정부 행정조직으로 넘어와서 우리 행정기능이 근대화의 견인차가 될 만큼 효율적으로 발전된 것은 전쟁과 사회발전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한 사례에 불과하다.
  
  미국 대학에서 일상적으로 듣게 되는 전략(Strategy), 작전(Operation), 전술(Tactic), 무게 중심(Center of Gravity) 같은 용어들은 학문의 방법론에서도 군사적 思考가 많이 응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군대와 전쟁의 긍정적인 면을 소개만 해도 전쟁광이니 국수주의니 하는 비난을 퍼붓는 병적이고 패배적인 지식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일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 우리 민족의 뇌리와 핏줄 속에 눌어붙어 있는 사대적, 위선적, 후진적 찌꺼기들은 없어지지 않고 사회의 선진화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해방 후 우리가 모처럼 확보한 군사문화를 잘 정리하여 국가, 기업,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하는 것이지 [군사문화의 청산]이 아닌 것이다. 군사문화를 잘 소화해야 朝鮮朝的인 문약성을 극복하고 강건한 국가 체질과 시민윤리를 갖추게 될 것이다. 선진국 체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비책(秘策)은 바로 이 군사문화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국익의 추구]라는 강좌의 담당 교수 로버트 블랙윌은 키신저의 보좌관을 오래 지냈고 부시 행정부에서는 백악관의 안보회의(NSC=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유럽담당 책임자로 있었다. 이 기간 중 독일통일 과정에 미국측의 전략 수립 책임자로 깊이 개입했다. 그는 독일 통일과정에서 미국이 한 역할은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외교활동으로 꼽힐 것이라고 자랑하곤 했다. 백악관 시절에 그의 직속 부하였던 필립 젤리코 하버드 대학 부교수가 쓴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한 全기록 [독일은 통일되고 유럽은 바뀌었다]란 책을 자신의 강좌에서 교재로 썼다. 기자는 블랙윌 교수에게 {미국이 한반도 통일에 대하여 가장 우려하는 것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이 통일한 뒤에 駐韓 미군을 철수하라고 요구할까 봐 걱정이고 혹시 북한의 핵무기 제조 기술과 핵 물질을 인수하여 핵 개발을 시도할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이런 걱정은 블랙윌 교수가 독일 통일에 관계할 때도 품었던 것이다. 독일과 미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갔는지를 알면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예측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미국은 통일된 독일이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탈퇴하여 중립국이 되려고 할까 걱정했다. 중립 독일은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중립 독일은 또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과 서독에 있는 미군을 다같이 나가라고 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駐韓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도 철수시켜야 하므로 미국의 세계 전략에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된다. 따라서 미국은 통독(統獨) 과정에서 통일된 독일을 나토 안에 묶어놓고 주독(駐獨) 미군과 핵무기를 계속해서 독일에 놓아둘 수 있도록 다짐받는 데 외교의 목표를 두었다.
  
  이런 미국의 본심은 당시 국무장관 베이커가 199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세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에게 한 말에서 드러난다. 베이커는 {미국이 동독이 제안한 통일 독일의 중립화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은 중립화된 독일은 나토에 묶여 있는 독일보다도 소련에 대하여 더 위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립 독일은 핵무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정치력이 있는 나토에 독일이 매여 있으면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통일된 독일이 나토에 남게 되면 나토의 지휘 아래에 있는 부대는 지금의 동독 지역에는 주둔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베이커는 이런 논리를 고르바초프에게도 들이댔다. 그는 {미군이 나간 중립 독일과 나토에 묶여 있는 독일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고르바초프는 {당신의 제안은 매우 현실적이다. 나는 베르사이유 체제의 실패가 되풀이되어 독일이 또다시 재무장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실수를 막기 위해서는 독일을 유럽 체제 안에 묶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제안을 한번 검토해보자}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나토의 관할권이 동독에는 미치지 않도록 한다는 발상은 서독 외무장관 겐셔의 작품이었다. 이 발상을 베이커에게 주어서 소련을 설득하도록 한 것이었다. 독일통일 과정에서 소련이 의외로 쉽게 미국, 독일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은 본질적으로 美·獨의 설득논리에 소련의 지도부가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에 바탕을 둔, 잘 가꾸어진 정책과 논리는 엄청난 武力이나 돈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독일통일은 사소한 것 같아 보였던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 11월9일 동독 공산당 서기장 크렌츠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던 정치국원 샤보우스키에게 [국외 여행자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법률 초안]을 건네주면서 발표하도록 했다. 이 법은 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긴 했지만 언제부터 시행한다든지 하는 세칙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초안이었다. 샤보우스키는 기자회견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이 초안을 읽었다.
  
   독일 통일이 주는 암시
  
  이 법안의 요지는 국외 여행을 희망하는 사람이 신청을 하면 경찰은 신속하게 비자를 발급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날 밤 이 소식이 전해지자 東베를린 사람들은 동서 분계선을 지키는 동독 경찰초소로 달려가서 당장 비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한 경찰관들은 몰려드는 군중을 향해서 총을 쓰든지 베를린 장벽을 개방하든지 택일 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리고 장벽이 무너지면서 東베를린 사람들은 서쪽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크렌츠 서기장은 이 기정 사실에 편승하여 동독 정부가 그런 결정(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서독으로 갈 수 있도록 한 조치)을 즉시 발효시킨다고 발표해버렸다. 이런 우연적 사고에 의하여 도래한 기회를 잡아채어 통일로 가져가기로 결단한 사람이 콜 서독 수상이었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심한 것이 부시 미국 대통령이었다. 부시는 처음부터 콜의 통일 드라이브를 지원하여 그 대가로 미국이 걱정하고 있던 駐獨 미군과 핵무기, 그리고 나토 탈퇴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독일 통일이 베를린 장벽 붕괴 1년만에 성사된 것은 콜 수상의 지도력과 부시의 지원, 그리고 동서독 주민들의 통일 의지, 이로 인해서 공식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兩獨 사이에 사회통합이 기정사실로 되어버렸다는 점,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소련의 방해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콜 수상은 소련에 대해 경제원조를 약속하고 미국은 소련이 느끼는 안보위협을 해소하기 위해서 나토軍의 동독지역 주둔 금지같은 발상으로 접근했다. 이때 고르바초프는 駐獨 소련군의 철수를 미끼로 하여 통일에 동의하여주는 조건으로 여러 가지 양보를 서방세계로부터 받아낼 수 있었으나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해지는 가운데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 統獨 과정에서 고르바초프가 너무나 양보를 많이 했다는 데 대한 군부의 불만은 다음 해 8월 쿠데타 기도의 원인이 되었고 이는 고르바초프의 실권을 가져왔다. 統獨 과정에서 서독이 미국과 소련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한 조치들은 한국이 統韓 과정에서 중국과 미국을 안도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몇 가지 암시를 주고 있다. 최근 한국에 온 황장엽(黃長燁)씨는 북한을 접수한 뒤에도 일정 기간 분리통치를 하여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시킨 다음에 남북한 통합을 해야 서로가 편할 것이라는 착상을 밝혔다. 통일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요사이 이런 과도기적 북한 분리 통치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초대 駐中대사를 지낸 노재원(盧載源)씨가 다듬고 있는 [대한민국 주권하의 특별행정구 시안(試案)도 그런 논의의 일환이다.
  
   북한 분리통치론
  
  대한민국이 북한을 접수한 다음 10∼30년의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북한을 특별법이 적용되는 행정구역으로 설정하여 분리 통치를 하는 동안 북한의 경제수준을 향상시키고 주민들의 동화 적응 능력을 배양하면서 동시에 국토의 개조를 단행한다는 것이다. 盧대사는 {단순히 현재 수준의 대한민국과의 동화가 아니고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구현하는 것을 특별구 개조(改造)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지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후진적 또는 불합리한 제도와 시설은 동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盧대사는 이런 한시적 분리 통치가 급격한 남북한 통합에 흐른 부작용을 최소화한다는 소극적인 목표가 아닌 선진통일조국의 이상형을 북한에 건설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청사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盧대사는 또 이 특별구는 북한 지역에 駐韓 미군이 주둔하지 않도록 하여 중국의 美 경계심을 해소하는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서독이 동독지역에 나토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겠다고 하여 소련을 설득해간 과정과 비슷하다. 주한미군(駐韓美軍)의 현위치 주둔은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반도의 안전보장에 관한 韓, 美, 中 조약]의 체결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침을 정부가 확정하면 통일 전부터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우리의 흡수 통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설득하여 안심시켜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사전 정지 작업이 안된 상태에서 북한이 붕괴하면 중국과 미국이 북한에 직접 개입하여 북한에다가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려 할 것이고 이는 분단의 영구화로 갈 수 있는 길이란 것이다.
  
  盧載源 대사의 이런 제안에 대해서 서강대 이상우(李相禹) 교수는 {金正日은 절망적 상황을 타개하는 길은 미국이 하자는 대로 맡겨서 미국의 힘으로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막아보려는 전략을 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먼저 통일 뒤에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해를 조화시킬 수 있는 복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金正日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면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이 지금까지 북한을 다루는 하나의 가정(假定)이었다. 기자는 金正日이 그런 식으로 도발하기에는 너무나 부패한 혼(魂)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살적 공격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 바탕에서나 가능하다. 金正日의 변태적인 향락 생활과 외국에 숨겨놓은 비밀은행구좌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도발을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인민군이 질 것이 뻔한 전쟁을 할지도 의문이다. 달아날 곳이라곤 바다밖에 없는 한국과는 달리 북한은 우호국인 중국과 인접하고 있어 파멸의 순간이 다가오면 그들은 중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통일준비가 선진화의 길
  
  북한 당국을 몰아붙여도 도발을 못할 것이라고 판단할 때 우리가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몰아붙일 경우 金正日 집단이 살아남기 위하여 중국이나 미국 같은 외세를 끌어들일 가능성이다. 지금 한반도 내외에는 현상유지를 원하는 세력이 통일지향자들보다 더 많다. 미국, 중국, 북한당국, 그리고 남한의 일부 세력이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불리(不利)를 딛고 오늘날의 이 결정적인 상황을 통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정부가 먼저 현상 유지와 현상 타파 중에서 후자를 택일해야 한다. 우리의 對北 전략목표가 평화공존인지 흡수통일인지 모르도록 위장하려는 기회주의적 정책으로는 국민들의 희생정신을 동원할 수가 없고 우방국들로부터는 경멸과 불신을 받는다. 정부가 흡수통일을 결심하면 문제는 오히려 간단하다. 통일을 위한 경제건설, 통일을 위한 정치개혁, 통일을 위한 시민윤리 정착 식으로 통일선진조국을 만든다는 것이 택시 운전사에서 대통령까지 공감하고 공유하는 삶의 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과 모든 조직이 한시도 이 주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될 때 정치는 보다 성숙해질 것이고 소비도 절약될 것이며 국민들은 보다 떳떳해질 것이고 지식인 사회에서는 헛소리가 줄어들 것이다. 통일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선진화의 전략이 되는 것이다. 서울대학교는 金日成 대학을 어떻게 접수하여 동화시킬 것인가를 걱정하고, 국방부는 연합사 체제를 어떻게 바꾸어야 우리의 군사력이 미국과 마찰을 빚지 않고서 북한으로 진주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며, 포항제철소는 금책(金策)제철소를 어떻게 인수하여 운영할 것인가에 대하여 지금부터 계획해 간다면 나라의 분위기가 건실해질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은 1861년 대통령 취임 연설, 그 마지막 문단이다. 남부가 흑인노예 문제로 분리를 선언하여 미 합중국이 과연 연방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분열과 전란의 전야에 처해 있을 때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은 독립정신으로 돌아가 신성한 합중국 연방을 보존해가자고 눈물어린 호소를 한 뒤에 이렇게 말하면서 연설을 끝낸다.
  
  <당신네들은 정부를 파괴하겠다는 맹세를 하여 저 천당에다가 등록한 적이 없지만 나는 나라를 보존하고 수호해야 할 가장 신성한 서약을 한 사람입니다. 이 연설을 여기서 끝내기가 아쉽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적이 되어서는 안될 사이입니다. 감정이 우리를 뒤틀어놓더라도 그 것이 우리 사이에 있는 애정의 연대까지 파괴해서는 안됩니다. 수많은 전장과 수많은 애국선열의 무덤에서 나와서 이 광대한 대지 위에 살아 있는 수많은 가슴과 난로가로 뻗어나간 이 신비한 추억의 현은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천사의 천성(天性)이 언젠가는 반드시 그 줄을 다시 건드릴 때 합중국 연방의 노랫소리를 다시 물결치게 할 것입니다>
  
   평화냐 통일이냐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꼽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의 대표적 명연설에서 위선적인 평화론자들을 이렇게 비판한 적이 있다.
  
  <1861년에 미합중국 연방을 사랑한 사람들이 평화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월한 것이고 전쟁과 분쟁은 그 어떤 것보다도 나쁜 것이라고 믿었다면 우리는 수십만 명의 생명과 수억 달러의 재산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수많은 여인들의 가슴 찢어지는 고통과 수많은 가정의 파괴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싸움으로부터 몸을 피함으로써 이런 고통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전쟁을 피했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겁쟁이들이며 지구상의 위대한 국가의 반열에 낄 자격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폭로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우리 선조들의 피속에 강철과 같은 결의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한다. 링컨의 지혜를 믿고 그랜트 장군의 군대에 들어가 총검을 잡았던 선조들에게 감사한다>
  
  1861년 링컨이 선택할 수 있었던 정책은 두 가지였다. 평화를 선택하면 합중국의 분리를 받아들여야 했다. 미 합중국의 지속을 선택하면 전쟁을 결단해야 했다. 링컨은 전쟁을 선택하여 약 60만 명의 생명을 희생시킨 끝에 합중국을 보존했으며 그 자신도 암살됨으로써 피를 보탰다. 이 전쟁 때문에 21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국가 통합력과 동원력을 확보했다. 7세기의 金庾信과 1950년대의 胡志明도 비슷한 기로에 서서 전쟁을 선택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얻었다. 비스마르크는 19세기에 역시 세 번의 통일전쟁을 결단하여 독일 통일의 꿈을 이루었다. 우리는 6·25를 일찌감치 치른 덕분에 이번에는 잘 하면 전쟁 없이도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드문 행운을 맞고 있다. 그러나 통일은 절대로 공짜처럼, 삼풍백화점 붕괴처럼 오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을 각오하는 것 이상의 결의가 있을 때만 전쟁 없이도 값진 통일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굴욕적인 평화를 선택하여 저항 없이 나라를 내어준 朝鮮人과, 전쟁을 결단하여 통일국가를 만든 신라인(新羅人), 수백년 뒤의 역사책에서 대한민국人은 그 사이 어디쯤 위치하게 될 것인가.
  
출처 : 월조
[ 2003-07-02, 17: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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