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2) - 주인이라도 물어라(2)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핼버스탐 기자
  
  니만 재단에서는 매주 4∼5회 세미나를 개최했다. 유명한 기자, 칼럼니스트, 잡지 편집장, 경영자, 방송국의 프로듀서, 가수, 교수, 시인, 형사, 정치가, 검사, 사회사업가 등 다양한 직업인들이었다. 열 평 남짓한 방에서 접는 의자들을 갖다 놓고 접시에 음식을 담아와서 점심이나 저녁 삼아 먹어가면서 두 시간씩 진행하는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의 강연 및 토론이었다.
  이런 세미나나 파티에 여러 번 참석해보니 미국인들은 이런 행사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무척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세미나를 시작할 테니 자리에 앉아주세요] 하는 식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런 주의를 하지 않아도 모든 일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은 또 마이크를 잡고 딱딱하게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을 상당히 어색하게 여긴다. 출석 여부를 조사하는 사람이 없고 [꼭 참석해주세요]라고 주의를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출석률은 항상 90% 이상이었다. 하버드 대학에서의 수업과 니만 세미나를 다 만족시키려면 세미나실과 강의실 사이를 하루 평균 4∼6㎞ 걸어다녀야 했다. 좀 놀아볼까 하는 심정으로 온 기자는 계산착오를 한 셈이었다.
  
  니만 세미나에 초청된 연사 중에는 [최고의 천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의 著者 데이비드 핼버스탐 기자도 있었다. 니만의 책임자인 빌 코바치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핼버스탐을 [금세기 최고의 기자]라고 소개했다. 마침 그때 기자는 케네디 스쿨에서 [역사로부터의 추론](Reasoning from History)이란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다. 1963년에 있었던 월남 대통령 고 딘 디엠 축출 쿠데타를 다루는 시간에 교수는 [누가 고 딘 디엠을 죽였는가]라는 문제를 칠판에 쓴 다음 이름을 써내려갔다. 미국 CIA, 월남 장군들, 케네디 대통령, 당시 국무부 차관 힐스맨, 당시 駐사이공 미국 대사 헨리 캐보트 롯지…
  
  이런 명단들 가운데 핼버스탐의 이름이 들어갔다. 당시 20대 후반으로서 뉴욕 타임스 월남 특파원이었던 핼버스탐은 월남 정부의 부패와 이런 정통성 없는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이 보도로 1964년에 그는 퓰리처賞을 받았다. 핼버스탐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젊은 기자들이 쓴 反고 딘 디엠 기사가 미국의 여론을 움직여 케네디 정부가 그를 제거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키가 거의 1백90㎝나 될 것 같은 핼버스탐은 아직도 반골기질이 강한 사회부 기자 같았다. 앉자마자 그는 요사이 미국 방송국의 보도 경향을 경멸조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그처럼 피상적이고 그림을 중시하는 보여주기 위주의 보도행태가 과연 저널리즘으로 불릴 수 있는가 하는 개탄이었다. ABC의 프로그램을 지칭하여 민망할 정도로 비판하는데 그 ABC의 프로듀서인 테리가 참다 못해 손을 들더니 {선배 기자가 이런 자리에 와서 한다는 말씀이 동료들에 대한 비판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핼버스탐은 더욱 목청을 높이더니 {그러면 당신은 그런 보도를 하는 사람이 기자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취지로 한바탕 비판을 쏟아부었다. 옆에서 구경하면서 나는 [저러니 발로 뛰어 대작(大作)을 쓰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핼버스탐은 하버드대학의 학보사 기자 출신이다. 테네시州의 지방지에서 출발하여 뉴욕 타임스에 발탁되어 갔다. 10여 년간 근무한 뒤에 1967년엔 월간 잡지 하퍼誌의 전속기자로 옮겼다. 1968년에 그는 이 잡지에 [맥 조지 번디의 비싼 교육]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왜 천재들은 거지들에게 패했나
  
  번디는 30代에 하버드 대학의 학장을 지낸 정치학자로서 역시 하버드 출신인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서 안보 보좌관으로 발탁되어 월남전에 관한 전략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하퍼誌 기사는 번디 같은 천재가 어떻게 월남전 확대 같은 바보짓을 할 수 있었던가에 대한 심층취재였다. 이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핼버스탐은 케네디가 발탁했던 당대의 천재들이 어떻게 월남전을 이 지경으로 몰고갔는가 하는 주제로 결정판적인 책을 써보겠다는 충동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쓰는 데 4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취재에 2년 반, 집필에 1년 반. 그는 취재와 집필 기간 중에 자신의 기명(記名)이 신문과 잡지에 나오지 않게 되는 그 고독과 소외감이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기자는 하루하루 숨가쁘게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자신을 불태우면서 이 사회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그로 해서 유명해지곤 하는 쾌감으로 살아가는 직업인이다. 핼버스탐은 이런 저널리즘의 세계로부터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파티에 참석하면 {요사이는 뭘 하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취재하고 있는 책에 대해서 설명하노라면 그들은 흥미를 잃고서 눈동자가 희미해지는 것이었다>
  
  핼버스탐은 그러나 취재 그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에 평균 두 사람씩을 2년 반 동안 거의 매일 인터뷰했다고 한다. 신문기자 시절에는 인터뷰가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이었는데 마감시간과 지면의 제약에서 벗어나니 서너 시간 계속되기도 하는 인터뷰가 좋은 교육이 되더라는 것이다. 핼버스탐은 [나는 역사가 내어 뿜는 흥분에 감염되었다. 나는 과거가 잡아당기는 힘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은 월남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 과정과 실패를 분석한 책으로는 가장 많이 팔렸고 지금도 팔리고 있는 고전(古典)이다. 1972년에 간행되어 양장제본으로 약 20만부, 페이퍼 북으로 약 1백50만부가 팔렸다. 이 책의 판매에 공헌한 것은 [The Best and The Brightest]란 제목이었다. 이 문구는 이제는 미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상용(常用)되는 단어가 되었다.
  
  핼버스탐은 케네디가 끌어 모았던 주로 하버드 대학 출신의 일류 엘리트를 이런 신조어(新造語)로써 지칭했다. 이 책의 주제는 그러한 천재들이 어마어마한 과학병기를 동원하고서도 왜 촌로(村老)같은 호지명(胡志明)과 교장선생님처럼 생긴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거지같은 정글 게릴라에게 패배했느냐 하는 물음이다. 그 물음에 대해서 30년만에 답한 사람이 월남전을 지휘했던 당시 국방장관 맥나마라로서 2년 전에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의 실수는 월남의 역사와 민족성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개입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월남전에의 본격적인 개입을 결정한 1965년 여름 존슨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록을 읽어보면 미군의 전쟁수행 능력에 대해서만 논의하지 월맹측의 상황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없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제1조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다]는 무시되고 있다. 이는 英美계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감과 여기에서 비롯된 자기 중심적인 思考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핼버스탐은 [최고의 천재들]에서 당시 미국의 對월남전을 지휘했던 엘리트들이 가진 약점을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주재하는 최초의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나온 부통령 린든 존슨은 자신의 정치적 대부(代父)인 샘 레이번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장관들이 그렇게 명석할 수가 없어요. 누가 더 머리가 좋은지 분간하기 어려운데 내 생각으로는 맥나마라가 최고인 것 같아요} 한때 미국의회를 주름잡았던 레이번은 점잖게 충고한다. {린든, 자네 말이 맞을지 몰라. 다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겠지. 그러나 말이야, 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보안관으로 출마해서 당선된 경력이 있다면 다소 안심이 될 텐데 말일세}
  
   군사력 對 정치력
  
  핼버스탐은 레이번의 이 지적이 핵심을 찌른 것이라고 했다. 머리만 좋은 이 엘리트들은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선거를 치른 사람들이 체득하는 인간관계나 인간심리에 대한 통찰력도 결여된 사람이었다. 상아탑이나 최고경영자의 사무실에서 길들여진 안목과 감(感)으로 월남전을 치르다 보니 역사, 문화, 민족성, 혁명적 정열, 희생정신과 같은 무형적 요소에 대해서는 등한하게 되었다. 수치화할 수 있는 병력수, 폭탄투하량, 병참, 전사자수, 무기생산량 같은 지표를 기준으로 해서만 전쟁을 생각하니 그들에게 있어서 월남전쟁은 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숫자놀음이었다.
  
  미국 엘리트의 이런 함정을 간파한 것이 핼버스탐이었다. 그는 1967년 월남을 방문했을 때 월남전의 본질적인 성격을 정확히 파악했다. 월남전은 미국의 군사적 우월성과 월맹측의 정치적 우월성 사이의 대결인데 시간은 월맹측의 편에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미국은 언젠가는 철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전투에서는 이기고 있었지만 월맹은 즉각 인명손실을 보충할 수 있어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하는 아주 결정적인 부문에서는 항상 미군에 대하여 우위에 서 있었다. 맥나마라의 수학 對 지압의 심리학이 대결한 꼴이었다. 1969년 2월 이탈리아의 인터뷰 전문기자 올리아나 팔라치가 월맹의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과 나눈 대화는 핼버스탐의 문제의식과 그 궤(軌)를 같이 하고 있다. 지압은 {미국은 앞으로 10년, 또는 15년간이나 월남에 60만 대군을 주둔시킬 수는 없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괴뢰정권, 그것도 강력한 괴뢰정권을 남겨놓고 가야 하는데 이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월남 괴뢰정권은 미국의 노예로서의 가치도 없다}라고 했다.
  
  {미국은 모든 것을 달러로 해결하려고 한다. 자주독립 정부도 달러만 투입하면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수 같은 전략은 여기서 먹히지 않는다. 미군은 달러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인민의 정신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군인의 머리수는 이곳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25대 1, 6대 1, 3대 1이니 하는 병력비율은 의미가 없다. 이 전쟁은 全인민이 그들과 싸우는 전쟁이다. 전 인민이 들고일어났을 때는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몽골군대도 세 번이나 물리쳤다. 모든 전쟁 수단에서는 그들이 앞섰지만 우리는 저항했고 견뎠으며 우리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모든 인민이 함께 싸워야 한다. 13세기에 유효했던 것이 20세기에도 유효하다. 문제가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월남 사람이기 때문에 모두가 뛰어난 전사들인 것이다}
  
  지압은 당시 파리에서 진행되고 있던 평화회담에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모든 것은 군사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미국은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겪게 될 것이다}고 예언했다. 지압은 또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얻어야 한다는 식은 아니다. 우리는 타협에 의한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평화는 완전한 승리, 즉 미군의 완전 철수를 뜻한다}라고 못박았다.
  
   피터 아네트 기자
  
  니만 세미나에 초청된 또 한 사람의 대기자는 CNN 방송의 피터 아네트였다. 30여 년 동안 전장만 누빈 그는 걸프전 땐 바그다드에 남아 있다가 개전(開戰) 당일의 폭격상황을 중계방송했고 후세인과 인터뷰하는 세계적인 특종을 했다. 60대 후반인 아네트 기자도 핼버스탐처럼 氣가 센 사람이었다. 세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는 것이 마음은 아직도 팔팔한 사건기자였다. 그에게 내가 물어보았다.
  
  {미국은 20세기에 들어서 東아시아 유교권 국가들과 세 번 전쟁을 치렀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는 1승, 한국전쟁 때 중국인민해방군과는 1무승부, 월남전에서는 1패하여 상당히 고전(苦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네트 기자는 주저 없이 즉답을 했다.
  {아시아 전제 국가는 수십만, 수백만의 인명을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차이이지요}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어떤 복잡한 학설보다도 고참 기자의 간단한 이 한 마디에 승패의 비밀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기자는 지난 해 7월 하순 하노이 북쪽 山中에 있는 지압 장군의 별장에 가서 그와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80 노인으로 변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이 위대한 전략가는 {작은 나라가 강대국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는데 그것은 인민의 마음을 잡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월남전을 지휘할 때 13세기에 몽골 군대를 물리친 전투(戰鬪)를 참고로 했다고 말했다.
  
  핼버스탐, 아네트, 지압이 말하고 있는 월남의 승리 요인은 [민심장악]이란 단어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의식화하면 수천만 인민을 전부 戰士로 만들 수가 있다. 수천만의 전사가 혁명적 열정이나 통일에의 집념으로 무장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덤빌 때는 아무리 서양 강대국의 정규군대가 신식 무기를 앞세우고 달려들어도 장기적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핼버스탐이 말한 대로 군사력만으로는 정치력을 꺾을 수 없는 것이다. 민심을 전쟁의 결정적 요인으로 보는 것은 손자(孫子), 모택동(毛澤東), 김유신(金庾信) 같은 동아시아 장군들의 공통된 점이다.
  
  孫子는 공격의 우선순위를 적의 마음, 군대, 도시로 설정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배운 서양 장군들은 왜 구름같이 막연한 민심을 제1공격 목표로 삼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1968년 월맹측이 벌인 구정(舊正)공세는 군사적으로는 대실패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미국인들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공산게릴라들이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하고 고도(古都) 후에市를 한 달 이상 점령하는 것을 보고는 {이 전쟁에서는 빨리 손을 떼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가의 전쟁의지를 지탱하는 民心이 꺾여버린 것이다.
  
   몽골군과 월남군
  
  1257년 중국에서 남송(南宋)정벌전을 벌이고 있던 몽골의 쿠빌라이 황제는 남쪽으로 우회하여 南宋을 공격할 테니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월남조정이 거절하자 대군이 쳐들어왔다. 월남은 수도를 내주고는 달아나면서 식량과 집을 다 불태워버렸다. 보급을 받을 수 없게 된 몽골군은 철수하다가 매복군에게 대패했다. 서기 1284년 몽골군대 50만이 다시 침입했다. 이때 월남 왕은 왕자들과 대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私兵)들을 전부 천 홍 다 장군의 지휘하에 두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다. 총사령관 천 홍 다에게 왕은 이렇게 말했다.
  
  {적은 너무나 강력하다. 장기전은 엄청난 파괴를 몰고 올 것이다. 차라리 인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천 홍 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폐하가 품고 계시는 연민의 정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땅과 절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폐하께서 항복하시겠다면 그 전에 먼저 저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그는 전쟁교리를 책으로 만들어 장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병사들은 결전의지를 다짐하기 위해서 [몽골에게 죽음을]이란 글자를 팔에다가 문신으로 새겨넣었다. 월남 군대는 도시를 적에게 내어주고 산 속으로 달아나 적의 병력을 분산시킨 뒤에 곳곳에서 고립된 초소와 소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몽골군대는 보급선이 끊어지고 월남군의 초토작전으로 먹고 입을 것을 구하지 못했다. 철수하는 길도 험난하여 매복한 월남군대는 서서히 몽골군대를 수렁에 빠뜨리는 형국으로 적을 대패시켰다. 1285년 7월의 결전에서 몽골군대는 사령관을 잃고 5만의 포로를 남긴 뒤 도주했다. 2년 뒤 몽골군대는 30만의 병력으로 다시 쳐들어왔으나 똑같은 초토작전과 게릴라戰에 걸려 패배했다. 월남조정은 1288년에는 포로된 몽골 장병들을 석방하여 元으로 송환시켜주고 조공까지 바치는 유화정책을 써서 元과의 정면승부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 신라도 唐과 결전하여 한반도의 거의 전역을 손에 넣은 다음에는 唐에 복속하는 형식을 취해서 보복을 피했다. 이것은 굴욕외교가 아니라 강대국과의 정면승부를 피해야 생존이 가능한 작은 나라의 실용적 외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3세기에 월남의 군사제도는 농민군 제도였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시가 되면 순식간에 동원체제로 변하여 부족장과 귀족을 장수로 삼고 전 인민이 전사화(戰士化)되는 것이었다. 이런 농민군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지배층과 농민들이 상하로 단결하여야 한다. 그런 단결이 없는 상태에서는 농민군 제도가 조선조(朝鮮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합지졸이 되어버린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단결은 지배층의 솔선수범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이다. 월남에 가면 천 홍 다 장군 동상이 우리나라의 李舜臣 동상처럼 전국 도처에 서 있다. 그는 죽을 때 왕에게 유언을 했다.
  
  {군대는 父子 사이처럼 한 마음으로 단결해 있어야 합니다. 백성을 인정으로 대하소서. 그래야 저들의 마음 속에 깊은 뿌리를 내려 영원히 지속될 기반을 마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지압처럼 민심 장악을 승리의 결정적 요인으로 본 것이다. 인민의 마음에다가 전쟁 원리의 기본을 설정하고 있는 동양식 전쟁관과 정규군의 기능적 요소에다가 중심을 놓고 있는 서양식 전쟁관의 차이는 두 세계가 가진 상반된 문화와 역사의 산물이다. 월남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문화와 역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요사이 유행이 되다시피한 문화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그런 각성의 한 결과물인 것이다. 동양이 서양과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경쟁에서 이기려면 이 [민심의 장악]이란 명제를 깊게 탐구하여 시대를 뛰어넘어 적용될 수 있는 원리를 거기서 뽑아내어야 할 것이다. 기자가 하버드 대학의 정치행정대학원(케네디 스쿨)에서 수강한 [역사로부터의 추론](Reasoning from History)이란 제목의 강좌는 세 교수가 함께 가르치고 있었다. [대통령의 권력]이란 명저(名著)로 유명한 리처드 뉴스타트, 戰爭史학자로 유명한 어네스트 R 메이, 부시 행정부 시절에 백악관의 안보회의에 근무하면서 독일통일과정에서 참모 역할을 했던 필립 젤리코 교수.
  
  70대 후반인 뉴스타트 교수는 계단식 강의실의 맨 뒷줄에 있는 학생의 말이 잘 들리지 않으면 귀를 감싸쥐고는 계단을 달려올라가서 학생의 질문을 청취하곤 했다. 이 세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정책 수립자들이 역사의 교훈을 맹신하면 큰 착오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교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제2의 뮌헨 사태] [제2의 월남화] [도미노 현상] [지금 여기서 적을 막지 못하면 세계 어디에서도 막을 수가 없다] 같은 말이었다.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이 미국의 사활적(死活的) 국익이 걸려 있지도 않은 월남전에 말려들어간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도미노 이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들은 월남이 공산화가 되면 인접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몽땅 도미노 카드가 넘어가듯 차례로 공산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도미노 이론은 또 1938년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의 협박을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2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너무나 단순화된 분석에 기초하여 생긴 논리이다.
  
  젤리코 교수는 [정책전문가는 차라리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역사는 똑같은 방식으로는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역사를 분석할 시간이 있으면 당면한 문제를 더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역사로부터의 추론] 같은 것은 잊어버리라는 것이 이 과목의 결론인 것 같았다.
  
   金庾信을 잊은 지 오래
  
  이 세 교수는 당면한 문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맨 첫 질문으로 던져야 할 것은 [이야기가 어떻게 된 거야?}(What is the story?)라고 했다. 분석을 하기 전에 또 어떤 이론을 적용하기 전에 먼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건의 줄거리만 제대로 파악이 되면 대책(對策)은 저절로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을 중시하는 기자적 접근법이다. 북한에 대해서 복잡한 이론을 들이대기보다는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對北정책은 저절로 서게 되어 있다는 月刊朝鮮식 접근법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역사는 정책적 대안(代案)을 생산하는 공장은 아니다. 역사는 교과서가 아니라 참고 도서이다. 역사는 또 상상력을 자극하고 용기와 열정을 고무하는 문학적인 자료관이다. 기자는 하버드의 옌칭도서관에서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읽으면서 통일을 앞둔 한국 사람들이 참고로 할 만한 상상력을 많이 얻었다.
  
  三國史記의 제1 주인공은 김유신(金庾信)이다. 왜 태종무열왕이나 문무왕, 또는 광개토대왕, 장수왕보다도 왕이 아닌 한 신하에 대한 기술이 가장 긴가. 을지문덕(乙支文德)에 대한 언급은 한 쪽으로 끝나는데 金庾信에 대한 기술은 그 스무 배가 넘는 이유는 무엇인가. 三國史記를 쓴 김부식(金富軾)이 金庾信을 삼국시대 제1의 인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일연(一然)도 金庾信에 대해서 가장 길게 쓰고 있다. 一然과 金富軾의 같은 평가는 고려시대 때까지는 적어도 金庾信이 통일의 원훈으로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朝鮮朝에 들어와서부터 그에 대한 평가가 약화되었던 것 같다. 문약한 朝鮮朝 선비들의 안목으로는 이 巨人을 잴 수가 없었을 것이다. 金富軾은 한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할 때 총사령관이었던 사람으로서 전략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대한민국 시대에 들여와서는 新羅의 삼국통일이 무슨 못할 짓을 민족한테 저지른 것인 양 생각하도록 하는 역사교육이 북한 세력과 일부 철없는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바람에 金庾信은 망각 속에 더 깊게 묻혀졌다. 교보문고에 가면 링컨 전기는 많지만 金庾信 전기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군(群)에 그의 이름은 아예 후보로 오르지도 않는다. 하인에게는 영웅이 없다라는 말이 있고 선지자(先知者)는 고향에서 핍박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하인은 하인 수준의 눈밖에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고향은 영원히 그러한 선지자를 필요로 하는 후진국이기 때문이다.
  
  독일통일의 원훈 비스마르크 전기가 한 권도 없는 독일이었다면 1990년의 독일통일이 이루어졌을까. 미국의 통일대통령 링컨을 저주하는 나라가 강대국이 되었을까. 金庾信이 당면했고 직시했으며 고민했던 통일의 문제가 이제는 구호나 정책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 그 행·불행과 직결되는 주제로 등장해 있는 지금에 와서도 金庾信과 삼국통일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寶庫)를 옆에 두고도 발로 차고만 있는 꼴이다. 기자는 한반도 통일에 정책적인 참고로서는 독일통일만한 것이 없고 상상력과 의지력을 자극하는 자료로서는 신라통일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金春秋의 평화공존 대 金庾信의 對唐결전
  
  唐이 신라를 도와서 백제와 고구려를 친 것은 신라에 대한 자선사업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백제와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까지도 먹겠다는 전략을 깔고 있었다.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唐의 소정방(蘇定方)은 백제에 군영(軍營)을 두고 신라까지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신라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다미공(多美公)이란 사람이 唐과 싸울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신라 사람을 백제사람으로 변복(變服)시켜 唐나라 군인들을 상대로 도둑질을 하도록 하면 당이 공격할 것이고 이를 기회로 삼아 당과 한판 붙어 쫓아내자는 발상을 내어놓았다. 태종무열왕은 {당이 우리를 도와서 백제를 망하게 해주었는데 우리가 그런 식으로 당과 싸운다면 과연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라고 했다. 金庾信이 나섰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우리가 위기를 당하여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겠습니까}
  
  蘇定方은 이런 결전의지를 알고는 백제 의자왕과 그 신하들, 그리고 군사 2만 명을 데리고 唐으로 돌아가 고종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어찌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다. 蘇定方이 답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같이 하니 비록 나라가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간단한 일화에는 오늘 우리가 통일과정에서 응용할 수 있는 원리가 다 들어 있다. 김춘추(金春秋), 즉 태종무열왕과 金庾信은 통일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왕은 당을 [우호적인 강대국]으로 보는 입장에서 이 우방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어한다. 金庾信은 당을 [우호적인 적대국]으로 보고 있다. 백제를 당의 영토로 내어주려고 한다면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인처럼 모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을 결심한 마당에는 약해보인다고 다리를 밟는 주인을 물어뜯지 않고는 나의 자존과 나라의 자주를 지킬 수가 없으니 [우리의 생존권을 수호하는 범위 안에서는 당과의 제한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우리도 지금 통일을 두고 똑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 金春秋식의 평화공존 노선과 金庾信식의 흡수통일 노선이 그것이다. 前者의 목표는 휴전선을 평화협정에 의거하여 사실상의 국경선으로 대체한 다음 전쟁 없는 상태에서 잘먹고 잘 살자는 생각이다. 이런 사람들은 통일비용을 강조하고 평화를 앞세워 흡수통일론을 반박하며 민족애를 앞세워 북한에 대해서 무조건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 논자(論者)들은 대체로 金日成 부자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회피하며 북한을 우리 헌법과 국가보안법이 규정하고 있는 反국가단체가 아닌 사실상의 국가라고 생각한다. 우방국인 미국과 일본보다도 북한당국을 앞에 두는 北美, 北日이란 표기를 한다. 이것은 바로 미국과 중국이 원하는 논리이다. 즉, 한반도의 현상유지이다.
  
   적을 속이려다가 자신을 속이다
  
  후자(後者), 즉 金庾信식 흡수통일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1970년대에 우리가 평화적인 체제경쟁으로 金日成 집단을 압도하기 위해서 하나의 시간 벌기로 마련했던 평화공존책(策)은 이제는 상황의 변화로 폐기되어야 하고 상당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흡수통일로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현상 타파 노선을 방해하는 미국에 대해서도 비록 우방이지만 무조건 추종해서는 안되고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에 대한 경제적 인도적 지원도 북한 체제를 약화시킨다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4者회담도 중국과 미국이 통일과정에 개입하는 통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論者들은 대체로 金日成 부자를 민족의 원수라고 생각하며 美北, 日北이라 표기한다.
  
  우리 정부의 노선이 현상유지, 즉 평화공존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현상타파, 즉 흡수통일을 겨냥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對北정책의 목표에 대해서 국민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는 이 점이 바로 우리의 최대 약점인 것이다. 金庾信이 對唐결전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독불장군처럼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의 노선을 지탱할 만한 내부의 단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蘇定方이 말한 대로 작지만 안으로 똘똘 뭉쳐 있는 신라는 고슴도치와 같아서 아무리 세계 최대의 제국이라 하더라도 집어삼키려면 입이 터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대다수가 {흡수통일 이외에 무슨 방법이 있나}라고 말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러나 국가 지도부가 이런 국민들의 여론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데서 일종의 국론분열이 시작되었다. 金泳三 대통령은 후보시절에 관훈클럽 토론회에 나와서 한 질문자가 {金日成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평가를 유보하겠다}고 한 사람이다. 그는 정말로 金日成이 죽었을 때도 평가를 유보하여 조문론(弔問論)에 허점을 보였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우리는 흡수통일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말했다. 물론 이 말은 북한당국을 속이기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국민까지도 속이는 효과를 불러왔다. 통일처럼 국민 개개인의 삶이 걸려 있는 문제에까지도 사소한 외교적 게임에서나 써야 할 애매한 언사를 사용하면 국민의 합의를 깨게 되고 국민의 열정을 동원해야 할 때 깨진 쪽박처럼 물이 새게 되는 것이다. 기자는 최근 어떤 비공개 통일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한 통일원 간부가 {우리의 통일정책은 흡수통일이 아니다. 독일통일을 흡수통일이라 해서 그런 표현을 쓰는 것 같은데 독일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니라 동독이 무너져버린 것을, 또 동독 사람들이 스스로 서독 체제를 선택한 것을 서독이 받아주어서 생긴 통일이다}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다른 학자는 또 {독일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니라 합류통일이라 불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흡수통일론을 꺼내면 북한과 親北세력들이 공격하고 나서니까 구차하게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통일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흡수통일이다. 동독이 내부로부터 무너지도록 서독은 수십년간 조용하고 끈질기게 공작해왔다.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는 서독의 헌법조항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서 동독 군대가 해산되었다. 그러함에도 굳이 이 서독의 통일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독일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여 친북세력의 비판을 면해보려고 하는 이 천박한 思考. 이런 변명의 논리에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對北정책을 지휘하고 있는 한 金庾信을 무덤에서 불러내지 않고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분위기의 나라, 흡수통일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에서 쾌감을 얻어내려는 변태적 지식인이 엘리트 행세를 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고난과 희생이 동반되는 통일의 의지가 생성되겠는가?
  
출처 : 월조
[ 2003-07-02, 17: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