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제거계획 - 52년6월초의 육본심야회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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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제 개헌 추진 세력의 정비
  
  임시 수도 부산의 거리는 시끄러워졌다. 52년 1월에 제1차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된 뒤부터 「백골단」「땃벌떼」 「민중 자결단」등 폭력 단체들이 등장. 『민의를 어기고 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킨』 야당 국회 의원 규탄 시위를 계속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이용문 장군이 선우종원씨 집에 나타난 52년5월14일은 이처럼 어수선할 무렵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때 직선제 개헌작업을 밀고나갈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책략의 대가인 장택상을 총리로 임명한 데 이어 국방장관을 이기붕에서 신태영으로 바꿔치웠다. 당시 국방부 제1국장 최경록씨(현재 주일 대사)에 따르면 이기붕 장관은 『계엄령을 선포하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견에 반대했었다고 한다.
  
  이기붕 장관과 이종찬 총장은 절친한 사이로 두 사람의 우정은 비록 가는 길은 달랐지만 4·19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말년의 병약한 이기붕과는 달리 이 때의 이기붕은 깔끔, 청렴, 강직한 사람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이승만은 이어서 내무장관에 직선제 개헌의 주체세력인 원외 자유당의 부총재 이범석, 치안국장에 문봉제를 새로 임명했다. 노회한 이승만은 장택상-이범석-신태영-문봉제 라인을 통해 군과 행정·경찰력을 동원, 직선제 개헌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당시 육군본부는 대구에 있었다. 부산의 정치 정세가 어지러워지면서 이곳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이종찬 총장 비서실장이었던 안광호씨(전 대사·현 동강실업회장)는 이렇게 말한다. 『벤 플리트 8군 사령관은 그 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대구에 내려와 이종찬 총장을 만나곤 했다. 벤 플리트는 아이스크림을 무척 즐겨 먹었는데 이 총장을 방문할 땐 꼭 한 상자씩 갖고 왔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총장은 정치 파동에 대한 미국측의 기본 입장은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유진산 등 야당 의원들과 이기붕도 자주 이 총장을 찾아왔다. 자기 쪽으로 포섭하려는 움직임인 듯했으나 이종찬 총장은 워낙 강직한 분이었다』
  
  이종찬 중장은 당시 37세로 이용문 준장과는 동갑, 박정희 대통령보다는 한 살이 많았다. 대한제국 외무 대신 이하영의 직손자로 전형적인 서울 문안의 명문 출신이었다. 일본 육사49기로 졸업. 남방전선의 선박 부대 참모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때 소좌였다. 국군에는 늦게(48년) 들어갔다. 일군에서 근무한 데 대한 근신의 뜻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총장도 어렵게 여긴 박정희 대령
  
  지난해 예비역 중장 강문봉씨는 「전시 한국군 주요 지휘관에 관한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53명의 예비역 장성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채병덕, 정일권, 이종찬, 백선엽 등 전시 육군 참모총장 네 명의 지도력을 평가하도록 한 내용이었다. 여기서 「인격」면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은 것이 이종찬 장군이었다. 책임감·정직성·진실성·충성심·독립심·청렴성·상식·교양·자신감·도덕성·신앙심 등이 그의 인격적 특징으로 분석되었다.
  
  고매한 인품의 강직한 장군으로 인상박혀 있는 이종찬 장군을 『시류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많다. 당시의 많은 젊은 장성들과는 달리 그는 권력이나 돈으로부터는 초연하여 개인적인 약점이 없었다. 풍부한 상식에서 우러나오는 달변은 한번 말문을 열면 몇 시간이나 계속돼 부하들을 압도하기도 하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청렴·달변·풍부한 상식은 군장성 사이에서 그의 도덕적 권위를 더욱 높여주었다. 부하들은 그를 매우 어렵게 대했다.
  
  다만 이용문과 박정희만은 이종찬을 당당하게 대했다고 당시 작전국 편제과장이던 이근양씨는 말한다. 『그때 군 장성들 사이에서 「인물」로 꼽히고 있었던 사람은 이종찬·김백일·원용덕·정일권·강문봉·이용문 정도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김백일과 이용문 장군이 특히 인기가 높았다. 대인관계에 능수능란한 이용문 장군은 총장을 친구 대하듯 했고 할말을 다했다. 그렇다고 무례했던 건 아니다. 박정희 대령은 과묵, 당당한 태도와 조리정연한 발언으로 이 총장을 대했는데 이 총장도 비록 후배이지만 그를 어렵게 여기는 것 같았다.
  
  당시 육본 참모진의 분위기는 순수하면서도 명랑했다. 이용문 장군이 그런 분위기를 창출하는 데 공이 컸다. 무엇보다도 그는 쾌활했다. 미군사 고문단 사람들과 만날 때도, 비록 영어는 잘 못했지만 그렇게 의연할 수가 없었다. 그는 통역을 참석시키지 않고 늘 옆방에 있도록 했다. 고문과 이야기할 땐 무조건 「오케이」 「아이 시」였다. 그렇게 얼렁뚱땅하여 고문을 돌려 보낸 다음엔 옆방에서 통역이 엿들으며 기록한 대화 메모를 보고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식으로 결정 통보를 하는 거였다. 시간절약도 되고 체면도 지키는 수법이랄까?
  
  나는 이 장군이 가슴패기에 달린 상의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이상하게도 빨리 꺼내는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비결을 물었더니 이 장군은 포키트 덮개 단추를 가리켰다. 가만히 살펴보니 끼워진 단추가 아니라 끼워진 것처럼 달아놓은 눈가림 단추였다. 장군이 복장 위반을 해선 안 되니 그런 식으로 시간 절약을 한 것이었다. 그 북새통 속에서도 이 장군은 사냥을 나가곤 했다. 짐승을 잡는 방법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늘 두 자루의 연발 엽총에다가 탄알을 꽉 채우고 하나는 부관이 들고 따라오게 했다. 짐승이 나타나면 조준도 않고 그 근방에다가 집중 사격을 하고 얼른 부관으로부터 총을 받아 또 왕창 다 쏘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한 방쯤은 명중하기 마련이었다』 이 무렵 이용문 장군이 정치 정세에 어떤 복안을 갖고 있었는지를 아는 데는 5월14일 밤에 있었던 선우종원씨와의 면담 이외엔 별다른 자료가 없다. 다만 앞 뒤 진행 상황과 연관시켜 추리를 해볼 수는 있다.
  
  『뒤엎어버릴까?』
  
  당시 작전국에는 이용문 장군 밑에 박정희 대령을 비롯, 정래혁(민정당 대표위원) 유원식(5·16 뒤 최고회의 재정위원장으로 통화개혁의 주역) 유병현(주미 대사) 이근양 등 쟁쟁한 과장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이용문 준장과 박정희 대령이 벌이는 술자리에 가장 자주 참석했던 이는 이근양 중령이었다. 『정치파동으로 시끄럽던 어느날 우리 세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용문과 박정희 두 사람은 갑자기 술김에서 그러는지 「2개 대대만 끌고 부산 내려 가면 확 뒤엎을 수 있겠지?」하고는 껄껄 웃는 것이었다. 내가 「군인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하면서 끼여들자 두 사람은 「아니, 농담이야」라면서 또 한 바탕 웃었다. 두 사람은 술자리에서도 나라 걱정을 많이했다. 그런 시국관이나 국가관에서는 생각이 서로 잘 들어 맞았다』
  
  당시 이용문 장군은 작전국장이란 핵심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 정세에 대해서도 귀가 밝을 수밖에 없었다. 정보국장 시절의 부하들이 정보기관의 요소요소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정보도 꽤 많았다. 정치파동 때의 인물들을 아마도 가장 많이 면담한 사람일 「광복20년」의 저자 김교식씨(극작가)의 증언-.
  
  『당시엔 대략 세 그룹의 정보 인맥이 있었다. 하나는 육군 정보국 출신들로써 작전 정보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용문,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ㅈ씨, ㄱ씨 등 민간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둘째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같이 방첩 수사 정보 업무에 종사하면서 국군의 통수계통을 무시하고 이승만과 직접 연결되어 권력에 봉사하던 무리다. 이들 중에는 일제 시대에 독립 투사들을 때려잡던 헌병 보조원이나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 많았다. 작전 정보 인맥이 직업 군인들이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세 번째 무리는 미군 정보 기관을 위해 일한 한국인들이다.
  
  당시 한국에는 미군 CIC, 유엔군 사령부 정보처, 8군 정보처, CIA, 대사관 등 여러 갈래의 미 정보 기관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런 기관의 한국인 정보원들은 여러 개의 여권을 갖고 다니면서 거의 치외법권적인 정보 수집 활동을 벌였다. 초기엔 작전 정보 계통 사람들도 특무대로 가서 근무하기도 했다. 정보 업무 종사자들은 어딜 가든지 그 업무의 성격상 늘 자주 만나고 연락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그들 특유의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5·16을 통해 결국 작전 정보 출신의 인맥이 대권을 잡았고 4대 의혹 사건 등의 공작을 통해서 그 역기능도 드러내게 되었다』
  
  미군에 고무된 당돌한 반항
  
  계엄령선포에 대비, 신태영 국방장관은 부산에서 대구 육군본부로 전화를 걸어 병력 차출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부산엔 중대 규모의 병력밖에 없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은 6·25가 터진 직후 한국군이 거의 붕괴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에 넘겨버렸기 때문에 국방부장관이 미군을 거치지 않고 육군본부에 병력 동원을 명령하는 것은 지휘 계통 위반이 되는 형편이었다. 신태영 장관의 전화 받기를 육본에선 서로 피했다고 한다. 당시 작전국 편제과장 이근양씨의 증언을 다시 듣는다.
  
  『총장도 참모차장도 자리를 피했고 이용문 국장마저 동해안 일선 시찰을 명목으로 하여 출장가 버렸고 박정희 작전차장도 아프다고 결근했다. 자연히 선임 과장인 내가 장관전화를 받게 됐다. 후방의 2개 대대를 부산으로 보내라는 이야기였는데 과장인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대구의 육본은 야당 제압에 쓰여질 것이 확실한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했다. 이것은 이종찬 총장의 의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강직한 장군이라도, 작전권 문제 같은 변명의 구실이야 있었지만, 독단으로써 국군의 최고통수권자인 이승만 정권에게 이처럼 정면 도전할 수 있었을까?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반역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명령거부였다. 이 대통령은 실제로 『반역이다』고 규정하기도 했다. 당시 육본에서 이종찬 장군을 모셨던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이 총장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군의 정치불개입에 대한 그의 평소 소신에다가 미군의 확고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산 정치 정세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은 그것이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자세였다. 누가 대권을 잡든지, 어떻게 잡든지, 그건 부차적 문제였다. 이런 뜻이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나 벤 플리트 8군 사령관을 통해 이종찬 장군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미군이 이승만의 정치 조작(操作)에 반대하고 있다』는 인식이 대구 육본의 당돌한 태도를 크게 고무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지난해 강문봉씨는 이런 말을 했었다. 『그 항명 사건이야말로 두고두고 시비거리가 될 것이다. 국가 원수의 병력 동원 명령을 이 총장이 스스로 판단하여 거부한 것은, 비록 야당 정치인으로부터는 찬사를 받았지만 그 자체가 너무 정치적인 월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전쟁에도 바쁘니 정치파동에 군대를 동원하지 말고 경찰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식으로 명령의 수정을 건의하는 것은 참모총장의 의무이지만 국가 주권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그 직권 아래서 내린 명령을 부하가 거부한 것은 결코 잘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라가 올바로 되려면 그런 일이 칭송의 대상이 돼서는 안될 것이다』 여태까지는 이종찬 장군의 파병 거부가 찬사만 받아 왔으나 강문봉씨와 같은 이견도 있음을 우리는 감안할 필요가 있다.
  
  원용덕장군의 친위 쿠데타
  
  이승만정부는 1952년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을 비롯한 전남북, 경남의 23개 시군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일부 지방에서 계엄 해제로 공산 도배의 출몰이 빈번하여 후방 치안을 교란하고 민심을 소란케 하고 있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계엄 사령관에는 육군 중장 이종찬으로 하되 영남지구 계엄 사령관에 육군 소장 원용덕을 임명한다』 정부가 계엄 선포의 한 이유로 삼은 것은 그 며칠 전 부산 근교의 금정산에서 일어났던 공비 출몰 사건이었다. 고 서민호 의원(국회 부의장 역임)은 이 사건이 김창룡 특무부대장에 의해 날조된 것이란 증언을 생전에 한 적이 있다. 중죄수를 불러 내어 공비로 위장시키고 사살했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반해 당시 내무장관 이범석은 회고록에서 「재야 세력의 중진이 미국 대사관에 가서 금정산 사건은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오늘에도 그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고 있다」고 썼다. 한 사건을 보는 눈은 이렇게 다르고 지금에 와선 그 진위를 가릴 수도 없다. 그러니까 「역사는 과거 사실의 복원이 아니고 오늘에서의 해석이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5월26일 부산의 계엄군은 임시 의사당으로 출근하는 국회의원 통근차가 검문에 불응한다고 47명의 의원이 탄 이 차를 크레인으로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들 중 서범석 의원 등 5명은 국제 공산당 사건 혐의로 즉각 구속되었다. 2일엔 곽상훈 의원 등 6명이 같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 11명은 내각 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던 중심 세력이었다. 정부가 발표한 사건 내용은 전부 맹랑하게 조작된 것이었는데 반공 검사에다가 치안국 수사·정보 과장을 지낸 선우종원씨를 적색 주모자로 지목한 데서 이 사건의 희극성이 엿보인다. 선우씨는 석달 동안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에게 밀항선을 알선해준 것은 미8군 G2(정보처)였다고 한다.
  
  이승만이 계엄군과 경찰을 동원, 야당 의원들에 대한 일대 검거 선풍을 벌이면서 사태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국회의원 통근차가 크레인에 끌려간 26일 오후 4시 대구 육본 회의실에서 열린 참모회의 분위기는 노기등등했다. 고 이종찬 총장의 생전 회고담은 이렇다. 『각 참모들이 브리핑을 하는데 김종면 정보국장이,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공병대 크레인이 끌고 갔는데 쿠데타가 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군이 정치에 이용되어선 안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참모들은 자기들끼리 좀더 구체적인 회의를 한 뒤 보고하겠다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나니 각 부대에 보낼 훈령을 만들어 놓았다고 보고해서 상황실에 가 보니 칠판에다가 「군대는 동요치 말고 본연의 자세로 국토 방위의 신성한 임무만 다하라」는 요지의 훈령이 씌어져 있었다』
  
  「육군 장병에게 고함」이란 유명한 훈령217호를 낳은 이 참모회의 참석자는 정보국장 김종면, 인사국장 김용배 준장, 계엄민사부장 이호 준장, 헌병사령관 심언봉 준장, 법무감 손성겸 준장, 국수국장 대리 백선진 대령 등이었다. 이용문 작전국장은 무슨 일 때문인지 빠졌고 박정희 대령이 대신 참석했다. 김종면씨(전 서울신문 감사)의 기억에 따르면 회의는 게엄령 선포를 친위 쿠데타로 규정하는 분위기였고 이승만과 원용덕에 대한 감정이 원색적으로 노출되었다고 한다. 한때 만군 계열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원용덕이 상관인 이종찬 총장을 무시하고 이승만의 수족이 되어 놀아나는 데 30대 청년 장성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게다가 대통령이 군 조직법에도 없는 육·해·공군 총사령관이란 임명장을 친필로 써 원용덕에게 주었다는 것이 그들을 더욱 자극하였다. 『군이 이번 사태로 정치에 간여하게 되어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됐다』고 아주 예언적인 걱정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과묵한 박정희 대령만은 한 마디도 않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김종면씨는 『그 때의 분위기는 조금도 사심이 없었다. 일선에서 장병들이 피를 쏟고 있는데 후방에선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데 대한 순수한 분노가 우리의 행동을 지배했다』고 말했다.
  
  이종찬 총장 구원한 벤 플리트
  
  훈령 「육군 장병에게 고함」이 예하 부대로 내려간 5월27일 오후 정례 참모회의를 하고 있는 이종찬 총장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이 장군, 할 이야기가 있으니 부산으로 내려오게』 격한 어조였다. 참모들은 혼자 내려가면 체포될 위험이 있다면서 김종면·심언봉 준장을 수행케 하였다. 한편으로는 벤 플리트 장군에게 이런 사정을 알려 도움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이종찬 장군은 두 참모를 데리고 8군 사령관 전용 열차편으로 부산에 내려갔다. 부산역에는 미 대사관 승용차가 대기중이었다. 이 승용차로 송도의 대사관 직원 관사로 가서 미해군 무관과 접촉한 뒤 식사를 하고 대사관 승용차 편으로 서구 부민등 임시 경무대로 갔다. 이 총장은 「어쩌다가」벤 플리트 장군과 같이 경무대에 들어가게 됐다고 했다.
  
  이 대통령의 두눈은 충혈돼 있었고 안면 근육은 씰룩거렸다. 이 총장에게 대통령은 『왜 나라에 반역하느냐?』고 추궁했다.
  이 총장은 『각하! 작전권을 가진 유엔군 사령관의 동의 없이는 군대를 이동할 수 없다는 것,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자네가 날 훈계하나?』고 화를 냈는데 이쯤 해서 벤 플리트 장군이 말렸는지 노 대통령은 다소 누그러졌다. 이종찬은 미리 써 간 사표를 냈다.
  대통령은 『아직 자네만 믿네』라면서 사표를 돌려 주고 오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오후에는 이 총장, 벤 플리트, 원용덕 장군이 참석했다. 대통령은 이 총장에게 『내가 잘못했든 자네가 잘못했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물었다. 이 총장은 계엄 업무를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 옆에 있던 원용덕 장군이 반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써준 영남지구 계엄 사령관 임명장을 보이면서 계엄 사항은 자기가 맡아야 한다고 우겼다. 벤 플리트 장군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한국의 정치엔 관여할 수 없지만 작전권이 자기에게 있는 이상 부산에 병력을 투입할 순 없다』고 했다. 『저녁 무렵 관저를 나올 때 원용덕 장군이 나에게 병력 동원도 안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길래 벤 플리트 장군에게 물어보라고 했어요. 벤 플리트 장군은 잘라서 거절하더군요』(이종찬 장군의 회고·「민족의 증언」제4권).
  
  이종찬 장군이 난국을 모면하는 데 벤 플리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상과 같은 장면에서 역력히 드러났다.
출처 : 월조
[ 2003-07-02, 17: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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