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현지 특파취재 -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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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고리대금하는 동척(東拓) 출신
  
  한국 철수 일본인들은 귀환 뒤 같은 일본인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식민지에서 온갖 못된 일을 하다가 쫓겨나왔다』는 손가락질을 면하려고 한국 거주 사실을 숨기는 사람도 많다. 도쿄제대(帝大) 출신의 고급 관료들도 인사록 등 공개되는 자료에는 조선 총독부 근무 사실을 생략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한협회의 이사가 된 모씨가 협회에 제출한 이력서에 조선 총독부 경력을 써넣지 않아 비난을 받기도 했단다.
  
  경성제대를 나와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마에다 주한대사도, 한국인의 감정을 의식해서인지, 총독부 경력을 공식적으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신분 노출을 가장 꺼리는 사람들은 조선 수탈에 있어서 일제의 도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출신들일 것이다. 일한협회에 아직도 가입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모임은 있으되 비밀로 회동한다고 한다. 일한협회의 한국어·한국사 강좌에서 강사역을 맡고 있는 재일동포 차병돈씨(75)의 말―.
  
  『동척(東拓) 출신들의 모임이 있다기에 총독부 고관 출신의 소개장을 갖고 찾아갔지요. 긴자의 어느 빌딩이었는데 사람을 굉장히 꺼리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한국행 관광단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권유하러 갔는데 안 가겠다더군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동척 출신들이 모여서 고리대금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내가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사무실이라고 그래요』 패전 때 동척 경성지점장(당시 본사는 도쿄)으로 있었던 이노마다 마사이치(猪又正一)는 우방협회를 통해「나의 동척 회고록」이란 책을 8년 전에 냈는데 지금은 통 소식이 없다고 한다.
  
  『조선에서의 수난 잊지 말자』
  
  일본인들의 기록정신은 많이 알려진 그대로다. 무르만스크 상공에서 KAL기가 피격 당했을 때도 메모하고 사진 찍고 한 것은 일본 승객 뿐 이었다. 기록을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사물을 장기적으로 보느냐, 단기적으로 보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이 당장 돈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재앙이 될 때도 있는데 그래도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미래와 역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후예들이 우방협회란 조선통치사 연구단체를 만들어 그들의 발자취를 출판하고 있는 것도 과거에 대한 책임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집념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기록이란 건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질 물증이다. 우리 민족이 말로만, 감정으로만 일제의 착취에 열을 내고 있는 동안 총독부 후예들은 착실하게, 우리의 주장을 뒤엎을 물증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타일 위에 사인펜으로 쓴 것 같은 우리의 기억과 감정을 씻어버리고 지나간 뒤 남는 것은 타일을 파고 새긴 저들의 기록일 것이며 역사는 이 기록만으로 일제 36년을 심판할지 누가 아는가. 우리는『일제 36년을 잊지 말자』고 하지만『패전 뒤의 고난을 잊지 말자』면서 한국 철수의 기록을 방대한 저작으로 남긴 것은 일본인이었다.
  
  내가 가와사키역 근방에서 만난 모리타 요시오씨(森田芳夫)가 바로 그 사람이다. 72세의 이 노인은 서울 성신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로 있다. 여름방학을 틈타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가 우방협회의 지원을 받아 쓴 「조선 종전의 기록」(1964년 출판)은 1038쪽에 달하는 대작이다. 패전 뒤 철수까지의 한국 사정을 이해하는 데 뺄 수 없는 자료로 이미 고전이 돼 있다. 몇 년 전에는 이 책을 쓸 때 모은 자료를 세 권의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었다. 아주 얌전한 인상을 주는 모리타씨는 경성세화회 호즈미 회장의 한마디 말이 그를 이 필생의 작업에 몰두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모리타군, 장래를 위해서라도 철수관계 자료를 모아 두게』 북새통 속의 서울에서 이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감동이 있었다는 거다. 모리타씨는 그 뒤 19년 동안 1000여명의 증인들을 면담, 이 책을 냈다.
  
  『저 혼자 힘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수많은 철수민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정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사망자, 수형자 명단을 깨알같이 적어 훈도시 속에, 또는 구두 밑창 속에 감추어 갖고 왔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정부에게 무엇인가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 혼란 속에서도 그렇게 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알리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일제의 한국인 착취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한국인·미국인·소련인·공산주의자들로부터 당한 일들과 일본인들의 의연한 대응과 깨끗하고 질서 있었던 철수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왜 한국엔 귀환의 기록이 없나?
  
  모리타씨는 군산에서 났다. 합병 전에 벌써 한국에 건너왔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경성제대를 나왔으며 그의 아내도 한국에서 난 일본인이다. 경성세화회에서 철수 사무를 보다가 귀환, 일한 협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외무성에 들어가 패전 뒤의 철수관계 조사원으로 일했다. 그 뒤엔 극동아세아과에서 일하다가 한일국교 정상화 1년 전부터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기 시작, 지난 1975년에 참사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국 생활을 했다. 퇴직 뒤 바로 성신대 교수가 되었으니 그의 한국 생활기간은 일본 생활의 세배나 된다.
  
  『책을 쓰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역시 힘에 의한 지배는 좋지 않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억지로 합쳐졌지만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할린에 있는 한국인 문제, 한국에 남은 일본 여자들의 문제 등등 결별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항복을 결정한 어전회의가 8월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8월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시기를 놓치고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월9일 어전회의에서 결사 항전의 주장이 이겼다면 소련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미군은 인명손실을 막으려고 상륙을 포기, 한반도는 적화됐을 것입니다.』
  
  모리타씨는 『우리 같은 식민지 세대는 패전으로 발판을 잃고 큰 손해를 보았다』면서 『그래도 한국이 좋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50년 전 친구가 있는데, 일본에는 어딜 가도 50년 전 친구끼리의 모임은 없다는 것이다. 모리다씨는 일본에서 잃은 근거지를 전후의 한국에서 다시 찾은 예이다. 모리타씨는 나에게 『왜 한국에는 귀환의 기록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추궁같기도 했다. 나는 도쿄 근방 사이마다현에서 1945년 10월에 났고 다음해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 패전 철수의 기록은 있으되 승전 귀환의 기록은 없다―유행가는 있지만.
  
  안재홍의 도량 못 잊어하는 이들
  
  모리타씨는 이것만은 꼭 기사에 써달라면서 설명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감격에 못이겨 눈물을 흘린 자료가 있습니다. 8월15일 오후 3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안재홍 선생(건준 부위원장)이 한 연설 대목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자주 호양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앙된 그 순간에도 이런 차분하고, 이성적인 연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연설 덕분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수난을 면했습니다』 관동대지진때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와 해방때의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를 비교하면 우리의 도덕적 우월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국제관계에서는 그러나 힘과 줏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도덕적 우월성은 자칫하면 「쓸개빠진 선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총독부 인맥의 뿌리는 조슈 군벌
  
  초창기에 한국을 말아먹은 일본인 가운데는 야마구치(山口) 현 사람들이 많다. 시모노세키 항구 주변의 이 작은 서해안 지방은 일곱명의 역대 수상을 배출했다. 이토(伊藤博文), 데라우치(寺內正), 가츠라(桂太郞), 야마모토(山本有朋), 다나카(田中義一), 그리고 전후의 기시 및 사토 형제 수상이 그들이다. 이들 수상 가운데 이토와 데라우치는 통감과 총독으로 한일합병의 주모자였다. 기시와 사토는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었다.
  
  이 밖에도 이노우에 공사, 하세가와(長谷川好道) 2대 총독, 아카시(明石元二郞) 초대 헌병 사령관등이 야마구치 현 사람이다. 야마구치 현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는 조슈번(長州藩)으로 불리었다. 도쿠가와 막부에는 반항적인 지방이었다. 이 조슈의 무사들이 지금 가고시마(규슈 남쪽)에 있던 사쓰마번의 무사들과 손잡고 일으킨 친(親)천황 혁명이 메이지 유신이었다.
  
  그 뒤 수십년 동안 야마구치와 가고시마 출신들은 일본의 정계와 군을 지배했다. 수상은 두 지방 출신이 교대로 했고, 육군은 야마구치파가, 해군은 가고시마 인맥이 장악했다. 노일전쟁 때 발틱 함대를 격파한 도고 원수도 가고시마 사람이었고 당시의 육군대신은 데라우치였다.
  
  데라우치는 9년 동안 육군대신을 지내며 육군을 철저하게 지배, 한일합병 직전엔 이토를 능가하는 정계 실력자였다. 과격한 성격의 데라우치는 심복인 동향 사람 아카시 소장을 헌병사령관겸 총독부 경무총감으로 임명, 이른바 헌병 통치,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데라우치는 1916년 봄 조선 총독부 청사 건축 기공식을 올렸고 그해 6월 일본총리로 임명돼 한국을 떠났다가 그 3년 뒤 죽었다.
  
  데라우치의 아들인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 대장도 아버지를 닮아 과묵, 과단성 있는 사람이었다. 1936년 2월26일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직후 성립된 히로다 내각에서 육상(陸相)이 된 그는 군부내의 황도파를 일소하는 숙군작업을 지휘했다. 이 황도파는 그의 아버지가 이끌었던 조슈군벌에 대항하여 생긴 것이었다.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남방군 총사령관이었다. 임파르전쟁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이 전쟁을 위해 「콰이강의 다리」란 영화로도 유명한 타이의 태면(泰緬) 철도 부설공사에 연합군 포로들을 마구 동원, 수많은 사망자를 내게 했다. 전인미답의 밀림을 하루 1㎞씩 뚫고 나간 「철도사상 유례가 없는 세기적 기록의 돌관공사」에서 일본은 1000명, 포로 1만3000명, 노무자 3만3000명 등 모두 4만7000명이 죽었다. 포로는 네명에 한 명, 노무자는 두 명에 한 명 꼴로 죽었다.
  
  여기에 배속되었던 한국인 군속들은 연합군 포로들의 감독을 맡았다. 전후 많은 한국 군속들이 「포로 학대」란 죄명으로 전범 재판에 걸려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데라우치 부자와 한국과는 무슨 원수가 졌는지 모르겠다. 데라우치 히사이치도 1946년 싱가포르 감옥에서 병사했다. 3·1운동 뒤 한국에 부임, 「문화 정치」란 유화 정책을 추진했던 해군 출신의 사이토(齊藤實)총독은 그 뒤 총리대신까지 지냈다가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2·26사건 때 반란군들은 그 때 내(內)대신이던 사이토의 집을 덮쳤다. 사이토는 침실에서 총을 맞았다. 아내가 빈사상태의 사이토를 감쌌다. 반란군들은 아내의 몸 밑으로 총을 들이밀어 난사했다. 뒤늦게 뛰어든 한 사병이 「나도 쏘게 해달라」고 했다. 이 사병이 장교의 허락을 받고 또 몇 발을 더 퍼부었다.
  
  전후에도 건재했던 우가키와 아들
  
  6대 총독 우가키는 5년 동안 한국을 통치, 대륙경영의 병참기지로 만들어놓고 퇴임, 곧 차기 총리지명을 받았다. 우가키는 군 안에서는 화평파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중국침략을 추진하던 군부대에서는 우가키의 조각에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는 방법으로 거부권을 행사, 결국 우가키는 총리가 되지 못했다.
  
  우가키는 전후 미군 점령당국과 협조, 공직 추방이 해제된 뒤에는 85세에 참의원에 출마, 전국구 최다득표로 당선되어 가장 나이 많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무렵 일한협회의 고문으로 이름을 빌어 주기도 했다. 1956년에 88세로 죽었는데 40세나 젊은 세 번째 아내가 임종했다. 그의 장남 우가키 가즈오는 평범한 생애를 택했다. 와세다대학을 나와 미쓰이 물산, 도요 레이욘의 간부로 있다가 지금은 유통문제 컨설턴트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70세이다.
  
  창씨개명 등 민족 말살정책의 추진자였던 미나미(南次郞) 7대 총독은 총독 부임 전엔 조선군 사령관, 육군 대신, 관동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강경파 참모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만주사변을 확대시킨 책임이 크다. 전후 도쿄 재판에서는 A급 전범으로 단죄되었다. 법정신문에선 검사를 무시하는 듯 『모른다』『기억이 안난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종신형 선고를 받고 복역중 병으로 가출옥, 1955년 12월에 죽었다. 81세.
  
  8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총리 대신으로 영전했다. 도오조 히데키의 뒤를 이은 그는 군부를 누르고 전쟁 수행의 주도권을 잡으려했으나 실패했다. 장개석 정부와의 휴전 협상을 추진했으나 역시 실패, 총자직. 전후에는 A급 전범으로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복역중 1955년 11월에 죽었다. 75세.
  
  9대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한국인 대학살이 있었던 관동 대지진 때의 계엄사령부 참모장이었다. 1939년엔 잠시 총리대신도 지냈으며 도오조 히데키를 총리로 추천한 원로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패전뒤엔 전범재판에도 안 걸리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1953년 9월에 죽었다. 78세.
  
  조선군 사령관의 두 아들
  
  지금 일본 국회에는 조선군 사령관의 아들이 둘 있다. 한 사람은 자민당 스즈키파의 참의원 이다가키 타다시(61)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강경파였다. 이다가키 대장은 1941년에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이때는 전성기를 지났을 때였다. 한국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한 장본인이다. 술 잘하고 호탕하며 포용력이 큰 이다가키는 1929년 관동군 고급참모(대좌)로 임명되자 작전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와 단짝이 되었다.
  
  머리좋은 이시하라가 기획, 추진력 좋은 이다가키가 실천하는 식으로, 두 사람은 1931년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주모자가 되었다. 이 명성으로 1938년엔 육상, 1941년엔 대장이 되었다. 도오조는 총리가 되자 이시하라와 이다가키가 붙어 있으면 골치거리가 된다고 판단, 이시하라는 퇴역시키고 이다가키는 조선군 사령관으로 멀리 보내버렸던 것이다.
  
  이다가키는 A급 전범으로서 도쿄재판에서도 오오조 등 다른 6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만주사변 주모가 가장 큰 범죄 사실이었다. 1948년 12월23일에 사형 집행. 63세였다. 일본인들은 7명의 무덤 앞에다가 「순국7사지묘」(殉國七士之墓)란 비석을 세웠다. 이다가키의 2남인 타다시는 육사출신으로서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을 보냈다. 시베리아에서 5년간 억류돼있다가 돌아왔다. 일본 유족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살아남은 직업군인으로서 영령들에 보답하기 위해 정치를 택했다』는 그의 주된 활동은 격전지의 유골 수습과 전몰자 진혼이라고 한다.
  
  3·1운동 때 7000명이 넘는 한국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당시의 조선군 사령관 우스노미야(宇都宮太郞)의 장남이 유명한 친북한 중의원 의원 우스노미야 도쿠마다. 교토제국대학 경제과를 다닐 때부터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그는 감옥생활 1년만에 전향,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패전 뒤에는 요미우리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경제관계를 담당하기도 했었다. 국회에 진출한 이후엔 중공과 북한통으로 자처하며 이단적인 노선을 걸었다. 김대중씨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75년엔 미키 수상의 친서를 갖고 김일성을 비밀 방문한 적도 있다. 지금은 자민당을 탈당한 80세의 이 노인은 한때 아버지를 변명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한 적도 있다. 이 또한 부자 2대에 걸쳐 한국과 이상한 인연을 맺고 있는 집안이라 하겠다.
  
  『총독부의 죽음을 지켜보겠다』
  
  일한협회 사무실에는 돈도 안 받고 일하는 젊은이가 있다. 다카자키 대학 강사 미야츠카 도시오씨(宮塚利雄)다. 36세. 그는 10여년 전 한국을 여행, 처음으로 식민 통치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배웠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데서 쇼크를 받았다. 전공을 조선근대 경제사로 정했다. 1973년 경희대학 대학원에 유학, 일제시대 경제사를 공부했다. 그 뒤 단국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와 모교에서 일제시대를 가르치고 있다. 아내도 한국여자다.
  
  그는 일한협회, 우방협회 일을 하는 게 바로 살아 있는 공부라고 말한다. 노인들은 미야츠카씨를 아주 대견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70∼90대 노인들속에서 그는 아주 싱싱하게 보였다. 노인들은 미야츠카씨 같은 젊은이들이 이 협회를 이어받아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지만 2세들은 협회를 외면하고 있다.
  
  『조선 총독부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을 제가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야츠카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요즘 여기서 조선 근대사 스터디그룹을 조직했는데 학생들이 10여명 온다』고 했다. 미야츠카씨 같은, 일제 시대를 경험못한 젊은 세대가 오히려 편견없이 한국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여러 번 받았다. 조선 총독부의 후예들은 그들의 생애와 보람을 걸었던 식민통치에 대해 차마 솔직한 심경을 털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식민 통치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자기들의 지나간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는 할 수 없었다』『방법이 나빴다』는 식으로 항상 변명의 구멍을 마련해 놓는 것이다. 이들이 사라지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은 미야츠카씨 같은 세대가 일본을 이끌고, 한국에서도 「일제 세대」가 물러날 때 비로소 대등한 관계의 교류가 이뤄질 터이다. 대등한 교류는 힘과 줏대로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법이다. 약자에 대한 사죄란 연극이며, 약자에 대한 이해란 곧 동정이며 약자와 강자의 친선관계는 어차피 종속관계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총독부 후예들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의식(儀式)의 시대도 사라져야 할 때다. 논개 진혼제니, 한국인 전범 유골 수습이니 하는 속죄의식(儀式)으로서 한일 친선을 할 때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포경선이 잡아 죽인 고래들에게도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제사를 지내는 민족이다. 이들에겐 속죄 의식이야말로 최고의 변명이며, 자위이며, 속임수인 것이다. 나까소네의 방한, 경협 40억 달러, 교과서 수정도 그런 의식이 아닐까? 일본인들은 이런 의식을 너무나 진지하게 연출하는 선수들이다. 그래서 속게도 되는데, 「속죄」란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총독부 후예들이 일제 시대와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자 경고다.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사망자)
  
  이름 조선총독부 경력 귀환후 경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정무총감(고이소 총독때) 일한협회 초대회장. 중의원출마 낙선
  호즈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 식산국장. 경성전기사장 참의원 의원. 우방협회회장
  시오다 마사히로( 田正洪) 광공국장 종전잔무처리본부장. 관동축로회사사장
  하라다 다이로쿠(原田大六) 총독부 감찰과장 일한협회 전무
  야마나 미키오(山名酒喜男) 아베총독 비서설장 회계 검사원. 사무국 차장
  오쿠무라 시게마사(奧村重正) 사계(司計) 행정관리청 사무차관. 일한 협회 회장
  시라이시 무네기(白石宗城) 흥남 조선질소비료 공장장, 전무 일본질소 사장. 일한협회 회장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경학원 대제학. 경성대 교수 천리대 교수
  후루이치 스스무(古市進) 경성 부윤 무역업
  나카야스 요사쿠(中保與作) 경성일보 부사장 저술업
  호시노 기요지(星野喜代治) 조선은행부총재 일본부동산은행회장
  가마다 사와이치로( 田澤一郞) 총독고문 전후 철수민단체 합회 회장. 민족학회장
  다카미야 다헤이(高宮太平) 경성일보 사장 저술업
  이시다 센타로(石田千太郞) 평안남도 지사 이누야마 정장(町長)
  오오다케 주우로(大竹十郞) 내무국장 시즈오카 현 지사
  신카이 하지메(新具계) 사정국장 현(현) 지사
  하시모토 마사유키(橋本正之) 황해도 경찰부장 야마구치 지사. 중의원 의원
  무라야마 미치오 재무과장 야마가다 현 지사
  이토 다이키치(伊藤泰吉) 체신국장 가와고에 시장
  아베 센이치(阿部千一) 경남지사, 옥계금산사장 중의원 의원, 이와떼 현 지사
  요코미조 미쓰데루(橫溝光暉) 경성일보사장 법무성 사법법제, 조사부 고문
  유노무라 다쓰지로(湯村辰二郞) 농림국장, 조선섬유산업회장 미야기현 지사
  
  <고등 문관 시험 출신 고관의 현주소(생존자)>
  이름 조선총독부경력 귀환후 경력 현재 활동
  오오노료쿠 이치로(大野綠一郞) 미나미 총독때 정무 총감 변호사 은퇴
  마에다 리이치(前田利一) 수습 사무관 외무성 동북아시아 과장, 총영사 주한대사
  구라지마 이타루(倉島至) 평양체신국장, 함북 경찰부장 . 일한협회 나가노 지부장
  미즈다 나오마사(水田直昌) 재무국장 학습원 감사 우방협회이사
  와카바야시 마사다케(若林正武) 감포항 경비대장 임야청 장관
  야기 노부오(八木信雄) 전남지사, 총독부 보안과장 사우회(師友會) 사무국장
   일한문화교류협회 회장
  아마기 이사오(天城勳) 전북 경무과장 문부성사무관 방송교육개발센터 소장
  시라기 야스노부(白木康進) 사무관 회계검사원장 은퇴
  아다치 아타루(安達遂) 전기과장 호세이 대학 공학부 교수 교수 계속
  요코야마 고오세이(橫山幸生) 경북경찰부장 동북관구행정 감찰국장 무역진흥서비스회사 사장
  야스다 무네츠구(安田宗次) 광공국 철강과장 대장성 동경, 재무국 차장 변호사
  야마모토 야노스케(山本 之助) 총독부경제경찰 과장, 황해도 경찰부장 모리오카시장 3회 당선 변호사
  야마지 야스유키(山地靖之) 평북 지사 현(縣) 지사 닛세이(日精) 사장
  무라카미 마사니(村上正二) 총독부지방과 사무관 시즈오카현 경찰본부장 하나에 모리후사 사장
  미야사카 간코(宮坂完孝) 총독부 사무관 참의원 사무총장, 국회도서관장 은퇴
  마츠기 다카미지(松木孝道) 함남경제 경찰과장 북해도 재무국장, 사립학교 진흥회 감사 우방협회 상무
  마츠모토 소오이치(松本操一) 함남 농상부장 중부행정 감찰국장 도이(土井)임학진흥회이사
  마사이 야스유키(正井保之) 총독부지방과 사무관 경제기획청 감사관 농림수산항공협회장
  리우가사 하쿠오(立笠博雄) 총독부 노무과장 변호사, 대학강사 호세이 대학 강사
  하시다 간이치(橋田貫一) 총독부 사무관 외무성 자카르타 영사 일본기계 디자인 센터 전무
  니시다 도요히코(西田豊彦) 교통국 지방해원심판소장 해상보안청 차장. 수난구제회 이사
  다하라 미노루(田原實) 총독부 사무관 고치현 노동기준국장. 노동복지공제회 상무
  다카하시 요오지로(高橋洋次郞) 총독부 전기과기사. 주우고쿠(中國)지방,전기보안협회 이사장. 일한협회 부회장
  다카하시 히데오(高橋英夫) 평북 내무부장 고베 세관장 은퇴
  소오다 마코토(會田忠) 총독부 경비과 사무관 . 국토청 토지 감정 위원회위원
  스즈키 하루히사(鈴木治久) 총독부 상공과사무관 회계검사원 총무국장. 미츠비시중공업 항공기 사업본부장
  구라다 하루미(倉田春水) 총독부 사무관 북해도 노동기준 국장. 건설업 노동재해방지협회 전무
  에가사키 타로(江ケ崎太郞) 평북경제경찰과장. 건설성 과장. 수도권건물관리(주) 이사
  이시지마 야스오(石島康男) 함남 근로동원과 사무관. 아이치현 노동기준국장. 일본노동복지협회 이사
  이케오 가쓰미(池尾勝己) 총독부 사무관 도쿄 통산국 총무부장, 산요(山陽) 모노마 사장 스미토모화학(주) 이사
  이시즈카 규우지(石塚久司) 부산지방 철도국 부두국장 오사카 육운국장 긴센(주) 부사장
  아키야마 쇼헤이(秋山昌平) 강원도 학무과장 회계검사원 제1국장 변호사
  아베 이즈미(阿部 泉) 총독부 위생과장 아키타현 부지사, 오사카 부경찰본부장 도쿄 지도연구소 감사역
  아사무라 렌(淺村 廉) 총독부 도쿄 주재관 경제기획청 종합개발국장, 일본도로 공단이사 주택융자보증협회 이사장
  아베 다츠이치(阿部達一) 총독부 정보과장 병원 경영
  모리 히로시(森 浩) 총독부 경비과장 변호사
  하야시 가츠도시(林 勝壽) 총독부 농무과장 후생성 국장, 간사이텔리비전 회장 일한 협회 회장
출처 : 월조
[ 2003-07-02, 17: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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