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과 박정희 소령 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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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소령이 남로당 군사책(軍事責) 이재복(李在福)에게 포섭되었다가 여순반란사건 뒤 체포돼 조직을 털어놓고 살아나기까지의 이야기
  
   백선엽(白善燁)·김안일(金安一)·김창룡(金昌龍)의 연대보증으로 살아났다
   자술서를 써 軍내 조직을 다 털어놓다
   형 박상희(朴相熙)의 피살이 朴소령을 좌경화시켰다
   거물 최남근(崔楠根)중령과의 숙명적 인연
   동거 李모 여인과 당시 수사관들, 입을 열었다
  
  <1989년 12월 월간조선>
  
  안개 속의 전력(前歷)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면 드러나던 사실도 안개 속으로 들어가 미스터리로 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1963년의 대통령선거 때 朴正熙대통령 후보의 남로당 전력(前歷)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었고, 그의 사상관계는 그 뒤 한 번도 제대로 정리된 바가 없었다. 朴대통령 재임기간에는 관계자들이 무서워서 입을 다물거나 거짓증언을 했고, 朴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조금씩 이야기들이 새나오기는 했으나 그 전무가 드러난 적은 없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름 앞에 「공산주의자」라는 낱말을 붙이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던 분위기의 진짜 희생자는 朴正熙였다. 인간으로서, 군인으로서, 또 정치가로서 朴正熙에 대한 평가는 이 미스터리 부문의 해명 없이는 정확히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朴正熙는 그 일생일대의 위기를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 전력을 과거완료형으로 끝내버렸기에 반공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한때 공산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희망과 고뇌와 울분과 갈등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물질적 토대를 만든 朴正熙대통령의 깊숙한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朴正熙소령에 대한 수사·재판기록이 없어진 지금 기자가할 수 있는 일은 관계자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당사자들과 1차적인 목격자를 찾아 만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의 안개를 걷어내는 일이었다.
  
  숨겨진 혼력(婚歷) 李여인의 중언
  
  朴正熙소령이 광주의 여순반란 토벌사령부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하다가 육군 본부작전 교육국의 과장으로 원대 복귀한 것은 1948년 11월 초순이었다. 그달 11일 육사7기 생도들의 졸업식이 있었다. 朴正熙소령이 군내의 남로당간부란 혐의를 받고 金昌龍대위가 지휘하던 1연대 수사팀에 체포된 것은 이 졸업식 날이었다. 朴소령은 이때 이화여대 중퇴자인 李모여인(현재 69세)과 용산의 육군본부장교 관사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李여인은 지금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에서 살고 있다. 朴소령의 체포상황에 대한 가장 가까운 목격자인 李여인의 증언을 들어본다.
  
  『미스터 朴이 방을 준비했다고 해서 합치게 됐습니다. 용산 관사에 간 지 며칠 안 있다가 숙군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연락해 주었어요. 밥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효(李曉)대위가 술에 취해 왔어요. 내 손을 꼭 잡고 내가 어리고 수줍어하니 돈을 얼마 줬지요. 「당분간 기다려라. 갑자기 출장갔다」고 합디다. 그랬으면 전화했거나 인편으로 메모가 왔을 것인데 밤새 생각하니 이상했어요. 근처 강문봉(姜文奉)씨 부인에게 찾아가니 「몰랐느냐」고 남편을 불러 알려줍디다.
  
  너무 기가 막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쇼크 받았어요. 이북서 공산당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며칠 후 金昌龍이가 왔어요. 경위를 설명하고는 미스터 朴이 메모를 주라고 하더라면서 건네줍디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7기생의 육사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도 하고 아침에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 타고 도피할 수 있었는데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안갔다. 이것이 나한테 얼마나 불리한 줄 아느냐?」
  
  한 여인 때문에 안갔다니... 그러나 난 괘씸했어요. 그것까진 또 괜찮아. 고향에서 박재석(편집자주:朴正熙소령의 둘째 형)의 아들이 고춧가루 등을 갖고 왔어. 재옥이 엄마(朴소령의 첫째 부인)가 알까 봐 서대문형무소도 못 다니게 해』李여인에게 朴소령의 체포사실을 처음으로 알려주었다는 李曉씨는 육사 2기생 출신으로서 朴소령과 동기다. 그는 육군소장으로 전역한 뒤 지금은 수원에서 살고 있다. 77세. 李씨는 『내가 李여인을 朴소령에게 소개시켜 주어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되었다』면서 『나는 그때 육군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朴소령이 체포된 사실을 빨리 알았고, 朴소령의 관사가 나의 관사 바로 옆에 있었다』고 말했다.
  
  자술서로 조직 털어놔
  
  그때, 군내부의 남로당 조직에 대한 수사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은 육군본부 정보국이었다. 백선필대령이 국장이었고, 그 밑에 특무과(SIS)가 있어 이 숙군수사를 전담하였다. 수사는 본부의 특무과와 각 지방의 특무과 파견대에서 주로 했다. 1연대 정보주임인 金昌龍대위는 그전부터 군내의 남로당 조직을 추적해 온 경험이 있어 별도로 1연대 수사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朴正熙소령을 체포하여 신문하게 된 것은 金昌龍팀이었다. 육사3기생 출신인 金대위는 「모든 사람은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金소령은 일제시대에 관동군의 헌병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지하조직을 수사해본 경험자였다. 이 전력 때문에 해방 뒤 북한에서 소련군에게 붙들려 처형되기 직전에 탈출, 월남했었다. 북한에서 얻어맞은 흉터로 얼굴이 성한 데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육군정보국의 전투정보과장은 朴正熙소령과 친했던 육사1기 출신 김점곤(金點坤)소령(육군소장 예편·현재 경희대교수)이었다. 金소령은 朴소령의 체포사실을 이틀 뒤에 알고는 金昌龍대위를 불러 『때리지 말고 조사하되 자술서를 받도록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여러 부대에서 여러 갈래로 진행되고 있던 숙군 수사를 총괄한 것은 정보국 특무과였고, 과장은 김안일(金安一)소령이었다. 金소령은 朴正熙소령과는 육사 동기생이었다. 金소령은 1963년에 육군준장으로 예편한 뒤 목사(신학박사·평양신학 연구원장)가 돼 지금은 경기도 의왕시에서 살고 있다. 생존하고 있는 숙군 수사관계자들 중에서는 朴소령 사건에 대해서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지난 10월 말 金安一씨는 자신의 집에서 기자에게 약 세시간에 걸쳐 수사 내용을 털어놓았다. 金씨는 『朴正熙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술서를 잘 썼기 때문이다』고 했다. 金씨는 장문의 자술서를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핵심내용을 이렇게 기억해냈다.
  
  『朴소령은 金昌龍에게 붙들리자마자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면서 자술서를 쫙 써 내려갔다고 합디다. 그 내용인즉, 육사재학중 형인 朴相熙씨가 대구폭동때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집에 내려가 보니 유족을 남로당 간부인 李在福이가 잘 보살펴주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李는 朴正熙에게 『공산당선언』등 책자를 갖다주면서 남로당에 가입하도록 꾀었고,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도 하더랍니다. 자술서를 읽어보니 朴소령은 이념적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인간관계에 얽혀서, 또는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한 감상적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朴소령은 자술서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죄다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 명단에 따라 수사를 하여 많은 조직원들을 잡아들였다는 것이다. 특히 朴소령이 교관 또는 중대장으로 근무하였던 육군사관학교내의 남로당 세포가 많이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金安一씨에 따르면 『朴正熙소령은 군내 남로당 조직도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나 활동한 흔적이 거의 없었고, 자술서를 통해서 남로당 조직원들을 많이 노출시켰으므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金昌龍등 3명이 보증서 구명(救命)
  
  朴소령은 그때 남산 신라호텔 근방에 있었던 헌병대 영창 안에 수용돼 신문을 받았다. 金安一소령은 『朴소령을 살리자는 이야기를 나에게 맨 먼저 한 것은 金昌龍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金安一소령은 직접 朴소령을 신문하기로 했었다는 것이다. 육사동기생 사이였지만 金소령은 그 전에는 朴소령과 대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육본특무과는 지금의 조선호텔 근방에 있었다. 金安一씨는 자기 앞에 불려와 앉혀진 朴소령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생명에 애착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살려달라고 구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태연한 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생사가 갈리는 그런 순간에 얼이 빠져 있었을텐데 朴소령은 자연스럽게 당당합디다. 그래서 백선엽(白善燁) 국장에게, 살려주자는 제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金安一씨는 朴소령에 대해서 金昌龍과 같은 판단을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잡혀와서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자백을 하는 것은 당에서도 큰 과오로 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조직이나 다른 사람을 물고 들어가면 배신자가 됩니다. 언젠가는 복수하지요. 그렇게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사람들은 거세된 환관과 같아서 풀어주어도 절대로 다시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지요. 朴正熙가 그런 사람이 되었기에 우리는 살려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金과장과 金昌龍이 구명사유서를 겸한 朴소령에 대한 신원보증서를 갖고 白국장한테 갔더니 白국장은 『너희들도 여기에 도장을 찍으라』면서 자신이 도장을 찍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朴소령을 살리는 데는 당시 숙군수사의 핵심 간부인 백선필, 金安一, 金昌龍등 3명의 연대보증이 있었던 것이다. 朴소령은 金昌龍 팀의 신문이 끝난 뒤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졌다가 49년 1월에 석방되었다. 朴소령은 그 뒤 불구속 상태로 군사재판을 받았다. 군수사기관에서 朴소령을 살려주기로 결정했으므로 재판은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고 金安一씨는 말했다.
  
  미국 대사관 보고서
  
  이런 자료가 하나 있다. 1961년 7월 15일, 그러니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두 달 뒤 주한미국대사관은 쿠데타 주체 세력에 대한 1차 분석 보고서를 국무성에 전문으로 보냈다. 이 보고서는 쿠데타에 공산세력이 개입돼 있느냐의 여부를 주로 검토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이 군사쿠데타 세력의 주류는 압도적으로 애국적이고, 민족적이며, 반공적이다」고 결론지은 다음 「그러나 과거에 공산주의와 연루되었던 장교들이 있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고 지적하였다.
  
  이 보고서는 또 「그러나 朴正熙 장군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공산주의를 배신하고 전향한 그의 전력이,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한다면 그를 희생자 1호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 미국측 분석은 金安一과 金昌龍의 예측이 정확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朴正熙는 군부내의 공산주의 조직을 털어놓았을 때 이미 공산주의와 결별하였고, 그 뒤로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임을 여러번 스스로 입증하였다. 朴正熙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온 뒤 명동 거리에서 잘 아는 사이인 남로당원과 마주쳤다고 한다. 그때의 기분을 朴正熙는, 『내 머리 뒷꼭지를 향해 그가 총구를 겨냥하는 것 같아 오싹했다』고 표현하더라고 한다. 朴正熙는 해방 뒤 한 2년간 공산주의자였지만, 그 경력은 과거 완료형으로 끝나버린 것이었다.
  
  형 朴相熙의 피살
  
  朴正熙는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가. 해방 전후의 朴正熙와 그환경을 살펴보면 朴正熙는 공산주의자가 딜 수 밖에 없었던 가정, 사회, 군, 그리고 사건들의 조건 속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가정 환경으로서는 셋째 형 朴相熙의 영향을 꼽아야 한다. 朴正熙 형제 일곱명 중 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相熙, 正熙 뿐이었다. 朴相熙는 20대때 동아일보 구미 지국장이 되었다. 신문판매뿐 아니라 간단한 기사도 써 올리는 주재기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고관이 구미에 오면 예비 검속을 당하기도 할 정도로 요주의 인물이 돼 있었다고 한다.
  
  재일거류민단 단장을 지낸 바 있는 조영주(曺寧柱)씨(81)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때 일본의 다찌메이간 대학 및 교토 대학 대학원을 다니며 사회주의 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방학 때 고향에 오면 친구인 相熙나 황태성(黃泰成)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주로 사회주의 사상 문제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朴은 정열적이고 의분심이 강하며 민족주의적인데, 黃은 냉철하고 코스모폴리탄적 이었습니다. 黃은 골수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지만 朴은 그렇게 되기엔 너무 뜨겁고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黃泰成은 동아일보 김천지국장이었다. 黃은 朴相熙에게 김천 여자인 趙씨를 중매하여 결혼하도록 한 사람이다. 朴正熙는 소년 시절에 相熙형을 가장 존경하며 따랐다.
  
  남로당 군사책에게 포섭 당해
  
  1946년 10월 좌익이 주도했던 대구폭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살된 朴相熙의 비극이야말로 朴正熙를 좌익으로 밀어붙인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고 朴대통령의 바로 위 누나인 在熙씨(76)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열병의 치료를 한다고 누워 지낼 때였습니다. 새벽이었는데, 새까만 옷을 입은 경찰들이 저의 집에 들이닥쳤어요. 나를 보고 상희씨와 어떻게 되느냐고 묻길래 동생 된다고 했더니,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킨 뒤 오빠가 공의한테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해요. 남편이 놀라서 뛰어나가려니까, 한 경찰관이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렇게 나가려고 하느냐면서, 서장한테 같이 가면 통행증을 끊어 주겠다고 해요. 남편이 나갔다가 곧 이불에 둘둘 말린 피투성이의 오빠를 업고 왔어요. 숨은 붙어 있는데 정신은 없습디다.
  
  총 세 발을 맞았다는데 옆구리와 배꼽 밑의 상처는 제 눈으로 봤지요. 제가 녹두를 달여 그 물을 떠먹이는데 한 모금만 마시고는 곧 숨이 넘어갔지요. 대구 폭동이 났을 때 오빠는 구미 경찰관들이 안 다치도록 어떤 창고로 피신시키고 바깥에서 문을 잠갔고, 죽을 때도 그 열쇠를 갖고 있었대요. 죽기 직전에 경찰서장과 같이 있었는데, 서장이 이제는 집으로 가도 괜찮을 것 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서는데 경찰관들이 덮치길래 논두렁으로 피했다가 총을 맞았답니다. 총을 쏜 경찰관들이 오빠를 업고 공의한테 데리고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명령하더랍니다. 오빠는 가족을 불러 달라고 했고, 내가 좋은 일을 했는데 왜 죽어야 하느냐는 말도 하더랍니다』
  
  朴正熙는 형이 피살되었을 때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대구폭동이 나기 8일전인 1946년 9월 24일에 입교하였던 것이다. 그는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朴正熙는 대통령시절에 측근에게 『형이 피살된 사정을 알아보려고 장교복장으로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숙군수사 때 金昌龍에게 이 점을 추궁당하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기자가 朴相熙의 죽음에 대하여 알아보았더니 대체로 在熙씨의 증언과 일치하였다. 대구 폭동이 확산되면서 구미경찰서도 좌익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한다.
  
  이때 좌익세력의 한 지도자였던 朴相熙는 구미경찰관들을 창고에 수용시켜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창고 열쇠를 자신이 갖고 다니며 부하들이 해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충청도 경찰이 파견돼 구미경찰서를 탈환할 때 朴相熙는 피격되었다는 것이다. 朴相熙는 구미경찰관들을 보호했으니 달아날 필요가 없다는 태도로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외지에서 온 경찰의 총을 맞은 것이었다. 朴相熙는 사회주의자였지만 남로당에 가입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는 게 정설이다.
  
  朴正熙소령의 자술서에도 쓰여있다는데, 朴相熙의 유족을 보살펴 준 것은 李在福(1948년에 46세)이었다. 평양신학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에서 교토신학교를 나와 경북지방에서 목사로 일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된 李在福은 해방 뒤 경북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남로당에 들어갔다. 대구 사람인 그는 朴相熙·黃泰成과는 동년배로 친구 사이이기도 하였다.
  
  李在福은 자연스럽게 朴正熙와 가깝게 되었다. 朴槿惠씨에 따르면 단 한번 아버지가 그 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숙집으로 이재복이가 찾아와 형의 친구라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이재복의 꾐에 넘어가게 되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때 李在福은 남로당의 군조직담당부서인 특수부장이었다. 이 무렵 대구에 주둔 하고 있던 6연대의 연대장은 崔楠根이었다. 李在福은 崔楠根중령을 포섭, 군내의 남로당 최고간부로 만들었다. 李在福이 어떻게하여 崔중령을 알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朴正熙는 李뿐 아니라 崔중령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李在福·崔楠根·朴正熙 세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朴正熙와 육사 2기 동기생이었던 한웅진(韓雄震)씨(88년에 사망·육군소장 출신)는 3년 전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었다. 『저는 육사를 졸업하고 1947년에 대구의 6연대로 부임했는데 崔연대장이 「朴正熙에게 이야기 잘 들었다」면서 부관 겸 헌병대장으로 임명, 아주 아껴줍디다. 1947년말 저는 법무관 교육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 와 한 달간 朴대위와 같이 지냈어요. 그때 朴대위는 사관학교 중대장이었는데 서소문의 어느 여관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崔연대장은 거의 매주 한 번씩 이 여관방으로 朴대위를 찾아 와 같이 나가곤 했어요. 어느날은 崔연대장이 「韓중위도 같이 나가지」라고 했는데, 朴대위가 「저 친구는 공부하도록 버려두고 우리끼리 갑시다」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朴正熙는 실토를 합디다. 「그때 崔중령이 韓중위를 포섭하려고 했지만 너무 어리다고 내가 말렸다. 우리 두 사람은 그때 효자동에 있던 李在福의 집을 출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李在福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거물 崔楠根과 친숙
  
  朴正熙는 어떤 술자리에서 李在福을 자신의 삼촌이라고 속여 韓씨에게 소개시켜 주더라는 것이다. 韓씨는 친척 처녀를 朴正熙에게 중매해주려고 하고 있었는데, 李在福은 『조카에게 신경써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란다. 李在福은 첫눈에도 호감이 가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1947년에 춘천 8연대에서 朴正熙중위와 함께 근무했던 김점곤(金點坤)씨도 『朴正熙가 친척이라고 속여 李在福을 술자리에 초대, 元容德이 우리를 포섭하러 왔던 것 같았다』고 했다. 崔楠根은 아마도 당시 군부 안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던 장교였을 것이다.
  
  호방하고 인정스러우면서도 열정적인 崔는 많은 일화를 남기고 죽었다. 그런 崔를 朴正熙가 따랐고, 1947년에는 이미 두 사람 모두 군내의 남로당 조직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朴正熙는 인맥상으로도 군내 남로당 조직의 최상층부인 李在福·崔楠根과 직결돼 있었다는 얘기다. 崔는 함경도 태생인데 만군봉천군관학교 출신이었다. 해방직전에는 무장한인 독립단의 소탕을 임무로 삼고 있던 만군산하 간도특설대의 신병교육대 부대장이었다. 그때 여운형(呂運亨)은 만군내 한국인 장교들 사이에 건국동맹 군사분맹이란 비밀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崔는 이 비밀 결사에 들어 있었다. 해방 때 朴正熙 중위는 북중국 열하성에 주둔하고 있던 만군 제8단의 단장부관으로서 중국공산군과 싸우고있었다. 朴중위는 건국동맹군사분맹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민족적인 장교로 분류돼 포섭대상에는 올라 있었다. 崔楠根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만주로 쳐 들어와 지휘계통이 혼란한 틈을 타서 2백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백두산 기슭으로 들어가 『지금부터는 조선 독립군이다』고 선언, 해방된 것도 모르고 10여일간을 돌아다녔다고 한다(그때 이부대의 하사관이었던 박창암(朴蒼岩)씨의 증언). 해방 뒤 崔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 장교가 되었는데 만군 시절의 후배들 사이에서는 그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친구들, 손떼라고 만류하기도
  
  朴蒼岩씨(육군준장예편)의 증언을 들어본다. 『저는 1946년 2월 呂運亨 선생의 밀명을 받고 박승환(朴承煥)·박임항(朴林恒)·최창윤(崔昌崙)등 동지들과 함께 북한으로 올라갔습니다. 공산주의자로 위장하여 북한 인민군의 창설요원으로 일했는데 呂運亨 선생과의 관계가 들통이 나 몽땅 투옥되었지요. 우리의 리더였던 朴承煥은 옥사했고, 다른 사람들은 풀려난 뒤 남쪽으로 집단 탈출했지요. 그때가 1948년 초였습니다. 우리는 만군 출신들이 남로당에 많이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을 찾아가 공산주의의 실상을 전해주어 환상에서 깨어나도록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있었던 崔楠根 중령은 그때 지방에서 연대장으로 있었는데 여순반란사건 직전에 지휘관 회의 참석차 서울로 올라왔어요. 崔昌崙과 저는 崔선배를 만나 밤 새워가면서, 남로당에서 손을 떼라고 조르기도 하고 공박도 했어요. 崔선배는 고민을 하더니 「남로당에서 발을 배면 군대에 더 있을 수 없다. 과수원이라도 하나 사서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합디다. 그 무렵 崔昌崙은 만주군관 학교 1기 후배인 朴正熙소령을 찾아가서도 똑같은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朴소령이 체포된 뒤 전향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데는 이런 설득이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여순반란사건 이전의 한 2년간 朴正熙가 崔楠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더라는 증언은 더 있다. 朴正熙보다 만주군관학교 1기 선배였던 이기건(李奇建)씨(육군준장 예편)는 군관학교 시절부터 朴正熙를 별다르게 생각해 왔었다고 한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왜 여기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당돌하게도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합디다. 그때 나는 「왜놈」이란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일본놈」이라고 하지 「왜놈」이란 말을 쓰지 않거든요. 우리같은 사람이야 반 일본화 돼 있었는데 朴正熙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李奇建은 해방 뒤 고향인 북한에서 인민군이 창설되자 장교가 되었다.
  
  공산주의에 체질이 맞지 않아 1948년에는 남한으로 탈출했다. 『서울에 와 보니 崔楠根과 朴正熙가 남로당 조직에 들어 있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겠습디다. 朴正熙를 만나 북한의 실정을 전해주고는 손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더군요. 다음날 崔楠根을 만나 손을 떼라고 했더니, 「여보, 내가 하는 일이 없소」라고 잡아떼요. 내가 「이런 충고도 마지막이다」고 못박았죠. 그 이튿날인가, 朴소령이 나를 당시 경복고 앞의 어느 집으로 초대했어요. 朴正熙와 강창선, 조병건 등 두 장교와 이재복이가 와 있더군요. 강, 조 두 사람은 나중에 숙군과정에서 남로당 간부로 지목돼 숙청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술을 같이 마셨는데 李在福이가 나한테 말을 시키는 것이, 내가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내려온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겁이 나서 변소 가는척하고 맨발로 도망쳐 나왔지요. 그리고는 白善燁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성격적으로 반체제
  
  朴正熙가 남로당에 들어간 한 이유는 그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구사범 재학시절, 문경 보통학교 교사 시절, 만군 장교 시절, 그리고 해방 뒤의 청년장교 시절에 걸쳐 일관되게 발견되는 朴正熙의 성격은 현실에의 불만, 기성질서에의 반항, 외세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朴正熙의 보통학교 시절에 대해서 누님인 在熙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40리였습니다. 마을에는 시계가 하나도 없어 어머니는 동쪽에서 밝은 별이 두 개째 떠오를 때에 맞추어 아침을 짓기 시작하여 정희가 등교시간을 놓치지 않게 했습니다. 정희는 등교 때는 짚신을 한 켤레 더 차고 갔어요. 그것은 돌아올 때 신는 것이지요. 정희는 어둑할 때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마중을 나가 기다리면 저 끝에 죄끄만한 아이가 촐랑촐랑 걸어오는 거예요. 하루에 40리를 걷느라고 지쳐빠진 정희를 업고 오면 등뒤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정희는 몸이 약했어요. 새벽밥이라 잘 먹지 못했고, 겨울엔 도시락이 꽁꽁 얼어서 먹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한때 밤눈이 어두워졌어요. 밤만 되면 봉사 비슷하게 되어 변소에도 못가요. 제가 업어다가 변소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곤 했습니다. 소의 지라를 먹였더니 다시 밝아졌어요. 정희가 검정고무신을 처음 신게 된것은 5학년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사다주셨어요. 그것을 품에 꼭 안고 자더니 다음날 학교 갈 때는 짚신을 신고 고무신은 학교에 가서 신는다고 들고 가더군요. 정희는 또 아버지에게 자그마한 갈쿠리와 지게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공일 같은 날에는 뒷산에 올라가 빨간 솔잎을 끌어모아 묶음을 만들어 두어요. 아무도 손을 못대게 해요. 이것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어머니한테 팔아달라고 해서 돈이 생기면 공책과 연필 등을 사곤 했습니다』
  
  대구사범에서 사회주의 접해
  
  朴正熙소년이 1932년에 대구사범에 들어가 받은 교육은 「황민화」였으나 이것은 朴소년을 포함한 한국인 학생들을 오히려 반일적으로 몰아부쳤던 것 같다. 그때 대구사범 교사들 가운데는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애썼던 이들이 더러 있었다. 朴正熙가 입학하기 전해에 영어교사 현준혁(玄俊赫)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쳤다고 구속되었다. 玄俊赫은 뒤에 국내파 공산당의 거물이 되어 金日成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朴正熙가 졸업한 뒤에는 김영기(金永驥) 교사와 학생 30여명이 지하독립운동을 모의했다고 구속되어 5명이 고문으로 옥사했다. 당시 대구사범 교사들 중에는 사회주의로 의식화된 사람들이 많았다.
  
  朴正熙는 군수기지사령관 시절에 정규 육사출신 청년장교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내가 사회주의에 처음으로 접한 것은 대구사범때였다. 나는 그때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었다』고 솔직히 말한 적도 있었다. 朴正熙의 반일·반골적 기질은 1939년 문경공립보통학교 시절에 그가 일본인 교장을 구타한 뒤 사표를 낸 뒤 만주군관학교로 들어간 데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朴교사는 머리를 짧게 깎으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장발을 하고 다니다가 일본인 장학사와 교장에게 지적당하자 발칵했던 것이다.
  
  그런 성격의 朴正熙가 제국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양성 학교에 들어간 것은 그의 민족적인 성향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朴正熙는 기질적으로 반일적이었지, 그것을 역사의식으로 연결시켜 자신의 행동을 결단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朴正熙는 반골적 기질과 함께 권력지향적 성향도 아울러 갖고 있었음은 그의 직업선택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만군에서도 朴正熙는 민족적 기질을 유지하였다. 그때 만주국의 수도 신경에 있던 관동군 사령부의 정보관계 부서에서 하사관으로 있었던 박기병(朴基丙)씨(육군소장 예편)는 기억을 갖고 있다. 『그때 丁一權상위는 만군헌병사령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朴正熙등 만주군관학교 생도들을 가끔 불러 저녁을 사주곤 했습니다. 朴正熙생도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벌떡 일어나 독립군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선배님들, 이 노래 모르시죠」하면서 주먹질을 하며 부르는데 우리 생각으로는 놀랄 만한 일이었죠』
  
  朴正熙는 그런 민족의식을 한 번도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생각은 민족적, 반항적, 반체제적이되 그것을 섣불리 행동화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태도는 朴正熙의 일관된 생존습관이기도 하였다. 朴正熙의 이런 자세를, 한 대구사범동기생은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승산이 없을 때 움직이지 않는다는 태도로 봐야 한다』고 했다. 반항적 생각 뒤의 이런 차가운 계산이 숙군 수사 때 朴正熙소령으로 하여금 남로당조직을 다 털어 놓게 하여 그의 생명을 부지하도록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출처 : 월조
[ 2003-07-16, 14: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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