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5)6.25 전쟁 체험 手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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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2000년 6.25남침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일보가 모집한 체험수기중 뽑은 것입니다. 이 글을 프린트하여 6.25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선물하여 읽도록 합시다. 젊은 영혼들이 강정구류의 거짓선동에 넘어가지 않게 하고 조국을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1편: 전직 경찰관 아내의 「斷腸의 喪夫記」
  
  공산당에게 맞아죽은 屍身들 속에 남편은 없었다
  남편이 차라리 北으로 끌려가 목숨이라도 부지했으면 하는 가냘픈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5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박순애 서울 금천구 시흥2동
  
  이리市에서 맞은 6·25
  
  생각조차 하기 싫은 지난날을 더듬어보면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기억들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얼굴은 주름투성이이고 머리는 흰 눈이 쌓인 듯 백발이 되어버렸으며 이빨은 대부분 義齒(의치) 신세가 된 지금의 나는 몸 어느 구석을 보나 인생의 황혼기에 서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그런데 기억의 필름이 한참 되돌아가다 멈춘 순간에 보여진 나의 모습은 20代의 아름다운 자태였다.
  
  6·25 당시 나는 26세였고, 자상하고 가정적이었던 나의 남편은 34세였다. 우리는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많은 재산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큰 아이는 여섯 살, 둘째는 네 살, 막내는 한 살이었다.
  
  전쟁이 나기 두 해 전에 남편은 전북 이리(현 익산) 경찰서 총무과 과장으로 있었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사표를 냈다. 그리고는 양계장을 운영하여 성공해보겠다는 꿈을 안고 퇴직금과 옷가지를 저당 잡히고 빌린 돈으로 이리市에서 약 2㎞ 떨어진 신고현洞에 땅을 사서 양계를 시작하였다. 두 해 동안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닭이 300수 가량 되었다. 성실한 노력으로 소박한 꿈이 현실 속에 이뤄져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던 우리 가정에 날벼락 같은 북한의 6·25 남침의 광풍이 불어닥쳤던 것이다.
  
  전쟁을 위한 軍備(군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던 남한의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맨주먹으로 대항하는 형국이었다. 북한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거침 없이 南으로 南으로 내려왔다. 어느새 북한의 전투기들은 이리 상공에까지 날아와서는 철도 기관차실에 폭격을 가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었다. 얼마 후 인민군들은 행렬을 지어 철모에 풀과 나뭇가지를 꽂고 人共旗(인공기)를 달고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남부지방 모든 도시와 마을들을 휩쓸고 손아귀에 넣어가고 있었다.
  
  인민군이 들이닥치자 전부터 남한에 잠복해 있던 공산당원들과 평소 이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소위 「빨갱이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날뛰기 시작하였다. 「이젠 우리들 세상이다」라고 기세가 등등하였다. 그들은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면서 과거 남한 정부에 충성했던 인사, 재산 있고 교육받은 사람, 그리고 평소에 惡感(악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붙잡아다가 「반동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가두기도 하고 혹은 죽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소위 「반동분자」의 집에 들어가 재산을 빼앗고 가축을 잡아먹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권세를 부렸다.
  
  
  한밤중에 끌려간 남편
  
  남편은 사직한 지 이미 2년이 지났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피신하려던 중 전직 경찰은 손대지 않는다는 선전을 전해 듣고 안심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불안하여 집 걱정은 하지 말고 피신하라고 권고하였다. 가정과 집안 일들이 걱정이 되어 바로 집을 떠나지 못하던 남편은 엉거주춤하고 있다가 결국 당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강제적으로라도 피신하도록 밀어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되지만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느 날 밤 인민군과 동네의 「빨갱이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남편을 불러내어 『너 경찰 했지?』하고 큰 소리로 묻고는 끌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안고 따라가면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붙잡아 가느냐고 항의하며 울고불고 애걸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분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이 악질 공산당 놈들아!』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진 것, 감정을 가라앉히고 대책을 강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큰 아이 두 형제를 이웃집 할머니에게 맡기고 어린 막내는 업은 채 남편의 옷가지를 싸 가지고 소위 보안서로 갔다. 팔에 완장을 찬 무지막지해 보이는 「빨갱이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였다.
  
  그중에 과거 우리 동네 반장을 했던 이가 있기에 반가워서 인사를 하며 우리 집 주인 좀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는 쳐다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손짓만 하였다. 아는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분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옆에 있던 다른 이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였더니 그 사람은 등에 업고 있는 아이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더니 전주형무소에 가 있으니 걱정 말고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믿어지지 않아 유치장 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았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기에 안 보일까, 진짜 전주 형무소로 보냈나?』하고 생각하다가 점점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발이 떨리어 간신히 보안서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중 폭격기가 시내를 돌며 폭격을 해서 계속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를 기다리며 울고 있을 어린 두 형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가 없으면 누가 키워줄까, 애들을 위하여 살아야 해」 이렇게 생각하면서 등에 업은 아이를 안고 엎드렸다.
  
  폭격기가 지나가면 또 다시 걷고 이렇게 하면서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양계장의 닭은 다 없어졌다. 내가 시집 오고 나서 남편이 사다 줘 애지중지하던 오르간은 인민군이 인민의 노래를 배운다고 그들이 점거하고 있던 교회로 가져갔다. 뿐만 아니라 된장 고추장을 항아리째 다 가져가기에 조금은 남겨두고 가라고 하니 『당신네는 반역자다. 그러니 여기저기 다니며 얻어다 먹어라. 이것은 모두 인민병원에 보낼 것이다』 하며 오히려 자기 것인 양 당당하였다.
  
  가구며 이부자리며 옷가지 등은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한쪽 방에 몰아넣고는 문을 잠가버렸다. 그밖에 저희들이 필요한 것들을 다 가져가 버렸다. 심지어 김일성 사진을 건다고 몇 개 안되는 사진 액자까지도 가져갔다. 또다른 방은 공산당들이 사무실로 점거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 부르며 떠들어댔다.
  
  한편 그들은 우리를 감시하는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우리 이웃 사람들은 피난 가고 없었고 할머니 한 분만 남아 계셨는데 밤이 되면 무서워서 할머니와 같이 있었지만 불안하여 마음 놓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인민군이 남침하여 난동을 부린 것은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3년도 더 되는 듯 지루했고 지긋지긋했다. 심적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두 아이 업고, 끌고 전주 형무소로
  
  공포의 날들은 그래도 흘러갔다. 어느 날 밤 방 안이 조용해져서 들으니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는 소문과 9·28 서울 수복 소식도 이리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전주 형무소도 문이 열렸다고 수군대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에 너무나 반가워 춤이라도 출 것 같았고, 『유엔군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을 전할 그이는 우리 곁에 없었다.
  
  아직 사방에서 설치고 있는 공산당 잔당들이 도망가면서 우리 가족을 해치면 어찌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즉시 먼 길을 걸을 수 없을 둘째 아들을 이웃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큰 아이는 걸리고 막내는 업고서 전주로 향하였다. 『전주 형무소의 문이 열렸다니 이제는 그 이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마음은 급하고 마구 뛰었다. 집에서 전주 형무소까지는 100리 길이었다. 밤을 새워 걷다 보니 밤이슬이 내려 몸이 축축하고 추웠다.
  
  큰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두 아이를 함께 업을 수도 없고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달래가며 쉬었다 걷고 또 걸었다. 길을 몰라 헤매며 어두운 밤길을 무서움도 무릅쓰고 걷다 보니 어느새 동쪽 하늘에서 불그스름한 햇살이 비쳐 불쌍한 우리 母子(모자)를 반겨주는 듯하였다. 우리 세 모자는 활짝 웃으며 떠오르는 햇님을 보자 생기가 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다.
  
  바로 이 새벽 시간에는 차도 없었고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가다가 앞을 쳐다보니 내복 바람에 머리는 길고 얼굴은 창백해 보이는 40대 가량의 한 남자가 비슬거리며 오솔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전주 형무소에서 갓 나오는 사람 같아 보였다. 가까이 왔을 때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오늘 새벽 형무소 문이 열려서 막 나오는 길인데 아직 못 나온 사람도 있다고 전해주었다.
  
  인민군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와! 하고 몰려나오는 도중 지방 공산당들이 막아서서 인민군들에게 항의하면서 『왜 너희가 문을 열어주어 우리의 원수들을 풀어주느냐?』 하고 항의하고는 문을 도로 닫아버려서 나머지 사람들은 못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백한 얼굴의 그 남자는 나에게 몇 가지 정보를 더 말해 주었다.
  
  9·28 수복 3~4일 전부터 밤이 되면 형무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내어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패곤 했는데 너무 아파 부르짖는 애절한 소리에 감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까지도 몸의 피가 마를 정도였고 바로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고 했다. 불려나가 맞아 죽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힘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후에 열렸던 문이 닫혀 못 나온 사람들도 결국 그렇게 죽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끔찍하고 잔인한 소식을 듣게 되자 혹시 남편이 형무소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마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비규환, 지옥 그대로의 모습
  
  공중에서는 제트기가 「색 색」 소리를 내면서 빠른 속도로 전주 시내를 누비며 귀를 찢는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시내에 남아 있을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전주에 사는 먼 친척집에 들러 아이들을 맡겨놓고는 형무소로 급히 달려갔다.
  
  형무소에 들어서자 이미 광장에는 무수한 屍身(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를 찾으러 온 가족들이 경악과 슬픔 속에서 묵묵히 시체를 찾고 있었다. 큰 운동장에는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시체를 한 구씩 한 구씩 눕혀 놓았던 것이다. 손을 뒤로 결박하여 철사나 단단한 끈으로 묶고 몽둥이로 패서 죽게 된 屍身들이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 있었다. 그래서 입고 있는 옷을 보면서 찾아가고 있었다. 아비규환, 지옥 그대로였다.
  
  나도 남편을 찾으려고 수백 구의 屍身을 찾아다녔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거기에 없었다. 없기를 바라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일 죽었다면 屍身이라도 찾아서 양지바른 곳에 고이 잠들게 해야지』하고 마음 먹었지만 떨리고 슬퍼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재차 현장을 돌면서 행여나 빠지지 않았을까 하여 찾아보았다. 그러나 남편의 屍身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행여나 어디엔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야산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다. 자수하면 무조건 용서한다는 공산당들의 감언이설을 믿고 3개월간을 숨어서 고생하다가 9·28 수복 전날 가족들의 권유로 자수하러 갔다가 간악한 저들의 마수에 이곳으로 끌려와 참혹하게 맞아 죽은 시체들이었다.
  
  신사복 차림 그대로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여섯 구의 시체였다. 근처에 부러진 몽둥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차라리 총살을 했다면 이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고 죽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였다. 참으로 짐승도 아닌 사람으로서 이런 끔찍한 만행을 할 수 있을까? 벌레도 죽이지 못했던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끝끝내 남편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한편으로는 체념도 하고 또다른 한편으로 그들에게 끌려 北으로 납북되어 가가서라도 행여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있으면 하는 가냘픈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어린 3형제를 키우며 악착같이 살아오다 보니 어언 50년의 긴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아직도 남북 통일이 안 된 채, 이산가족이 되어 왕래는 물론 서로의 생사조차도 모르는 가운데 살아 있는 6·25 전쟁 1세대는 이제 70~80세가 넘어 인생의 황혼 길을 걷고 있다. 조급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족을 재회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한결 같이 명절 때면 고향의 부모 형제를 그리며 눈물 짖는 분들이 아닌가.
  
  남북회담 때면 남한은 최우선 순위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제기하는 데, 북한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협상에 응하는 체하지만 지금까지 흥정거리로 이용할 뿐 인도주의적인 자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공산당들에게 그런 기대를 건다는 것이 헛된 것일 뿐이라는 생각도 하면서도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이번만은 하는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이 땅 위에서 생긴 수많은 전쟁 고아들, 미망인들, 상이군인들, 그리고 이산가족들이 그들 생전에 통일을 보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단란했던 우리 가정의 행복을 산산조각 나게 한 6·25! 그리고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을 증오하기도 하였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주님의 제자된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비옵기는 주님, 북한의 동족상잔의 비극의 주모자들과 6·25 때 이 땅 위에 무죄한 피를 흘리고 무자비하게 强暴(강포)를 행한 자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그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이 북한 방방곡곡에 넘치도록 하여 주셔서 평화로운 통일이 성취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편: 敵치하의 기록/ '악질 反動'의 자식 受難記
  
  숟가락까지 뺏어가 젓가락으로 죽을 먹다.
  인민군에게 끌려간 아버지는 참혹하게 총살돼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남은 가족들에 대한 박해는 끊임이 없었다

  
  이석주 충북 충주시 교현 2동
  
  총살당한 아버님
  
  저는 6·25 사변 당시 연령이 21세였습니다. 年老(연로)하신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저와 처 어린 동생 2명 등 7명의 가족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아버지는 동리의 이장을 보시고 학교에 국민회장직을 맡는 등 지방에서는 존경받고 계셨습니다. 저는 대한청년단 교육도 받고 청년방위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25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는 누가 수습하는 사람도 없고 각자 흩어져서 집으로 와 있었습니다. 저희 집 앞에는 강물이 흘러 그 당시는 어찌나 비가 많이 왔는지 강물이 많아서 물을 건널 수도 없어 피난도 못 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청년 방위대에 다니고 공비토벌에 참여하였다고 제 걱정만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제가 어디에 갔다 오니까 어머니가 시름없이 앉아 계시며 『아버지는 수산면의 인민분주소원에게 붙들려 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날 수산면 인민분주소에 갔습니다.
  
  소장은 이경림이라는 사람이고 분주소원 중엔 월악산 금수산에서 빨치산으로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내막을 물었더니 『네 아버지는 오늘 아침에 평양에 교육을 받으러 갔으니 만나려면 여비나 좀 가지고 제천군에 가서 만나라』하였습니다.
  
  집에 와서 제천에 갈 준비를 하는데 수산에 계시는 저의 당숙께서 오셨습니다. 『아저씨 오셨습니까』하고 하였더니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오시라고 하여 가족이 모두 모였습니다. 당숙께서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면서 『형님이 돌아가셨다. 시체를 찾아오자』 하면서 집안 친척 몇 분과 저와 어머니, 당숙께서 현장에 갔습니다.
  
  가 보니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묘 제절(무덤 앞에 절을 할 수 있도록 평평하게 만든 땅)에다 7명을 묶어 놓고 총살을 시켰는데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어찌 잊겠습니까. 시체를 대강 수습하여 밤을 새워서 장사를 지내고 나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집안이 불길하려니까 2~3일이 지난 후 바깥 화장실 대들보에 번들번들한 큰 구렁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 하루 지나 다음날은 안쪽 화장실 대들보에 큰 구렁이가 있고 담 사이에도 큰 구렁이가 있었습니다.
  
  
  악질분자의 자식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동리 사람들은 저희 집을 가까이 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때 동리에서는 저녁마다 모여서 회의를 하고 김일성 노래도 배우고 인민기도 그렸습니다. 동리 사람들은 어찌 그렇게도 단결이 잘 됩니까.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가 기다리시고 가족들이 있겠습니다만 집이 싫어지고 어찌나 무서운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 같고 대문간을 보면 허연 시체가 눈에 보여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약 1주일이 지나니까 수산면 인민분주소에서 왔다고 하면서 『상부의 지시로 동무네 집 살림을 조사하고 수색을 한다』며 살림 일절을 창고와 방에다 모아 놓고 열쇠를 잠그고 손대지 말라 하였습니다. 쌀은 인민군 밥을 하여 준다 하면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니까 동리의 인민위원장이 와서 제게 『상부의 지시니 50리 밖으로 이주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혀서 위원장에게 『나는 지금 하라는 대로 하고 있는데 年老하신 할머니와 어머니,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하면서 애원을 하였더니 『그러면 좀 기다려 보라』하면서 갔습니다. 다음날 와서 하는 말이 동네 아무 집이라도 좋으니 얻어서 가라 하니 누가 방을 줍니까. 자기네도 목숨이 아까워서 안 주는 것입니다.
  
  동리의 한 사람이 『나도 댁의 은덕을 많이 받았으니 죽으면 같이 죽지』 하면서 방을 한 칸 주어서 그리로 이주하여 3개월을 살았습니다. 동리에서는 인력동원이라 하면서 너무나 저희를 못 살게 하고 어머니와 제 동생 세 사람을 교대로 부역을 많이 보냈습니다. 집안 식구나 편안히 살까 하여 의용군 모집이 있어 의용군에 지원을 하였더니 동리에서는 받아주는데 면당위원장이 악질분자의 자식이라 하면서 받아주지를 않아 못 가고 나중에 보니까 인민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 합니다. 슬픈 세월을 보내면서 감자와 보리죽으로 연명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동리의 민청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인민군 식사하는데 수저를 가져오라』하면서 저희 집 수저 6개마저 가져갔습니다. 죽을 쑤어서 그릇에 담아 젓가락으로 먹고 있는데 동리의 인민위원장이 와서 보더니 『죽을 어찌 젓가락으로 먹느냐』 하기에 아까 민청위원장이 와서 수저를 가지고 갔다 하니까 『이놈들이 죽는 사람은 아주 죽으란 말이여』하면서 가더니 수저 여섯 개를 갖다 주니 그 고마움이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국군 붙들고 쌓였던 눈물 쏟아
  
  그때 저희 집은 인민위원회로 쓰고 있었습니다. 동리 사람은 무섭다고 낮에도 혼자서는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는 밤에 집에 들어가도 든든하고 무섭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는데 어쩐지 인민군이 하나 둘씩 원주 가는 길을 묻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내막도 모르고 며칠이 지나니까 포 소리도 나고 예감이 불길하여 동생을 데리고 깊은 산 금수산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밤이면 정방사라는 절에서 밤을 새우곤 하였습니다.
  
  약 3일을 있다 보니 동리에 한 사람이 수산에서 연락이 왔다 하면서 수산에 가자 하여 밤에 수산에 갔습니다. 수산 지서에 가니까 경찰은 복귀하지 않고 국군만 있었습니다. 어찌나 반가운지 군인을 붙들고 쌓였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옆에 있던 저의 친구가 제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지서에서 군인들에게 협조도 해주고 멸공대를 조직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놈들은 인민군과 같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경찰이 완전 복귀하고 저는 방위대에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동리일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때서야 저의 집에 찾아와서 『우리의 목숨은 석주에게 달렸다』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동안 저지른 일은 생각을 하면 벌을 받아야 하지만 용서하고 말았습니다.
  
  각 기관이 완전 복귀가 되어서 아버님의 죽음이 알려졌습니다. 훌륭한 분이 돌아가셨다 하면서 官에서 중앙으로 상신하여 군수님 서장님 각 기관장님이 모여서 위로의 말씀도 하여 주셨습니다. 국무총리의 표창장 및 훈장도 주셨습니다. 메달에는「나라에 몸 바친 동지」라고 새겨져 있고 표창장에는 청년 운동으로 나라에 목숨을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22세에 軍에 입대하여 제주도에서 96일간 교육을 마치고 제1사단에서 근무하면서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열심히 하였습니다만 뜻대로 되지 않고 5년 만에 만기 제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충주댐 수몰로 인하여 표창장도 분실하여 중앙총무처 상훈과에 再발급을 신청하였더니 再발급은 안되고 상훈 기록 카드만 보내주셨습니다.
  
  기록 카드에는 반공 청년 유공자로 되어 있어도 지금 와서는 누구 하나 위로의 말도 없고 아무 혜택도 없고 이북에는 쌀을 주고 비료를 주고 지원을 많이 하면서 저 같은 사람은 아무 혜택도 없으니 이북 동포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불만만 쌓이고 죽을 때까지 그 시절 6·25 전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부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세상에도 널리 알려주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3편: 國軍의 6.25 - 분대장의 화천 발전소 탈환작전 보고서
  
  어수룩한 中共軍 포로, 만년필 건네면서 풀어달라 애원.
  강가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중공군이 세면중이었고 수백 마리의 말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우리는 불과 100명도 되지 않았다. 승리는커녕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생각이 모아졌다

  
  김희선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4동
  
  5일간 굶은 뒤 곧바로 전투 배치
  
  국군 6사단 소속의 우리 본대대는 용문산 방어전투에서 大勝(대승)을 거두고, 일로 北進(북진)하여 이곳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에 도착하였다. 우리 목적은 화천 발전소를 공격하는 데 있었으며, 그곳은 적의 군단 보급창과 사령부가 있는 적의 심장부였다.
  
  우리 대대는 용문산 앞 설악전투에서 敵(적)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대응, 적을 섬멸하였다. 우리 대대는 비록 그 전투에서 승리를 했지만 근 20여 일간의 전투에서 대대장 이하 20여 명만이 살아남았으며 게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5일간이나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굶었으므로 우리 대대의 잔여 병력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조금의 휴식도 없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도착한 장소엔 우리 연대 중 각 대대에서 차출된 병력이 약 100여 명 가량이었으며 그중 부상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으로 10명씩 한 조로 분대단위를 조직, 7개 분대가 편성되었다. 각 분대는 중공군에게서 노획한 말(일명 노새) 한 필과 60㎜ 박격포 1문, 경기관총 각 1문씩을 지급받았고, 또한 개인 화기에 총탄을 수령, 만반의 전투태세를 완료하였다.
  
  그후 지프로 연대장이 도착, 全(전)대원을 집합시켜 놓고 일장의 작전명령을 지시하였는데 훈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대는 구만리 발전소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한다. 구만리 발전소는 38선 이북지점에 위치해 있고, 그곳은 敵의 전기 공급원이며 전략기지이다. 만약 우리가 구만리 발전소를 탈환한다면 금화 및 금성평야까지 공격하는 데 교두보가 될 것이다. 또한 중공군은 그곳에 군단 본부를 설치하고 막대한 군사장비 및 보급품 저장소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全대원들에게 정종(술) 한 잔씩을 따라 주시는 한편 한 사람씩 악수하면서 『용감히 싸워 꼭 구만리 발전소를 탈환하길 바란다. 죽지 말고 구만리 발전소에서 꼭 만나자』고 힘 있게 말씀하셨다.
  
  
  야간 행군
  
  우리는 오래간만에 쇠고기 국물에다 저녁식사를 배불리 먹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석양이 서산에 기울 무렵 출동을 개시했다. 그 당시 춘천 발전소로부터 구만리 발전소까지의 도로는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만리 발전소에서 뻗어나온 산맥을 타고 칠흑 같은 밤길을 재촉하며 행군했다.
  
  구만리 발전소까지의 거리는 약 32㎞로, 산은 울창한 숲과 험한 낭떠러지가 많아 전진하는 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얼마나 행군했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반쯤 이상이나 행군한 지점부터 산이 가파르고 악산이라 통과하는 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가까스로 오른 산등성이를 고삐를 당기고 뒤에서 채찍질을 하면 탄약을 실은 노새는 앞발을 버둥거리면서도 힘차게 올라왔다. 이를 본 우리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기 때문에 중공군이 산악전에 노새를 대거 이용한 것 같았다.
  
  우리는 담배도 못 피우며 소리 죽여 행군을 하였는데 계속되는 산봉우리를 넘어도 또 산이 계속되었다. 아마도 몇 수십 봉우리를 넘었을까. 드디어 우리 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적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어둠이 걷히기 전에 무사히 발전소 가까이 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각은 새벽 5시께인 것 같다.
  
  그 당시 대대장은 우리 대대의 대대장이 아니고 타부대에서 온 장교였다. 대대장은 全분대장을 집합시켜 놓고 작전명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로 아래 북쪽으로 약 1㎞ 지점에 구만리 발전소가 있고 그 뒷산 너머엔 댐에 의한 호수가 있다. 또한 저 북쪽에서 바로 아래로 흐르는 강이 있다. 우리의 공격 지점은 발전소 건물의 중심이다』라고 하시면서 각 분대장에게 일일이 공격 대기지점을 지시하였다. 이때 우리 분대는 강건너 북쪽 약 500~600m 지점을 지정받았다. 그리고 대대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각 분대는 한 시간 내로 공격 대기지점까지 각별히 주의하여 도착해야 한다. 만약 적에게 발각되면 이 작전은 실패할 것이며 우리 대대는 전멸될 것이다. 아무쪼록 작전이 무사히 성공하길 바란다. 목적지에 도착 후 권총 신호탄 세 발을 발사하면 총공격을 개시하고 60밀리 박격포와 경기관총은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발전소 건물을 집중 사격하도록 하며 全분대원들은 단독무장으로 돌격해라. 점령 후 대대장 위치는 제일 큰 건물로 지정하니 연락해라』 하시며 각 분대장에게 성공을 다짐하는 악수를 힘있게 하셨다.
  
  분대장인 나는 분대를 인솔하여 공격 대기지점으로 출발하였다. 우리 분대는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계곡을 따라 하산하였는데 얼굴이 가시덩굴에 찢기면서 피가 흘렀고, 후미에서 노새를 끌고 오는 대원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적군에게 발각될까봐 숨을 죽여가며 물이 허리춤이나 차는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고 나니 어찌나 춥던지 아래 윗니가 저절로 부딪쳐 떨릴 지경이었다. 우리는 물에 젖은 옷을 말리기는커녕 짤 사이도 없이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며 행군을 계속했다. 빽빽이 들어선 참나무 숲 사이의 비탈진 길을 기어오르기란 너무나도 힘든 苦行이었다.
  
  우리 분대는 악전고투 끝에 목적지인 공격 대기지점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공격개시 시간이 지연될까 봐 휴식을 취할 여유도 없이 60밀리 박격포와 경기관총을 신속하게 장착하였으며 분대원도 만반의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우리가 대기한 산은 해발 약 300~400m의 高地(고지)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대대장의 권총 신호탄이 오르기만 기다리는 긴장되고 적막한 시간을 보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동쪽 저 멀리 붉은 해가 호수 한가운데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이 가시기 시작하더니 구름인지 안개인지 강을 따라 지나갔고 구름이 지나가고 잠시 끊어진 사이 강줄기가 보이더니 강가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중공군이 세수하는가 하면 수백 마리의 말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지 않은가. 또한 수십 대의 소련제 지프차와 가스 화물차가 산재해 있었으며 대공포 같은 고사포가 은폐도 하지 않은 채 산재해 있었다.
  
  
  중공군과 마주치다
  
  우리 분대원들은 눈앞에 전개된 상황을 지켜보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100여 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어떻게 쳐부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는커녕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백에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됐는지 모르지만 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뜨리는 총성이 울렸다. 대대장이 발사한 신호탄이 화염을 뿜으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더니 연거푸 세 발이 발사되었다. 우리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경기관총을 미친 듯이 발사하였고 박격포는 집중 포격을 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각 高地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집중 사격하였고 발전소에 떨어지는 포탄은 계곡에 메아리쳤다.
  
  폭음과 기관총 총성에 놀란 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며 사방 팔방에서 쏘아대는 아군 사격에 놀란 적군은 갈피를 못 잡고 혼비백산하였다. 예상치 못한 아군의 공격에 중공군은 얼마간 대항 사격을 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중지되었다. 아마도 아군의 집중포격으로 희생자가 많은 것 같았다.
  
  나는 분대원을 인솔, 명령받은 공격지점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산 밑에는 발전소 진입로가 있었으며 도로에서 강쪽으로는 경사가 심한 동시에 강물의 수심도 깊었다. 우리는 가까스로 渡江(도강)하여 약 30m쯤 갔을까. 큰 묘 같은 흙더미가 강 연안부터 발전소까지 수백 개가 산재해 있었고, 그 흙더미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곳에서는 수증기 같은 김이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나는 분대원을 散開(산개)해 대기시켜 놓고는 副(부)분대장을 내 뒤에 따라오게 한 후 첫번째 무덤 같은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적군의 토치카였으며 김이 나는 입구 쪽으로 총을 겨누면서 들여다 보니 15~16명 가량의 중공군이 오들오들 떨면서 웅크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서툰 중국말로 『거수래래』 하였다. 그 순간 탕- 하는 총성이 바로 내 등 뒤에서 났다. 돌아보니 중공군 장교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副분대장이 사살한 것이었다. 내가 호 속을 들여다보고 적에게 나오라고 했을 때 뒤쪽에서 중공군이 튀어나오며 권총으로 나를 겨누었기에 사살했다고 한다.
  
  나는 6명 가량의 분대원을 바로 20m 뒤에 배치, 경계하게 한 다음 副분대장과 분대원 2명과 함께 선두에서 토치카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 참호에서 보통 15명 정도의 중공군 포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참호라 중공군을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우선 2개의 참호에서 잡은 20여 명의 중공군 포로를 일일이 무장 해제시키고, 副분대장과 분대원 3명에게 인솔케 한 후 큰 건물 쪽으로 보냈다. 나는 나머지 분대원과 합세하여 다음 참호를 수색, 20여 명의 중공군을 더 생포하여 대대장이 있는 큰 건물로 갔다.
  
  
  수천 명의 중공군 포로와 지샌 밤
  
  대대장은 무전기를 이용하여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는 것 같았다. 총성이 산발적으로 계곡을 메아리치는 가운데 각 분대에서 잡아온 포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어느 분대는 중공군 포로를 잡아온 족족 창고에 가두었다.
  
  정오가 지나도록 우리는 아침 식사도 제대로 못해 기진맥진했고 배가 고팠다. 하는 수 없이 팔뚝만한 굵기의 길다란 자루 속에 있는 중공군의 비상식량인 미숫가루로 허기를 채웠다.
  
  그 후 우리는 대대장 위치를 중심으로 1㎞ 내에 있는 강변의 수색은 물론 발전소에 인접한 건물의 수색작전을 계속하였다. 우리 분대는 중공군의 참호를 거의 다 수색하고 나서, 한 건물을 집중사격한 다음 문을 열어보니 수십명의 중공군이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중공군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군복 및 신발인 일명 「상해 농구화」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으며, 또다른 한 창고에는 미숫가루가 쌓여 있었고, 또다른 창고에는 수수포대가 쌓여 있었다.
  
  우리는 포로를 창고에 가두고 철저히 경계하였으며,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수천명의 중공군을 잡아놨으니 후송해 가라고 재촉했다. 또한 밤이 되어 적이 반격해 올 경우 현재의 아군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할 것이라며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현재 춘천댐에서 아군과 교전 중이며 적의 저항이 심해 시간이 걸릴 것인 즉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철저히 경계하라는 연대측의 답신을 받았다.
  
  날은 곧 어두워졌으며 각 분대는 대대장 위치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체코식 기관총과 M1 소총, 카빈총 및 실탄을 장치, 적의 공격을 대비한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중공군 포로가 건물을 뛰쳐나와 우리를 덮칠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중공군 포로들은 우리 부대원이 소수 인원인지 모르는 듯 창고에 조용히 있었고 그날 밤은 중공군의 공격 없이 무사히 날이 밝았다. 날이 밝아오자 중공군 가마솥에는 우리가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말고기가 끓었고, 경계병력을 제외한 全대원은 오랜만에 말고기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후 일부 경계병력을 제외한 각 분대는 인근 수색에 출동되었고, 우리 분대도 수색을 계속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 얼마 안되어 댐이 보였고, 강 건너 저쪽에는 서너 채의 초가집이 보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재빨리 강을 건너 民家(민가)를 우회하여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가만히 살펴보니 말이 두세 마리씩 여기저기 나무에 묶여 있었다. 한 열 마리 정도였을까. 아침이라 중공군이 추워서인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중공군이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가 총을 쏘라고 지시도 하지 않았는데 꽝꽝…하고 사격이 개시되었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포로 5명, 말 10필을 체포, 노획했다.
  
  
  중공군 보급품으로 갈아입다
  
  해가 지기 전에 본대로 무사히 돌아와 보니 중공군 포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 당시 다른 분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분대도 제대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늦은 봄인데도 불구하고 겨울 군복을 여름 군복으로 갈아입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군복은 눈, 비에 젖었을 때 불에 말리느라 군데군데 구멍이 났으며, 찢어진 구멍에서 솜이 튀어나와 말이 군복이지 거지나 다를 바 없었다. 또한 목욕은커녕 속옷을 빨아입을 새가 없어 「이」가 득실득실하였으며, 우리는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창고에 쌓여 있는 중공군 내의와 군복으로 갈아입고 깨끗한 상해농구화로 갈아 신었다. 갈아입은 후 상쾌한 그 기분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대장을 제외한 아군은 철모와 총을 빼놓고는 중공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대대는 敵地(적지) 내에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창고에 있는 수수를 삶아 먹게 되었는데 메수수라도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밤이 되기 전에 우리 분대는 개인호 속에서 경계임무에 들어갔다. 우리 대대는 발전소를 점령하는 데 10여 명의 戰死者(전사자)가 났기 때문에 현재 인원은 60여 명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장 위치를 중심으로 반경 500m 거리에 개인호를 파고 경계를 하였다. 그러나 여러 날 전투에 시달려서인지 눈이 감기고 졸음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밤 10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총성이 들리며 강 건너에서 적의 기관총탄과 따발총탄이 불과 40~50m 정도의 거리에서 아군을 향해 날아왔다. 곧이어 사방에서 중공군이 물 밀듯 쳐들어오고 적군의 수류탄도 날아와 터졌다. 우리 아군은 이에 질세라 적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최후까지 분전했다.
  
  결국 날이 새기 전에 우리는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적이 버리고 간 戰死者는 수십 명이었고 아군의 戰死者는 불과 10여 명 내외였다.
  
  우리는 주야간 수색작전과 방어전투에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낮에는 경계병을 제외한 인원은 모두 다 곯아 떨어졌다. 그러나 기다리는 지원부대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으로써 대항하니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
  
  그후 2일 정도는 적의 반격 없이 무사히 지냈다. 그러나 그날 어둠이 깔리기 전 초저녁에 적의 병력이 발전소를 향해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 정보의 출처는 미군인지 아군인지 몰라도 항공정찰에 의한 정보였던 것 같다.
  
  그 정보가 입수되자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대원들은 모두 지쳐 있고 적의 병력에 비해 아군 병력은 소수여서 대항할 수 없으니 전멸하기 전에 지원군을 빨리 보내줄 것을 애걸하다시피 요청했다. 그러나 연대장의 답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군 2연대는 현재 춘천 발전소에서 총공격 중이고, 美8군이 야간 항공공격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받았다』고 하셨다.
  
  
  중공군, 강을 건너기 시작하다
  
  대대장은 분대장들을 집합시켜 놓고 연대장의 명령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려주었고 우리 분대장들도 대원 모두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우리는 이 밤이 지나면 아군 지원부대가 도착한다는 생각을 하니 용기가 생기고 힘이 치솟아 올랐다.
  
  우리가 가져온 소총탄이 모두 떨어졌으므로 중공군에게서 노획한 무기 중에서 쓸 수 있는 무기는 각 분대마다 잔뜩 갖다놓고 전투준비를 했다.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강에 접한 고수부지에 개인호를 파고 잡풀로 위장해서 적이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얼마만큼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강 건너 산 중턱에서 적의 체코식 기관총탄이 비오듯이 날아왔으며 적의 82밀리 박격포탄이 연거푸 날아와 작렬했다. 우리는 대항하지 않고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적이 유효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적은 대대장 위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기관총을 발사했다.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심적 동요 없이, 적의 소총부대가 와서 우리와 한판 접전한 후 승패를 가리길 바랐다.
  
  그러던 중 동쪽 산너머에서 아군 전투기가 날아와 조명탄을 수십 개 떨어뜨렸다. 그로 인해 칠흑 같은 밤은 대낮같이 밝아졌고 뒤이어 날아온 7~8대의 艦載機(함재기) 무스탕은 우리 주위를 선회하며 접근해 오는 중공군에게 사정없이 폭격을 감행했다. 무스탕은 아군이 위치한 건물 주변을 제외한 곳에 기총소사했으며 좀 떨어진 곳에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화염이 치솟았다.
  
  그러던 중 얼마 안 있다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중공군이 허리만큼 되는 강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나는 『사격 개시』하면서 구령을 외쳤다. 「드르륵」 아군의 체코식 기관총이 사정없이 발사되고 대원들은 한 놈이라도 놓칠세라 사격을 계속했다. 우리 분대는 한 시간 가량 적과 맞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적을 물 속에 水葬(수장)시켜 버렸다. 우리 대대는 날이 샐 때까지 적의 치열한 공격을 방어했다. 나는 이날 밤 전투에서 적의 따발총 사격에 콧등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상이 아니어서 다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미군 무스탕은 날이 샐 때까지 조명탄을 떨어뜨리면서 중공군의 근접을 견제하기 위해 폭탄과 기관총탄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적의 총성은 멎었고 강 어귀에는 적의 시체가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강을 건너오던 중공군을 많이 죽였는데 강물에 떠내려 갔는지 시체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우리 분대는 다행히 한 명의 전사자도 없었으며, 나를 빼놓고는 부상자도 없었다. 우리는 승리했다! 우리는 또 살았다! 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가슴속에서 울려 나왔다.
  
  적군과 아군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밤새껏 요란했던 총성은 멎고 서서히 새벽이 되었다. 언제 그 치열한 전투를 했느냐는 듯이 고요한 가운데 바위에 부딪쳐 흐르는 강물 소리와 이따금씩 말 울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지축을 흔들며 나타난 美軍 탱크
  
  우리 대원들은 기진맥진하였고 밥을 구경한 지 5일이나 된 듯했다. 우리는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비상식량 미숫가루를 몇 움큼 털어넣고 강물을 떠 마시고는 허기진 배를 달랬다. 하늘에선 아군 전투기가 이따금씩 우리 주위를 선회하며 중공군에게 기총사격을 가했다.
  
  우리 대원들은 한두 명의 경계병을 놔두고 곯아 떨어졌다. 어찌나 잠이 오던지 쏟아지는 졸음을 견딜 수 없었다. 일생의 단 하룻밤도 잠을 편히 못 잔 것 같았다. 얼마나 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대원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적이 再공격하나 싶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군 탱크 20여 대가 지축을 흔들며 강 건너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와- 하고 목청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감격이란 말로 다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일이었다. 우리는 대대장을 위시하여 全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탱크 위로 올라가 미군과 악수하며 기뻐했다. 마치 구세주가 나타난 듯이.
  
  그후 약 서너 시간 뒤에 20여 대의 트럭에 탑승한 아군 지원부대가 도착하였다. 바로 2연대 병사들이었다. 그중에는 대구 제10교육대 동기생도 있었고, 우리 동네에서 같이 出征(출정)한 고향 친구도 있었으며 우리 연대에서 사귄 전우도 있었다. 나는 어깨를 얼싸안고 웃고 울었다. 나는 전우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때처럼 절실하게 실감해 본적이 없었다.
  
  탱크 부대를 뒤따라 연대장은 연대 참모들과 같이 도착했는데, 연대장께서는 푸른 안경을 쓰고 지휘봉을 손에 든 채 지프차에서 하차하셨다. 대대장께서는 연대장님이 도착하는 걸 미리 알았는지 마중나와 악수했다. 그 일행 중에는 6사단 정훈부 사진 기자가 있어 사진도 찍었으며 또한 종군기자도 끼어 있었다.
  
  연대장께서는 우리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들 모두 다 중공군 복장에 신발까지 상해제 농구화를 신었기 때문이다. 연대장께서는 우리 분대원과 일일이 악수하시며 다음과 같이 치하하셨다. 『잘 싸웠다. 용감하다. 구만리 발전소 탈환작전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우리 국군 전투사에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제군들이 구만리 발전소를 점령했기 때문에 全軍이 북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후 우리는 지원부대와 합세하여 막대한 戰果(전과)를 올렸다. 우리 3대대는 병력을 보충받아 예비대로 발전소에 주둔하였다.
  
  
  破虜湖
  
  그 당시 부산에서 발행한 신문과 6사단 「블루스타」 정훈 주간지에서 발표한 戰果는 다음과 같다.
  
  ▲중공군 포로:1만5000명 ▲말:100필 ▲소련제 고사포:4문 ▲소련제 지스 및 가스차:20여 대 ▲일제 야포:2문 ▲수수:수천 포대 ▲중공군 군복 및 내의:여러 창고
  이상과 같은 戰果로써 우리 6사단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중공군 포로를 많이 잡았다고 해서 구만리 저수지를 「破虜湖(파로호)」라고 명명하셨다. 지금도 화천 발전소 뒷산 「파로호」 도로 옆에는 李承晩 대통령이 친필로 쓴 전승비가 있다.
  
  그후 대대 수색대의 敵情보고에 의하면 백암산에 중공군 주력부대가 포진해 있으며 그 戰力(전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구만리 발전소 점령 즉시 포로가 후송된 것은 물론이려니와 창고에 쌓여 있는 중공군의 식량인 수수와 미숫가루는 모조리 실어가 버렸다. 또한 노새·말도 다 후방으로 실어가 버렸으나 그 중 몇 마리는 숲속에 몰래 숨겼다가 중대 단위로 잡아먹기도 하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軍 보급 행정에 부정이 행해지고 있었다. 일반 노무자들은 중대 단위로 음식을 만들어 각 소대로 운반했는데 그들은 M1 실탄통, 양철통에다 밥을 담고, 국물은 기관총 탄통에 담아서 양손에 들고 다녔다. 그러나 밥과 부식의 양은 코끼리가 비스켓을 먹는 정도의 소량이어서 대원들은 배가 고프다고 투덜거렸다. 그로 인해 중대장은 취사반장에게 기합까지 주었는데 취사반장은 『보급품인 쌀 한 가마가 명색이 한 가마이지 반 가마도 채 안 들어 있으니 어찌합니까』 하고 중대장에게 하소연조로 해명했다.
  
  어느 날 나는 (그 당시 나는 정훈병이었음) 중대장에게 불려 갔는데 하시는 말씀이 『他중대는 민가를 수색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갖다 먹는다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면 대원들의 허기를 다소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물으셨다. 중대장께서 나에게 지시하는 것 같아서 『제가 가겠습니다』 하니 중대장께서 쾌히 승낙하셨다.
  
  나는 곧 노무자 1명을 데리고 아침 9시경 구만리 발전소 댐 쪽으로 거슬러 올랐다.
  
  댐에 올라가 보니 물은 滿水(만수)되지 않은 채 3분의 2정도만 차 있었다. 댐 위를 건너 북쪽 연안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강 어귀에는 팔뚝 길이보다 더 큰 잉어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총을 쏘아 몇 마리 잡고 싶었으나 총성이 나면 적군에게 발각될까봐 그만 두었다. 호반은 동쪽으로 넓게 퍼져 있었으며 우리는 금강산 쪽에서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이따금 강 어귀에 있는 민가를 뒤져보긴 하였으나 먹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아마 중대 위치에서 약 4㎞ 정도는 온 것 같다.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 민가를 찾았으나 강벼랑이 심해 더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좌측 골짜기 쪽에 민가가 있을 것 같아 그리로 올라갔으나 큰 산이라 계곡이 깊었다. 다행히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어 골짜기 중턱쯤 올라서니 화전민이 사는 집이 보였다. 그 집은 울타리도 없는 一字(일자) 오두막집이었다.
  
  우리는 다리가 아파 민가를 바라보며 앉아 쉬고 있었는데 중공군(그 당시 떼놈이라고 불렀음)이 부엌에서 물을 떠가지고 나와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그때는 구만리 발전소를 점령한 지도 1개월 이상 지났으며 또한 소강상태여서 敵의 전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때였고, 때문에 중공군은 보기 힘들었다.
  
  
  중공군 포로가 내미는 만년필
  
  나는 식량 대신 중공군이라도 잡아 가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같이 온 노무자에게 중공군을 잡아올 테니 그간에 적이 대항하면 나를 엄호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무자는 대답을 하면서도 중공군을 처음 봤는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카빈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살금살금 다가가 찢어진 창살 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 보니 2명의 중공군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골격이 장대한 놈이었고, 다른 한 명은 조금 아까 물을 떠갖고 들어간 놈이었다.
  
  나는 여러 차례 전투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적군에 대한 공포심이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총을 겨누면서 『거수래래』 하고 소리쳤다. 중공군은 깜짝 놀라 벌벌 떨면서 손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나는 물을 떠가지고 들어갔던 조그만 놈에게 방 안에 있는 총을 갖고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엉거주춤 따꽁총과 따발총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키가 5척도 되지 않는 떼놈(물을 갖고 방안에 들어갔던 중공군)은 내가 무서웠던지 눈물을 흘리면서 손짓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귀중한 물건을 놓고 왔나 싶어 들어갔다 오라고 손짓했다. 그때 문이 열려진 상태라 방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는데 그는 방바닥에 있는 구질구질한 보따리를 뒤져 무언가 손에 쥐고 나오는 것이었다. 혹시 나는 소형 수류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차하면 총을 쏘리라 마음 먹었다.
  
  그는 방 안에서 나와 손에 쥐고 온 물건을 내 바지 주머니에 넣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나는 황급히 그것을 꺼내 보니 가는 면실로 짠 주머니 속에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나는 만년필을 꺼내서 뚜껑을 열어 보니 펜촉에는 「메이드 인 상하이 14K」라고 씌어 있었으며 잉크도 묻어 있지 않았다.
  
  나는 만년필을 받고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만년필을 나에게 준 조그만 놈이 손짓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보내달라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와이로」를 주었으니 그 대가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 나이로 약 18세도 안되어 보이는 소년이었기에 불쌍한 마음에 보내주고 싶기도 하였으나 만약 그 소년을 보내 준다면 우리는 적에게 노출되어 추격당하기 때문에 놔줄 수는 없었다. 나는 안된다고 호통을 치면서 따발총과 따꽁총을 뺏고는 카빈 개머리판으로 그 꼬마놈의 어깨를 쳤다.
  
  그리고는 두 놈의 중공군 포로를 앞세워 내려오는데 갑자기 적의 82밀리 반격포탄이 연거푸 다섯 발이 날아와 불과 2~3m 앞에 떨어져 터지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엎드렸다. 내 소속이 12중대 중화기 중대 정훈하사관이었기 때문에 적의 화력이 82밀리 박격포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곧 적의 집중사격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재빨리 행동, 허둥지둥 탄막을 벗어났다.
  
  그후 다시 10여 발의 포탄이 날아와 터지고는 포격이 멎었다. 나는 부상없이 무사했다. 그런데 중공군 포로 중 어린 중공군과 노무자는 온데간데 없어졌고 키가 6척이 넘는 중공군 포로 한 명만이 내 옆에 엎드려 있었다.
  
  
  중공군 포로가 중공군을 무장해제시키다
  
  나는 탄막을 벗어나려고 키 큰 포로만을 앞세워 빠른 걸음으로 골짜기를 내려오는데 앞세운 중공군 포로가 걸음을 멈추고는 손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대략 해석하자니 자기들이 타고 온 말이 저기 있으니 끌고 가자는 것이었다.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골짜기 덤불 숲 사이로 두 필의 말이 보였다. 나는 중공군 포로에게 총을 겨누고는 말을 끌고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덤불 속을 헤치고 두 필의 말을 끌고 와서는 나보고 타라고 손짓했다. 내가 중공군 포로에게 노획한 따발총과 따꽁총을 말 안장에 잡아 매라고 하자 그는 말 안장에 총을 단단히 매었다. 그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말 한 마리는 그가 끌고 앞장 섰으며 나는 다른 말에 올라 타고는 비좁은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30여 m 앞의 우측 산등성이에서 중공군 15명 가량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말에서 내려와 엎드려 사격태세를 취했다. 앞서 가던 중공군 포로는 내가 따라오지 않으니까 뒤를 돌아봤다. 나는 포로에게 눈짓 손짓으로 우리 앞으로 내려오는 중공군을 가리켰다. 그때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엎드려 적에게 총구를 겨누고는 여차하면 사살하리라 마음먹고 적의 동향을 살폈다.
  
  그런데 내가 잡은 키 큰 중공군 포로가 말 안장에 매달린 따발총을 재빨리 끌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발포하려는 순간 그는 무심코 다가오는 중공군들에게 위협사격을 가하고는 무어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중공군들은 벌벌 떨면서 키 큰 중공군 포로 앞에 일렬횡대로 정렬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랠래』하고는 엎드려 총구를 겨누고 경계하는 나를 손짓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다가가니 키 큰 중공군 포로는 나에게 중공군을 무장해제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가 하는 행동이 미덥지 못했으며 내가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순간에 혹시 나를 해칠까 의심이 났다. 그래서 나는 키 큰 중공군 포로에게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라고 손짓했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중공군들로부터 일일이 총을 빼앗았다. 빼앗은 무기를 보니 따발총, 따꽁총, M1 소총, 칼빈 소총, 일본군 구구식 소총 등 각국의 소총들이었다. 키 큰 중공군 포로는 빼앗은 총들을 말 안장에 묶었다.
  
  그런데 중공군 포로의 배가 유난히 부르기에 살펴보니 옛날 우리나라에 있었던 비단(모 본단) 반 필 가량을 배에 감고 있었다. 나는 비단을 빼앗아 마침 지나가는 산골 피난민에게 주었더니 고맙다며 굽실거리며 갔다. 또 한 중공군은 성냥알을 한자루 메고 있었고, 몇 사람은 미군에게서 뺏은 치약, 담배, 껌, 만년필과 중공제 담배를 갖고 있었다.
  
  나는 키 큰 중공군 포로를 선두에 서게 하고 다른 중공군 포로에게 말을 끌게 하고는 강변을 따라 화천댐에 도착했다. 나 혼자서 여러 명의 중공군 포로를 인솔하는 것이 힘들었고 같이 갔던 노무자가 도망가지만 않았더라면 힘이 덜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중대 및 대대본부가 있는 발전소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대대장과 중대장을 위시한 全부대원들은 나를 열렬히 환영하여 반겼다. 나는 갑자기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포로를 잡게 된 경과를 자세히 보고했다. 중대장은 내 말을 자세히 듣고 나더니 도망간 키 작은 중공군 포로를 마저 잡아 오라고 하였다.
  
  
  퇴비 더미 속에서 붙잡힌 어린 중공군
  
  나는 취사장에 가서 허기를 채우고는 1개 소대를 인솔, 또다시 산골 민가로 향했다. 그때가 1951년 5월 말께인 것 같다. 댐을 건너 강변을 따라 올라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1개 분대를 인솔, 전투대형으로 골짜기를 따라 올랐고, 다른 2개 분대는 1개 분대씩 나누어서 양쪽 능선을 따라 전진해 올라갔으며 골짜기를 수색하는 우리 분대를 엄호하였다. 그때 당시 장교가 충원이 되지 않아 내가 직접 지휘했다.
  
  우리들은 비를 흠뻑 맞으며 아까 왔던 민가에 도착, 수색했으나 놓친 포로는 없었다. 아군은 산등성이에서 우리 분대를 엄호하기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나는 분대원들과 함께 민가를 지나 산봉우리를 향해 오르면서 수색을 계속했다. 그때는 비가 멎었고 하늘은 먹구름이 걷히고 구름은 동쪽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간간이 봄볕 햇살이 내려 쬐었다.
  
  그런데 앞을 보니 잡풀이 무성한 큰 무덤 같은 곳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수상히 여겨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무덤이 아니고 오래된 중공군 토치카였다. 그러니까 김이 나는 데는 토치카 입구였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니 비좁은 호 속에서 중공군 6명이 총을 껴안고 쪼그려 앉아 자고 있었다. 나는 대원들을 불러 그들을 모두 생포했다.
  
  중공군들을 생포, 하산하려 하는데 골짜기 덤불 속에서 말 울음소리가 났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 사람이 탈 수 있는 노새였다. 생각건대 아까 내가 키 큰 중공군과 나이 어린 중공군을 생포했을 때 추격해온 기마병의 노새인 것 같았다.
  
  우리는 중공군 포로를 데리고 민가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는데 다른 분대에서 아까 놓친 중공군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들에게 생포하게 된 경위를 물었더니 마당에 쌓여 있는 퇴비 더미 속에 중공군이 숨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 나이 어린 포로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울고 있었다.
  
  우리 소대는 중공군 7명과 말 6필을 잡아서 무사히 본대로 귀대하였다. 돌아와 보니 연대장 및 연대 참모진, 사단 정훈부 소속의 종군기자가 와 있었다. 연대장은 악수를 청하시며 전공을 치하하셨다.
  
  그때 당시 중공군은 아군 春期(춘기) 공세에 패하여 전력을 상실했으며 전력보강 및 再정비를 위해 시간을 얻고자 휴전을 제의했다. 미8군은 중공군의 제의를 받아들여 원산만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에서 회담을 하고 있었을 때다.
  
  
  잊혀진 戰功
  
  그러므로 전황은 약 1개월 이상 교착상태에 빠졌고 그로 말미암아 중공군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미약한 때에서 내가 잡은 포로는 敵情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존재였다. 내가 잡은 키 큰 포로는 장개석軍 상사 출신인데 장개석 장군이 패배, 대만으로 갔을 당시 도매금으로 중공군에게 편입, 아군 계급으로는 일등병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국부군 출신이라 천대를 받아왔으며 또한 감시대상이었다는 데 환멸을 느껴 아군에게 귀순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그후 내가 화천 발전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듣기를 나의 戰功(전공)이 신문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그 신문이 어떤 신문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부산에서 발간한 신문인 「민중신문」과 6사단 정훈부 발간 주보인 「블루 스타지」에 나의 전공이 게재되었다. 나는 그 신문을 오려 한동안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산리 전투를 거쳐 금성벌판을 점령하는 와중에 유감스럽게도 그 신문을 분실하고 말았다.
  
  그후 나의 戰功을 육군본부로 상신한 줄로 알고 있었으나 훈장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목숨만 건졌으면 되지 하고 신경쓰지 않았으며 나의 전공을 기억할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
  
  

  4편: 10세 소녀가 겪은 敵 치하 3개월
  
  『우리 애기가- 애기가 죽었어』
  
  폭격이 멎었다. 살아 있는 것조차 신기할 뿐, 가족들은 서로의 安危조차 묻지 않았다. 동네를 내려다 보니 어제까지 건재하던 곳이 사라져 버렸다
  
  趙惠蘭 서울 관악구 봉천11동
  
  어른들의 아이들 단속
  
  그날은 아침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그 해 무더운 여름 석 달 동안 비행기 폭격 소리, 기관총 소리, 또는 수시로 어느 집 누가 총살당했다는 소리를 매일 들어온 터였지만, 그날 아침부터 용산 쪽에서 울려오는 소리는 아주 기분 나쁜 소리였다고 생각한다.
  
  앉아 있으면 땅 속으로부터 『웅웅웅』하고 들려오는 소리, 서 있으면 공기를 가르고 무엇인가 날아 다니는 것 같은 섬뜩한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함성과 쥐 죽은 듯한 정적, 길거리의 사람들은 도망치듯 가고 있었다. 한낮이 지나자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서 들려 왔으며 길에는 꽤 많은 사람들과 부상자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진작부터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고 단속하기 시작했으며 어떤 일인지 며칠 전부터는 길에서 활보하던 인민군 내무서원, 또는 붉은 완장을 차고 아무 집이나 드나들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은 왜 아이들에게 입을 다물기를 강요했을까? 어른들의 이야기는 엿들어도 안되고 만에 하나 들은 얘기를 밖에 나가서 해도 안된다고 호통 치셨다. 오늘만 해도 어른들은 뭔가 알고 계실 텐데. 바로 앞집 2층 다락에는 「삼광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이 여름 내내 숨어 지내는 것이 우리집 변소(화장실)에서 정면으로 보였다. 손바닥만한 환기통으로 선생님의 덥수룩한 수염과 말라빠진 어깻죽지를 볼 수 있었고 가끔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약혼녀)가 그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에 그 쪽을 좀 자세히 볼라치면 엄마나, 하여간 누구한테든지 뒤통수를 얻어 맞기 일쑤였다. 그때는 내 입이 가장 위험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서울역 앞 지금의 남대문 경찰서 바로 뒤였다. 동네 이름이 「도동 1가」 수복 후 「양동」이라는 요상한 동네가 되었다가 지금은 「남대문로 5가」로 되어 있는 줄로 안다.
  
  
  『우리 애기가… 애기가 죽었어』
  
  어른들이 조그만 환기통 속의 선생님에게 조금 참으라고 눈짓을 한 것 같았는데 울고 싶을 만큼 기분 나쁜 분위기는 점점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초가을 오후가 거의 끝날 무렵 지붕을 뚫고 지나간다는 박격포 하나가 골목 건너 2층 집에 정확하게 내려 앉으면서 우리 동네는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길쭉한 방망이 같은 것이 바로 머리 위로 날아간 것 같았는데 그것이 「박격포」라는 것이다. 아주 멀리 날아간다고 「장거리포」라고 했으며, 또는 날아갈 때 북치는 듯 『둥둥』 소리가 난다고 「장구포」라고 아이들이 부른 것 같았는데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폭탄과 기관총 사격소리, 소위 함포사격이라 한 것을 남산 밑 民家(민가)에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은 어스름 저녁부터였다. 이미 여러 곳에서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 죽어가는 자와 부상자들의 흐느낌 소리가 공기 속으로 들려온다. 오히려 산 사람들은 너무 침착해서 누구의 지시라 할 것도 없이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빛 하나로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
  
  주로 日人(일인)들이 살던 낡은 목조건물 2층인 우리집은 아래층에는 나(10세)와 동갑내기인 「행일」이라고 하는 사내아이가 살았다. 물론 부모님과 세 동생, 여섯 식구가 살았고, 우리는 이층에서 역시 부모님과 4남매가 살았다. 맏이인 언니가 17세였고 바로 위 오빠가 13세였다.
  
  그때 애기 낳은 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된 아래층 행일이 엄마, 행일이 어린 동생들, 우리 식구 도합 12명이 폭격을 피한 곳은 日本식 아궁이인 「함실아궁이」 속이였다. 아직 부은 몸으로 갓난 아기를 껴안은 행일 엄마, 즉 아래층 아주머니와 온 식구가 좁은 아궁이 앞에서 각자 가져온 이불을 쓰고 쪼그려 앉아서 다같이 하늘의 뜻에 맡기고 엎드려 있었다.
  
  바로 이웃에서 신음 소리와 사람 살리라는 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있는데 바로 가까이서 들린 『작은 아버지,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 하는 소리에 같이 이불을 쓰고 엎드려 있던 아저씨(행일이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다가 우리 아버지의 제지를 받고 도로 바락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즈 애빈 어디 갔나?』
  
  아버지 물음에 아주머니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듯 이미 초저녁에 혼자 도망갔다고 했다. 극심한 폭격이 그 지역을 완전히 아비규환,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미 동네가 불바다가 되고 집들이 내려 앉기 시작하자 두 집의 아버지는 거의 동시에 식구들을 이끌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때 아주머니의 비명 소리와 처절한 울음 소리가 들린다.
  
  『우리 애기가… 애기가 죽었어』
  
  그때 아저씨가 완강하게 꾸짖었다.
  
  『조용히 해』
  
  사람 소리가 들리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때다. 우리는 거의 맨발에 불타는 집더미, 깨진유리, 파편들을 밟고 또 밟고 뛰었다. 이미 밤은 깊었고, 뒤돌아 본 집은 이미 무너져 내렸으며 밤하늘에서 내려 비치는 둥그런 보름달은 많은 사람들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보름달인지 지옥의 불인지 지금도 나는 구별 못하고 있다.
  
  죽은(?)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와 함께 양쪽 식구 12명이 길거리로 뛰어 나온 장소는 삼천동 고개라 불리는 남산과 그전병무청 쪽으로 가는 삼거리였다.
  
  널려 있는 시체,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날아다니는 유탄과 파편,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가는 곳은 남산 입구의 그들이 파놓은 방공호였다(지금 힐튼 호텔 근처가 아닌가 싶다). 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아이 여덟 명을 데리고 나올 때, 맨발에 팬티 하나씩 걸친 아이들이 상처 하나 없는 것을 보고 불가사의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다. 순간적으로 어른들은 아이들 몇은 희생되지 않을까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신 것 같다.
  
  피신용으로 파놓은 방공호는 이미 많은 사람이 들어차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지만 모두들 입을 다물고 조금씩 자리를 비켜 주었다. 굴 안은 깊고 꽤 넓었는데 입구에만 사람들이 있을 뿐 더 깊이는 들어갈 엄두도 못 내는 것이 이미 안쪽은 악취와 오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애기가 울었어』
  
  그때 들릴락 말락 아주 가냘픈 모기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순간 행일이가 소리를 지른다.
  
  『엄마, 애기가 울었어』
  
  어른들이 행일이의 큰 소리에 질겁을 하고 질겁을 한다. 어른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애기 목숨 정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애기를 끌어안고 울었다. 조용히 하라는 아저씨의 나무람에도 우리는 새벽 밝아 오는 여명에 애기의 울음이 우리에게 큰 희망과 안전을 가져다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폭격이 멎고 새벽은 오는데, 자신이 살아 있는 것조차 신기할 뿐 구태여 서로의가족들의 안위조차 묻지 않는다. 날이 밝아 동네를 내려다 보니 어제까지 건재하던 동네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군데군데 부서진 서울역 건물만 겨우 보이고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지역(동자동 일부, 남산동, 도동 全지역)에서는 몇 사람이 죽었느냐가 아니고 누가 살았느냐가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오늘이 추석이다. 엊그제 양식을 조금 구해다 차례 준비를 해놨는데』
  
  그런 중에도 큰 아이들은 신문을 팔러 다니고 김밥과 주먹밥을 팔러 다녔다.
  
  『호외! 유엔군이 용산까지 왔습니다』
  
  『조간신문, 호외, 호외, 유엔군이 용산까지 들어왔습니다. 국군이 들어옵니다』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곳곳에 나타났다.
  
  『큰 길로 나갑시다. 태극기를 들고 유엔군을 맞으러 나갑시다』
  
  그 시기에 내가 국군과 유엔군과 인민군의 차이를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만 그 여름 석 달 동안 서울에서 저지른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만행은 열 살 먹은 내가 보기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주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이 좌경으로 치닫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내 기억만으로도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좌익들의 행태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행동이라고 막연히 느꼈을 때 『우리에게도 국군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조그만 태극기를 받아 들고 폐허가 된 집터를 지나 갈월동 굴다리 입구 큰 길가로 나갔을 때 우리들의 모양새는 어땠을까? 그때의 아버지는 이미 40 중반에 들어 선 여섯 식구의 家長(가장)이셨다. 그때 아버지의 우시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 같다.
  
  탱크 소리가 나고, 탱크 양쪽에 미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걸어가는데 나는 코큰 미군, 특히 흑인들이 너무 낯설어 쳐다 보고 있는데 (국군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앞으로 나가 그중 미군 한 명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나중에는 주저앉아 거의 소리나게 우셨는데 미군은 아버지의 어깨를 몇번 쓰다듬어 주고 곧 지나가 버렸다. 아래층 아저씨가 다가와서 두 분은 쪼그리고 한참을 계셨다. 그리고 아저씨는 내 머리를 한 번 만지고 곧 등을 돌려 떠나가셨다.
  
  그렇게 하룻밤, 아니 석 달 동안 지옥의 여름을 같이 보낸 행일이네 집과는 영원히 헤어졌다.
  
  다락방에 숨어 있던 삼광초등학교 선생님은 그날 밤 약혼녀와 노모를 양쪽에 모시고 나오다가 오른쪽에 있던 약혼녀가 고개에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제5편: 한 대학생이 쓴 敵 치하 서울 90일간의 일기
  
  나는 살아났다
  갖은 고통을 참고 살아난 내가 막판에 아군의 포탄을 맞고 죽을 위기에 빠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가 잦아졌다. 고요한 아침이 밝아오는 듯했다. 나는 지하실에서 마당으로 나와 기운없이 쓰러져 버렸다

  
  정한조 서울 관악구 봉천4동
  
  1950년 6월14일 수요일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가는 자식을 위하여 어머니는 지금 떡을 만드시느라 땀을 흘리고 계신다. 어머니란 말은 보살이라 들었다. 포근한 고향의 품을 떠나는 내 마음도 안되었지만, 자식의 성공을 위하여 온 정성을 떡 만드시는 데 쏟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옆에서 서울로 가져갈 책 여러 가지를 보자기에 쌌다.
  
  
  1950년 6월15일 목요일
  
  시간이 있으면 아버지가 일하시는 역 밑의 재목창고에 가볼 터인데 시간적 여유가 없어 바로 어머니와 역으로 나가 차표를 샀다. 역으로 따라 나오려고 보채는 여동생 경자에게 돈을 주며 『학교에 가야지,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야지』라며 타이르고 나왔다.
  
  쓰라린 어머니와의 이별 시간이 곧 다가왔다. 눈물을 흘리며 손짓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아!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소자는 성공을 위하여 서울에 공부하러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출세를 하여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손을 흔들며 서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뜨거운 눈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고 차는 떠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차는 곧 아버지가 일하시는 재목창고 옆으로 지나갔다.
  
  저 만큼 떨어져서 손을 흔들고 서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자 뜨거운 눈물이 왈칵 핑 돌았다. 아버지, 소자를 위하여 온갖 고생을 하시는 아버지, 꼭 성공하여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1950년 6월18일 일요일
  
  장억경, 유광섭, 신종환 친구들과 마포강으로 나갔다. 마포에는 지정순 누나가 있어 음식 솜씨를 자랑했다. 집에서 가져온 떡을 가방에 넣어왔기 때문에 나누어 먹었다. 떡이 맛있다고 해서 하숙집까지 데리고 와서 더 주었다.
  
  
  1950년 6월21일 수요일
  
  S가 몹시 그립고도 보고 싶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강변으로 나오면서 전차 정류장까지 그 생각만 하고 걸어나왔다. 하루빨리 강의가 시작되어야지 잡심을 하다니…. S의 모습을 뿌리치고 전차에 올랐다. 집으로 가다 말고 곧장 도서관으로 나가서 소등시간까지 책을 보았다.
  
  
  1950년 6월24일 토요일
  
  학교에 나가 보니 흑판 게시판에 등기가 왔다고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등기를 펴보니 6000환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돈을 찾았으나 등록금은 내지 않았다. 왕태와 억경이가 등기 왔으니 한 잔 하자고 졸라댄다. 나는 속으로 「난 너희들과 같은 갑부의 자식도 아니며 여유 있는 돈도 아닌 등록금인데 한푼도 헛되게 쓸 수 없다. 이 돈은 부모님이 피땀으로 해서 보낸 것인데 내 어찌 함부로 쓴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전국 체육대회 육상여자 100m 경북대표 선수로 상경한 S를 만나기 위하여 7시 30분 서울역 앞 협동호텔에 갔으나 대구고녀 운동선수는 이 호텔을 떠나 서울역으로 나간 후였다. 100환짜리 입장권을 사 가지고 역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여학생이 모인 곳으로 가서 S를 찾아내었다. 못 만나고 떠날 줄 알았는데 내가 찾아와서 S는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다.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눈과 마음으로 장래를 약속하며 아쉬움을 나누었다. 무정하게 떠나는 신호를 남겨두고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S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고 순간적이라 미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헤어진 마음의 공허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숙집으로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해서 S를 내 아내로 맞을 것이라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1950년 6월24일 토요일 밤 바로 이날이다. 내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은 날일 줄이야….
  
  大文豪(대문호) 소설가, 신문사 편집국장이 되려고 많은 책도 읽고 습작하던 내가 서울에 상경, 그 뜻을 펼쳐 보려고 희망했는데 통신장교로 임관되어 지금은 편집국장이 아닌 전화국 국장으로 정년 퇴직하였으니 말이다. 이날부터 9·28까지 그리움과 고통으로 참을 수 없는 굶주림의 나날을 보냈으니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은 후일이요, 나에게는 이날의 비극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6·25를 통해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신이 나를 지켜주었으며 무슨 어려운 일에도 굴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굳은 의지와 결단심을 가지고 모든 일에 자신을 갖고 노력하는 인내심을 키운 것이다. 철저한 반공심으로 나는 살아난 것이다. 이 철저한 인생철학으로 갑종간부 42기 후보생으로 논산에서나 통신 20기 광주에서의 고된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한창 치열했던 북한강 949고지 전방에서 통신장교의 직분을 잘도 이겨내고 제대한 것이 아니던가….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되었으며 명심보감에 말씀하시기를 천명을 순종하는 자는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신념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오늘의 복을 누리게 됐다고 믿는다. 평소의 민주주의 사상을 건전하게 올바르게 지니고 있었음으로 나는 산 것이다. 자유진영이 반드시 승리하고 공산주의는 망할 것이며 서울탈환이 반드시 올 것으로 사상적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2만4600환. 이것이 나를 살린 것이다. 모든 일에 절약하고 절제로서 처신하는 일이다. 세상의 인정은 곧 돈 있는 곳으로 쏠린다고 했다. 사람의 의리가 돈으로 인해서 끊어지고 돈이 살린다고 했다. 6월24일 등기로 올라온 6000환을 찾아서 등록하고 나머지를 썼더라면 그 어려운 시기에 무슨 돈으로 장사를 했더란 말인가? 또한 무슨 힘으로 생명을 보존했을까?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힘이요, 진실한 사랑은 오아시스의 샘이었다. 쓸쓸하고 어렵고 고생이 되어도 S를 꼭 만나야지 하는 마음이 위안이 되었고 딴 여자에게 곁눈질도 안하고 잡념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6월24일 저녁차로 내려갈 때 약속한 미래는 꼭 이룰 것이라고 마음먹었던 보람으로 S와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되었으니 사랑의 힘이요, 인연이 열매되어 결혼했다고 본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학교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무슨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꼈다.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문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옆으로 군용트럭이 폭주를 하고 군인들이 지프로 요란스럽게 지나갔다. 평상시와 다른 급박한 공기가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안색이 달라 불안한 마음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서울역에 내려서야 38선 이북에서 공산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프 군용차가 서대문 쪽으로 질주하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놀란 피난민들이 떼지어 서울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고 바람결에 은은한 포성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두려운 생각이 든다. 피난민과 부상병이 계속 시내로 밀려들어온다. 나는 곧장 서대문 우체국에 가서 고향으로 전보를 치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1950년 6월26일 월요일
  
  전세(戰勢)를 알아보기 위해서 학교로 나갔으나 강의도 없고 별다른 조치도 없이 10시가 되었는데 하늘에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서 기관총으로 『따다닥』 쏘기 시작하더니 밑에서도 대포로 『쿵쿵』 하고 쏘지 않는가…. 아이고 정말 전쟁이 났구나 싶었다. 집합종이 울려 강당으로 모여 임시 휴교발표를 들었다.
  
  친구와 노량진으로 나오니 한강 인도교가 차단되었음을 보고 한강 벽을 내려가서 친구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한치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건너지 말라고 하는 한강을 건너서 서울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곧장 대구로 내려갈 것이지….
  
  그때 내려갔으면 긴 고생과 굶주림을 면했을 것을…. 남산 위에 시꺼먼 먹구름이 덮이고 초저녁에 어둠이 깔릴 때 북쪽 골짜기 뒤에는 북괴군 2개 사단이 남쪽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李承晩(이승만) 정부는 현재 북한 괴뢰군이 쳐들어오고 있으나 대한민국의 강한 국군에 의해서 다시 통일될 것이니 정부의 성명서를 믿고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라는 말을 했다.
  
  이를 믿었던 내가 너무나 어리석지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그런 말을 해놓고 28일 오전 2시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경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수천 명의 시민을 죽게 하고 한강 이북에 남아 있던 4만4000명의 병력을 묶어버리고, 또한 대포와 장비와 함께 선량한 150만 서울시민의 발을 묶어놓고 그 고생을 시킨 것이다.
  
  
  1950년 6월27일 화요일
  
  나는 아침을 먹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싶어 서대문 경찰서 앞으로 나가서 신문을 샀다. 현재 북한 괴뢰군이 이남으로 개성 백전 응진 동두천 춘천 포천 문산 주문진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 국군은 격퇴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했다. 저녁에는 의정부까지 공산군이 쳐들어 왔다고 보도되었다.
  
  나는 곧 짐을 정리하고 내려갈 준비를 했다. 서울역으로 나갔으나 오늘 오후 2시에 경부선 열차가 막차로 떠나버린 것이다. 대전으로 가는 차가 있을까 하고 알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초조한 저녁 때 부슬부슬 비까지 오니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온다. 내 어찌하여 내려가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는고…. 원망스럽고 비통스러운 생각에 안절부절 방에 있을 수가 없어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돈암동에서 오는 길인데 곧 북괴군 탱크가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맙소사 때는 늦었구나. 나는 속으로 울었다. 어머니 소자는 어찌하오리까…. 비는 점점 퍼붓고 있으니 피난 갈 방향조차 알 길 없다. 앞이 캄캄하다.
  
  아! 서울도 최후가 되었구나, 상황을 전환시킬 아무런 힘이 없음을 한탄했다. 그때 기나긴 사이렌 소리가 기분 나쁘게 억척스럽게 오는 빗속 사이로 들려온다. 나는 즉각적으로 서울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임을 알아차렸다. 한잠도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1950년 6월28일 수요일
  
  악몽의 밤이 지나고 밤새도록 오던 비도 말끔히 사라지고 날이 밝아졌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연대 친구를 찾아 철도관사를 지나 순화동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울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한강 인도교가 파괴되고 철교마저 끊겼으니 남쪽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지금 시청은 공산군에게 점령되고 시내에는 탱크가 행진하고 있다고 했다. 맥이 탁 풀린다. 이 일을 어찌할까 앞이 캄캄했다.
  
  총소리와 탱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요란하게, 가까이…. 나는 하숙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는데 어찌하랴. 멀리서 만세소리까지 들려오니 꼼짝없이 당했구나 싶었다. 나는 나갈 생각도 없이 누워버렸다.
  
  구경을 나갔던 주인집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서대문 쪽에서 수천 명의 죄수가 문을 부수고 로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누워서 고향 부모형제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모든 일이 꿈만 같다. 라디오와 신문을 믿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때 동대의 중호가 와주었으면 의논이라도 할 것인데 그의 주소를 모르니 한스럽기만 하다.
  
  
  1950년 6월29일 목요일
  
  지금은 학교에 나갈 수도 없다. 공산주의 학생들이 활개를 치고 있을 터인데 친구 만나러 나갔다가 큰일 날 것이 뻔하다. 강의가 없는데 나갈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북괴 비행기는 서울 상공을 날면서 무슨 삐라를 뿌리고 있는데 알게 뭐냐… .수많은 시민들이 어떻게 피난할 것인지,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으로 옮긴다고 했는데 갈 사람은 다 가고 바보만 남았으니 아득하게 보이는 천장만 쳐다보고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별 궁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1950년 7월1일 토요일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와 신문을 한 장 사서 보았다. 그것은 조선인민보였다. 그곳은 지리산 유격대가 벌써 함양 염양 진주 방면으로 설치는 보도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평양 상공에 나타난 B29기를 11대나 격추시켰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남대문으로 나가 구두 밑창을 500환 주고 단단히 수선했다. 그리고 시장으로 들어가서는 오징어 20포를 사 가지고 나왔다. 배가 고프면 그것을 씹고 견딜 생각으로 산 것이다. 1000환을 주었다. 옆에는 맛있는 떡이 눈에 빛났으나 꿀꺽 침을 삼키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 이후 어찌될지 모르는데 일전 한푼 헛되게 쓸 수 없는 것이다.
  
  
  1950년 7월6일 목요일
  
  하숙집의 눈칫밥은 참으로 거북스럽다. 한술 얻어먹고 나오는 마음은 무겁고 힘이 들었다. 할 일 없이 잠깐 밖으로 나가 신문을 사 보았더니 미군과의 첫 대전이 실려 있었으며 미군의 야포를 비웃으면서 그 옆을 지나가는 탱크부대의 자랑을 보도하고 있었다. 계속 남진하는 보도다. 내일이면 천안을 함락시킨다는 것이다.
  
  
  1950년 7월7일 금요일
  
  미군과 국군의 全병력이 금강으로 후퇴해서 사방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나 탱크는 계속 진격한다고 보도했다.
  
  
  1950년 7월11일 화요일
  
  이른 아침 공산군이 조치원으로 쳐들어가니 10명 중 9명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더라고 보도했다.
  
  
  1950년 7월12일 수요일
  
  대전까지 탱크가 진격하고 있는 보도가 나오니 맥이 탁 풀린다. 어찌하여 미군과 국군은 이를 저지하지 못하고 후퇴만 계속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저녁 하늘에는 먹구름이 덮여 한 차례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오징어를 씹으면서 먼 고향의 모습을 그리면서 답답한 가슴을 억누른다.
  
  
  1950년 7월13일 목요일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한 술 얻어먹고 방에 와서는 시원한 바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고 있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누가 찾아왔으니 일어나라고 했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너무나도 반가운 중호가 찾아온 것이다. 『너는 참 세월 좋구나, 낮잠 자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얼굴은 웃고 있으나 건조되어 말라붙은 모습에 서글프게 찌그러져 있었다.
  
  군복을 염색해 입은 옷차림에다 굶주리고 지친 마른 입술에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나의 손목을 잡고는 『한조야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으니 죽든 살든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다. 나하고 같이 내려가자…』하고 말을 건네왔다. 나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모험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하였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고향으로 가야 한다. 믿음과 신념을 갖고 있었다. 자유진영이 얼마 후에 반격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1950년 7월14일 금요일
  
  중호를 보내고 난 후에 나는 후회를 했다. 미군의 폭격이 위력이 없고 괴뢰군은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심정이다. 아침을 먹고 나는 곧 남대문으로 나갔다. 무슨 장사라도 해서 장기전으로 살아보리라 마음먹었다. 남대문 자유시장을 이곳 저곳 찾아다니며 무엇이 나에게 적합한 장사거리가 될 것인가를 살펴봤으나 하나도 내키는 것이 없었다.
  
  점심 때가 지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기운이 하나도 없다. 왜 이렇게 먹고 싶은 것이 많을까.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고 눈물이 나오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까봐 피하듯 돌아왔다.
  
  밖에서 저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배가 고프니 그 소리가 더욱 귀에 잘 들려온다. 눈칫밥이라도 얻어 먹고 살기 위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참아가면서 견디었다. 고통은 시련이요 수양으로 이겨야 한다는 새로운 굳은 결심을 하고….
  
  
  1950년 7월15일 토요일
  
  잠이 깼으나 거북스러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얻어먹는 주제에 그들 앞에 나가기가 싫었다. 그들이 마루에서 밥을 다 먹었을 즈음 슬그머니 나가서 세수를 하였다. 그들도 사람이라 밥을 먹으면서 모르는 체하랴….
  
  그때까지 나는 싫어도 방에 누워 있어야 했다. 야윌 대로 야윈 내 몸에 무슨 피가 있다고, 언제부터 생겼는지 빈대까지 나와서 밤새도록 나를 괴롭혔다. 아침에 물밀 듯이 찾아오는 잠을 나는 결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아침밥을 놓칠까 싶어 온 신경을 밖으로 쏟아야 했다.
  
  아침을 먹고 나오는 나를 주인 아주머니가 붙든다. 자기들도 지금 돈과 양식이 떨어졌으니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내놓으라고 한다. 울고 싶은 심정이다. 나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면서도 부탁하는 그들의 처지가 오죽 딱했으면 말했을까 짐작된다.
  
  물론 내 호주머니에 생명과도 같은 돈이 숨어 있으나 200환밖에 없다고 나오지 않은 땀을 닦았다. 친척집에 찾아가보겠다고 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나에게 서울 친척집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한 곳 있기는 하지만 아주 먼, 촌수도 없는 그런 집이 한 집 있기는 있었다.
  
  
  1950년 7월16일 일요일
  
  아침을 먹고 난 뒤 주인 아주머니에게 친척집에 간다고 하고 나왔다. 참으로 막연하였다. 중호가 다시 찾아와 준다면 나는 그를 따라 고향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독하고 힘 없는 발길은 나도 모르게 남대문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인민군의 붉은 깃발이 이리저리 나부끼고 그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시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나는 우연히 좋은 장사거리를 발견하였다. 나는 생기가 돌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1000환을 주고 런닝 셔츠 하나를 사 입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오늘 친척집에 가서 2000환을 얻어서 1000환은 런닝셔츠를 사 입고 남은 돈이라며 1000환을 주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주인 아저씨는 동정하는 눈치로 나를 감싸주었다.
  
  
  1950년 7월26일 수요일
  
  인민군의 탱크는 낙동강 근방으로 진격중이라고 보도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남대문 한 모퉁이에 밥장사 하기에 좋은 자리 하나를 마련하고 왔으니 그곳에서 밥장사를 하자고 권했다. 자기들도 지금 굶주리는 처지라 귀가 번쩍했다. 쌀은 큰사위가 잘 아는 영등포에 가서 사오기로 하고 필요한 그릇과 의자를 준비하였다.
  
  
  1950년 7월27일 목요일
  
  오늘부터 하숙집 아주머니와 남대문 노상에서 음식장사를 시작했다. 막걸리도 같이 팔았다. 나와 큰사위는 영등포에 가서 쌀을 팔아오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6·25 전에는 마포 파출서장으로 있던 위인이 굶주림 앞에는 그도 별도리가 없어 나와 함께 영등포로 쌀을 사러 가는 것이다.
  
  
  1950년 7월28일 금요일
  
  오늘도 큰사위와 영등포로 쌀팔러 나섰다. 쌀을 두 말씩이나 짊어지고 오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찌는 듯한 한여름이라 말라붙은 몸에 웬 그렇게 땀이 많이 나는지. 마포 모래사장을 걸어오니 죽을 지경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얻어먹어야지 어찌하랴. 고생 끝에 낙이라, 오늘부터 대우가 달라지고 막걸리까지 곁들이고 오래간만에 주린 배를 채우게 되었다.
  
  
  1950년 7월29일 토요일
  
  큰사위가 몸살로 드러눕게 되자 나 혼자 영천고개를 넘어 20리나 되는 시골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쌀 팔러 나갔으나 없어서 사지 못하고 오는 길에 호배추를 사가지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서 오래간만에 목욕을 하였다. 그리고 오는 길가에 담배장사를 할 수 있는 시골 가게 집을 눈여겨보고 왔다.
  
  
  1950년 7월30일 일요일
  
  오늘부터 나는 아침 일찍 남대문에 밥장사할 물건을 실어다 주고는 담배장사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고 담배장사 도매집으로 찾아갔다. 담배는 진짜와 가짜가 있어 공작 샛별 화랑을 취급하고 있었다. 나는 3000환을 준비해서 샛별 가짜 한 보루를 사 가지고 영천행 전차를 타고 독립문에서 내려 그곳에서 담배를 다 팔았다.
  
  나는 꼭 살아남아서 그리운 고향으로 가서 부모형제를 만나리라….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비굴하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리라. 담배장사로 1500환을 벌고 보니 아침을 조금 먹고 온종일 굶은 몸에서도 기운이 솟았다. 그렇다, 눈칫밥은 그만 먹으리라. 이 약한 몸으로 병이라도 얻으면 모든 결심이 허사가 될 것이다. 내일부터 독립하여 내 자신이 자취를 하며 살아가리라.
  
  
  1950년 7월31일 월요일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주인 아주머니를 찾았다. 『지금까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이 어려운 때 나도 가만히 먹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친구와 무슨 장사라도 해서 그 돈으로 자취를 할까 생각하였습니다. 미안하지만 밑천이 없으니 돈 4000환만 빌려주시면 5일 후에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솥과 냄비 그릇을 빌려주십시오』 했더니 선뜻 응해주었다.
  
  물론 나에게도 돈이 있었지만 지난번 돈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빌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오늘은 대담하게 공작 담배 가짜를 두 보루 사 가지고 영천으로 해서 시골가게를 찾아다니며 다 팔고 올 수가 있었다. 오는 길에 호박 2000환 어치를 사와서 저녁을 대신했다.
  
  
  1950년 8월1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남대문으로 나가려고 나설 때 주인 아주머니가 곧 밥이 되니까 먹고 나가라고 했다. 참으로 고마웠다. 나는 속으로 내가 살아남아서 꼭 이 은혜를 갚으리라고 마음먹었었다.
  
  어제 배가 고파서 참외로 점심을 했던 것이 탈이 되어버렸다. 약방에서 약을 사 먹었으나 별 효력이 없었다. 점심은 옥수수로 때웠다. 20리를 나가서야 담배를 다 팔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200환짜리 밥을 사 먹고 들어왔다.
  
  
  1950년 8월2일 수요일
  
  고픈 배를 졸라매고 나가려는 찰나 주인 아주머니가 부른다. 밥 먹고 나가라고. 그러나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물건을 살 수 없다』하고 뛰쳐나왔다. 100환짜리 주먹밥을 사 먹고는 한 사발 물로 배를 채웠다. 많이 걸어다니다 보니 구두 밑창이 헐어서 발이 나왔다. 그것을 수선하다가 문득 마포에 사는 김도순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한때 그의 딸과 혼인 이야기가 어른들 간에 있었으나 S가 있는 내 마음에 될 법이나 했던가….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는 중호와 함께 그 집에 하숙했다가 얼마 후 이 집으로 옮긴 것이다. 마포에 찾아갔더니 모녀가 집에 있었다. 반가워서 야단치며 맞이하는 그 情이 너무나 고마웠다. 내 꼴이 너무나도 안되었던지 서둘러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왔다. 밥 같은 밥을 정말 오래간만에 먹었다. 지난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그 집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보리쌀 한 되를 사 가지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서글프게 쳐다보았다. 밥을 줄 터이니 이리 오라고 했다. 먹고 왔다고 하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와서는 눈물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을 열고 달을 쳐다보니 눈물이 더욱 나와서 옷을 적시고 또 적셨다. 어머니, 꿈에라도 좋으니 한 번 보여 주십시오. 아, 어떻게 이 전쟁을 피해 고향을 찾아갈꼬….
  
  인민군은 계속 南으로 南으로 진격하고 아군의 반격은 어느 때 한단 말인가. 굶어죽고 난 뒤에 국군이 승리한들 무슨 소용인가. 밤에 B29기가 와서 공습을 하지만 희망은 없다. 하도 답답하여 건넌방으로 갔더니 그 집 사위가 숨어서 UN방송을 듣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건너가서 이 방송을 들으며 아군의 반격 날이 어느 때인가 귀를 기울이곤 했다.
  
  
  1950년 8월3일 목요일
  
  오늘 아침 나는 또 한 끼를 얻어 먹었다. 외출해서는 보리쌀 한 되를 더 사 가지고 왔다. 요즈음 갑자기 심한 공습을 보고는 혹시 외출할 수 없으면 곤란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4일 금요일
  
  지난밤에 낙동강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나마나 어두운 밤에 수천 명의 피난민이 강 속으로 빠졌을 것이다.
  
  
  1950년 8월5일 토요일
  
  UN방송에서 괴뢰군은 점령한 지방에 통치의 태세를 갖추고 치안유지를 하고 있으며 전직 관리였던 사람들은 한갖 서기에 이르기까지 투옥하거나 살해되고 있으며, 地主는 즉각 처형하고, 동조하지 않은 사람은 마구 죽이고 있다고 했다. 지금 서울에서도 수많은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북한 괴뢰군에 편입시켜 남쪽으로 보내며 나머지를 봉사대로 동원시키고 있었다.
  
  
  1950년 8월10일 목요일
  
  주위의 공기가 심상치 않아 담배장사를 나갈 수가 없었다. 영등포에 있는 친구 종한이 집으로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보리밥을 해먹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무덥고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아서 모든 것이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마포 강을 건너려니 여전히 식량 구하러 나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인민군들은 이쪽저쪽 보이지만 별로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숨은 듯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뜨거운 마포 모래사장을 지나 바쁘게 굴다리를 빠져 나가다가 김도순 아주머니의 딸을 만났다. 시골에서 식량을 구해오는 길이라고 했다.
  
  『지금 어디 가세요』
  
  그는 반갑게 나를 대해 주었으나 친구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고는 떠나려고 하는데 우리 학교 경제과에 다니는 고향친구를 만났다. 그는 영등포동 인민위원회에 있다고 하며 무슨 서류를 잔뜩 가지고 뽐내는 것이다. 나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그 얼굴을 살피니 별로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나 불안했다. 그가 떠날 때까지 도순 딸은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꼭 들를 터이니 가보라고 했다. 영등포역 앞에 있는 종한이를 찾아갔더니 시골에 가고 없다고 한다. 이틀이나 사흘이나 대중없이 온다는 것이다. 맥이 탁 풀리고 기운이 없어진다. 그 집에는 그의 아버지와 백모가 단 둘이 있었다. 양반에다 부잣집이라 쌀이 넉넉히 있는 모양이었다. 친자식처럼 나를 위로해 주며 쌀밥을 수북하게 한 사발 해서 콩기름으로 주물러서 만든 콩나물과 야채반찬을 차려주었다. 맛있게 먹고 그 집을 나왔다. 오는 길에 고구마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1950년 8월15일 화요일
  
  점점 불안해진다. 지금쯤 종한이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종한이 집으로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 생각에 마포로 나갔다. 마포 강을 건너고 막 모래사장을 지나려는데 인민군 놈들이 젊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집합시키고 있었다. 이크, 큰일났구나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놈들이 다시 오는 배를 향하여 그곳의 젊은이를 잡기 위하여 가는 때를 놓칠세라 먼저 배에서 내려온 사람들 틈 속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면서 휙 뒤를 돌아보니 그들은 도망치는 나를 보고 따라올 듯하더니 멈추고 말았다. 사람들에 끼어 도망치고 있으니 총을 쏘지도 못하고 따라오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잡아놓은 젊은이들을 놓칠까봐 주춤한 것이다. 만일 이때 잡혔다면 어찌되었을까. 등골이 서늘해진다. 십중팔구는 의용군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나는 영등포에 들어갔다. 또 의용군으로 붙들릴까봐 방송국 뒤를 돌아서 역전 앞으로 가지 않고 시장 쪽 뒷골목을 돌아서 종한이 집으로 찾아갔다. 물론 종한이는 있을 리 없었다.
  
  백모에게 위험한 고비를 넘겨온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백모는 나를 동정하여 집에 있으라고 했다. 아,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또 있으랴. 손잡고 고맙다고 울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우선 이 집에서 먹고 자게 되었다. 밤이 늦어도 종한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1950년 8월16일 수요일
  
  아침 일찍 종한이의 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나갔다. 일손이 없어 풀이 나무같이 커서 엉망이다. 신세지는 처지에 자진해서 열심히 밭을 매기 시작했다. 속으로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이니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하루종일 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더워서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하는 것이다.
  
  백모가 밭으로 찾아와서 아침이 다 되었으니 식사하라고 했다. 세상에 별일도. 지금은 남의 집 머슴이 되었으니 그것도 친구 집의…. 그러나 나는 좋았다. 그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이때까지 먹어보지도 못한 쌀밥을 먹게 되었으니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던가.
  
  그날 밤 종한이가 돌아왔다. 얼마나 반가운지 눈시울이 뜨거웠다. 할 이야기도 많지만 자기 아버지에게 나에게 밭 매는 일을 시키지 말라고 당부하는 고운 마음은 너무나도 고마웠다. 목욕을 하고 마루에 앉아 다정했던 지난날을 밤 늦도록 이야기했다.
  
  
  1950년 8월10일 토요일
  
  생전 해보지 않던 밭 매기에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자식처럼 위로하고 동정해주는 고모는 누룽지까지 남겨 두었다가 나에게 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궁금해서 살며시 시장쪽으로 나가 동정을 살폈다. 인민군이 영등포에 무척이나 많이 집결돼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다가 인민군 장교와 부딪치고 말았다. 『동무 어디 가는가?』 하고 의심스럽게 묻는다. 『구위원회에 있는 동무를 기다리는데 같이 가려고 기다린다』고 했다.
  
  그는 『수고한다』고 했고 나도 그를 보고 『수고한다』고 했다. 속으로 「이놈들 너희들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데 어서 꺼져라」하고 싶었다. 그는 먹던 참외를 나에게 건네주었으나 거절했다. 내가 아무리 굶어죽을망정 너희들이 주는 참외를 먹을 것 같으냐, 나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슬슬 정보를 캐내고 싶었다.
  
  그는 신의주에서 20일을 걸쳐 걸어왔다고 하며 내일 탱크를 인솔하고 南下하는데 낮에는 못하고 주로 밤을 이용해서 행동한다고 했다. 물론 잠은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인다고 했다. 학식은 없고 이론과 투쟁심이 강하며 철저한 훈련을 받고 온 듯했다. 오래 머물다가 탄로날까봐 시간이 되었으니 곧 가야 한다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1950년 8월20일 일요일
  
  이곳에 며칠 묵고 보니 이 영등포가 남쪽 집결지임을 알았다. 모든 병력과 장비가 이곳에 집결되고 새로운 전투지시를 받고 南下하는 것을 알았다. 밥을 먹고 있는데 누가 대문을 두드린다. 나는 방 안으로 숨어들어 문 사이로 밖을 살펴본 즉 3명의 인민군이 물을 얻으러 왔는데 백모와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농사짓다가 의용군으로 끌려온 듯하며 말씨가 유치하고 얼굴은 굶은 탓인지 말라붙어서 눈동자가 흐릿했다.
  
  그중의 한 사람은 고향이 그립고 부모형제가 보고 싶다고 했으며 지금 자기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고 난 후에 백모 보고 다시는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했다. 가만히 숨어 있으면 된다고 했다. 때마침 급습하는 제트기 B29가 까맣게 폭탄을 싣고 영등포 상공을 덮었다. 제트기야 『꽝 꽝』 부숴서 반격해다오. 백모와 한 구석에 숨어서 빌었다.
  
  
  1950년 8월22일 화요일
  
  이 집에 온 지 꼭 일주일. 등잔 밑이 어둡다고 공산군 굴 속에 있던 나도 이 집을 떠나야만 했다. 동네 사람들이 숨어 있는 나를 수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동회장 귀에 들어가서 종한이 아버지가 불려간 것이다. 자식 친구이고 볼 일이 있어 잠깐 들른 것이라고 잘 말했으나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 뻔했다. 종한이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가 붙들어도 나는 있을 처지가 못되는데 고마운 친구다. 나에게 쌀 한 말과 보리쌀 한 말을 자루에 넣어서 주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그 집을 나오면서 장차 꼭 이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서있는 종한이에게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오는 길에 저쪽 남쪽으로 뻗어 있는 고향 길을 바라보고 그리운 향수에 발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 길로 곧장 내려가면 고향으로 가는데 그리운 어머님을 만날 수가 있는데, 눈물이 흐르고 흘러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 자리를 떠나 무사히 마포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마포시장에 가서 보리쌀 네 되를 5200환에 팔고 한 되만 갖고 가기로 했다. 앞으로 장사를 하려면 자본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마음이 좀 든든했다. 하숙집으로 들어서니 주인 내외가 걱정하며 가다리고 있었다. 저녁은 내 손으로 보리밥을 해 먹었다.
  
  
  1950년 8월24일 목요일
  
  요즘은 길가에서 청년을 보면 막 잡아다가 의용군으로 보낸다는 정보를 받고 집에 있기로 했다. 제트기가 쉴 새 없이 서울 상공을 급습하고 유엔 방송에 군산상륙과 인천 함포사격, 원산 함포사격이 개시되고 맥아더 방송에서도 총 반격전을 시도한다는 보도를 듣고는 전세가 달라질 가능성이 엿보여 마음이 놓였다.
  
  
  1950년 8월28일 월요일
  
  괴뢰군의 공격이 약화되고, 괴로운 지경에 이르고 전투능력이 전에 없이 저하된 것을 알았다. 전세의 전환점이 온 것이 분명했다. 서울이 적어도 한 달 후에 탈환되리라 확신을 얻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괴뢰군은 힘이 빠진 모양이다.
  
  나는 앞으로 한 달을 지낼 수 있는지 따져 보았다. 식량으로는 15일간을 지낼 수 있고 남은 돈으로 15일간을 지낼 수 있었다. 나는 희망이 있음에 용기가 솟아났다. 그렇다. 그때까지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1950년 8월29일 토요일
  
  고구마보다는 보리쌀이 훨씬 좋다고 생각되어 두 관에 2200환으로 팔고 보리쌀을 샀다. 현재 호주머니에는 17200환이 남아 있다. 밀가루를 1되 500환 주고 샀다.
  
  
  1950년 9월2일 토요일
  
  이불을 2중 3중으로 덮어쓰고 한국방송과 東京방송을 들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고 시작되는 우리 방송. 참아달라는 李대통령의 목소리와 격려해주는 맥아더 장군의 반격전의 보도를 들으니 꼭 살아날 것을 더욱 굳게 마음먹었다.
  
  
  1950년 9월4일 일요일
  
  밤새 비가 내린 후 맑고 무더운 날이 시작된다. 괴뢰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있는 보도를 들었다. 불덩이 같은 해가 굶주리는 나의 힘을 더욱 빼고 방에서 일어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힘이 없다.
  
  
  1950년 9월16일 토요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D데이가 바로 어제 오전 6시30분에 시작됐다. 용감한 우리 해병대가 작전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천을 둘러싸고 완전히 괴뢰군 목표물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조심스럽게 이불을 확 덮어쓰고 들었다. 만약에 들키면 총살감이다.
  
  李대통령도 눈물 섞인 목소리로 우리에게 방송하고 있었다. 승리는 곧 우리의 눈앞에 다가왔으니 조금만 더 참으라고 호소하고 맥아더 장군의 東京방송도 역시 승리의 예고 방송이라 나는 너무 기뻐서 이불 속에서 엉엉 울었다. 아 어머니, 곧 어머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합장을 했다.
  
  
  1950년 9월18일 금요일
  
  얼마 후에 아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 큰 시가전이 벌어질 것이며 어느 때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니 숨어야 할 장소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주인집 사위와 지하실을 말끔히 청소하고 입을 옷도 그곳으로 옮겨놓았다.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이부자리를 깔아놓으니 견딜 만했다. 입구에 빈 유리통을 막고 들어가니 누가 이 집에 들어와도 감쪽같이 몰라볼 것이다. 밤중에라도 누가 조사하러 올지 모르니 오늘부터 아예 이곳에서 자기로 마음먹었다.
  
  
  1950년 9월19일 화요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괴뢰군 소탕전이 개시되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에서 영등포, 마포로 쳐들어오면 서울 시내가 戰禍 속에 며칠간 혼잡할 것이 틀림없으니 그때까지 먹을 것만 확보해두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국군방송은 벌써 인천에서 부평까지 들어와서 내일이면 영등포를 공격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마음은 뛰고 가슴이 벅차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 나는 살았노라고.
  
  그러나 나는 이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라 생각하고 변소는 밤에 나가고 조심스럽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대문을 황급히 열고 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와서는 지금 이쪽으로 인민군이 오니 꼼짝 말라고 숨어 있는 나에게 알려준다. 얼마 후 대문을 열고 인민군 몇 놈이 들어와서는 『여기 젊은 사람들이 있소』하고 두리번거리며 이방 저방 열어본다.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는 우리 주인과 딸들밖에 없다』고 대답하니 마당에서 한참 머뭇거리더니 구둣소리를 내면서 대문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최후 발악으로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젊은 사람이 있으면 즉각 쏴 죽이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총 쏘는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려왔다. 주인 아주머니가 밖으로 망을 보러 나가더니 저쪽 골목에 젊은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다고 했다.
  
  
  1950년 9월20일 수요일
  
  인천으로 상륙했던 해병대가 한강을 건너 용산역으로 진격해 오는 뉴스를 들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인천상륙작전 D데이와 동시에 국군은 美 제트기와 함께 낙동강을 건너서 총반격을 개시하고 유엔군은 함포로 군산 원산 청진으로 꽝꽝 쏘면서 총진군한다는 보도다. 대한민국의 승리는 눈앞에 다가온 셈이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었으나 모든 일은 마지막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나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꾹 참고 국군이 바로 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숨어 있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었다.
  
  살살 망을 보고 다니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니 동 위원회에는 한 사람도 없고 위원장도 도망가고 김일성 사진도 어느 사이 하나씩 떨어져 없어졌다고 했다.
  
  
  1950년 9월 21일 목요일
  
  한강과 마포 강을 건너 도망가는 인민군은 그 도망가는 길을 제트기가 쳐부수고 인민군 집결장소로 가장 많이 숨어 있었던 남대문 국민학교도 제트기가 맹렬히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2시쯤 나와서 해두었던 식은 보리밥을 좀 먹고는 곧 지하실로 숨어들었다. 韓美 해병대의 치열한 공격도 괴뢰군이 숨어서 완강하게 막으니 서울 탈환이 무척이나 힘드는 모양이라 별로 진전이 없었다.
  
  
  1950년 9월22일 금요일
  
  원 이렇게 서울 입성이 늦을까. 영등포에서는 배급물자가 들어와서 굶주린 주민에게 밀가루 설탕 과자 등을 나누어주고 있다는데 발악하는 인민군을 어떻게 서울에서 몰아낼 수 있을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발악은 극도에 이르러 우리 시민을 마구 쏘니 큰일이다.
  
  
  1950년 9월23일 토요일
  
  오늘은 정말로 다행한 날이다. 보통 2시쯤이면 나는 살며시 지하실에서 나와 보리밥이라도 한 술 먹고 다시 지하실로 숨어드는데 그 무렵 인민군이 대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주인 아주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면서 숨을 죽인다.
  
  만일 이때 내가 지하실에서 모르고 밖으로 나왔으면 바로 죽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굶어서 쇠약할 대로 쇠약해서 축 늘어진 상태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인민군이 가고 난 얼마 후에야 나는 이 사실을 알았다. 이때 조상이 나를 잠에서 붙들고 있었던 까닭으로 살아난 것이다.
  
  
  1950년 9월24일 일요일
  
  해병대가 서울에 입성하고 남산을 점령하고 용산에는 우리 태극기가 휘날려도 그들은 좀처럼 도망가지 않고 마포로부터 후퇴해서 내가 있는 서대문 로터리 의주로 순화동 충정로 중림동에 집결하여 발악하고 있었다.
  
  전매국 북쪽과 서대문 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지고 불꽃이 활활 타고 있어도 그들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아 서대문에 있는 시민은 인민군과 함께 꼼짝없이 갇혀 있는 것이다. 시가전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동대문 쪽을 열어 놓았음에도 괴뢰군은 계속 숨어 있었다.
  
  
  1950년 9월25일 일요일
  
  아직 한여름이지만 새벽 2시, 3시가 되어 하늘에서 비 같은 차가운 이슬이 내리면 가마니 밑으로 올라온 습기는 홑이불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오전 5시쯤 총소리는 한층 심하게 마포 쪽과 영천 쪽에서 들려온다.
  
  의주로 옆으로 졸졸 탱크가 소리를 내면서 지나간다. 아침이 되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옆 골목에서는 총소리와 함께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젊은 사람이 인민군에게 발각되어 총살되고 있는 것이다.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있는 것이다. 최후 발악하는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만 계속 들리고 있었다. 시민을 위하여 공격을 함부로 못하는 미군은 얼마나 초조하게 눈앞에 있는 서울을 바라보고만 있을까. 시간이 갈수록 시민의 희생이 늘어난다. 무슨 결단이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1950년 9월26일 화요일
  
  공포의 나날이 지나가고 오늘은 시꺼먼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무엇을 예고하는 기운이 도는 날이다. 밤이 되어도 미군은 서대문으로 진격하지 않는다. 정말 미치겠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의 방송은 서울이 탈환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나가면 바로 죽는 것이다.
  
  
  1950년 9월27일 수요일
  
  아침이 되었어도 서대문에 미군의 진격소식은 없다. 맥아더 방송대로라면 지금쯤 미군이 서대문에 당도해야 하는데 웬일인지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 굶어 지쳐있는 이 몸은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데 왜 이렇게 늦을까.
  
  탈환은 틀림없으나 내 몸이 어떻게 견딜 수가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지금은 물도 못 마시고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다. 어두운 밤이 되어도 별다른 소식이 없다.
  
  
  1950년 9월28일 목요일
  
  정확하게 오전 3시가 되니 들어보지 못한 포격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그것도 간격을 두고 계속 들려온다. 얼마 후에는 내가 숨어 있는 의주로에도 『꽝』하는 포탄소리가 앞과 옆으로 뒤로 규칙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속으로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해 멈추던 공격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완전 포격해서 진군하는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이크 큰일났구나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아군의 포탄에 죽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빌었다. 『신이여 나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그때 바로 옆에 꽝하고 포탄이 떨어진다. 직감으로 이 집을 피해 양쪽으로 포탄이 떨어진 모양이다. 나에게는 이상이 없으니 천만 다행스럽게 위기를 넘겼다.
  
  포탄이 계속 퍼붓고 있으며 이곳 의주로에 집결된 괴뢰군을 완전 소탕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5만 발이나 포탄을 이곳에 쏘지 않았나 싶었다. 마포에서 이곳까지 완전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도 점점 사라지고 고요한 아침이 밝아오는 듯했다. 아, 나는 살았구나 정말로 살았구나 용케도 참고 견디더니 드디어 서울 수복이 되었구나.
  
  의주로를 지나 광화문 쪽으로 해서 중앙청으로 우리 해병대가 소탕전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지하실에서 마당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마당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기 때문에 온몸에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자 기운없이 쓰러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찬물을 마시고는 흐릿한 눈동자를 바로잡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바로 했을 때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환희와 기쁨에 찬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간신히 몸을 움직여 나갔더니 골목마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 인민군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으며 개천물에는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로터리로 나가니 미군이 양쪽으로 줄을 지어 광화문 쪽 고개로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악수를 몇 번이고 했다. 그리고 로터리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아직 타고 있는 건물에서 시꺼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서대문 의주로1가 2번지 9통 28반. 서울수복 그날 가장 치열했던 의주로에서 지칠 대로 지친 괴롭고 외롭던 긴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마터면 마지막에는 아군 포탄에 쓰러질 뻔했던 내가 살아났다.
  
  그후 나는 1953년 4월11일 통신장교로 임관하여 참전용사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1954년 4월26일 S와 결혼하여 MBC와 여성잡지에 모범가정으로 보도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1956년 軍에서 학창복교 제대하고 전화국에 취직하여 88올림픽 경기가 끝난 1988년 11월에 32년 만의 직장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정년퇴직한 것도 그때 얻은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살아온 덕택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계속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다.
  
출처 : 박순애 외
[ 2005-10-28, 11: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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