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14)신라 통일의 민족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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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신라통일에 대한 오해와 이해
  
  질문: 신라는 외세인 唐을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민족반역세력이 아닌가.
  
  답: 신라에게는 당이나 고구려나 백제가 똑 같은 외세였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이엔 동족의식이 없었다. 같은 민족이란 동질감이 없었다. 언어도 달랐고, 종족도 달랐다. 백제-고구려 지배층은 부여계통, 신라는 흉노계통이었다.
  
  지금의 프랑스, 독일, 영국처럼 달랐을 것이다. 신라는 당의 힘을 빌어, 백제는 왜의 힘을 빌어, 고구려는 돌궐의 힘을 빌어 안전을 도모하려고 한 점에서 같다. 당시에는 동족애도, 한민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은 민족주의의 기준을 가지고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민주주의의 기준을 적용하여 왜 직선제 대통령이 되지 않고 세습을 했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신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다른 외세 백제, 고구려를 친 것뿐이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인 것만 욕하는 이들은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였다가 이를 쫓아낸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신라가 당과 결전하여 한반도를 확보했기 때문에 그 뒤 고려, 조선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던 것이다. 당시 당은 세계최강의 제국으로서 전성기에 있었던 나라였다. 신라 같은 작은 나라가 세계최강국과 결전을 벌여 민족 통일을 수호했기 때문에 당신은 지금 중국인으로서 살지 않고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신라통일이 바로 한민족을 만들었다. 민족이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민족을 만든 것이다. 같은 국가 안에서 같은 풍습, 정치제도, 主敵, 애환을 공유하면서 한 천년 살다고 보니 민족주의가 생긴 것이다. 민족은 단숨에 만들어지는 않는다. 신라통일은 민족을 만들어낸 우리 민족사 최고의 위대한 업적이다. 이를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불운이 따를 것이다.
  
  김유신, 김춘추, 문무왕 등 신라통일의 원훈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후손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면 그런 이들은 굴러온 복덩이를 차버리는 어리석은 이들이다. 영광을 수치라고 가르치는 이들도 제 정신이 아니다. 과학과 이성으로써 신라통일을 바라보면 남는 것은 영광과 감동뿐이다.
  
  

  * 신라에 대한 부당한 모함의 예
  
  1. 신라는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을 쳤다?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동족이 아니었다. 동족이란 무엇인가. 같은 언어, 같은 풍습, 같은 종교, 같은 정치제도,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오래 살아온 공동체이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은 서로 싸우느라고 이런 공동체에 필요한 공감대를 형성할 겨를이 없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동족이 되는 것은 신라통일 이후 한반도를 보금자리로 삼아 함께 살면서부터이다.
  
  따라서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친 것은 동족이 아니라 외세였다. 즉, 외세를 불러들여 외세를 친 것이다. 신라에게는 당이나 백제, 고구려가 똑 같은 외세였다. 백제에겐 왜나 신라가 똑 같은 외세였다. 백제는 항상 왜와 손잡고 신라를 쳤다. 백제 또한 외세를 빌어 외세를 친 것이니 비난받을 필요가 없다.
  
  7세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민족주의란 잣대를 신라통일에 들이대고 사대주의적 통일 운운하는 것은 세종대왕한테 왜 직선제 선거를 통해서 임금이 되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2. 신라는 당을 끌어들였지만 최후엔 당을 한반도에서 쫓아내었다.
  
  -신라통일을 욕하는 이들은 당을 끌어들인 이야기만 하고 신라가 당을 격퇴시킴으로써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확보한 위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3. 만주를 차지하지 못한 불완전 통일이다?
  
  -그 책임은 만주를 지키지 못하고 나당 연합군한테 망해버린 고구려한테 물어야 한다. 왜 신라가 고구려의 책임까지 떠맡아야 하는가. 설사 고구려 중심으로 통일되어 만주와 한반도가 우리 땅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을 한족과 북방기마민족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때 만주를 차지했었던 거란의 遼, 여진족의 金이 그 뒤 어떻게 되었나를 보면 안다. 강과 바다로 대륙과 격리되어 수비하기가 좋은 한반도를 한민족이 차지했기 때문에 수많은 침략으로부터 국토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4. 고구려는 수와 당과 대결하여 뒤에 민족통일국가의 일원이 되는 자원을 지켜내었다. 신라는 왜와 대결하여 역시 한민족의 자원을 보존할 수 있었다. 백제는 가야,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백제의 자원을 660년까지 보존하고 있다가 신라통일에 의해 한민족의 한 구성요소로 넘겨주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모두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것이다.
  
  5. 민족통일국가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고 이를 저주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지식인 대접을 받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한국뿐일 것이다. 미국인이 언제 독립을 저주하던가, 일본인이 언제 명치유신을 저주 경멸하던가, 독일인이 언제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을 낮추어 보던가,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 가리발디-마치니-카불의 지도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을 비난하던가. 자신의 탄생과 생일을 자학하는 국민이나 국가는 자살하려고 작심한 것들이다.
  
  

  가. 신라와 대한민국의 공통점
  
  1. 통일신라는 세계의 일류국가였다. 대한민국은 非서구문명국가로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일류국가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2. 신라와 대한민국은 文武를 겸한 尙武국가였다.
  3. 신라와 대한민국은 개방적 해양국가였다.
  4. 통일신라와 대한민국 시대에 한민족의 활동반경이 가장 넓었고 세계사의 主流에 참여했다.
  5. 신라와 대한민국은 동맹국 외교에 성공했다. 신라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唐과 동맹하여 통일에 성공했고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선진국 미국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통일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6. 신라와 대한민국은 애국적 종교와 정치를 결합시켰다. 호국불교와 화랑도의 결합, 反共애국기독교와 국군 장교단의 협력이 그것이다.
  7. 신라와 대한민국은 강대국과 동맹하면서도 자주정신을 유지했다.
  8. 신라와 대한민국은 유능한 지도자를 만났다. 통일신라는 외교의 金春秋, 군사의 金庾信, 내치의 文武王을 가졌고 대한민국은 외교의 李承晩, 군사의 朴正熙, 경제의 李秉喆을 가졌다.
  9. 신라와 대한민국에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한국역사상 여왕들이 나온 나라는 신라뿐이고 여성대통령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나라는 東아시아에선 한국뿐이다.
  10. 대한민국이 신라보다 못한 점은 두 개이다. 첫째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고귀한 자의 의무)이고 또 하나는 국내통합 부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아직도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11. 신라통일은 민족을 만들었고 대한민국 건국은 국민국가의 출발이었으며 남북자유통일은 선진화로 가는 길을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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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자료: 일류국가 만들기의 新羅모델
  
  대한민국의 꿈은 자유통일을 이룩한 다음 일류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민족사의 두번째 선진화 경험이다. 첫번째는 신라가 서기 676년 한반도를 통일한 다음 약200년간 일류국가로 번영했을 때였다. 7~9세기에 유럽은 암흑시대라고 하여 로마 문명이 게르만족에 의하여 파괴된 뒤라서 교회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문화의 건설이 없었다. 아랍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 세계 2대 문화권은 唐과 신라를 중심으로 한 동양, 그리고 아랍권이었다. 예술, 군사력, 정신력에서 신라는 당시 세계의 일류국가였다.
  신라가 唐과 동맹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본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가 그 뒤 2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고대의 황금기인 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신라였다. 우리가 지금 두번째로 일류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첫번째 일류국가 新羅의 모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라를 일류국가로 만든 원동력은 이렇게 정의된다.
  1. 정치가 안정되었다. 왕권의 계승이 비교적 순리대로 이뤄졌다.
  2. 지배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확립되어 국민단합이 이뤄졌다.
  3. 외교를 잘하여 당시의 최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4. 종교와 권력이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삼국통일의 2대 주체세력인 호국불교와 화랑도를 만들어냈다.
  5. 文武겸전; 나라의 기풍이 엄격하면서도 개방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6. 해양력이 강했다. 對唐결전에서 신라는 해전으로 결판을 냈다.
  7. 실용적 자주정신이 강했다.
  8. 행정 시스템이 잘 짜여져 유사시 동원력이 강했다.
  9. 불교 같은 외래문물을 사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국의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10.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한강유역을 잃지 않았다.
  11. 통일과정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거의 차별없이 통합했다.
  
  위의 11개 조건은 대한민국이 일류국가의 꿈을 실현하는 데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주정신, 실용정신, 해양정신, 文武통합, 애국종교, 행정력, 수도死守, 지도층의 솔선수범, 애국청년의 조직화, 정치안정, 동맹외교라는 키워드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일류의 조건일 것이다.
  
  

  나. 한국사의 로마는 신라
  
  
  徐廷柱의 신라 정신
  
  불멸의 역사서인 史記의 저자 司馬遷은 이 책의 後記에서 『결국 사람은 모두 마음이 답답하고 맺힌 바가 있어 그 道를 통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말하며 장차 올 일을 생각한다』고 썼다.
  
  기자가 흉노-고조선-신라-한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흐름을 쓰고 있는 것이나 신라통일의 前과 後에 관심이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未堂 徐廷柱 시인도 6·25 사변 때 하도 참혹한 것을 많이 보고 당하고 한 뒤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몰렸다가 신라 정신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 뒤 신라 정신을 詩作의 한 주제로 삼았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신라 정신은 중세 유럽 사람들이 로마 정신을 再발견하여 현실의 장벽을 뚫고 나가려고 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이 큰 난관에 봉착할 때 길어 쓸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감흥과 상상력의 깊은 샘물인 것이다.
  
  
  <내가 어느 절간에 가 불공을 하면
  
  그대는 그 어디 돌탑에 기대어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그대 좋은 낮잠의 賞으로
  
  나는 내 금팔찌나 한 짝
  
  그대 자는 가슴 위에 벗어서 얹어 놓고
  
  그리곤 그대 깨어나거던
  
  시원한 바다나 하나
  
  우리들 사이에 두어야지>
  
  (徐廷柱:「우리 데이트는-善德여왕의 말씀 2」)
  
  
  未堂은 이렇게 말했다(1995년 1월호 月刊朝鮮).
  
  『1951년부터 1953년까지가 내게 있어 신라 정신의 잉태기였지. 6·25 전쟁 중 극심한 절망감 속에서 나는 「國難이 닥쳤을 때 우리 옛 어른들 가운데 그래도 제 정신 차려 살던 이들은 난국을 무슨 슬기와 용기와 실천력으로 헤쳐 왔던가?」하는 것을 절실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더듬거려 보던 끝에 신라 정신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야』
  
  未堂이 말하는 신라 정신의 요체는 멀리 보고 한정 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려는 영원성이다.
  
  『인생 행로를 제한받고 또 스스로도 제한하며 얼마만큼만 가고 말려는 한정된 단거리주의가 아니라 한정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고 또 가려는 저 無遠不至주의. 신라인들에게서 우린 그걸 배워야 해. 그러면 불안과 불신과 반감과 충돌 따위를 훨씬 줄일 수 있겠지』
  
  『신라 鄕歌에는 삶에 대한, 사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이 들어 있어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나지. 자연과 인생에 대한 소박한 감정부터 깊은 체념과 달관, 그리고 安民理世의 높은 이념까지를 노래한 향가도 그 바탕은 國仙 정신이야』
  
  國仙 정신은 무엇인가?
  
  『이 天地에 대한 주인의식이 신라인들에게 작용해 통일로 이끌어간 거지. 하늘과 땅을 맡아 생활하는 주인으로서의 강한 책임 의식, 이 점이 조선시대 유교가 우리 민족에게 弱者의 팔자와 분수에 다소곳할 걸 가르쳐서 亡國의 길로 유도한 것과 전혀 다른 점이지. 각 개인의 값이나 민족의 가치는 에누리당하자면 한정이 없고, 에누리만 해나가다가는 민족의 장래가 정말 암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나와 내 민족의 존엄성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지. 하늘과 땅과 역사의 주인된 자로서 말이네』
  
  『민중을 억압하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민중에게 아첨하고 추파를 던진대도 곤란해. 진심으로 민중과 일치하고 화합하려는 정신, 그게 중요하지. 신라에는 여러 훌륭한 어른들이 많지만 본받을 만한 인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로선 金庾信 장군을 들겠어. 金庾信 장군을 배워라! 고난을 앞장서서 짊어진 모습을…』
  
  그의 「金庾信 將軍 1」이란 詩는 이렇다.
  
  <말과 사람이 함께 얼어 쿵쿵 나자빠지는
  
  혹독한 추위 속의 어느 겨울날
  
  고구려 평양으로 가는 험한 산길에서
  
  新羅 최고의 군사령관 金庾信은
  
  한 사람의 輜重兵 步卒이 되어
  
  맨 앞에서 군량미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팔뚝을 걷어 어깨까지 드러내고
  
  땀 흘리며 끌고 가고 있었다.
  
  그래서 팔심이 더 세기로야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서 죽인
  
  金閼川을 신라 최고로 쳤지만
  
  그런 김알천의 그런 힘까지도
  
  金庾信 장군의 힘에다가 비기면
  
  젖비린내 나는 거라고
  
  신라 사람들은 간주했었다>
  
  
  徐廷柱 선생은 신라의 화랑들이 가졌던 未來佛 미륵신앙을 자신의 詩 「신라 사람들의 未來通」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사람들은 백년이나 천년 만년 억만년 뒤의 미래에 살 것들 중에 그중 좋은 것들을 그 미래에서 앞당겨 끄집어내 가지고 눈앞에 보고 즐기고 지내는 묘한 습관을 가졌었습니다. 미륵불이라면 그건 과거나 현재의 부처님이 아니라, 먼 미래에 나타나기로 예언만 되어 있는 부처님이신 건데, 신라 사람들은 이분까지도 그 머나먼 미래에서 앞당겨 끌어내서, 눈앞에 두고 살았습지요>
  
  
  대한민국은 新羅의 再生
  
  신라의 힘은 흉노족의 군사·정신문화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기마문화와 샤머니즘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토속적인 요소와 중국에서 들어온 漢字-불교-유교문화가 균형을 이루면서 한 덩어리가 되었을 때 신라는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의 생동성을 이어갔으나 중국적인 것이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정신도 國力도 시들어 갔다. 초기 신라왕은 유목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샤먼(巫王)을 겸했으며, 금관은 정치권력의 상징이자 샤머니즘의 具現이기도 했다. 화랑도와 신라 지배층의 주체성은 샤머니즘이란 토양에 뿌리 박았으므로 이것이 불교·유교에 의해 약화될 때 위기를 만났다.
  
  초원의 활기도 바다의 개방성도 사라지면서 한민족은 정신과 육체가 다 같이 야위어 갔다.
  
  1945년 한반도 분단으로 남한은 사실상 섬이 되었다. 그 뒤 조선조적인 내륙문화와 결별하고 해양문화권으로 흡수된 이후 새로운 운명이 개척되기 시작했다. 한민족이 조선왕조적인 질곡에서 해방되니 잊혀졌던 흉노적인 생명력이 튀어오른 것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흉노적인, 유목적인, 기마민족적인 활달함을 한민족의 피 속에서 再발견하였다. 이 나라의 모습은 점점 신라를 닮아 가기 시작했다. 신라인 이후 가장 넓은 활동공간을 확보한 것이 대한민국 사람들이었다.
  
  신라인 이후 처음으로 해양세력화하였다. 신라인 이후 처음으로 自主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통일신라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은 自主국방이 가능한 일류국가로 가는 길을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이런 쾌속질주를 가능하게 했던 세력은 羅唐동맹을 이끌어 냈던 金春秋와 비견되는 韓美동맹의 건축가 李承晩이었고, 金庾信 및 화랑도와 닮은 朴正熙 및 국군 장교단이었다.
  
  한국인은 李承晩·朴正熙의 영도下에, 그리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무대로 하는 넓은 활동공간을 얻었다. 이 공간을 활용할 정치적 자유도 얻었다. 그래서 빠른 기동이 생겼다. 공간과 자유와 기동은 한국인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흉노의 피를 끓게 했다. 민족 에너지의 대폭발은, 지도자들이 민족의 원형질과 유전자를 건드려 흥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의 정직으로 敵의 굽은 곳을 치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제2의 文武王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통일대왕인 문무왕의 文은 중국적 지성일 것이고, 武는 흉노적 군사력일 것이다. 오늘에 맞게 해석한다면 文은 지식인·언론인·법조인이고, 武는 군인·기업인·과학자들일 것이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요소를 균형 있게 통합하여 자유통일을 쟁취한 뒤 조국 선진화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것은 정치인의 몫이다.
  
  대한민국은 李承晩·朴正熙로 대표되는 실용적인 정치지도자의 시대를 1993년에 마감하고 그 뒤 11년간 조선조적인 문민정치 시대를 다시 경험하고 있다. 명분과 위선과 내분에 치우쳐 안보와 경제와 과학을 소홀하게 다루다가 외적의 침략을 부른 역사적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근대화 혁명의 시기에 대한민국이 양성한 실용·과학·합리의 정신으로써 문민 정권의 守舊性을 돌파할 것인지, 주저앉을 것인지 조국은 기로에 서 있다.
  
  이런 때 우리가 민족사로부터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을 끌어내려 한다면, 근세의 유럽인들이 로마를 연구했듯이 신라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그 신라 정신의 핵심이 바로 흉노적인 것이고 이는 한국인의 원점이자 自主의 기준점인 것이다.
  
  삼국통일 前後의 신라가 정신·물질·군사·외교 면에서 일류국가였고 민족의 제1 황금기였다면,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제2의 황금기이다. 경제규모 10위권, 군사력 6위권, 삶의 質 30위권의 대한민국이다. 이 두 번의 황금기를 주도한 영웅들(金春秋·金庾信·金法敏·李承晩·朴正熙·李秉喆 등)의 시대정신은 자존심·실용주의·열린 自主로 표현된다. 그 바탕을 흐르는 것은 자신의 야만성까지도 정직하고 당당하게 드러내 버리는 흉노적 기질과 이를 통제하는 合理주의의 절묘한 균형과 통합, 즉 文武의 合一인 것이다. 그 文武王은 『나는 흉노왕의 후손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했고, 金庾信은 승리의 비결이 『우리의 정직으로 敵의 굽은 곳을 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당한 正直으로 위선과 거짓을 부술 때 민족사의 제2황금기는 자유통일을 넘어 조국 선진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다. 일본이 신라에서 배울 때
  
  '일본의 역사'(岩波新書. 이노우에 기요시 著)를 읽다가 재미 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지휘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됩니다. 그가 뒤에 天智천황입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의 改新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합니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 公民으로 만들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연호를 정하는 것을 建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연호를 사용하는 백성들이 황제나 왕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연호를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에 처음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大化 改新의 주도세력은 親百濟 정책을 썼습니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복구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3만 명의 병정과 수백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냅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서기 663년의 일입니다. 일본 패잔병은 백제 유민들을 다수 싣고서 돌아왔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나카노오오에는 국내 문제에 전념하기로 하고 수도를 大津으로 옮긴 뒤 천황(天智)에 올랐습니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습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弘文천황이 등극합니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皇子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오오아마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붙었고 천황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습니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오오아마측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황으로 추대했습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입니다. 이 반란을 壬申의 亂이라 부릅니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는 2 - 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습니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습니다.
  일본 역사학계의 거두인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율령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天武천황의 통치 시기에 신라는 唐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670-676년 사이 신라는 唐을 상대로 일대 결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唐이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요동으로 철수시키게 했습니다.
  
  그 뒤에도 신라와 당은 국교가 끊어진 상태로 냉냉했습니다. 天武천황 정권은 신라의 눈치를 보면서 한때 唐과의 通交를 중단했다가 신라-당의 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난 지 27년이 흘러서야 재개했습니다.
  신라통일이 일본에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를 완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고대 국가가 그 체제를 정비하는 데 먼저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신라의 지도를 받았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우리나라를 통해서 일본에 한자 등 여러 문물이 전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국가 만들기의 노하우가 통째로 건너갔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백촌강의 해전에서 신라군에 의하여 결정적 타격을 입은 일본은 그 뒤 한동안 신라에 눌려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워간 셈입니다.
  이 史實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동아시아(당, 신라, 일본)의 공동 번영을 보장했다는 것을 잘 증명합니다. 한반도가 안정되면 주변국가들도 평화를 구가할 수 있고, 한반도가 지금처럼, 또는 삼국시대처럼 분렬되면 주변 국가들도 전쟁에 휘말려 들거나(삼국시대에 한반도엔 중국군대와 일본군대가 들어와 싸웠다. 임진왜란, 러일전쟁, 6.25전쟁의 경우도 그렇다) 불안정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김유신, 김춘추(태종무열왕), 문무왕 등 통일 3걸이 주도한 신라통일은 동아시아에 평화와 번영을 선물한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업적임이 이렇듯 분명한데도 엉터리 학자들과 못배운 자들의 위선과 환상, 그리고 신라통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좌익들의 선동에 의하여 폄하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한 일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사이가 좋으려면 한국의 실력이 일본과 대등하거나 우월할 때여야 할 것입니다. 7세기말의 통일신라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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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자료: 통일기 신라와 일본의 대외정책(정효운)
  
  *아래 글은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가 펴낸 신라문화 제25집에 실렸던 논문(일본율령국가와 통일신라의 형성에 관한 일고찰)에서 일부를 뽑은 것이다. 필자는 부산동의대학교 鄭孝雲 교수이다.
  
  <백제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신라의 對일본 외교는 적대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는 655년부터 668년까지 왜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왜는 백제와 고구려 군사동맹 노선에 가담하여 백제 부흥운동 과정에 있어 군사적 지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白江전투에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대해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倭의 입장에서 본다면 적극적으로 참가한 663년 白江전투에서의 패배란 상황은 倭를 정치·군사적 양면에서 대외적 위기에 대응하는 체제로 전환하게 하였다. 군사제도 면에서 방위태세의 확충과 정치제도 면에서 國制의 개혁이 그것이다. 패전 후 일본의 정치적 과제는 국내 민심의 수습과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통해 압박해오는 唐의 외교적 압력의 극복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상되는 신라와 唐의 무력적 외교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 방위시설의 증설을 강화하였다.
  
  <三年 是歲 於對馬嶋 壹岐嶋 筑紫國等置防與烽 又於筑紫大堤貯水 名日水城 四年 秋八月遺達率答春初築城於長門國 遺達率憶禮福留 遺達四比福夫於筑紫國築大野及椽二城
  六年 十一月 是月築倭國高安城 讚吉國山田郡屋嶋城 對馬國金田城 (이상 「日本 書紀」 天智天皇條)
  3년 이해 대마도 일기도 축자국 등에 방안과 봉화를 두었다. 또 축자에 큰 제방을 쌓고 물을 저장하였다. 이름하여 水城이라 한다.
  4년 추 8월에 달솔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도록 하였고 달솔 억례 복류와 달솔 사비복부를 축자국에 보내어 대야 및 연성의 두 성을 쌓게 하였다.
  6년 11월 이 달에 왜국의 고안성과 찬길국 산전국에 옥도성과 대마도의 금전성을 쌓도록 하였다.>
  
  664년에서 667년에 걸쳐 對馬에서부터 畿內지역에 이르기까지의 요지에 많은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방어 전략과 연계하여 667년 3월에는 수도를 내지인 近江大津宮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국적 방어 태세의 정비는 唐과 고구려의 전쟁이라는 동아시아 정세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려는 의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시기 倭의 對外정책은 더 이상 한반도 정세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불간섭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는 666년(天智 5) 10월과 668년(天智 7) 7월의 2회에 걸쳐 군사동맹국이었던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 파병을 요청하고 있지만 응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668년(天智 7) 7월의 고구려 사신 파견에 뒤이어 9월에는 신라로부터 사신이 倭에 파견되고 있다.
  
  <秋九月壬午朔癸巳 新羅遺沙級金東嚴等進調 丁未 中臣內臣使沙門法弁·秦筆 賜新羅上臣大角干庾信船一隻 付東嚴等 庾戌 使佈勢臣耳麻呂 賜新羅王輸御調船 一隻 付東嚴等 … 十一月辛巳朔 賜新羅王絹五十疋 綿五百斤 韋一百枚 付金東嚴等 賜東嚴等物 各有差 乙酉 遺小山下道守臣麻呂 吉士小?於新羅 是日 金東嚴等罷歸
  
  (「日本書紀」 天智天皇 七年條)
  
  추 9월 임오 초하루 계사에 신라가 사록 급손 김동암 등을 보내어 진조하게 하였다. 정미에 중신 내신이 사문법변과 진필을 사신으로 하여 신라의 상신 대각간 유신에게 배 한 척을 주어 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였다. 경술에 포세신이마려를 보내어 신라왕에게 조를 나르는 배 한척을 하사하여 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였다. … 11월 신사 초하루에 신라왕에게 비단 오백필과 면 오백근, 가죽 일백매를 하사하고 김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고 동암 등에게도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이가 있었다. 을유에 소산하 도수신마려와 길사 소유를 신라에 보내었다. 이 날에 김동암 등이 파하고 돌아갔다>
  
  이들 신라 사신 파견의 의미는 656년(齊明 2) 이후 13년만이라는 점보다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唐軍에 의해 함락되었던 시점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사신의 파견은 앞으로 예상되는 唐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외교적 목적을 가진 파견으로 생각된다. 이에 倭의 天智조정은 다량의 답례품을 사여하는 등 후한 대접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倭의 행위는 군사적 긴장관계에 있던 신라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외교책에서 나왔다고 보아진다.
  이 점은 군사동맹국이었던 고구려의 지원 요청에 대해 협력하지 않은 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것과 동시에 당시의 신라와 倭가, 당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해 공통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倭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중립적 불간섭 외교정책은 신라가 唐과 전쟁을 수행하였던 시기에도 일관되게 추진되었다고 보아지며, 이는 白江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추진한 소극적 양면외교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왜의 對唐외교는 주로 熊津都督府 鎭將과의 교섭이었기 때문에 당조정과 직접적으로 외교를 추진하지는 못했다. 이는 한반도의 정세가 격변기란 점도 작용하였지만 唐과 적대적이었던 고구려·백제의 군사노선을 선택하였던 것이 唐과의 직접 교섭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와중에 669년(天智 8)에 제 5차 遺唐使(견당사)가 파견되었다.
  
  이 사신의 파견에 대해서는 시기적으로 보아 고구려 멸망과 관련된 축하사절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점 역시 倭의 중립적 외교의 표현으로 보아진다. 이후 701년(大寶 1)에 6차 遣唐使가 파견될 때까지 33년간 唐과의 국가적 교섭은 보이지 않는다. 天智朝의 唐과의 외교단절 정책과, 신라와의 외교 재개란 대외정책의 방향은 天武·持統朝에도 계승되고 있다.
  
  이 시기 왜의 對外정책을 제약한 요인은 白江전투의 패배에 따른 패배감과 唐의 위협이라는 국가적 위기감이었다. 후자는 신라와 공통하는 대외인식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이 일본의 외교를 唐보다는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우선시하는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고 생각한다>
  
  

  라. 신라통일의 세계사적 의미
  (최성재)
  
  [정치는 국가의 생존이 달린 선택]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환타지 소설 읽듯이 읽으면 안 된다.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 한의 여후, 당의 태종과 측천무후, 명의 영락제, 청의 옹정제 등 초창기에 치열한 권력 투쟁을 통해서 권력의 정상에 오른 이후에 이들이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백성들을 배부르고 등 따습게 한 것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사회 윤리 또는 국가 윤리 대신 오로지 개인 윤리의 잣대만을 들이대어 형제를 죽였다, 조카를 죽였다, 자식을 죽였다, 공신을 죽였다, 라는 그 한 가지 사실만 두고, 그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거들떠보지 않는 춘추필법을, 최소한 국가를 책임진 사람들은 계속 견지하면 곤란하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천하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고 그 국가는 저 막강하던 진이나 수처럼 밤하늘의 불꽃인 양 허망하게 스러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 와중에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었을 것이다. 흔히들 독재자로만 아는 위에 든 위인들은 하나같이 백성에겐 풍요와 자유를 안겨주되 정적에겐 가난과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수백 년 평화의 양탄자를 깔았다. 욕을 몽땅 덮어쓰는 대신 국가와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후엔 하나같이 풍요로운 경제와 다채로운 문화와 활기찬 사회의 새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노력 없는 성공은 없고 희생 없는 영광은 없는 법이다.
  
  [영토를 넓히는 일은 국가의 흥망을 거는 대도박]
  
  특이한 나라가 신라이다. 삼국통일 후에 100여년 간 치열한 권력투쟁이 없었다. 아주 안정되었다. 지금까지 이걸 연구한 걸 못 보았는데,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 세상에는 절대 저절로 잘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신라는 남다른 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약 신라가 발해 정복에 나섰다면, 거의 100% 신라는 망했다. 그럴 힘이 전혀 없는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00여년에 걸쳐 전쟁을 한 나라가 무슨 힘이 더 있었을까. 그것도 그냥 전쟁이 아니라 그 당시로서는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는 100여년에 걸친 세계대전의 대격전장이었다. 국가 총력전의 각축장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신라가 발해와 전쟁을 벌였다면, 당이 최소한 어부지리로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했을 것이고 일본도 영남과 호남의 일부라도 차지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민족의 국가는 소멸되고 그들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맛보고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었을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높았던 고려는 정종 때에 광군(光軍)을 설치하여 군대를 무려 30만이나 유지했다. 그 결과 고려보다 수십 배 큰 송도 못 이긴 요와 금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해가 망했지만, 금방 요가 들어서고 금이 들어서서 만주를 차지한다는 것은 '새총으로 호랑이를 잡는 것'만큼 어려웠다. 그들의 침략에 나라가 안 망하면 다행이었다. 윤관이 17만 대군으로 여진을 물리치고 한때 9성을 쌓았지만, 그것마저 유지하지 못했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기도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다. 조선의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의 국경선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국경선을 넓힌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본 삼국 통일]
  
  우리는 삼국통일을 우습게 여기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이건 엄청난 쾌거이다. 후삼국의 짧은 기간 외에는 무려 1300년 동안 우리 한민족은 동족상잔이 없는 평화로운 통일국가 체제를 유지했다.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적 같은 일이다. 중원과 북방의 초강대국들이나 고려말 이후 전쟁의 귀신이 된 왜에게 굴하지 않고 그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자주통일국가를 유지한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세계에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다. 우리는 중국과 비교하되, 중국이 통일국가로서 위엄을 떨칠 때와 비교하는 데만 익숙해져서, 신라의 통일을 초라하게 보고 특히 그 면적이 작다고 주눅이 들지만, 중국이란 나라도 통일과 분열을 얼마나 되풀이했으며 이민족의 지배는 또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 중국은 BC221년에 통일했지만, 그 후로 나라가 산산조각 난 적이 부지기수이다. 전 중국인이 오랑캐의 지배를 받은 것만 해도 400년이 넘는다. 또한 오늘날의 저 오만방자한 중국이 5개 내지 10개 국가로 분열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 빈틈을 노려서 우리가 만주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신라의 삼국통일은 세계로 눈을 넓히면 더욱 빛난다. 우리나라와 면적이 거의 비슷한 영국이 통일한 것은 1707년, 우리보다 약 1000년이 늦었다. 북해도를 빼면(이것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에 병합) 역시 우리와 비슷한 크기의 일본이 통일한 것은 1603년, 우리보다 약 900년 늦었다. 독일이 통일한 것은 1871년. 우리보다 1200년이 늦다. 유럽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졌던 로마제국이 망한 후 라틴족은 기껏 이태리 반도 하나를 통일하는 데도 무려 1400년이 걸렸다. 왜 이태리는 조상들이 그렇게 큰 나라를 가졌었는데, 그 모양 그 꼴로 분열되어 살았던가. 후손이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몽골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건설했지만, 지금은 땅만 좀 클 뿐 너무도 초라하다. 후손이 못났기 때문이다.
  
  로마나 몽골과는 달리 그 조상이 우리 조상보다 훨씬 못났던 일본이나 영국 또는 독일은 우리보다 900년에서 1200년 통일이 늦었지만, 그 후손이 우리보다 훨씬 잘났기 때문에 못난 조상을 원망하지 않고, 아니 그런 조상을 엄청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불철주야 노력해서 옛 전통에 새 전통을 차곡차곡 쌓아서 세계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전쟁 도발과 식민지 경영의 과오는 있었지만, 이 세 나라는 오늘날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를 압도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평화로운 통일 국가를 구가하다가 이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채 강대국에 운명을 맡기고 있는 우리나라를 압도한다.
  
  특히 한반도 크기의 영국은 통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를 달성한 덕분에 100여년간 전 세계의 태양으로 군림했다. 그 상징이 그리니치 천문대이다. 그 곳을 중심으로 동경과 서경, 곧 동쪽과 서쪽이 나뉘어진 것이다. 세계의 중심이란 말이다.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세계의 중심이란 말이다. 중국이나 미국이나 인도나 러시아가 아니라, 일개 섬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 면적은 우리와 거의 같지만 그 조상이 못나서 영국은 우리보다 1000년이나 늦게 통일했지만, 그 후손이 잘나서 못난 조상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달팽이처럼 국내로 움츠려드는 게 아니라 독수리처럼 세계로 눈을 돌리고, 노인처럼 지팡이를 짚고 과거로 뒷걸음질치지 않는 게 아니라 청년처럼 가슴을 활짝 펴고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감으로써 만주나 중원 따위가 아니라 5대양 6대주의 패자가 된 것이다.
  
  우린 어떤가. 똘똘 뭉쳐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어려운데, 한 나라 안의 국민들이 가슴에 저마다 증오와 원망을 품고 입에 가득 욕설과 저주를 내뱉으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대를 이은 독재자가 해괴한 구실로 대를 이어 국민이야 굶어 죽든 말든 오로지 군대만 양성함에도, 그의 선의를 철석같이 믿고 그가 달라는 대로 나라의 세금을 뚝 떼어 식량과 달러와 비료를 아낌없이 고일(상납할) 뿐, 2300만 동족의 생존과 인권은 그 독재자의 처분에 전적으로 맡기는 자들이, 70% 이상의 세금납부자들이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분배의 투명성을 요구하면, 권력과 조직과 방송을 이용하여 도리어 이들을 시대착오적인 수구보수자라며 민족화해에 찬물을 끼얹는 자라며 사정없이 몰아붙이고 집요하게 뒷조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상식이 안 통하는 나라에서 어찌 국론이 핵이 분열되듯이 분열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렇게 국론이 갈가리 찢어진 나라가 어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가 있을까.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북한은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암울한 일제시대에 그렇게 해서라도 조선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기개를 길러주기 위해서 한 단재의 말을 세계 11위의 경제강국이 된 오늘날까지 앵무새처럼 외우고, 특히 전쟁을 일으켜 동족을 300만 죽이고 조상과 일제와 소련과 중국이 물려주고 적선한 것을 뜯어 먹기만 하고 전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어 300만을 굶겨 죽이고, 전 국민의 평균 신장을 저 가혹했던 일제 시대 때보다 평균 5cm나 낮추어놓고도, 일대일로는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우세했던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신라의 통일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열등감과 죄의식을 해소하려는 북한의 선전선동에 말려 들어가, 삼국통일과 김유신 이야기만 나오면, '뚜껑이 열리는' 사람들은 제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도 이젠 그럴 소리를 하면 차분하게 설득해서 싹수가 노랗지 않게 해야 되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마징가 제트' 같은 의식 수준을 갖고 있는 것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욕하기 전에]
  
  개인이라면 중소기업 하나라도 알짜배기로 키우고 나서 삼성을 욕하고, 한국의 위정자라면 남북통일은커녕 일본에서 두 번 다시 망언이 못 나오도록 독도를 명실상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고 나서, 북한은 적화통일의 망상은 제발 버리고 백두산과 간도 하나라도 제대로 차지하고 나서, 삼국통일을 욕하기 바란다. 학자라면 동북공정을 들고 나오는 중국의 입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 김부식을 욕하기 바란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당당히 본기(本紀)라고 하여 중국과 똑같이 당당히 황제국의 역사로 기술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발 한번이라도 읽고 나서 삼국통일과 김유신을 욕하기 바란다.
  
  단재 신채호는 「삼국사기」를 거의 읽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읽었으면 본기가 뜻하는 것이 뭔지 김유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몰랐을 리가 없다. 거기엔 죽은 지 400년이 넘었지만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의 사대부만 아니라 나무하는 아이와 물긷는 아낙네도 칭송해 마지않던 김유신에 대한 기록이 문무왕을 빼고는 삼국의 역대 모든 왕에 대한 기록보다 많고, 통일 이전의 역사는 신라에 대한 기록보다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훨씬 많다.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에 맞서 삼국의 역사를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바로 이 「삼국사기」이다. 괴이하게 서로 철천지원수라는 식민사관 학자들과 민족사관 학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대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한 김부식이 편찬한 이 「삼국사기」이다. 중국은 사마천의 「사기」와 진수의 「삼국지」가 있고, 일본은 「일본서기」가 있고, 우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있다. 이 4권은 각기 자국의 고대사를 가장 자세히 기록한 정사(正史)이다. 우리가 고구려를 우리 땅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삼국사기」이다. 무령왕릉의 지석을 통해 입증되었듯이 「삼국사기」는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에 비해 훨씬 정확하다.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업신여기면, 중국과 일본은 쾌재를 부르면서 저네들의 사서에 비추어 우리 고대사를 제멋대로 왜곡하여 한국의 과거만이 아니라 한국의 현재도 멸시하고 한국의 미래마저 어둡게 한다.
  
  

  마. 라이샤워의 신라극찬
  
  E.O.라이샤워는 됴쿄에서 출생한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 교수로서 일본학과 동양학을 연구했고 이 대학의 옌칭(燕京) 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그는 일본 승려 圓仁의 여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번역했고, 그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엔닌의 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한 章을 떼어내어 「중국의 신라인」을 다루고 있다. 아마도 기자가 이 여행기를 읽고 감탄한 것과 같은 감동을 그가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와 唐이 손잡고 동아시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唐, 新羅, 일본이 공존공영하던 고대사의 전성기에 신라인들이 한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圓仁이 우리에게 알려준 바에 의하면 중국 동부, 신라, 그리고 일본 사이의 무역은 대부분 신라 출신자들의 손에 의하여 장악되었다고 생각된다. 신라인들은 평온한 지중해 연안에서 상인들이 그 주변영역에 하였던 것과 같은 역할을 연출할 수 있었다. 중국의 수도 長安에 머무는 외국 사람들 중에서 신라인들이 가장 많았고, 다른 외국인들보다도 철저하게 중국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서해는 신라인에 의해서 지배되었다고 생각된다.
  신라인 무역상 사회는 山東반도 南岸 일대와 淮河(회하)하류 일대를 따라 집중되었다. (해상무역의 전략적 거점인) 楚州에는 거대한 신라 租界가 있고 신라인 총독이 신라방의 행정을 관장할 정도였다. 839년 봄 일본사절단의 신라인 통역 김정남이 초주에서 귀국하는 사
  절단을 위하여 아홉 척의 배를 구하고 이를 운항할 60명의 신라인 선원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중국연안의 신라인 사회는 상당할 정도로 치외법권의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圓仁이 중국 연안에서 만났던 많은 무역선들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신라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은
  동아사이 해상무역에서 신라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그들의 도전은 미약했다. 일본 遣唐使(견당사)의 관료주의적 비효율과 혼란과 비극적인 항해의 기록은, 신라인들이 여유 있게 산동연안을 몇 번이나 왕복하다가 드디어 圓仁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던 뛰어난 기동력에 비하면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어쨌든 圓仁의 시대에는 아직 신라인들이 세계의 이 부분에서 해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라이샤워는 張保皐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張保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三國史記의 잛은 기록을 보충하는 圓仁의 여행기와 라이샤워의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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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기사: 圓仁의 [入唐求法巡禮行記]속 신라
  
  張保皐 연구의 결정적 자료
  
  일본 天台宗의 大成者인 圓仁(엔닌)은 서기 838년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唐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기 위한 고난에 찬 순례를 했다. 이 여행기록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唐뿐 아니라 일본과 신라를 오가면서 국제무역을 하던 해상왕 張保皐 등 신라인의 해외 활동이 잘 적혀져 있다. 장보고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 자료이다. 이 여행기는 日記式이다. 중국 천지를 걸어서 다니면서 체험한 민중의 삶은 생생하다. 圓仁은 주관적인 감상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아주 세밀하게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적어놓고 있다. 일본인의 기록정신이 이런 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司馬遷의 史記를 읽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여행기가 절제와 자제를 미덕으로 삼는 전형적인 동양식 기록문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圓仁의 이 여행기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법사의 大唐西域記와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꼽힌다. 기자는 최근 '중심'에서 출판하고 金文經씨가 譯注를 붙인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거의 절반이 唐, 일본인이 아니라 신라인이다. 圓仁이 9년 동안 唐에서 공부하고 여행하는 데, 그리고 귀국하는 데 在唐신라인들의 도움이 컸다. 그는 신라인의 唐內 집단거주지나 연락망, 특히 張保皐가 산동반도에 세운 기지인 赤山법화원의 큰 도움을 받았다.
  신라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의 여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譯注者 金文經씨는 이렇게 썼다.
  
  主人賊心算人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이 신라인들이 세계무역사의 새로운 단계인 동서해상교역의 초기단계에 가담하고 그 주인노릇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신라인들은 마치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이 지중해나 중동의 해안에서 수행하였던 것과 같은 역할을 동쪽의 세계에서 그것도 前者에 비해서 훨씬 위험한 해상에서 앞장서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교역은 종전의 唐을 중심으로 한 조공무역에서 민간이 주도하는 교역체계로 그 내용이 바뀌어갔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 무역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주인공들이 바로 신라 무역상인들이다>
  이 여행기에서 圓仁은 '주인은 도적의 마음으로 사람을 재어보았다(主人賊心算人)'라고 쓰는 등 자신이 접했던 인물들의 평을 자주 했다. 그는 신라인들에 대해서는 한번도 험담을 하지 않았다. 그가 묘사한 신라인들의 언동은 감동적이다. 신라인들은 이 일본 高僧에 의해서, 唐에서 당당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일을 정확하고 친절하고 의리있게 하는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일류 세계인으로서의 신라인
  
  그가 唐의 관리들과 하는 일은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데 在唐 신라인과 하는 일은 척척 돌아간다. 신라인들은 唐內에 거점과 인맥을 잘 만들어두었고 정보에 밝으면서 책임감이 강한 것으로 나온다. 장보고의 唐內 네트워크가 강했고 신라무역상들이 우수한 항해술을 근거로 하여 당, 신라, 일본을 연결하는 서해, 남해의 해상항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하여 我田引水式 과장의 필요 없이 사실대로 확인된다.
  圓仁 일행이 9년간의 순례여행을 끝내고 신라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되는 과정, 그 동안 수집했던 典籍들을 신라인에게 맡겨두었다가 불교탄압의 와중에서도 고스란히 돌려받는 이야기, 장보고의 부하 張대사가 圓仁을 무사히 귀국시키기 위하여 배를 짓는 이야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하여 항해중 신라영해로 표류하여 들어갈까봐 경계하던 시절이었다. 신라인들은 敵國의 승려를 동족 대하듯이 한다.
  <張대사는 지난 해 겨울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금년 2월에 이르러 일을 마쳤다. 오로지 우리를 실어 떠나보내어 귀국시키고자 함에서였다>
  그러나 누군가 張대사를 모함하는 신고를 唐의 관청에 하는 바람에 張대사가 만든 배를 탈 수 없었다. 圓仁은 중국의 남부 항구 明州로 가서 거기에 와 있는 일본 배를 타고 귀국하기로 한다.
  <접대중인 張대사는 20리를 배웅해와서 비로소 헤어졌다>
  圓仁은 또 신라 배를 이용한다.
  <신라사람 진충의 배가 숯을 싣고 초주로 가려는 참에 만났는데 배 운임을 의논하여 그 삯을 비단 5필로 정하였다>
  <초주에 도착하니 신라坊의 총관인 劉愼言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맞아주었다. 비로소 명주에 있던 일본인은 이미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劉대사에게 부탁하여 이곳에서 출발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도모해주기를 청하였다>
  
  신라 배 타고 귀국길
  
  <신라사람 金珍 등의 서신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5월11일 소주의 송가구로부터 출발하여 일본국으로 갑니다. 21일을 지나 내주 관내의 노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일본국의 스님들이 지금 등주의 적산촌에 머물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 배에태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전일 노산을 떠날 즈음에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스님 등은 이미 남주로 가서 일본국으로 가는 본국선을 찾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노산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반드시 배를 타고 오십시오'라고 하였다>
  <노산으로 가는 배편이 있어 편지를 써서 김진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이곳의 소식을 알리고 특별히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 뒤 다시 노산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고자 여행 식량을 준비하였다. 초주의 신라인 劉총관이 모든 일을 맡아주었다. 전 총관인 薛詮과 등주 張대사의 동생인 張從彦, 그리고 어머니 등 모두가 배웅하였다>
  <김진 등의 배를 찾을 수 있었다. 배에 올라 떠났다. 등주 관내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였다. 張詠(張대사)이 배로 올라와 만났다>
  <張대사가 보낸 송별의 물건을 받았다. 적산포로부터 바다를 건넜다>
  <날이 밝을 무렵 동쪽으로 산들이 있는 섬을 보았다. 높거나 낮거나 하여 이어져 있었다. 뱃사공 등에 물었더니 '신라국의 서부, 웅주(공주)의 서쪽 땅'이라고 했다. 본래 백제의 땅이다. 하루종일 동남을 향해 나갔다. 산과 섬이 연이어서 끊이지 않았다. 밤10시가 가까워질 무렵 고이도(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구초도(전남의 거차군도 중 한 섬)에 도착했다. 섬지기 한 사람과 매를 키우는 사람 2명이 배위로 올라와서 이야기하기를 '나라는 편안하고 태평합니다. 지금 당나라 칙사가 500명을 이끌고 경주에 와 있습니다. 4월중에 일본 대마도의 백성 6명이 낚시를 하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무주의 관리가 잡아 데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병으로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
  
  <서남 방향에는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 신라국의 동남쪽에 이르러 큰 바다로 나아갔다. 동남쪽을 바라보고 갔다>
  <날이 밝을 무렵 동쪽으로 멀리 대마도가 보였다. 정오경에 전방에 일본국의 산들을 보았다. 오후 8시 무렵이 되어 히젠국 마쓰우라군 북부 시카시마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험난한 귀국과정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다가 圓仁일행이 당에서 수집한 많은 서적을 싣고 한반도의 서해안, 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무사히 도착하는 장면에 이르러 기자도 모르게 안도가 되었다. 마치 기자가 1200년 전으로 돌아가 劉愼言, 張대사 등 신라인이 되어 圓仁일행을 무사 귀국시키기 위해서 노삼초사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 신라인의 정보망, 基地網, 우수한 항해술, 정확한 업무자세는 왜 통일신라가 민족사 최초의 일류국가였는가를 웅변해준다. 일류국가는 일류국민으로 구성된다. 9세기 신라인들이 보여준 품격이야말로 신라의 國格이었을 것이다.
  圓仁 또한 일본의 천태종을 발전시킨 國師가 되었고, 그의 여행기에 신라인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여 그 뒤 사람들이 신라와 張保皐의 對外 활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제1 가는 자료가 되도록 하였으니 이야말로 국경을 넘어선 報恩이 아니겠는가.
  圓仁의 여행기를 영문으로 번역 출판하면서 '圓仁의 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냈던 前 주일미국대사 라이샤워도 신라에 감탄했다.
  <당시의 한국(신라)은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오늘과 같은 나라였다. 같은 민족, 언어, 국경을 가지고 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한국에 필적할 만한 소수의 국가群속에 일본이 들어 있다>
  신라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羅唐동맹이었다. 신라인의 해외 활동은 세계제국 唐의 제1 동맹국이었다는 데서 가능했을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신라인을 닮아 세계로 넓어질 수 있었던 것도 韓美동맹 덕분이었음을 모르는 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바. 隱忍自重의 나라 新羅
  
  隱忍自重(은인자중): 마음속으로 참으며 몸가짐을 신중히 함(금성출판사 국어사전).
  
  은인자중이란 말이 우리 귀에 익게 된 것은 1961년5월16일 아침 KBS 방송을 통해서 울려퍼진 혁명공약 때문이다. 박종세 아나운서가 읽은 혁명공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今朝未明을 기하여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장악하고(후략)>
  
  隱忍自重이란 말은 칼을 가슴에 품고(忍)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실력을 기르고, 신중한 처신으로 결정적 순간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 단어를 보면 연상되는 인물과 나라가 있다. 쿠데타를 준비해가던 朴正熙의 모습, 그리고 삼국통일을 준비해가던 신라의 모습이 그것이다.
  
  삼국중에서 가장 약체였고 침략을 많이 당한 나라가 신라였다. 삼국사기의 통계를 분석한 역사학자 孫晉泰에 따르면(한국민족사개론. 을유문화사) 신라는 왜로부터 27회, 백제로부터 40회, 고구려로부터 17회, 말갈로부터 7회, 낙랑으로부터 4회, 가야로부터 3회 총98회의 침공을 받았다.
  
  신라가 먼저 공격한 경우는 20회에 불과했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 신라였다. 특히 백제와 왜와 가야의 연합세력으로부터 국토를 보존하기 위하여 피나는 투쟁을 했다. 고구려가 한족과 북방유목민족으로부터 한민족의 미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하여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 시기에 신라는 倭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냈다. 오늘의 한민족과 민족활동 공간으로서의 한반도는 고구려와 신라의 투쟁이 가져온 결과물이다.
  
  신라가 98회의 침공을 받은 데 비해 20회의 선제공격밖에 가하지 않은 것은, 이길 전투만 골라서 함으로써 불필요한 국력소모를 줄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은인자중하면서 국력을 키운 다음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약체로 출발한 신라의 역전승이고 허세를 배격한 실력주의의 성공이었다. 가장 약했던 신라가 은인자중하면서 실력을 기르더니, 가장 적은 회수의 전투로써 가야, 왜,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제압해간 과정은 감동의 드라마이다. 이 감동을 수치로 몰아가는 세력은 김정일 정권과 사대주의자, 위선자, 자학주의자, 무식자들이다.
  
  

  사. 唐이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킨 신라가 얻은 것
  
  서기 611년 백제 武王은 사신을 隨나라로 보내 煬帝를 만나 隨가 고구려를 칠 때 협조하고싶다고 자청했다. 煬帝는 기뻐하면서 부하를 무왕에게 보내 협의하도록 했다. 그 이듬해 수 양제는 遼河를 건너 고구려를 치게 되었다. 무왕은 국경의 경비를 엄하게 하고 말로써는 隨를 돕는다고 했지만 실은 양다리를 걸치고 기동하지 않았다. 隨는 이 전쟁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했다.
  
  수가 망하고 唐이 일어났다. 隨의 지배층이 가졌던 백제에 대한 불신감은 그대로 唐의 지배층에 인계되었다. 7세기 백제와 신라는 피를 피로 씻는 공방전을 벌인다. 백제와 신라는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패권국가 唐과 동맹하려는 경쟁을 벌인다.
  
  백제 무왕 28년(서기 627년)에 왕은 조카 福信을 入唐시켜 唐의 도움을 청했다. 당 태종은 이 자리에서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지 말아줄 것을 요구한다. 이즈음부터 唐은 신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기 643년 唐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에 맞추어 신라는 5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 남쪽의 水口城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하는 사이 백제가 서쪽으로 쳐들어와서 일곱 개 城을 빼앗겼다. 唐도 고구려에게 패퇴했다.
  신라는 唐과의 우호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했던 것이다. 唐의 지도부는 신라의 이 義理를 고맙게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서기 648년 선덕여왕의 명령을 받은 金春秋는 入唐하여 당태종과 함께 羅唐동맹을 맺는다. 신라가 당과 힘을 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한 다음에는 평양 이남 땅을 신라가 갖기로 약조한 것이다. 이 동맹관계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것은 신라 지도부가 손해를 감수하고 唐과의 약속을 지킨 代價이기도 했다. 국제관계에서도 의리와 신용은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미 동맹 관계도 羅唐 동맹과 비슷하다. 羅唐 동맹이 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듯이 한국 주도의 남북통일에서도 한미 동맹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신라처럼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의리를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미국이 어려울 때 배신한다든지 미국을 敵처럼 대하지나 않는지 되돌아볼 때이다. 만약 미국으로부터 우리가 배신자처럼 찍힌다면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용을 잃었던 백제처럼 결정적인 시기에서 결정적인 외면을 당할지도 모른다.
  지금 보는 우리의 작은 손해는 통일기에 큰 득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아. 아름답게 망한 나라 新羅
  
  신라의 마지막 왕 敬順王은 백제의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와 신라의 경애왕을 죽인 뒤 세워서 왕이 된 사람이다. 경순왕 9년(서기 935년) 왕은 나라를 고려 王建에게 바치려고 회의에 붙였다. 마의태자는 이렇게 말했다(三國史記).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 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스스로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인데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
  
  이에 경순왕이 말했다.
  '이와 같이 외롭고 위태로운 형세로는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무고한 백성만 간과 뇌를 땅에 바르는 것이니,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간과 뇌를 땅에 바른다'는 말은 原文에 '肝腦塗地'라고 적혀 있다. 무고한 백성들이 전쟁에 휘말려 거리에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절실하게 그린 것이다. 경순왕의 말에서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못하다'는 말이 흥미롭다. 나라를 지킬 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나라가 폭싹 망해버릴 정도로 약하지도 못하니 왕족들이 구차한 목숨을 근근히 이어가면서 백성들만 고생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경순왕은 후계자인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시하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할 뜻을 전했다. 그해 11월에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송도(개성)의 태조에게 귀순한다. 마차, 牛車, 말이 30여리에 잇달아 도로가 막히고 구경꾼이 담장과 같았다. 경순왕은 왕건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경주를 食邑으로 받았고 경순왕 백부의 딸을 왕건에게 시집 보냈다. 여기서 난 사람은 고려 현종의 아버지가 된다.
  
  신라의 귀족들도 고려에서 중용되었다. 경순왕이 싸워서 망하지 않고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과 귀족들이 망국의 피해를 보지 않고 오히려 덕을 본 셈이다. 삼국사기의 著者 金富軾은 이렇게 평했다.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 못한 일이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만약 죽음으로써 힘껏 싸워 항거하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만 궁급함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은 멸망되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만 끼쳤을 것이다. 현종은 신라의 外孫으로 寶位에 올랐고 그 후 대통을 이은 자가 모두 그 자손이었다. 어찌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망하면 왕족과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동서고금의 사례에서 보는 바이다. 신라처럼 싸우지 않고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왕이 스스로 결단하여 귀순함으로써 그 스스로는 물론이고 귀족과 백성들을 살린 예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고구려는 지배층의 自中之亂, 백제는 지배층의 부패가 심각했다. 두 나라가 싸워서 망한 것은 일견 장렬하게 보이지만 그 후유증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싸워서 망하든지 끝장을 확인할 때까지 가서 망하면 망하는 쪽에서 남는 것은 없다. 따라서 접수하는 쪽에서는 물건과 노예를 줍듯이 하니 예우해줄 이유가 없다. 신라 경순왕은 군사적, 경제적 餘力이 있을 때 귀순하니 왕건으로서도 대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지배층이 고려의 지배층으로 전입함으로써 신라사람들은 고려시대에도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 邊太燮 교수는 '韓國史通論'에서 고려 성종 때 국가체제가 확립되었을 때의 지배세력은 '지방호족 출신으로 중앙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頭品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고 썼다. 성종 때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主役이었던 유학자 崔承老는 신라 6두품 출신 귀족이었다. 그는 28개조의 개혁안을 성종에게 제시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와 유교 정치이념을 확립했다.
  
  북한 金正日은 이런 경순왕에게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북한체제가 망하고 김정일 집단이 단죄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다. 여력이 있을 때 손을 들 것인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때 항복할 것인가의 선택만 남았다. 김정일이 대오각성하여 대한민국에 귀순한다면 적어도 그와 친족, 그리고 측근들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는 그의 운명이 의자왕이나 차우세스쿠보다 나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이든 조직이든 헤어질 때, 죽을 때, 해산할 때, 망할 때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삼국통일로써 한민족이란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공동체의 무대를 한반도에 설정했던 신라는 망하는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라정신 속에 있는 실용정신, 자존심, 그리고 관용과 지혜 덕분일 것이다. 에밀레鐘에 새겨진 銘文에 나오는 '圓空神體'란 말이 새삼 생각난다. '둥글고 속이 빈 것이 하느님의 본성'이라는 의미이다. 원만하고 겸허하면서도 강력한 존재가 신라였다.
  
  

  자. 통일의 원동력은 정치안정
  
  삼국사기 列傳에 등장하는 신라인 56명중 20여명이 殉國한 사람이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忠을 다해야 하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孝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고 목숨을 내놓는 것은 忠孝를 함께 하는 인간의 도리이다'
  
  신라 56왕중 암살 등의 이유로 왕위를 찬탈당한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하다. 이는 신라의 王權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本紀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新羅本紀에는 정치관련 기사가 전체의 48.3%나 된다. 백제는 29.8%, 고구려는 36.4%이다. 이는 신라의 역대 왕들이 정치행위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다는 의미이다.
  
  신라사 연구의 권위자 申瀅植 이화여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신라는 정치기사가 큰 비중을 갖고 있어 왕권의 강화나 제도의 정비 등 정치적 발전에 큰 진전을 본 나라였으며, 전쟁에서 가장 적은 출혈을 보았으므로 비교적 정치적 안정과 문화의 개발이 가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배층이 정치를 잘해서 내부단합과 이에 기초한 생산력과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唐의 장수 蘇定方은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귀국하여 당 고종에게 보고한다. 고종은 왜 신라마저 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蘇定方은 이렇게 설명한다(삼국사기에서 인용).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겨 아랫사람들이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의 근본은 내부단합을 이루는 것이다. 상하관계에 질서와 의리와 인정을 심어 외부의 충격에도 잘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대가 달라도 변함이 없는 정치의 본질이다.
  
  국민들 사이에서, 분열과 갈등과 반목을 부채질 하는 것을 정치의 본질로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1300년 전 신라를 배워야 할 것이다.
  
  *통계: 전쟁과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新羅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 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싸워 한반도를 지켜냈고, 신라는 倭와 싸워 한반도의 남쪽을 지켰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라의 잦은 시련은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회발전과 王權강화를 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전쟁을 민족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가 그런 나라였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삼국통일이 요행수로 되었다고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출처 : 趙甲濟
[ 2005-11-11, 04: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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