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1980년 5월21일에 광주에 내려왔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당시 전교사 참모장과 보안부대장의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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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1995.6.5 검찰 진술조서)
  
  문: 일부 고소인들과 당시 505부대의 수사관이던 허장환 등은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 K-57비행장을 통해 광주로 와 전교사에서 브리핑을 받고 귀경한 직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정호용, 윤흥정, 부사령관 김기석, 참모장인 진술인, 3개 여단장, 505부대장 등이 참석하에 회의를 열어 정호용과 여단장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이던 백남이는 93.5.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시 5.22 전두환이 내광하여 전교사로 왔으며 당시 전두환 사령관의 비행장 도착과 전교사 출발사실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바도 있으며, 5.27 작전개시 전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전교사를 방문하였는데 자신은 노 사령관의 얼굴을 본 사실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사실인가요.
  답: 저가 그 당시나 사후에라도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더라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나 노태우 사령관의 내광사실에 대해 그와 같은 이야기 자체를 들은 사실이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만약 전교사에 와서 지휘관들을 만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참모장인 저가 알고 있을 터인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며, 참고로 당시 전교사의 주요 간부들 즉 윤흥정 사령관, 김기석 장군, 저, 김순현 장군, 임헌표 장군과 백남이 대령 등 전교사의 대령급 장교들로 구성된 친목모임인 “무등회” 라는 것이 있어 거의 매월 모임을 가지고 있는 바 백남이의 인터뷰 직후에 백남이도 있는 자리에서 인터뷰 기사를 화제삼아 백남이에게는 물론 참석자들끼리 서로 확인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고 당시 백남이도 우물쭈물하며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아 더 이상의 추궁을 하기도 무엇하여 넘어간 사실이 있었습니다.
  
  (중략)
  
  문: 백남이가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할 이유가 있는가요.
  답: 저가 말씀드리기는 무엇하지만 통상 전교사 작전참모는 장군으로 승진을 할 수 있는 보직으로 여겨졌음에도 백남이는 장군진급을 하지 못하고 전역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광주사태를 조기진압하지 못한 데 대해 당시에도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며(저에게 하소연하며 눈물을 보인 사실이 있음) 5.24 교도대와 공수부대의 오인사격에 대해 백남이의 상황전파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사태 직후 징계를 받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이 되며, 이와 같은 일과 함께 저의 기억상으로도 노태우 사령관이 사태 후에 보안사령관이 되어 광주와 전교사에 한 번 온 사실이 있는데 이를 착각하여 증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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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우 전 광주보안부대장(95.1.20 진술조서)
  
  문: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의 양심선언(김영진 저,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상권, 228정 이하) 내용에 의하면 보안사령부 대공과장 홍성률 중령이 5.18 오후에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확인키 위해 사태 감독관이라는 직책으로 내려와 5.20 저녁에 상경한 바 있다는데 그 내용이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홍성률 중령이 광주에 내려 왔던 것은 사실이나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5.21 이후에 보안사령부로부터 광주시내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와 광주 시내에 민간인 복장으로 들어가서 상황파악을 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5.27 도청 진압작전이 끝난 후에 상경한 것입니다.
  
  문: 위 양심선언 내용에 의하면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에서 사태진행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헬기로 광주 일원을 둘러보고 간 바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작전부대의 위문이고 또 하나는 비밀 지시사항 시달로 추측할 수 있으나, 그렇다면 최소한 전교사 사령관을 만났어야 하고 저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인데 윤흥정 장군도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장군을 만난 일이 없다고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저도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꾸며댄 거짓말로 생각됩니다.
  
  문: 5.21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고 난 뒤에는 광주시내 상황을 어떻게 파악했는가요.
  답: 당시에는 보안부대 활동망, 경찰 정보망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여서 광주시내의 상황에 대하여는 거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안사령부에서 홍성률 중령을 내려보낸 것이며 진압작전과 관련해서는 작전부대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침투시켰었다는 사실을 진압작전이 끝나고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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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광주 진압은 내가 지휘, 전두환 관련 없다."
  
  최보식
  
   [(편집자 注)광주 5·18 사건 36주년을 앞두고 崔普植 조선일보 기자가 진압작전의 최종 지휘자였던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李熺性(이희성) 씨를 인터뷰하였다. 월요일마다 조선일보에 실리던 '최보식이 만난 사람'은 어제 나오지 않았다. 이희성 씨는, 당시 신군부의 실력자였던 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이 광주 진압 작전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李 씨는 '병사들이 혼란 속에서 위험을 느껴 쏜 것일 뿐, 발포 명령도 없었다'면서, '광주 사태가 불처럼 他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民亂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알려진 인터뷰 全文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8에 대한 유감 표명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설(說)이 보도됐을 때, 그쪽 관계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광주 방문은 와전된 것이다. 5·18에 본인 책임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희생자가 있었고 대통령이 된 뒤로 충분히 수습을 못 한 데 대해 아쉽다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그는 광주의 가해자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는 사실관계에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본인이 가장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광주 학살 주범'인데, 반성 없이 억울해하니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판단과 해석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 문제라면 기자(記者)로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은 느꼈다. 1980년 당시 정국을 관장한 李熺性(92)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첫인상이 단아했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이 궁금하오? 하나하나 질문하면 답변드리지. 늙어서 생각이 잘 날지는 모르겠소.'
  
   나는 곧바로 본질로 들어갔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면 5·18 상황을 전체적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국방장관과 대통령께 주요 사안은 보고했지만 내가 全權을 쥐고 통괄했다고 할 수 있소.'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5·18과 관련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렇소. 계엄사령관이었기에 책임을 진 거요. 5·18을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결과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소. 희생자와 유족이 많이 생기지 않았소. 국가적으로 이를 추스르는 차원에서 이들의 요구와 주장을 감안해야 하는 거요. 내가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걸 피할 수는 없는 거요. 도의적 책임을 진 거요(8개월 복역하고 특별사면됨).'
  
  ―당시 국정 수반인 최규하 대통령도 도의적 책임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군의 작전 상황이니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에게 있지, 군을 잘 모르는 대통령께서야 책임질 일이 아니오.'
  
  ―도의적 책임은 그렇고, 실제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5·18 당시부터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 주범'으로 전두환을 특정했습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계엄군 출동과 발포 명령을 그가 배후 조종했다는 게 통설입니다.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그렇다면 5·18에 전두환을 지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봅니까?
  
  '광주가 수습되고 3개월 뒤 그가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오. 대통령만 안 됐으면 전두환 이름이 그 뒤로 나오지 않았을 거요.'
  
  ―전두환이 아니라면, 누가 5·18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겁니까?
  
  '지휘 계통의 최고위에 있는 계엄사령관인 나와 국방장관(周永福)이오.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소. 전두환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는 보안사령관이었고, 내 참모에 불과했소. 참모로서 내게 건의할 수는 있었겠지만, 작전 지휘 체계에 있지 않았소. 진압 작전에 개입할 수 없었소. 그는 광주에도 내려간 적이 없소.'
  
  ―적극적인 스타일인 전두환이라면 광주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오히려 한번 내려갈 만하지 않았습니까?
  
  '현지 보안 부대를 통해 보고가 올라오니까 그도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소. 내려가 본들 뭘 하겠소. 부대장에게 격려금이나 건네주는 게 고작이잖소.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내게 보고하고 광주에 내려간 적 있소. 광주 현지 부대에 배속시킨 공수여단 격려차 간 것이오.'
  
  ―전두환이 육사 동기생 정호용을 통해 작전 지시를 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데, 정말 군대 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요. 특전사령관도 광주에 파견된 자기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소. 작전 책임과 지휘권은 배속된 부대 지휘관에게 있소. 조언은 할 수 있겠지만, 이래라저래라 작전 지휘를 하는 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거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1980년 5월 21일 '자위권(自衛權) 보유 천명' 담화를 발표할 때 보안사 참모가 초안을 건네줬다'고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전두환의 5·18 개입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검찰 조사를 서너 번 받았어요. 꼭 밤중에 잠 안 재우고 심문을 했어요. 졸려서 정신이 몽롱해질 새벽에 진술서 서명을 받아요. 검찰이 신사인 줄 알았는데 그런 트릭을 써요. 그래서 보안사 참모인지 계엄사 참모인지 헷갈렸던 거요. 계엄사 참모였다고 하더군요. 설령 보안사 참모라고 해도 그런 건의를 해올 수 있는 거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오. 애초에 담화 발표 구상은 나 혼자서 한 거요.'
  
  ―왜 그런 구상을 했습니까?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다만 담화 내용에 대해 신경을 썼어요. 장차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봤으니까. 그래서 참모들을 불러 문안을 검토한 뒤 발표했소.'
  
  ―장차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예상했다는 건가요?
  
  '재판 과정에서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자위권을 발포 명령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소. 그런 해석은 오버요. 공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개인마다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권'이 있다는 것이오. 피동적인 것이오. 발포 명령과는 다르오. 더욱이 담화문에서 '자위권이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자위권이 있음을 경고한다'고 했소. 예방 목적이지, 자위권을 적극적으로 발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소.'
  
  ―자위권을 천명한 담화 발표 뒤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됐습니까?
  
  '실탄 지급은 일선 부대 지휘관 차원에서 이뤄지는 거지, 계엄사령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오.'
  
  관련 재판 기록을 보면 '자위권 담화'가 있기 전에 실탄 발사가 이미 있었다. 5월 19일 시위대에게 포위된 계엄군 장교가 위협사격을 한 게 첫 발포였다. 20일 밤 광주역에서는 실탄 사격으로 4명이 숨졌고, 21일 담화 발표가 있기 전에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누가 발포 명령을 한 겁니까?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총 맞은 시민들이 있는데 발포 명령자가 없다는 게 과연 말이 됩니까?
  
  '전투라는 게 우발적이고 부화뇌동해서 일어날 수도 있소. 겁에 질려 있는 사병들이 막 쏘고,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누가 맞았는지도 가릴 수 없었소. 한밤중에 아군끼리 교전도 있었소. 다만 5월 27일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은 적극적이었소. 도청 지하실에 TNT와 수류탄 등 무기가 있었고 무장한 주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당시 북에서 이를 이용 안 할 리가 있었겠소.'
  
  ―당시 담화문에 '상당수의 다른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광주에 잠입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첩보는 있었지만 확증을 잡지 못했소. 확증이 없는데 어떻게 얘기하겠소. 다만 무기고를 털고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이끄는 등 민간인이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었소.'
  
  ―광주가 수습된 뒤 왜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뒤처리와 민심 위무(慰撫)가 시급해 그런 조사에 착수할 수 없었소.'
  
  ―공수부대를 투입해 초기에 과잉 진압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요?
  
  '당시 공수부대는 소요 진압 임무가 있었소.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져 있는데 학생들이 들어가겠다며 전남대 정문에서 군인들과 충돌한 게 발단이었소. 학생들은 가방에 넣어온 돌을 던졌고 군인들이 무방비로 맞은 거요. 그 뒤 시내에서 학생들이 집결하자 군인들이 뒤쫓아가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소. 이를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다고 흥분한 거요. 어떤 세력이 '경상도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며 악성 루머를 퍼뜨렸소.'
  
  ―광주가 수습된 뒤인 6월 초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초기 진압 작전의 과오 책임을 물어 당시 현장 지휘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게 맞습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내가 반대했소. 현장 지휘관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피해자가 생겼으나 그건 앞서 말한 대로 불가피한 상황도 없지 않았소. 나는 지금도 작전 실패는 아니라고 봐요.'
  
  ―숱한 사상자를 낳은 국가적 비극을 초래했는데?
  
  '한 사건을 이쪽·저쪽, 위·아래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오. 광주 사태가 불처럼 타 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습니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그 나름대로 진실 규명이 이뤄졌다고 봅니까?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 2019-05-13, 15: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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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천     2019-05-13 오후 9:24
고맙습니다. 장사복, 윤흥정, 이재우가 증인이군요.

그런데 이희성은 검찰진술조서에서 왜 전두환의 지시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했을까요?
“제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1979년 12월13일부터 1981년 1월24일까지 계엄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인 계엄사령관의 권한은 행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진술인은 속칭 ‘바지’ 계엄사령관이라는 말인가요.
“12.12 사건으로 軍權을 장악한 全斗煥의 요청에 따라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고, 그에 따라 계엄사령관이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全斗煥이 주도하는 軍部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제 의사대로 참모총장을 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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