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의 갑질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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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를 하면서 우연히 어떤 재벌그룹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다. 백년 전통을 가진 양심 있는 기업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그룹에 속하는 은행과 금융회사들을 맡은 회장이 나의 사무실로 와서 사건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그룹에서 변호사를 많이 써봐서 잘 알아. 수임료는 섭섭하지 않게 우리가 알아서 줄 테니까 그렇게 합시다.”
  돈은 충분하게 주겠다는 암시였다.
  
  “아니 그런 방식으로는 받지 않을랍니다. 내가 땀 흘려 일하는 시간만큼만 정확히 품삯을 계산해서 줘요. 그렇게 하는 게 내 마음이 편해.”
  나는 본의 아니게 그 회장의 호의를 거절한 셈이 됐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던지.”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인간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기 싫다는 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일한 만큼 돈을 받아야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다. 그 이상의 돈을 받으면 나의 영혼이 비굴해질 것 같았다.
  
  그 재벌그룹에는 수십 년을 집사 노릇을 해 오던 임원이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그의 표정에서 어떤 좋지 못한 암시가 오는 것 같았다. 마치 백화점이나 회사의 구매 담당이 납품업자에게 갑질 할 때의 표정 비슷한 걸 느꼈다고 할까. 돈을 벌려면 그의 앞에서 굽실거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받는 품값에서 일부를 떼어 뒷돈을 주기도 해야 하는 게 변호사 거래에서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를 무덤덤하게 대했다. 그의 표정이 트집을 잡고 싶어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를 무시해 버렸다. 어느 순간 그 결과가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대법관 출신도 부장판사 출신도 흔한데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를 변호사로 선임했다고 회장에게 깎아내린다는 말이 들려왔다. 점점 농도가 심해지고 나는 그의 입에 의해 부서지고 파괴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가 그동안의 품값을 계산해 줄 테니 일을 그만두라고 통보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은근하게 한 자락 여운을 깔았다. 내가 태도를 바꾸면 새로 선임하는 대법관과 부장판사 출신과 같이 일을 맡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나는 거절했다. 돈이 싫어서가 아니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몇 달 후 새로 사건을 맡은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한테서 나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법조인이 모르는 분야를 참 열심히 연구해서 많은 자료를 만들어 제출했더라구. 우리 사건을 새로 맡은 팀은 그걸 요약해서 항소심 법정에 내려고 하는 데 그걸 볼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우리끼리 뒤로 부탁하는 건데 엄 변호사가 사실관계 전체를 빠삭하게 알고 연구도 많이 했으니까 그 요약본을 만들어 주면 하는데.”
  
  참 여러 가지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사건을 맡고 일은 나한테 다시 재하청을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가 덧붙였다.
  
  “나한테 그 사건을 맡기신 분이 그 재벌그룹의 집사 노릇을 오랫동안 해 온 분인데 자기가 그룹 전체의 왕회장한테는 그 오너 집안의 가족 누구보다도 영향력이 있다는 거야. 가족이 변호사를 선임해도 자기가 잘라 버릴 수 있다는 거지. 우리가 그 분을 잘 대접해 드리고 있어.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아.”
  
  내가 도중에 잘린 이유가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런 게 세상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그룹 오너의 평생 집사 노릇을 해 온 백발의 그 임원의 태도를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오너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는 아들뻘 손자뻘 되는 사람에게까지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며 도련님 대접을 했다. 회장들 앞에서는 종의 태도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그 집안의 역사를 파악하는 내게 그가 왕같이 대접하는 회장의 태도를 비난하기도 했다. 밥 먹을 때도 입에서 먹은 걸 흘리고 입술에 밥풀을 묻히는 늙은 회장은 모자라는 보통사람일 뿐이라고 했었다. 나는 그가 오히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짜 영혼까지 매여버린 현대판 노예인 것 같았다.
  
  내면 깊은 곳에는 노예들이 가진 파괴본능을 숨긴 채. 이제 평생 머슴을 하던 그 분도 주인집에서 벗어나 자연인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그때 얘기를 써도 되는 것 같다. 그분에게 한 말씀을 전하고 싶은 게 있었다.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제 이 세상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나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다. 그래도 살아졌다. 중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영혼이 아닐까.
  
[ 2020-03-31, 00: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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