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점심 한 끼 하면서 나눈 對話
그가 꿈꿨던 큰정치는 어디로 달아나고 핏발이 성성한 복수와 칼부림의 난투극만 벌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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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이 어제 봉하마을 현지에서 거행된 것을 TV화면을 통해 봤다(이하 존칭, 직함 생략). 야인(野人) 시절 노무현과 점심 한 끼 하면서 나눈 대화 내용을 더듬어 보며 추도의 마음을 전한다.
  
  2001년 여름 어느 날로 기억한다. 노무현이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그만두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노무현으로부터 전화가 사무실로 걸려 왔다. 점심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쾌히 승낙하고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노무현은 일행 한 명과 함께 먼저 와 있었다.
  
  노무현과는 공·사석(公·私席)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터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일행을 소개했다. 필자도 안면이 있는 해양수산부 차관보를 지낸 박(朴)모 씨였다. 세 사람이 사각(四角)식탁에 앉다보니 누가 독석(獨席)에 앉느냐를 두고 서로 밀고 당기며 권했다. 필자는 전직 장관에다 국화의원까지 지냈으니 상석에 앉으라고 강권하고, 노무현은 "이제 나는 장관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니 인생의 선배인 필자보고 앉으라며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다가 끝내는 노무현의 겸손을 못 이기고 필자가 독석에 앉았다.
  
  점심을 나누면서 노무현이 들려준 얘기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쳣째는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부임해 보니 데리고 온 朴 차관보가 억울하게 물러났다는 것이 해양수산부내 공무원들의 여론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박 전 차관보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서 우리나라 해양수산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갰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박 전 차관보는 한일어업협정 재개정을 위해 일본측과의 협상에서 열심히 노력했으나 한일 두 나라 어선들의 어로구역 조정문제를 두고 일부 어민들의 반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당시 정권은 그 책임을 물어 박 전 차관보의 약점을 문제삼아 구속시킨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이 장관으로 부임해보니 해수부내 직원들이 하나같이 박 차관보가 억울한 희생양이 됐고 박 차관보가 석방 뒤 미국에 공부하러 갈 때 모금을 통해 여비까지 마련해 줬다는 소리를 들었다. 노무현이 박 차관보를 구제하기로 마음을 먹고 '한국수산회 회장'에 천거하겠다고 했다.
  
  다음 얘기는 노무현의 부산상고 동기생 이(李)모 기자가 지역MBC 이사로 발탁된 데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알려진 대로 노무현은 부산상고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변호사가 됐다. 그렇다보니 언론계 학맥(學脈)이 열세였다. 고교 동기생이 공영방송사 임원으로 발탁된 것은 앞으로 큰 뜻을 품고 있던 노무현에겐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세 번째 얘기는 "큰정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알려진 대로 흙수저 출신으로 지역주의 타파를 부르짖고 국회의원과 부산시장 등에 출마했으나 실패를 거듭해오던 터에 '5공청문회'를 통해 스타가 된 정치인이다. 앞으로 '큰정치'를 통해 정치판도를 바꾸어 보는 것이 노무현의 꿈이고 희망이라고 했다. 노무현은 비록 야인으로 돌아왔지만 대한민국의 정차판도를 뒤흔들어 놓을 큰 포부와 계획을 열변으로 들려줬다.
  
  노무현은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를 앞두고 지역방송 토론회 참석차 왔다가 필자의 사무실에 들려 차(茶) 한 잔을 나누고 돌아가 대통령이 되었다. 청와대 만찬과 '거가대교 준공식' 때와 퇴임 후 시그너스CC, 봉하마을 사저(私邸) 등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고인(故人)이 되고 말았다.
  
  이같은 인간세상의 별리(別離)를 두고 선인들은 "사람은 가고 정만 남은 인거유정(人去留情)"이라 했던가? 노무현이 꿈꿨던 큰정치는 어디로 사라지고 옹졸하고 편협한 소인배들이 핏발이 성성한 복수와 칼부림의 난투극만 벌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정치형국이다. 필자가 지난해 현충일에 기록으로 남긴 '봉하마을 풍경'을 재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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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하마을 풍경(風景)-‘밟힘’과 ‘밟는 것’에 대하여
  
  '(망월동의 전두환 기념비를) 밟으며 응징하는 것이 교육'이 된다면 '(노무현 묘역의 추모 보판을) 밟으며 추모하는 것도 교육'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국내 최대의 습지(濕地) '우포늪'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봉하마을'도 돌아봤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를 알리는 이정표가 발길을 안내했다. 현충일. 하늘은 찌푸려 있었으나 초여름의 신록(新綠)은 싱그러웠다. 찾아 온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봉하마을은 어느새 추모와 관광이 혼재돼 있는 풍경이었다.
  
  서울 국립현충원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느닷없이 역사갈등의 통합을 외치며 김일성 괴뢰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국군과 국민을 사지(死地)로 밀어붙이는데 동조한 변절자이자 6·25 전범(戰犯)인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추켜세웠다. 호국영령(護國英靈)과 국군, 국민들에게 염장지른 충격과 분노가 있었지만 봉하마을은 조용했다.
  
  주인 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私邸)인 현대식 건물과 함께 생가(生家)가 숲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생가는 슬레이트 지붕이 이엉으로 바뀌어 덮힌 본가와 아래채가 있었고 본가는 11평에 방 2개와 부엌, 아래채는 4.5평 부속가옥이었다. 진흙벽돌과 나무로 지어진 초가(草家)로 단아하게 복원돼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덟 살까지 살았던 집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墓域)도 성역의 단촐한 모습으로 꾸며지고 다듬어져 잘 관리되고 있었다. 묘비명(墓碑銘)이 눈길을 끌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생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語錄)이다. 제단(祭壇)에는 참배객이 헌화한 국화 몇송이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는 2009년 5월23일 새벽, 그날의 극단적 선택이란 충격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 방문객들도 말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추모의 글과 마음만 전해지는 인거유정(人去留情), 그대로였다, 사람은 가고 정(情)만 남은 인간사(人間事)의 덧없음이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한 것은 묘역에 깔아 놓은 추모보판(步板)이었다. 땅바닥에 깔아 놓은 수많은 보판에는 '노무현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등 고인(故人)에 대한 칭송과 추도(追悼)의 마음이 실명(實名)의 글로 새겨져 있었다. 비에 젖고 밑창이 닳고 해진 신발에 밟히며 마모(磨耗)돼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고인을 추모하고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령을 괴롭히고 서글프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노무현재단'과 '노무현의 사람들'은 고인에 대한 애도(哀悼)의 마음을 어째서 이렇게 소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의구심도 들었다.
  
  해마다 5월이면 모여들어 울고불고 슬퍼하던 사람들이 정작 추모의 글을 새긴 판각(板刻)은 땅바닥에 깔아 놓고 함부로 밟고 다니도록 왜 방치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신발 밑바닥에 밟힐 때마다 아프다며 신음하는 고통의 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듯 환청으로 들려 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시 前 미국 대통령도 밟고 지나갔고 문희상 국회의장과 정세균 전 의장, 이해찬을 비롯한 유시민과 수많은 국회의원, 장·차관, 정치인, 정치지망생들의 친노세력들도 '추모보판'를 밟으며 지나갔다.
  
  한명숙 전 총리가 태극기를 밟고 헌화조문하는 사진 한 장이 떠오르기도 했다. 비 맞고 밟히는 '추모보판'이 아니라 비 맞지 않고 짓밟히지 않을 '추모의 벽'을 만들 생각은 들지 않았는가?
  
  현충원에 '현충 추모의 벽'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박근혜 정부 때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용사 묘역에 세우려 했던 '추모의 벽'을 문재인 정권이 중단했다가 다시 거론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광주 망월동 묘역 입구에 묻혀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기념비'에 대해 '역사적 가치가 있으니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과 '밟으며 응징하는 것도 교육'이라는 6월7일자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밟고 지나가는 의미'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하게 했다.
  
  '밟으며 응징하는 것이 교육'이 된다면 '밟으며 추모하는 것도 교육'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지낸 이해찬과 현 이사장 유시민의 생각은 어떤가? 해마다 찾아오는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일(忌日)을 맞아 검은색 조복(弔服)과 검은 넥타이 차림의 사람들이 발걸음도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며 '노무현 추모의 보판'을 밟고 지나다닌 사람들도 '밟으며 추모하는 것도 교육이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가?
  
  밟히는 것은 아프다. 짓밟히는 것은 더욱 아프다. 밟는 자는 갑(甲)이고 밟히는 자는 을(乙)이다. 밟는 자는 강자(强者)요, 밟히는 자는 약자(弱者)다. 살아 있는 자는 강자요, 죽은 자는 약자다. 살아 있는 권력은 강자요, 죽은 권력은 약자로 탄압받기 일쑤다. '밟힘'과 '밟는 것'에 대한 생각이 봉하마을을 떠나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비에 젖으며 닳고 해진 신발 밑창에 밟히고 있는 그 아픔, 그 수모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밟고 지나가게 만든 자도 그들이요, 밟히며 몸부림치는 자들도 그들이다. 밟고 밟히며 공생하는 그들의 묘한 생존법칙은 위선과 가면의 탈이 아닐까.
  
  '노무현 효과'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전 대통령 노무현'을 책으로, 영화와 웹으로 ,전기(傳記)로, 어록(語錄)을 통해 역사 속의 인물로 다듬고 가꾸어 가고 있다. 숲속의 한 그루 살구나무에 열린 '노오란 살구'가 탐스런 모습으로 잘 가라며 '안녕'의 손짓을 해줬다.
  
  
  
  
  
  
  
  
  
  
  
[ 2020-05-25, 00: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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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idn     2020-05-26 오후 7:03
노무현이가 기자들과 기타 많은 愚民들이 운집한 청문횐가에서 단상에 앉아 단하의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무거운 명패를 던진 것이 절라도인들에게는 영웅으로 비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는 천박하고 상식없는 소인배의 비겁한 비루한 짓일 뿐이다

모르기는 모르겠다만
빨갱이 노무현이가 아무도 없는 넓은 들판에서 전두환을 만났어도 명패를 던졌을까 ?

민주주의는 법치가 준법이 근간을 이룬다
피의자는 준엄하게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비겁하며 무책임하고 천박했던 노무현이는 아이들 교육에 치명적인 폐해를 끼쳤다.
   opine     2020-05-25 오후 11:20
아, 무섭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비명이 "전체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영혼없이 맹종하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홍표정     2020-05-25 오전 4:04
문무대왕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봉하마을 풍경-'밟힘과 밟는 것'에 대한 글, 독자의 이 새벽잠을 깨우십니다.

봉하마을, 노 前대통령 '추모보판(追慕步板)'! 아직 안 가봐 잘 몰랐습니다.

헌데, 님의 글을 읽고 보니, 여기에 기릴 故人의 뜻을, 두고 두고 추도(追悼)할 인간 내면의 고귀함보다 그저 이제는 이념실현의 홍보적 수단으로만 여기는 허망한 작태가 아닌 가 합니다. 이게, 인간을 고귀한 靈魂보다 그저 스쳐 지나 가는 한 物質로만 바라보는 섬뜩한 유물론 좌파 공산이념에 물든 자들의 實體요, 虛像인가 합니다. 이제 그 행태가, 고인의 英志를 망각, 유린(蹂躪)함처럼, 마침내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을 소위 '개돼지'로 전락시켜, 70년 저 자유민주주의를 무참히 허무는 단계까지 와 있는 듯합니다. 그 한 手段이, 멀게는 저 '광주사태' 폭동주도의 한 實體로, 가깝게는 '나비효과'처럼 점점 국내외로 확산되는 지난 저 4.15 총선부정으로 이어져, 마침내 陽刻되는게 아닌가 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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