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오랫동안 위선의 탈을 쓰다가 보니까…”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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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장관>
  
  판사 생활과 법과대학 학장을 지낸 고교 일년 후배가 나의 사무실로 놀러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최근에 법무장관이 된 사람이 화제에 올랐다. 나는 법무장관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후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판사 생활을 하다가 사법부의 잘못된 관행이나 부패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언론이 그걸 받아서 보도를 하고 내 말이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죠. 그때 사법연수원생 대표라고 하면서 찾아온 사람이 있었죠. 나의 뜻에 동조한다면서 사법연수원에서도 사회에 대해 의견을 내겠다고 하면서 투쟁의식을 보이더라구요.”
  
  사회의식이 있는 용감한 사법연수원생 같아 보였다. 후배가 말을 계속했다.
  
  “그 다음해 정초가 되니까 이 친구가 부부동반을 해서 인사를 왔는데 거의 스승 대접을 하는 거야. 고맙게 생각했지. 그 얼마 후 그 친구가 판사가 됐다고 하길래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몇 년 안되서 그 친구가 대통령 비서관이 됐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잠시 정부종합청사쪽에 나와 일을 본다는 소리를 들었지. 그래서 우연히 그 근처로 가는 길에 그 친구 사무실에 들렀어요. 그 친구 비서가 나보고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더라구. 그냥 얼굴 한번 볼려고 왔다고 했지. 잠시 기다리다가 그 친구를 만났는데 예전과는 달리 표정이 뜨악한 거야. 영 거리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보고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묻는 거예요. 내가 청탁이라도 하려고 온 걸로 보는 것 같았어. 그때는 내가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야. 불쾌하더라구. 그냥 나왔지.”
  
  그의 감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다시 몇 년이 지나고 텔레비전 시사토론 방송에서 초청해서 패널이 돼 나갔는데 그 친구가 국회의원이 돼 그 자리에 먼저 와 앉아 있더라구. 패널로 나온 다른 사람들은 일어나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데 그 친구만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돌리고 나를 외면하더라구. 금배지를 다니까 그렇게 태도가 달라지더라구. 더 기가 막힌 건 사회자가 두 분이 아시는 사인 것 같은데 어떤 인연이시냐고 물어왔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같은 법조계에 있었으니까 안면은 익혔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더라구. 내가 화가 났지만 뭐라고 하겠어. 그런 친구가 출세하는 재주가 탁월한지 이번에 법무장관이 됐더라구. 이제는 어떤 태도를 취할지 궁금해.”
  
  법조계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지위에 올라가면 걷는 모습도 달라지고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군대 시절 훈련소에서 같이 기합을 받고 진흙 구덩이에서 뒹굴고 땀을 흘리던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아주 친한 친구같이 반가웠다. 그러나 법관이 되고 법원장이 되고 대법관이 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떤 장소에서 만나 반가운 마음으로 가까이 가면 경계하고 얼굴이 굳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몇 명 고교 동기들이 대법관이 된 친구와 마음 문을 열어놓고 밥을 먹는 기회가 있었다. 대법관이 된 친구는 어릴 적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함께 밥을 먹던 한 친구가 갑자기 그를 보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씨발놈아. 친구들 모이는 자리에서도 대법관 냄새를 풍겨야 하냐? 그게 대법관이냐? 너만 잘났냐? 나도 내 분야에선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썰렁해졌었다. 잠시 생각하던 대법관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오랫동안 위선의 탈을 쓰다가 보니까 그 탈이 내가 되어 버렸다.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비로서 탈을 슬며시 벗는 것 같았다. 삼십 년이 넘게 법정을 드나들었다. 따지고 보면 상당부분이 연극무대 같았다. 법관은 무대의상을 입고 들어와 연기를 하면서 고정된 대사를 뱉어내곤 했다. 물론 그런 형식이 필요하고 또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무대 의상과 직책에 취해 마네킹 같은 인생을 살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 2021-02-16, 15: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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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과오답     2021-02-17 오전 7:10
"야 이 씨발놈아. 친구들 모이는 자리에서도 대법관 냄새를 풍겨야 하냐? 그게 대법관이냐? 너만 잘났냐"

욕하는 분은 변하지 않을까요 물어 보고 싶군요
남이 변하는건 못 참으면서
자신도 비슷한 인간들이 너무 흔한거 같습니다
어찌 되었던 속이 시원 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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