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한강 다리에서 몸을 던졌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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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분께>
  
  그가 한강 다리에서 몸을 던졌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평소 헬스클럽을 다니면서 수영으로 다져진 체력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헤엄을 쳐서 강가로 나왔다. 수상구조대의 경찰관이 그를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는 파출소를 빠져 나와 호텔로 가서 다시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칼로 배를 갈랐다.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발견한 종업원이 앰뷸런스를 불러 그가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 처치를 하고 입원실로 올라간 그는 다시 병원 옥상으로 기어 올라가 뛰어내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두개골의 일부가 깨졌는데도 그는 살아있었다. 그렇게 독하게 죽으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보면 승부욕 그 자체였다. 지고는 못 사는 존재였다. 살아오면서 그는 패배가 없었다. 장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도 부자였다. 머리도 좋았다. 그는 명문 중고등학교와 서울대를 졸업했다. 미국과 일본의 대학에 유학해서 학위를 받았다. 재벌가의 딸과 결혼을 해서 장인이 하던 그룹의 회장 자리를 물려받기로 되어 있었다.
  
  어느 날부터 그가 장인과 팽팽한 대결을 하게 됐다. 장인은 그와 정반대의 환경에서 질기게 살면서 승리를 거머쥔 인물이었다. 시골 장터의 떠돌이 약장사 출신인 장인은 제약회사를 만들고 한 재벌그룹을 이루었다. 사위는 장인을 무사히고 장인은 사위를 비웃었다. 돌과 돌이 부딪쳐 파란 불이 일 듯 장인과 사위가 서로 소송으로 맞부딪치는 상황이 왔다. 그는 패배할 위기에 봉착했다.
  
  나는 그의 담당 변호사였다. 그는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자살 쪽으로 도피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누워있는 중환자실로 찾아갔다. 녹색 빛이 흘러나오는 모니터 아래서 그는 입에 가득 튜브를 꽂고 누워있었다. 그는 순간 나를 의식했다. 그런데도 시선을 천정 쪽으로 고정시킨 채 모르는 척 했다.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은 지독한 자존심이었다. 그는 붕대를 허리에 두껍게 두르고 있었다. 호텔에서 칼로 배를 가른 상처 때문이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모르는 체 하지 말아. 듣고 있지? 알아들었으면 눈을 천천히 세 번 깜빡거려 봐”
  
  그가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눈을 한번 꿈뻑 감았다 떴다. 그렇게 세 번을 했다. 침대 옆에 놓인 그의 하얀 손은 아직도 생생해 보였다. 나는 그의 손에 볼펜을 들려주고 메모판을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입에 들어간 관 때문에 말은 못 하더라도 글씨는 쓸 수 있을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써 봐.”
  
  그가 볼펜을 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송은 어떻게 됐어? 내가 졌어?’
  
  저승 문턱에 있는 그는 아직도 그게 궁금했다. 나는 회장측 변호사에게 그의 자살시도를 얘기했다. 재판장에게도 알렸다. 재판장과 변호사가 모여 소송이 없던 상태로 하자는 합의를 봤다. 회장이 소송만 취하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사위가 그런데 회장이 계속 싸우려고 할 리가 없었다. 나의 얘기를 들은 그의 표정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너 지금은 살고 싶지? 살고 싶으면 다시 눈을 세 번 껌뻑거려 봐.”
  
  그가 눈을 껌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또 한 번 그렇게 했다. 간호사가 다가와 그가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수술실로 들어간 그는 영원히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오전 나는 그의 영정사진 앞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늘게 피어오르는 향 연기가 그의 영혼같이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을 되돌아 보면 인생길 곳곳에 지뢰가 묻혀있고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 세상은 모순이고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치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서 누구나 한두 번쯤 죽음을 원할 수 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란 인물이 죽음을 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세상에 남아서 아직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죽지 못한다고 했다. 삶을 즐기려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어떤 임무를 띠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졌다는 것 같았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신문기사에서 살해당하기 직전의 엄마가 “애는 어떻게 해요?”라고 남긴 말이 가슴 시리게 다가왔었다.
  
  가까웠던 여러 사람이 자살을 했다. 자살을 해도 되는 것일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남뿐 아니라 자신도 포함된 게 아닐까. 죽이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육신의 욕망을 죽이고 자아를 죽여야 하지 않을까. 하늘에서 소환장을 보낼 때까지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게 아닐까.
  
  
  
  
[ 2021-11-28, 22: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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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팜파     2021-12-01 오후 12:58
참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자신만이 옳고 자신의 생각만이 가장 바르다는 것...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버리셨는데.
참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엄 변호사님 힘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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