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섞인 아버지의 술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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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에서 삼십삼년 전에 죽은 아버지를 봤다. 어둠침침한 산자락에 검은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옆을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그중 한 사람이 나의 팔을 슬쩍 잡았다 놓고 지나간다. 순간 그 옆모습을 봤다.
  
  ‘아, 아버지구나’
  
  아버지는 말없이 산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사람들의 검은 대열에서 혼자 빠져나와 아들과 얘기할 형편이 아닌 것 같다. 아버지가 만져준 팔에서 따스한 기운이 온 몸과 마음에 물결같이 퍼져나가는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났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투명한 새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흐린 하늘 아래 회색빛으로 드넓게 누워있는 동해바다가 멀리 내려다 보인다. 해수면에 바람이 이는지 접힌 주름같은 물결이다. 책상에 앉았다. 이제는 뼈마저 삭아 없어졌을지 모르는 아버지를 기억의 밑바닥에서 떠올린다. 아니 아버지가 지난 밤 내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에 있는 아버지 회사에 자주 갔었다. 암실 옆으로 작은 나무 책상들이 마주보면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끝에 책임자인 부장이 앉아 있었고 아버지 자리는 말단의 책상이었다. 아버지는 책상 옆의 빈 의자에 나를 앉히고 기다리는 동안 전과를 외우든가 공부하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상을 봤다. 나는 덩치도 좋고 싸움도 잘하는 우리 아버지가 왜 제일 낮은 자리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장이라는 작은 사람이 명령을 하면 아버지는 허리를 굽히고 복종했다. 그걸 보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동대문 근처에서 작은 사진관을 혼자 하던 아버지는 잡지사를 거쳐 신문사 사진기자가 됐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 사일구 혁명이 일어났었다. 어느날 밤 막소주를 글래스에 철철 넘치게 부어 마시면서 아버지가 뱉어낸 회한의 말을 칠십 고개에 이른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말을 쓰고 또 쓰고 말하고 또 말해 아버지가 내게 준 값진 유산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버지는 철없는 어린 아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저녁의 시위 현장을 찍기 위해 막 큰 대로로 나왔을 때였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길바닥에 돌이 질펀하게 깔리고 연기가 자욱했지. 그때 갑자기 내 눈앞에 경찰관 한 명이 카빈총을 어깨에 대고 어딘가 정조준하는 모습이 보이는 거야. 도대체 뭘 쏘려고 하나 총구 방향을 따라가 보니까 광화문 대로 건너편의 구두닦이 소년인 거야. 매일 회사로 와서 구두를 가져다가 닦아오는 안면이 있는 아이였어. 순간 ‘땅’ 하고 총성이 울리는데 그 아이가 개구리같이 펄쩍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져 널부러지더라구. 나는 너무 무서워서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 숨었어. 죽을까봐 벌벌 떨었지. 그 장면을 찍지 못한 비겁한 내 자신이 너무 싫더라구.”
  
  아버지는 권위 의식이 없고 소박했다. 아버지의 소주잔에는 눈물이 반쯤인 것 같았다. 나는 작은 월급에 목을 매고 아버지같이 회사 부장에게 허리를 굽히는 게 싫었다. 그래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면도 있다.
  
  변호사를 하면서 아버지가 맞닥뜨렸던 상황과 비슷한 현실을 여러 번 맞이했다. 처절한 고문을 당해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진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한밤중에 끌려 나가 교도관들한테 집단폭행당해 죽어 암매장된 사람을 보기도 했다. 살인청부업자를 시켜 꿈 많은 한 여대생의 생명줄을 끊어놓은 재벌 회장 부인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힘 있는 그들이 무서웠다. 그들의 유혹이 달콤할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외면하고 넘어가면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성경을 보면 강도당해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을 보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존재들은 그냥 피해 지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그게 세상인 것 같다.
  
  냄새가 나면 그냥 뭔가로 덮어버리려고 하는 게 세상이었다. 그런 상황에 마주칠 때마다 나는 쓴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양심이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같이 불의를 고발하는 카메라가 손에 없었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 소지가 금지된 비밀 유지 지역이었다. 고문을 법정에서 고발해도 그걸 들어주는 판사를 경험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카메라를 대신하는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여러 번 법정에 피고인으로 섰다. 아버지는 양심이 아프지 말라고 했고 그 분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살아보니까 그게 가장 편한 영혼이 되는 것임을 나이 먹은 이제야 깨닫는다.
  
[ 2022-06-26, 08: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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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가 바로서야     2022-06-27 오후 2:20
아하!! 그런 일도 있으셨군요!! 참! 많은 느낌을 받고 생각하게 하는 아주 귀중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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