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4성장군 백선엽] 軍과 나 (제7장 3.4)
하늘계단 (122.129.***.***)   |   2012.02.16  14:45 (조회 : 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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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4성장군 백선엽]         軍과 나



                                                             한국전쟁 당시

                                                최일선 야전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치룬 백선엽장군이

                                           오늘의 젊은 지성에게 바치는

                                                       생생한 전쟁 메시지


                                                                                      대륙연구소 출판부



                                                          6.25한국전쟁 당시

                                   이름모를 땅에서 꽃다운 젊음을 바친

                                                    대한민국 국군 용사들과

                                        산화한 UN참전국 장병들, 그리고

                                             6.25를 겪은 모든 국민들에게

                                                      삼가 이 책을 바칩니다.

                                                                     백 선 엽




차례


이책에 부쳐 ․ 정비석
16

저자서문 ․ 백선엽 19


제1장 길고 긴 여름날, 50년 6월


1. 아침 7시에 날아온 ‘개성함락’ 급보(急報) 28

2. 문산 방어선이 무너지다 34

3. 뗏목을 타고 진행된 한강 도하(渡河)작전 41


제 2장 낙동강까지 3백km의 후퇴길


1. 적 지연작전 한달 50

2.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54

3. 낙동강 피의 공방, 최후의 1인까지 60

4. 적 선봉을 꺾은 다부동전투 64

5. 적 3개사단 섬멸, 전세 역전 73


제 3장 선봉에 서서 북진, 북진


1. 후퇴 코스 거슬러 진격 84

2. ‘패튼전법’으로 우리는 전진한다 91

3. 평양입성, 생애 최고의 날 98

4. 평양 수복을 알리는 힘찬 종소리 105

5. 중공군의 덫에 걸리다 113

6. 피 말리는 가을밤, 운산 최후의 날 120


제 4장 물거품이 된 북진통일, 또 다시 후퇴


1. 입석부근에서의 휴식 130

2. 크리스마스 공세, 재난으로의 눈먼 행진 136

3. 참담한 1 . 4 후퇴 144

4. 중부전선에서의 공방전 152


제 5장 다시 38선을 향해


1. 한강에 불어오는 봄기운 162

2. 고락을 같이했던 1사단을 떠나다 169

3. ‘결전’이냐 ‘후퇴’냐 176

4. 3군단 붕괴의 여파, 대관령전투 183

5. 전선 교착중에 실시된 국군 집중 훈련 193


제 6장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1. 아무도 바라지 않는 휴전회담의 한국대표로 202

2. 휴전회담 주춤, 다시 전선으로 210

3. 白야전 전투사령부의 공비토벌 217

4. 지리산이 평정되고 중장 진급하다 224

5. 신생 국군의 상징부대 2군단 창설 232


제 7장 참모총장과 4성장군의 길


1. 중압감 속에 취임한 육군 참모총장 242

2. 국군 급식에서부터 산적한 문제를 풀다 250

3. 한국 국군 처음으로 4성장군에 256

4. 스탈린 사망 이후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265

5. 세계를 놀라게 한 반공포로 석방 273

6. 유리한 고지를 위한 최후 대공세 280


제 8장 마침내 전쟁은 끝나다


1. 통일은 더욱 멀어졌는가 290

2. 전후 복구사업에 박차를 가하다 298

3. 비로소 갖추어진 국군의 모습 304


제 9장 군과 나와 인생


1. 건군이래 최대의 군기파동 314

2.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321

3. 한국전쟁에 있어서 미군은 무엇인가 329

4. 해방후 군 좌우대결에 대한 회고 338

5. 제1공화국의 몰락, 역사가 주는 교훈 348


말미(末尾)에 부치는 글 ․ 김점곤
355





3. 한국 국군 처음으로 4성장군에



전후방에 걸친 이러한 산적한 문제와 씨름하던 52년말 아이젠하워가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아이젠하워는 52년 11월의 미 대통령 선거전에서 ‘한국전쟁을 종결하겠다’는 선거공약을 내걸고 승리, 공약 실천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12월 2일 대통령 당선자의 자격으로 내한하게 됐다.


아이젠하워의 방한은 도착시까지 극비에 붙여졌으며 김포공항에 내린 후에도 동숭동 서울대의 미8군사령부로 직행해 그곳에서 유숙했다. 이튿날인 12월 3일 아침 나는 아이젠하워가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참석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 레드포드 태령양 함대 사령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밴플리트 8군사령관,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그리고 나였다.


아이젠하워는 회의 직전 복도에서 참석자 일행을 만나 “굿모닝, 이렇게 모이니 마치 노르망디 상륙작전때 D데이 전날을 방불케 한다.”고 말했다. 회의에 앞서 밴플리트는 한국전에 종군하고 있는 아이젠하워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의 안부를 전했다.


“존은 3사단에서 훌륭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귀하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대장의 보직을 정보참모로 바꿨습니다.”아이젠하워는 “그것은 군사령관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나 나로서는 존이 적의 포로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희망입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밴플리트와 역시 아들을 최전선에 보낸 아이젠하워간의 아버지로서의 대화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한국군의 증편에 미국의 확약을 받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나는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에게 브리핑을 할 준비를 미리 갖추고 있었다.


나는 아이젠하워에게 한국군 20개 사단 증편계획을 설명하며 특히 미군 1개 사단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이젠하워는 이 계획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을 즉석에서 밝혔다.


아이젠하워는 이어 광릉에 예비사단으로 주둔하던 송요찬 소장의 수도사단을 방문했다.


여기에 동행한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를 서울시민 환영대회에 영접하기 위해 준비를 시켜두고 있었다.


중앙청앞 광장에는 10만 시민이 아이젠하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뜻을 전해들은 아이젠하워 일행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한 행사는 일정에 계획돼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호상의 문제로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의 시민 환영 대회장에 먼저 도착, 아이젠하워 일행이 태도를 바꿔 참석할 것을 기다렸다. 나도 李대통령을 수행했다.


10만 군중이 추위를 무릅쓰고 장시간 아이젠하워의 도착을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기다리는 동안 단상에 올라가 우리가 왜 휴전을 반대해야 하는지 열변을 토했다.


李대통령은 계획이 어긋남을 확인하자 배석한 나를 불러 세우고 “미국에 아이젠하워라는 2차대전의 영웅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이 전쟁의 영웅이 있다. 백선엽 장군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며 나를 추켜세웠다. 李대통령은 낙동강, 평양 등지에서의 전과를 소개하며 나를 우리나라를 수호한 군인이라고 과찬하는 것이었다.


(타자치는 사람 : 우리나라 돈 내 마음대로 초안의 인물을 정할 수 있다면 10만원권 이승만, 5만원권 백선엽, 1만원권 박정희로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5천원권은 전두환 1천원권은 이병철로 하고 싶습니다. 정주영도 존경하지만 북괴 김정일 돕는 것을 만년에 많이 해서 공과 과가 서로 비슷하다고 보기에 생략합니다. 그리고 왜 박정희보다 백선엽을 더 높이 세우느냐면 나라를 구한 인물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 인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승만, 백선엽 같으신 분들이 나라를 구하지 못했으면 대한민국은 없어졌을 것이고 우리 민족은 지금 북한처럼 전세계에서 가장 천대 받는 민족으로 전세계의 모든 국가와 민족과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박 3일의 아이젠하워 방문 일정이 끝나는 날 일은 또 꼬이기 시작했다.


李대통령은 이한을 앞둔 아이젠하워가 당연히 경무대를 예방할 것으로 믿었다. 李대통령은 백두진 총리 등 전 각료를 경무대에 불러들이고 김태선 서울시장을 8군사령부로 보내 아이젠하워의 경무대 예방을 주선하도록 했다.


그러나 김시장은 구 서울대 자리에 있던 8군의 정문에서 제지돼 영내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미군측은 아이젠하워가 보안상의 이유로, 또한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당선자’이기 때문에 경무대를 방문할 의사가 없음을 전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국가원수의 체면이 연거푸 손상되는 형세였다. 李대통령과 백총리는 나를 부르더니 8군에 가서 다시 한번 절충해 보도록 지시했다.


내가 밴플리트 8군사령관을 찾아가 용건을 얘기하자 그는 “클라크 유엔군 총살여관에게 한국측의 의사를 전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다.”면서 클라크와 만나 직접 얘기해 보기를 권했다.


클라크의 설명은 경호원들이 승인하지 않는 장소는 방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경호는 재무부 소관이며 이들은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였다.


“만약 아이젠하워 장군이 李대통령을 예방하지 않으면 이는 李대통령은 물론 한국 국민들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양자간 회담이 실현되지 않으면 미군도 앞으로 한국군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중히 결정하기 바랍니다.”


내 말을 듣자 클라크는 상기된 얼굴로 아이젠하워가 있는 바로 옆 사령관실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 나와 낮은 목소리로 “저녁 6시 경무대에서 만나자.”고 전했다.


아이젠하워는 아들 존 및 수행원을 대동하고 저녁 6시 예정대로 경무대에 도착해 의장대를 사열하고 李대통령과 각료들과 함께 약 40분간 환담을 나눈후 공항으로 직행, 이한했다.


아이젠하워가 방한 중 공식 또는 공개석상에 나타나기를 꺼려한 것은 사실이며 李대통령을 외면하려 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자기는 아직 미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당선자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이젠하워가 다녀간 지 보름 후쯤 이번에는 미 대통령 선거전에서 낙선한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이 잇달아 방한했다.


일리노이주지사 출신의 민주당후보인 스티븐슨은 성실하고 지성적인 분위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도 역시 한국전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내한한 것이었다. 스티븐슨의 안내는 나와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이 주로 맡았다. 전선의 1사단으로부터 제주도의 훈련소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 . 미군부대를 샅샅이 시찰했다.


스티븐슨과 나는 당시 미군의 방문자 숙소였던 지금의 필동 코리아하우스(일제 때는 정무총감 관사)에서 기숙하며 나의 안내로 전후방의 부대를 방문했다. 그는 한국군을 증강하면 미군 철수가 가능한 지에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


스티븐슨은 이로부터 4년 후 미 대통령 선거전에서 다시 아이젠하워와 대결해 패배하게 되나 나는 그의 인품이 대통령이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으리라고 생각됐다. 그는 한국군에 대해 “예상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코멘트(comment: 논평)를 남기고 나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이한했다.


아이젠하워와 스티븐슨 등 미국의 정치지도자의 방한을 계기로 국군 증강계획은 박차를 가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대로 강력한 군대를 가져야 하는 것이 절대절명이었고, 휴전을 결심한 미국도 전후 미군의 주력을 한국에서 철수하자면 한국군의 자위능력을 갖도록 지원하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이다.


나의 참모총장 취임시 10개 사단이던 국군은 53년 7월 휴전시까지 16개 사단, 53년 말까지는 20개 사단으로 계획된 증편을 완료하게 된다.


군대는 인원과 장비만을 모아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불과 1년여의 단기간내에 10개 전투사단이 창설된 배경에는 정부 및 육군본부와 미 8군, 미 군사고문단의 불철주야(不撤晝夜: 낮밤을 가리지 않음)의 노력이 있었다.


52년 말부터 53년까지 창설된 사단의 창설일 및 창설지는 다음과 같다.


▲12사단(사단장 윤재근 준장)=52년 11월 8일. 양양


▲15사단(사단장 이정석 준장)=52년 11월 8일. 양양


▲20사단(사단장 유흥수 준장)=53년 2월 9일. 양양


▲21사단(사단장 민기식 준장)=53년 2월 9일. 양양


▲22사단(사단장 박기병 준장)=53년 4월 21일. 양양


▲25사단(사단장 문용채 대령)=53년 4월 21일. 양양


▲26사단(사단장 이명제 준장)=53년 6월 18일. 논산


▲27사단(사단장 이형석 준장)=53년 6월 18일. 광주


▲28사단(사단장 이상철 준장)=53년 11월 18일. 논산


▲29사단(사단장 최홍희 준장)=53년 11월 18일. 제주



53년에 접어들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수상과의 회담을 주선했다.


전쟁중인 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2차대전 전후 미 . 일관계를 정리한 미국이 다음 단계로 극동 우방국간의 관계 재정립을 위해 정식 외교관계 조차 갖기를 꺼리고 있는 한 . 일간에 뭔가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李대통령의 역사적인 일본 방문에는 나와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수행했다. 당시 동경에 김정렬 공군소장이 유엔사령부에 연락장교 단장으로 주재하고 있었으므로 육해공군의 선임자가 대통령을 수행 보좌한 것이다.


53년 1월 5일 李대통령 내외와 우리는 클라크가 보내준 C-54군용기편으로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곧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다.


하네다공항에는 클라크 대장 부부와 오카자키 가쓰오(岡崎勝男) 외무대신등이 출영했고 미군과 일본 경찰이 삼엄한 경호를 하고 있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조총련 또는 공산계열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李 . 요시다 정상회담은 이튿날인 1월 6일 하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관저인 동경 시내 마에다(前田) 하우스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용식 주일공사, 요시다 日수상과 오카자키 외무장관, 클라크와 머피(Murphy) 정치고문 등 한 . 미 . 일의 6인이었다.


김용식 공사(외무장관 역임)는 이때 약 70분간 진행된 회담에서 李대통령이 주로 발언을 하고 요시다 수상은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고 전한다.


7순의 양국 정상은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한 후 회담장에 들어갔다. 李대통령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고 요시다 수상 역시 침착하고 빈틈이 없어 보였다.


李대통령은 한 . 일간 제문제가 장차 잘 타결될 것을 희망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데 대해 요시다 수상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은 차후 절대로 없을 것이며 군국주의의 부활도 있을 수 없음을 표명했다고 한다.


항간에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는 아직도 호랑이가 많은가.”라는 요시다 수상의 질문에 李대통령이 “임진왜란 때 가토가 다 잡아가 없다.”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실은 요시다 수상이 청년시절 신의주 건너 안동(安東)에서 영사로 근무할 당시 한국에 호랑이가 많다는 얘기를 하자 李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속담을 인용해 “우리나라에서는 아들을 최소한 셋을 낳아야 한다. 한 아들은 대를 잇고 또 한 아들은 승려를 만든다. 이중 한 명쯤은 범에게 물려갈지 모르니까 아들 한 명이 더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귀국길의 비행기안에서 李대통령은 회담 결과를 묻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해결된 것은 없다. 한일관계의 개선은 현재로서는 쉽지 않다. 한일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교제하려면 앞으로 30년은 지나야 한다. 일제때 종살이 한 세대가 사라지고 새싹이 자라나야 가능할 것이다.”


이때 동경의 모습은 전후복구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한국전쟁으로 인한 소위 조선특수(朝鮮特需)로 폐허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동경 거리에는 정, 사복의 미군이 많이 눈에 띄었다.


53년 1월 31일 나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국군에서 처음으로 4성 장군에 오르는 영예스런 날이었다.


박진석 비설실장을 통해 연락을 받고 부산의 경무대에 가자 李대통령과 밴플리트가 나의 양 어깨에 대장 계급장을 하나씩 달아주었다.


李대통령은 이때 “자네, 원래 우리나라에는 임금이 대장이고 신하에는 대장이 없었어. 지금은 공화국이니 자네가 대장이 된거야.”라면서 나를 격려해 주었다.


미군은 병력 20만명당 1명의 대장을 두는 것을 원칙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으로서는 나를 포함해 누구도 대장에 승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날 마침 퇴임이 임박한 밴플리트에 대한 서울대학교의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어 식장에는 정부요인들을 다수 만나 진급인사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대를 비롯한 전시 연합대학은 천막교사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예박사 수여식은 경남도청 강당으로 장소를 옮겨 열렸었다.


밴플리트는 51년 4월 11일 8군사령관을 맡아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오랫동안 한국전쟁을 지휘하고 군 경력을 마감했다.


그는 李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전투와 한국군 증강 양면에서 헌신했다. 그가 국군을 위해 특히 힘을 기울인 것은 4년제 육군사관학교의 창설 및 육성이었다.


그는 李대통령에게 한국군의 통솔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웨스트포인트와 같은 사관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52년 4월 육군이 진해에 사관학교를 탄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육사는 그 성격상 미 군사원조의 대상부대 명단에 포함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육사는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돼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 궁색한 형편을 면키 어려웠다.


밴플리트는 육사를 지원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모금 활동을 벌여 육사가 태릉으로 이전한 후 이 모금으로 도서관을 건립하게 됐다.


밴플리트는 현재 96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의 포크시티에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거리의 이름은 밴플리트 스트리트이다.


밴플리트의 후임은 테일러(Maxwell Taylor. 미 육군 참모총장. 주월미대사 역임)중장이었다.


테일러 역시 2차대전 중 미 101공수사단장으로 노르망디 및 룩셈부르크작전에 참가했고 전후 베를린 봉쇄 사태 당시 서베를린 주둔 미군사령관을 역임한 역전의 지휘관이었다.


포병출신인 테일러는 9개 국어를 구사하는 명석한 인물로 군정가(軍政家)로서도 손꼽히고 있어 그의 임명은 휴전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관측됐다.


테일러의 부임 직후인 53년 3월 5일 소련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교착되고 있던 휴전회담은 공산군의 후원자인 스탈린이 사망하자 협상을 마무리 하기 위해 바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스탈린 사망의 소식을 접한 곳은 동해상 원산 앞바다의 미 해군전함 미주리호 함상이었다. 라이언 군사고문단장이 함께 동행했다.


당시 제해권은 미 해군이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 미군 함정을 타고 원산이 육안으로 보이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52년 가을에는 미 전함 뉴저지호를 타고 원산 동쪽 15km거리의 여도(麗島)에상륙, 운산시내 철도 조차장과 항만시설에 함포사격 및 공중폭격을 가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요새화한 여도에는 미 해군과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스탈린 사망일에도 나는 클라크(Joseph Clark)미 7함대사령관의 초청으로 미주리호에 승선하고 있었다.


클라크 중장은 내게 “독재자 스탈린이 오늘 죽었다.”고 함상에서 수신한 뉴스를 전해주며 “이후 전쟁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날 내가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옮겨타고 있을 때 함상에서 폭발사고가 있었다.


항공모함에 귀환하던 함재기가 폭탄을 적재한 채 함상에 착륙하다 폭발해 바닥에 큰 구멍이 나는 사고를 저질렀다.


나는 이때 미군 사령관이 심한 꾸지람과 함께 기합을 주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4. 스탈린 사망이후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국군 전투사단의 급속한 증편 과정에서 핵심적 과제의 하나는 포병의 증강이었다. 포병의 적절한 지원이 없는한 보병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전쟁중 국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은 빈약한 포병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포도 빈약했을 뿐 아니라 숙력된 포병지휘관도 거의 양성돼 있지 않았다.


전쟁초기 일부 보병지휘관들은 보병과 포병의 협동 등 보포(步砲)협동에 대해 기초 개념도 갖추지 못했었다.


예컨대 포는 한 곳의 포진지에서 원근의 표적에 전 방위로 사격을 가할 수 있으나 보병지휘관들은 포병에게 “이리와서 쏘라.”, “저리 가서 쏘라.”는 등 엉터리 지휘를 하고 이에 항의하는 포병지휘관을 구타하는 일까지 빚어지기도 했었다.


육군본부는 이같은 과거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신설 사단에 충원할 포병사령관과 포병장교의 육성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이 과제를 담당한 사람도 포병감을 거쳐 행정참모부장이 된 신응균 소장(중장 예편. 서독, 터키대사 역임)이었다.


신영태 국방장관의 장남이기도 했다.


신소장은 52년 가을 나에게 포병 증강계획의 일환으로 포병사령관의 양성 방안을 가져왔다.


그는 과거 사단장과 사단 포병사령관의 계급상 격차가 심해 포병이 경시됐던 점에 비추어 신설 사단에서는 양자의 격을 좁혀야 원활한 작전수행을 기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따라서 부사단장급의 고참 보병 대령 중에서 요원을 선발해 집중적 포병교육을 시킨 후 이들을 포병으로 전과(轉科)시켜 각 사단의 포병사령관으로 배출하자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이들을 진급시켜 사단장은 소장, 포사령관은 준장으로 격을 맞추자는 계획이었다.


나는 이 안이 보병의 인사적체까지도 해소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이를 승인했다.


이때 포병사령관 요원으로 선발된 사람이 전 대통령 박정희 대령을 비롯해 박경원(중장 예편. 내무장관 역임), 이기건(준장 예편), 이명제(소장 예편. 작고), 송석하(소장 예편), 이창정(소장 예편. 작고), 김영주(준장 예편), 최경만(준장 예편), 박현주(소장 예편), 김동주(준장 예편. 작고), 이춘경(준장 예편), 김상복(중장 예편. 작고), 이희권(준장 예편), 김동빈(중장 예편), 강태민(소장 예편. 작고), 이백우(준장 예편. 작고)등이었다.


이들은 52년 10월 13일부터 3개월간 광주포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후 다시 메이오 준장의 제5포병사단에서 현장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을 모두 마치고 장성 진급과 함께 배치에 들어가기 직전 미군측으로부터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테일러 8군사령관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더니 “포병지휘관은 단기간에 육성될 수 없다.”면서 이 계획을 백지화해 달라는 것이었다.


포병출신인 테일러 사령관은 포병은 평생을 배워도 부족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으며 동시에 한국인의 수학적 계산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기존의 국군 포병장교들이 미8군 포병부장 데이(Day)준장을 통해 보병 대령들의 포병 전과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은밀히 전해두고 있었다.


나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한국군의 인사문제는 내가 잘 알아서 할 일이며, 이들의 자질과 리더십이 훌륭하다고 테일러 사령관을 설득했다. 아울러 테일러와 동행해서 화천 주둔 제5포병단에 가 이들을 개별 면접해 보고 가부를 판단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테일러는 내 말을 듣더니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자기 대신 라이언 군사고문단장이 면접을 실시하고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했다.


나와 함께 5포병단으로 직행한 라이언 소장은 메이오 포병단장으로부터 개인기록 카드를 제출받고 나의 통역으로 면접을 마쳤다.


라이언은
“이만하면 훌륭하다. 이 이상의 장교를 어디서 구하겠는가.”라면서 전원 합격의 판정을 내렸다.


라이언은 특히 박정희 대령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고 내게 소감을 전했다.


이 문제가 타결되자 이들은 53년 3월 모두 준장에 진급해 포병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테일러가 이 계획을 끝까지 반대했더라면 이들은 장성 진급의 기회를 잃을 뻔했다.


(타자치는 사람 : 박대통령을 준장으로 진급시킨 분이 백선엽 장군이며 또 박대통령께서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심사 받을시 신원조회에 걸려 진급 못할 뻔 했었는데 백선엽 장군이 박대통령의 신원 보증을 서셨습니다. 그때 백선엽 장군의 보증이 없었다면 소장 진급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내용도 나중에 나옵니다.)


5.16이후 포병 출신들이 크게 각광을 받은 이면에는 이같은 사연이 있었다.


우리가 포병지휘관 및 장교를 양성하고 미군이 포병장비를 지원함으로써 국군 포병은 궤도에 오르게 됐다.


1백5밀리 포 1개 대대가 사단을 일반 지원하고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가 연대를 직접 지원해야 했던 어려운 시대를 마감하고 사단마다 1백55밀리 포 1개 대대와 1백5밀리 포 3개 대대를 보유해 여하한 강대국 군대의 포병 수준에도 뒤지지 않는 위용을 갖추게 됐다.


한편 판문점의 휴전회담은 스탈린의 사망이후 큰 진전을 이뤄 53년 4월 20일에는 상이(傷痍)포로를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과 팽덕회는 3월 28일 병들고 부상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한달전의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4월 20일부터 5월 3일 사이 판문점에서
5천1백94명의 북한 포로와 1천30명의 중공군 포로가 북으로 송환되고 4백 71명의 국군과 1백 49명의 유엔군 포로가 남으로 귀환했다.


‘리틀 스위치(Little Switch)’라고 불리는 이 상이포로 교환의 국군측 인수단장으로는 최석 소장이 파견됐다.


최소장은 당시 아군 귀환 포로의 숫자가 적군에 비해 현격히 적은 데 대해
“국군 포로를 대부분 괴뢰군에 편입시켰기 때문에 돌려 보낼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여하튼 리틀 스위치의 완결로 휴전은 눈앞에 다가오는 현실로 인식됐다.


이 무렵 나는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즈 대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초청 목적은 펜터건 및 미국내 각급 군사교육 시설의 시찰과 나에 대한 군(軍) 및 군단(軍團)급 지휘코스의 오리엔테이션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5월 중순 나는 단신으로 첫 미국행의 여정에 올랐다.


대구에서 C-47군용기로 동경으로, 여기서 팬암소속 4발 여객기의 한산한 1등석에 앉아 웨이크와 호놀룰루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의 트래비스 공군기지까지 이틀에 걸쳐 날아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C-54 군용기로 워싱턴공항에 내렸다.


나의 도착이 일기불순으로 두어시간 늦어졌기 때문에 양유찬 주미대사가 나의 도착에 때맞춰 베푼 리셉션의 초대 손님들은 오랜시간 대사관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손님중에는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와 다수의 한국전 참전 미군이 포함돼 있었다.


이튿날 펜터건(미 국방부)근처 미군 장성관사들이 밀집된 포트마이어에서 답례로 열린 리셉션에는 콜린즈 대장을 비롯해 많은 펜터건 사람들로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환담과 축배의 왁자지껄함 속에서 우리나라의 암담한 장래를 내다보고 있던 나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었다.


자연히 나를 만나러 리셉션에 찾아온 과거 전장에서 친숙했던 미군 전우들과 따로 만나 진지한 대화를 갖게 됐다.


내가 1군단장때 동해상의 제5순양함대 사령관으로서 또한 휴전회담이 개시될 때 회담대표로서 나와 함께 싸우고 일했던
버크(Arleigh Burke)제독이 이때 해군성 전략 기획국장이었다.


또 1군단의 고문관이던
로저스(Glenn Rogers)대령과 평양진격때 1사단 고문관이던 헤이즈레트(Heyzlet)대령도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었고, 육본 참모총장 고문관이었던 하우스만(James Hausman)중령은 육군성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어 이날 모두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들 4명의 미군과 군사유학중 나를 수행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합류한
남성인 대위와 함께 연회를 마치고 곧장 로저스의 집으로 가 자못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새벽 3시까지 계속된 토론 끝에 우리들 6인이 도달한 결론은 ‘
한국은 비록 통일없는 휴전을 결사반대하고 있으나 미국은 조만간 휴전을 할 것’이며 ‘이 시점에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어떤 보장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한국의 장래는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버크 제독
은 특히 미국 정부로부터 모종의 군사적 경제적 보장을 받아내려면 내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직접 만나야 할 것이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날이 밝자 나는 콜린즈 총장을 찾아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콜린즈는 난색을 표했다.


“미국에는 매년 수많은 각국의 참모총장이 방문합니다. 귀관을 대통령이 만나게 되면 전례가 돼 다른 총장들의 면담을 사절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매일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가며 미군과 함께 싸우고 있는 한국의 참모총장을 어떻게 타국의 총장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더욱이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구면입니다.”


콜린즈 총장은 나의 완강한 태도를 보더니 옆방의 참모차장 헐(John Hull. 클라크 후임의 유엔군사령관)대장을 부르더니 내가 백악관을 방문하도록 연락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상오 10시 정각, 나는 백악관의 집무실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수행원도 배석치 않고 단독 면담을 갖게 됐다.


집무실은 창가에 큰 책상이 하나 놓여있는 생각보다 넓지 않은 방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먼저 李대통령의 안부를 묻고 말을 꺼냈다.


“한국 정부와 국민이 휴전을 반대하는 뜻은 잘 알고 있으나 한국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이 나의 선거공약이며 우방인 영국과 여러 동맹국들이 휴전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에 대해 “만약 여기서 휴전하게 되면 통일의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한국 정부와 국민의 휴전반대를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슨 방안이 있겠소.”


“대통령 각하, 왜 우리에게 보장을 해주지 않습니까.”


“보장(guarantee)이 무슨 뜻이오.”


“우리나라는 3년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됐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ce Pact) 같은 것을 고려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귀하의 뜻에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상호방위조약은 유럽국가와는 많이 체결하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와는 드문 케이스이고 또 이는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게 워싱턴에 얼마간 체류할 지를 묻고 그간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2차대전중 아이젠하워의 참모장)국무차관을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라고 말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덜레스(John Dulles)였다.


나는 이튿날 버크 제독과 함께 스미스 차관을 찾아가 휴전후 한국의 방위 및 재건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눴다.


이것이 54년 11월 18일 체결된
한 . 미 상호방위조약의 시발이었을 것이다.


약 닷새간 워싱턴에서의 일정을 마친 나는 뉴욕으로 가 웨스트 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와 미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17발의 예포 속에 방문한 웨스트포인트에서 1사단장 시절 다부동전투 때 함께 격전을 치렀던 마이켈리스를 재회했다. 그는 준장으로 진급해 생도대장을 맡고 있었다. 내가 이때 이곳에 기증한 태극기가 지금까지 그곳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명예 . 의무 . 국가(Honor . Duty . Country)’를 모토로 하는 웨스트포인트는 아이젠하워, 맥아더, 패튼,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테일러 등을 배출한 학교답게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뉴욕에서는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팬트하우스에 거주하는 맥아더를 예방했고 한미재단의 리셉션에서 이원순(전경련 고문), 김자경(성악가)등 동포들의 환대를 받기도 했다.


조지아주의 통신헌병훈련학교와 보병학교에서는 많은 도미 유학 육군장교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미보병학교에는 손희선(소장 예편)을 단장으로한 유학생이 수백명이나 있어 마치 국군보병학교를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대부분 영어에 미숙했기 때문에 교육에는 통역 장교를 두고 있었으나 교육성과는 훌륭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일정은 캔사스주의 지휘참모대학이었다.


이곳에서 나 자신이 2주간 교육을 받도록 예정돼 있었다.


이곳의 교장은 마침 호디스(Henry Hodes)소장으로 그는 휴전회담대표로 나와 함께 문산과 개성을 오가며 일했던 사람이었고 이곳에는 이종찬, 장도영, 최영희, 박병권, 정래혁, 안광호 등 장성들이 유학중이었으므로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나에 대한 교육은 희한한 것이었다.


나 하나를 두고 20여명의 교관이 전문 분야별로 속성 집중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내가 李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것은 이 교육이 열흘쯤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李대통령의 목소리가 태평양을 건너 내 귀에 울렸다.


“그쪽 형편이 꼭 급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이 좋겠어.”


나는 미국 방문일정을 줄이고 급거 귀국해야 했다.


내가 전화를 받기 이틀전 벌써 미국의 신문에는 李대통령이 나를 소환하리라는 기사가 보도돼 나는 뭔가 긴박한 사태가 모국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미국의 신문기자들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한국전쟁은 오히려 미국의 전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연일 뉴스의 초점이었다.


“휴전이 언제 되리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신(神)만이 안다.”고 답변하자 이튿날 신문의 헤드라인은 ‘Only God knows’였다. 어떤 기자는 “동양사람은 키가 작고 앞니가 튀어나오고 안경을 쓰는 데 당신은 왜 그렇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서있고 깨끗했다.


일요일이면 모두 교회에 나갔다. 에어컨이 막 등장했고 마릴린 몬로와 존 웨인이 대중의 우상이었다. 1백달러 지폐를 내면 점원이 신기하게 쳐다보며 여권을 확인했다.


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본 것도 이때 미 지휘 참모대학의 냉방이 잘된 극장에서였다.


내 눈으로 보기에 흑백 차별을 제외한다면 당시 미국과 우리나라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5. 세계를 놀라게 한 반공포로 석방



미국방문중 일정을 단축해 6월초순 귀국,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으나 대통령은 별말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왜 급히 돌아와야 했는 지는 거리를 가득 메우고 시위를 벌이는 군중들이 대신 전해주고 있었다.


“통일이 없으면 죽음을 달라.”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라.”

시민들의 휴전반대 데모는 절정에 달해 경무대로 가던 나는 자동차를 탄 채 군중들에 갇혀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이때 전국적으로 벌어진 시위는 관제데모의 성격도 있었으나 이것이 국민 감정과도 일치했기 때문에 그 열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다음 내용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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