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받는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에 대해 고뇌할 줄로 알지. 그렇지만 아니었어." 부장판사를 하는 친구가 내게 물었었다.

“나 사표를 내려고 해. 나도 책 읽고 싶고 애들이 공부하도록 돈도 대주고 싶어.”
그게 판사들이 변호사가 되는 일반적인 이유였다.

“판사 생활이 어땠어?”

“대학을 다닐 때 법을 공부해도 도대체 맛이 없었어. 딱딱한 호두를 껍데기채 그냥 입에 넣고 사탕 같이 빨아먹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냥 공부한 거지. 판사를 할 때는 법의 묘미보다는 권한이 대단하다는 걸 실감했어. 내 결정이 한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거야. 판사를 하면서 어깨가 무거웠지. 나의 행동과 태도가 세상의 시선에 의해 제한되고 구속되는 삶이지. 판결문에 오탈자만 있어도 당장 비난이 쏟아져. 그만큼 기대가 크고 세상은 판사의 완전성을 요구했어. 법원 내부적으로도 상급심의 재심사를 받는 입장이니까 긴장했어.

판사를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이건 국민과 당사자를 기만하는 거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어.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에 대해 고뇌할 줄로 알지. 그렇지만 아니었어. 의사들이 환자들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듯 판사인 나도 개별적인 인간을 보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유형에 따라 답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 어떤 틀로 사람을 규정지으면 그건 이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고 봐. 너는 딱 보니까 이런 유형이야 하고 즉석에서 답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어. 우리 법조인들의 머리가 그런 것 같아. 그 사건만의 특수성이나 당사자의 아픔을 살펴 줄 여유가 없었지. 재판을 받은 당사자들은 도맷금 취급을 받은 것 같아 불만이지. 존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인 판사도 존중하지 않아. 앞에서는 권위에 승복하는 것 같아도 뒤에서는 아니지. 그런 흐름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으니까 ‘부러진 화살’ 같이 사법부를 겨냥한 영화가 나오고 그걸 보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거야. 대법원장은 왜 영화 관객이 그렇게 많은가 그 본질적인 이유를 알았어야 했어.”

그는 사법부와 판사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978년 우리는 직업장교로 입대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같은 내무반에서 묵으면서 훈련을 받았다.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연병장을 뒹굴 때 그의 태도가 특이했다. 십분간의 휴식 시간이 되면 모두들 지쳐서 바닥에 널부러졌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혼자 조금 떨어져 앉아 땀에 젖은 상의 포켓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읽고 있었다. 고된 훈련의 일과가 끝나면 모두가 물먹은 솜이 되어 잠 속에 빠져 들었다. 그 시각이면 그는 숨겨두었던 책을 몰래 꺼내 음미하듯 읽었다.

어느 날 나 혼자 내무반에 있을 때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가 숨긴 책을 찾아보았다. 작은 성경과 해설서였다. 그의 영혼을 잡아주는 닻이 그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을 마치고 임관이 되자마자 몇달 후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이상했다. 그는 법서가 아닌 성경을 봤는데도 합격했다. 성경에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로운 힘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흐르고 법정에서 재판장인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성스러운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가 판사를 그만두면서 법원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후배 법관들에게 남긴 짧은 글이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법관 생활 15년 동안 매달 수백 건의 사건을 정신없이 처리하면서 내심 소송관계인의 애타는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해 늘 죄를 짓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는 깨끗한 양심을 가진 판사였다. 직업관도 투철했다. 혼탁한 물 위로 흔들리며 가는 이 사회를 바로 잡아주는 닻 역할을 하는 것이 판사라는 생각이다. 좀 더 깊숙이 말하면 양심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 생각이 아닐까. 무엇이 그를 반듯한 판사로 만들었을까. 나는 그게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젊은 날 먼지가 풀풀 나는 연병장에서 쉬는 시간에 그가 읽던 땀에 젖은 성경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판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먼저 떠오르는 게 ‘과부와 재판관’에서 등장하는 판사다. 그 판사는 하나님도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판사였다.

또 다른 재판관이 있다. 사도바울을 심리하는 재판관이었다. 자주 불러 얘기를 듣는 척하면서 은근히 뇌물을 바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판사가 되지 말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지위와 권한을 탐하고 대우가 좋아 보여서 법관이 된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그런 경우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보다는 오직 대법관이 되려는 출세욕이 전부였다. 그들의 주위에서는 냉기가 감돌았다. 약한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이재명 정권의 민주당에서 대법관을 대폭 증원하는 법을 통과시키려는 것 같다. 올곧은 양심을 가지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인재들이 그 자리로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