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애국애족과 86 정치인의 사욕편정(邪慾偏情)을 같은 '괴물'로 설정. 나에게도 여느 사람들과 같은 습관이 하나 있다. 신문에 실린 명문이나 좋은 칼럼을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하나씩 꺼내 읽거나 외우는 버릇이다. 신문 스크랩을 하던 버릇이 컴퓨터의 출현으로 저렇게 바뀐 것이다. 저장하는 데에는 컴퓨터가 편하지만 꺼내 읽는 것은 스크랩이 편하다. 컴퓨터는 정자세로 앉아서 해야 하지만 스크랩은 누워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신문 스크랩으로 바꿀까 생각하고 있다. 오늘 조선일보에 있는《[朝鮮칼럼]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한국의 86 정치인들》이란 칼럼도 반듯하게 저장해 놓았다. 동서고금을 막론, 저렇게 준엄히 꾸짖는 어른이 있어야 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발전한다.

칼럼 제목에서 말한 ‘괴물’이 누구일까?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그들은 또 누구일까? 아마 괴물은 박정희 각하를 이름일 것이고 괴물이 된 자들은 86 정치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설정이 잘못 됐다. 백보 양보해서, 각하가 독재자로서 괴물이었다 치더라도 그건 10월 유신 이후의 일이다. 유신 이전엔 각하를 독재자라 하지 않았다. 10월 유신 이전은 가내 수공업이었고, 이후는 중화학공업 시대였다. 처녀들이 댕기 머리를 끊어 팔아 이룩했던 것이 유신 이전의 가내 수공업의 성공이었고, 유신으로써 오늘 우리가 미국에 군함을 건조해 주고 탱크도 유럽에 수출하게 됐다. 유신이 중화학공업을 추동,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대한민국을 원조국(援助國)으로 올린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괴물은 박정희 각하가 아니라 국가 성공의 길을 가로막은 386이 괴물이었다. 도리어 박정희 각하가 386이란 괴물과 싸웠던 것이다.

니체가 했다는, "괴물과 싸울 때는 같은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무리 설득력 넘치는 말일지라도 갖다 불일 만한 데에 붙여야지 어떻게 박정희 각하에게 386 데모꾼들의 망동을 들이댈 수 있나? 거듭 말하거니와 혹 각하를 괴물로 설정하고 86 정치인을 괴물과 싸우는 사람으로 설정했다면 설정이 잘못된 것이다. 설정이 잘못되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처럼 결론도 잘못되는 법인데 묘하게도 저 칼럼은 결론도 훌륭하다. 그래서 칼럼의 필자가 의도하지 않은 제목을 신문사가 잘못 단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서적을 출판할 때 책 제목은 저자가 아닌 출판사가 단다고 들었다.

여담이지만 조갑제닷컴이 고맙게도 내 글에 제목을 달아줄 때가 많다. 나는 제대로 된 글도 못 쓰지만 제목 다는 게 글쓰기보다 어렵고 힘든다. 조갑제닷컴이 달아준 제목에 무릎을 칠 때가 많고 본문에 있는 글을 제목 삼았는데 이걸 왜 나는 몰랐단 말인가 하며 자신을 나무랄 때가 많다. 그러면서 배운다. 너무 감사하다. 조갑제닷컴에서 글쓰기를 배우듯 제목 다는 것도 배운다.

다 아시다시피, 각화무염(刻畫無鹽)의 고사가 있다. 진(晉)나라 유량(庾亮)이 주의(周顗)에게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악광(樂廣)에 견주고 있다.”라고 하니, 주의가 “어떻게 무염을 화장시켜서 서시의 앞에 내세운단 말인가(何乃刻畫無鹽 唐突西施也)”라고 답변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무염과 서시는 각각 대표적인 추녀와 미녀의 이름이다.

박정희 각하와 한낱 데모꾼들을, ‘괴물’과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사람으로 설정한 제목 때문에 저 칼럼이 제빛을 다 발하지 못하는 듯하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더라도 각하의 애국애족과 86 정치인의 사욕편정이 무엇이며 어떠한지 다 알지 않은가. 박정희 각하와 86 정치인들의 일세일기(一世一期)를 다시 한번 보라. 절세미인과 세기말적 추녀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