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 개혁(9)--성역이 너무 많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일단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할 명분이 된다.
이 명분 앞에서는 아무리 기세 좋게 나가다가도 멈출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근본적인 치유를 못한다. 이 명분 때문에 정확한 진단을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단기적이고 즉흥적이고 피상적인 미봉책이 난무한다. 사람만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
이리하여 속으로 병은 깊어만 가고 종양은 커져만 간다. 어찌 보면 겉은 멀쩡한데, 속은 이미 다 썩어 문드러져 있다. 마침내 누적된 문제가 일시에 드러나 폭발하게 되면(6·25나 외환위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때사 사람들은 너도나도 예언자연한다.
문제는 이 때도 서로 책임을 전가하느라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시야가 좁아서 다시 미봉책을 서둘러 마련한다. 수술을 하되 종양을 대충 걷어 내고 서둘러 봉합하기 바쁘다. 명분을 장악한 아마추어가 권력을 잡아서 하나같이 '정치적'으로 결정해서 강력하게 '소신 있게' 밀어붙인다.
병의 근원을 전문의들이 서로 의논할 절호의 기회 곧 아마추어들이 누구나 당연시하는 것을 전문가들이 근본적으로 검토할 절호의 기회인데도 이를 또 놓쳐서 문제를 새로 키운다.
교육에서 누구나 당연시하는 것들을 한 번 꼽아 보고 이것이 정말 당연한가를 따져 보자. 그래야만 교육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어 해결책도 근본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
1)과외는 나쁘다.(전두환 전 대통령의 통찰력은 신기막측이다.)
2)입시 위주의 교육은 나쁘다. (전인 교육만이 살 길이다.)
3)대학입시제도가 잘못되었다.(입시제도만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4)대학 본고사는 나쁘다. (대학은 수험생을 괴롭힐 생각만 한다. 대학의 입시 업무를 경감해 주어야 한다.)
5)평준화는 좋다. (교육에서는 자유보다 평등이 우선한다.)
6)내신은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30%, 40% 이상 반영해야 한다.)
7)보충수업은 나쁘다.(학교 교육이 정상화되어야 한다.)
8)자율학습은 나쁘다.(학교 교육이 정상화되어야 한다.)
9)대학문은 넓을수록 좋다. (명문대일수록 학생을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
10)고등학생은 계열에 관계없이 전교과목을 배워야 한다.(예체능이나 실업계도 예외가 없다.)
11)실업계 고등학교는 신경 쓸 것 없다.
12)대학 들어가는 것만 신경 쓰면 된다.
13)대학은 학문보다 낭만과 사회정의에 신경을 써야 한다.
14)종합대가 좋다. (전국의 모든 대학이 전학과를 개설해야 한다.)
15)예체능학과도 모두 대학에 있어야 한다.
16)일선 학교와 대학에 자율권을 주지 않을수록 좋다. 교육부가 일일이 간섭해야 한다.
17)유급제는 나쁘다.
18)재수는 나쁘다.
19)퇴학은 나쁘다.
20)주입식 교육은 나쁘다.
21)토론식 열린 교육이 좋다.
22)한 학급에 최소한 40명은 되어야 한다. 60명까지는 언제든지 허 용해야 한다.(모든 학생을 교육시키려면 어쩔 수 없다.)
23)교육 예산이 GNP의 6%가 되어야 한다.(이것만 확보되면 교육 문제는 절로 풀린다.)
24)사립학교도 공립과 똑같아야 한다.
25)전교조는 나쁘다.(김대중 정부 이전)
26)전교조는 좋다.(김대중 정부 이후)
27)교육은 정치의 시녀다.(정권이 바뀌면 교육 정책이 탈바꿈하는 것이 정상이다.)
28)일선 교사는 평생 7급 공무원 대우도 과분하다.
29)대학 교수는 놀든 연구하든 자유지만, 일선 교사는 출퇴근 시간 을 칼같이 지켜야 하고 아무리 잡무가 많아도 교재 연구를 꾸준히 해야 한다.
30)모든 원흉은 한국인의 맹목적인 교육열이다. 어떻게 하든지 이 교육열을 식혀야 한다. 그 전에는 어떤 정책도 소용이 없다.
이렇게 당연시하는 게 많다. 이것들은 신성 불가침의 영역에 속해 있다. 공산국가를 개혁하는데 있어서, 공산국의 가장 기본 전제인 재산 공유화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누구나 당연시했기 때문에 온갖 부작용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선뜻 재산 공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일반 국민들은 피부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다 느끼고 가슴으로는 이미 재산 공유에 대해서 사망 선고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마르크스의 멋진 이론에 압도당해서 그를 이론적으로 이길 머리가 없었기 때문에,
머리로는 재산 사유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온갖 개혁 정책과 사상 교육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는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는 등소평이 나와서 정치는 비록 공산당이 담당하더라도 경제에서 과감히 자본주의적 요소, 곧 재산 사유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혼란이 없이 공산주의의 모순을 개혁할 수 있었다. 등소평의 위대성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그는 공산국가에서 누구나 당연시하는, 하늘보다 지엄한 공산주의 상식에 의문을 품되 사상으로 이에 맞대응하기보다 일반 국민들의 뜻을 좇아 아주 간단한 말로 재산 사유화를 과감히 허용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공산주의라는 명분을 버리지 않은 척하면서, 재산 사유화를 단지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수단일 뿐이라며, 사실은 공산주의의 근본을 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는 가장 반공산주의적인 정책을 쓰면서도 현실의 공산당을 존속시켜 점진적인 개혁으로 혼란을 막은 것이다.
이건 모든 걸 부정한(본인 말로는 자기는 개량 공산주의자라고 했지만)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가 극심한 혼란을 가져와서 소련이 아예 하루아침에 후진국으로 전락한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과학기술, 자원, 국방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은 중국을 압도했지만, 한꺼번에 모든 걸 얻으려다 한꺼번에 모든 걸 잃어 버렸다.
이를 충분히 고려하여 나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방법을 제시하겠지만, 교육부를 해체하라느니, 교육부 장관은 당장 물러나서 애국가 한 번 크게 부르고 한강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라느니라는 말은 않겠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문화는 한꺼번에 모든 걸 바꾸어 버리는 러시아의 문화와 몹시 닮았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정치 개혁이 전혀 진척이 없는 이유도 지극히 간단하다. 대통령을 정치인 대열에서 빼 버리기 때문이다. 집권당에서 그분을 오로지 떠받들어 모시기에 바빠서 대통령이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어도 그것을 기가 막힌 이론을 동원하여 하나같이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주화 투쟁에 평생을 바친 분이 두 분이나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어찌 보면 예스맨에 의해 '바보' 아닌 '바보'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모든 걸 다 알고 모든 걸 다 잘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 법인데,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집권 중에는 하나같이 추종자에 의해 그런 식으로 미화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어른'이 대통령만 되면 추종자들이 대통령을 전지전능한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대통령 귀를 막고 눈을 가려서 멀쩡한 대통령을 현실 세계에서 격리시킨다. 구중 궁궐 청와대에 가두어 버린다.
이어 추종자들은 이런 대통령의 권위와 권력에 빌붙어 온갖 호사를 다 누린다. 국민들은 완전히 무시한다. 정말 거지발싸개 취급한다. 대통령을 바보로 만들고 국민들은 숫제 바보 천치 취급한다. 그래 놓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게 여권 실세이다.
(퇴임하는 순간 대통령은 무지개 위에서 갑자기 맨땅에 뚝 내동댕이쳐진다. 모두들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바보, 바보.
이 때에사 비로소 전직 각하 어른은 5년 내내 사실은 자기가 천재가 아닌 바보로 살았음을 깨닫는다. 이미 추종자들은 쥐새끼가 되어 쥐구멍에 쏙 들어가 버렸음을 알게 된다. 옛 추종자들은 쥐구멍 속에 자손 대대로 길이길이 먹을 양식을 숨겨 두었다는 것도 이분은 모른다. 진짜 바보가 돼 버린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자는 한 재산 못 챙긴 바보거나 한 재산 챙기길 거절한 양심가이다.)
자연히 대통령은 추종자에 의해 황제 못지 않은 권력을 누리게 된다. 민주 국가에서 황제 못지 않은 권력을 갖는다는 것, 그것보다 비민주적인 게 없다. 따라서 정치 개혁을 하려면, 가장 먼저 '여당 내'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와야 한다. 야당에서 그 소리가 나오면 그건 모두 발목 잡기요 멱살 잡기요 두 발 차기가 되니까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만든다.
제일 큰 문제를 건들지도 않고 작은 문제를 아무리 많이 다뤄 봐야 그것은 큰 문제에 의해 일순간에 뒤집어지게 되어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당연시되는 것, 곧 성역(聖域)이 존재하는 한 교육 개혁은 절대 개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따름이다. 끝없는 개악(改惡)이 될 뿐이다. 지난 20년의 교육 개혁 실패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교육 개혁이 잘 되려면 제일 좋은 방법은 교육부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분명히 교육부 안에 교육만 생각하고 누구보다 한국 교육이 나아갈 바를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과감히 교육부 장관과 대통령의 교육 정책을 비판해야 한다. 과장이 국장에게 국장이 차관에게 바른 소리를 해야 한다. 그것이 혼란을 가장 적게 가져오는 방법이다. 거대한 교육부의 관료 조직에 맞서는 사람들이 교육부 안에서 구름이 피어오르듯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 올라가야 한다.
(2000. 3. 25.)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