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베트남을 보면서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우월감이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예감은 들지 않는가? 南國山河(남국산하)

南國山河南帝居(남국산하남제거) : 남국의 산하에는 남제가 거한다고
截然定分在天書(절연정분재천서) : 천서에 분명히 정해져 있거늘
如何逆虜來侵犯(여하역로래침범) : 어이하여 너희 역로들이 침범하는가
汝等行看取敗虛(여등행간취패허) : 너희는 참담한 패배를 보고야 말 것이니라

이 시는 1076년 베트남(당시는 다이비엣 大越)을 침공한 송나라 10만 대군과 맞선 베트남의 리 트엉 끼엣(Ly Thuong Kiet 李常傑) 장군이 결전을 앞두고 읊은 시이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역사박물관에는 이 한시(漢詩)를 적은 족자가 전시돼 있다. 크지는 않다. 자그마한 평범한 한지에 무덤덤히 적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 한시를 보는 순간 베트남의 정신적 내면이 한 번에 이해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베트남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남전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우리는 미군과 함께 월맹군, 베트콩에 맞서 싸웠다. 그 ‘과거사’를 새삼 어느 특정의 입장에 따라 재정리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우리는 우리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전쟁은 끝났고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로부터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베트남 관계부터가 괄목상대다. 전쟁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베트남은 한류의 가장 큰 수요국 중 하나가 되었다. 경제관계도 긴밀해져, 이제 삼성 핸드폰의 50% 이상은 베트남에서 생산되고 있다. 삼성은 현재 베트남 전체 GDP의 5%를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변화는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다. 베트남전 당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미국이 현재는 베트남의 사실상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 돼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사실 중국 탓이 크다. 중국이 패권 야욕을 노골화하면서 베트남은 중국에 맞서기 위해 구원(舊怨)을 접고 미국과 손을 잡는 쪽을 택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 뿌리가 깊다

베트남과 중공은 냉전 시대에 같은 공산진영이었음에도 충돌을 거듭했다. 중국은 베트남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당시 남베트남 영토였던 파라셀 군도를 점령했다. 중국은 베트남전 종식 이후에도 이 섬을 통일 베트남에 돌려주기를 거부하고 현재까지 실효지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베트남전이 끝난 뒤인 1979년 중국이 베트남을 전면 침공하여 양국 간 전쟁이 발발했다. 베트남을 침공한 중공군은 베트남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2만 50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철수하고 말았다. 그 이후 베트남과 중국은 지금껏 팽팽한 대립과 긴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관계는 이처럼 현대에 우연히 빚어진 일이 아니다.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다. 베트남의 역사 대부분은 중국의 중화주의적 패권에 맞서 나름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저항으로 점철돼 있다. 서두의 ‘남국산하’라는 시는 그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한 상징이다.

베트남의 역사는 오래 됐다

베트남은 만만치 않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우리의 고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시대에 반랑(文郎)이라는 고대국가가 있었다고 한다. BC 2919년에 건국되어 2621년간 이어졌다고 하니 BC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는 고조선보다 더 오래된 셈이다. 물론 이것은 전설적 이야기다. 베트남 학계에서도 반랑국의 실질적 건국 시기는 BC 7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전설적 왕조지만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유적들이 발견되어 나름의 초기적인 문명의 실체가 있었음은 베트남에선 확고히 믿고 있다.

반랑국의 뒤를 이어 어우 락(甌駱 구락)이라는 나라가 BC 228년 건국된다. 이렇게 나름 독자적 역사를 이어가던 베트남은 중국의 진시황 시기부터 중국의 간섭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진(秦)의 뒤를 이은 한(漢)의 고조 유방(劉邦)이 BC 206년 조타(趙佗, 베트남어로는 Trieu Da 찌에우 다)를 남월(南越) 왕으로 봉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남월왕 조타는 한에 의해 봉해 졌지만 스스로 무제(武帝)라 칭하며 한과 대립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남월이 남 비엣(Nam Viet)이다. 남 비엣 시대는 BC 111년까지 이어지는데, 한무제가 BC 111년 원정군을 파견하여 남 비엣을 멸망시키면서 끝났다. 남 비엣을 멸망시킨 한무제는 9개 군을 설치하는데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것과 유사하다.

1000년 간 이어진 중국의 지배, 그에 맞선 베트남의 저항

한반도에선 한사군의 역사는 오래지 않아 끝나고 삼국시대가 펼쳐진다. 그러나 베트남에선 이후 약 1천 년 간 중국의 지배 시대가 펼쳐진다. 간헐적으로 항쟁이 일어나고 짧은 독립왕조의 시기가 거듭되지만 당의 안남도호부에 의한 지배가 마감되는 AD 905년까지 큰 틀에선 중국의 지배가 기본적이었다.

그 뒤 혼란을 거치다 938년 중국군을 물리치고 안남 응오 왕조(吳朝, 938~968)가 수립되면서 베트남계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응오 왕조는 짧게 끝나고 968년 딘 왕조(丁朝, 968~980)가 다이꼬비엣(大瞿越, 대구월)을 세우면서 이른바 다이비엣(大越, 대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응오 왕조는 혼란 속의 단명으로 끝나 실질적인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 국가로는 딘 왕조의 대월을 드는 경우가 많다. 다이비엣 즉 대월은 1802년 떠이썬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베트남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대표적인 국호로 이어지며 그 사이에 왕조만 여러 번 교체되는 형태로 역사가 펼쳐진다.

최초의 장기 왕조 다이비엣(大越 대월) 리 왕조(李朝, 1009~1225)

이 다이비엣 시대(968~1802) 베트남에서 최초의 장기 왕조가 리 왕조(李朝, 1009~1225)다. 전 레 왕조(前 黎朝, 980~1009)를 무너뜨리고 새로 나라를 연 리 왕조는 국호를 다이꼬비엣(大瞿越)의 중간 꼬(瞿 구)자를 떼내고 다이비엣(大越)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왕조 개창 그 해 탕롱(昇龍, 지금의 (河內)하노이)로 천도했다. 이렇게 하여 다이비엣의 수도가 된 하노이는 이후 계속 정치적 중심지의 역사를 이어가, 2009년 정도(定都) 1000년을 맞았다.

리 왕조가 나라를 연 무렵, 중국은 북송(北宋) 시대였다. 북송은 예전처럼 다시 베트남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를 회복하고자 신생 다이비엣에 대한 침공을 준비했다. 이 낌새를 눈치 챈 다이비엣은 그에 맞설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대응은 단순히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이비엣의 응수는 송에 대한 선제공격 감행이었다.

리 트엉 끼엣(Ly Thuong Kiet 李常傑) 장군

1075년 리 왕조는 리 트엉 끼엣(Ly Thuong Kiet 李常傑) 장군으로 하여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양면으로 송에 대한 공격에 나서도록 했다. 이상걸 장군의 이 공격은 대 성공을 거두어 불과 한 달여 남짓 만에 송의 남부 지역인 오늘날의 중국 난닝(南寧)지역(현재의 광서장족자치구 지역)을 점령했다.

일격을 당한 송은 1076년 음력 12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한차례 당한 만큼 송의 준비태세는 만만치 않았다. 다이비엣의 이웃인 크메르 왕국과 동맹을 맺어 배후에서 견제를 하게 함과 동시에 비엣의 오랜 적수인 참파까지 연합군으로 끌어들였다. 이렇게 나름 만반의 태세를 갖춘 송은 참파군을 포함한 10만 연합군을 편성하여 다이비엣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송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다이비엣은 다시 이상걸을 지휘관으로 하여 대응에 나섰고, 양군은 뉴응우엣 강(如月江)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리게 됐다.

송군을 마주한 다이비엣의 장군 이상걸은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서두에서 인용한 예의 ‘남국산하’라는 시다. 이상걸은 ‘남국산하’를 전장 부근의 사당 앞에서 낭송하게 하고, 모든 병사들이 그 시를 함께 노래하게 했다.

南帝(남제)는 남쪽의 황제라는 뜻이며, 逆虜(역로)란 반항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이상걸은 자신의 나라 다이비엣은 남쪽의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국이며,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송나라를 야만의 무리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개(氣槪)는 결코 말만의 허세가 아니었다. 공방을 거듭하던 양군의 싸움은 결국 다이비엣 군의 대승으로 끝을 맺었다. 송나라 군은 10만 병력 중 무려 8만을 잃고 퇴각하는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송은 다이비엣 공략을 포기하고, 양국은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다이비엣은 이 승리로 국가권력이 전반적으로 안정기로 접어들어 이후 200년 간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화산 이씨(花山 李氏)의 시조, 베트남 리 왕조의 망명 왕족 이용상(李龍祥)

리 왕조는 1225년 권신 쩐투도(陳守度, 진수도)에 의해 멸망하고 리 왕조의 일족은 몰살을 당한다. 그러나 완전한 몰살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몇몇 후손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경우가 리 왕조 6대 영종의 아들 이용상(李龍祥)이다. 그는 놀랍게도 고려로 망명하여 살아남았는데 현재 한국의 화산 이씨(花山 李氏)는 바로 그 베트남 망명 왕족 이용상을 시조로 한다.

리 왕조 멸망 이후로도 베트남은 수많은 굴곡의 역사를 이어갔다. 몽골의 침공이 있었으며, 1408~1428 사이에는 짧게나마 다시 중국 명(明)의 지배가 있기도 했다. 왕조의 교체와 남북 분열 및 내란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명에 뒤이어 등장한 청(淸)이 또 다시 베트남 정복전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혼란기를 틈탄 명의 짧은 지배를 제외하곤 몽골도 청도 베트남 정복에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청이 종주국을 자처하고 베트남이 형식적으로는 청의 우위를 인정하는 태세를 취해주긴 했으나 베트남은 예전에 리 왕조가 그랬듯이 내적으로는 황제국을 자처했다.

베트남 역사가 새로운 상황을 맞은 것은 마지막 왕조인 월남(越南) 응우옌 왕조(阮朝, 1802~1945)가 서면서였다. 이 마지막 왕조가 서면서 나라 이름은 대월(大越, 다이비엣)에서 월남(越南) 즉 ‘비엣 남’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의 명칭 베트남이 굳어졌다.

한편 응우옌 왕조는 새로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 그런데 바로 이 덕분에 베트남은 결국 프랑스라는 서구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응우옌 왕조 건립 주역들이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얼마나 헤아렸을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베트남에선 “중국은 어쨌든 No”지만 서구에 대한 경계심은 중국에 대한 만큼 강하지 않았던 건 분명해 보인다.

베트남이 맞은 기회

베트남은 현재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 경제공동체협정) 가맹국이다. 이 TPP의 최대 수혜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바로 베트남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트남의 인구는 현재 9400만 명에 이른다. 1억 돌파가 멀지 않았다. 평균연령은 29세로 정말 젊은 국가다. 2015년 경제성장률 전망은 6.5%선인데 TPP의 효과가 발휘되기 시작하면 7%가 넘는 경제성장률이 최소 10년 이상은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TPP 등을 포함해 베트남에 있어 그 무엇보다도 큰 기회는 바로 ‘미국과의 관계’ 그 자체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역사적으로 중국과 뿌리 깊은 대립관계에 있는 베트남은 마치 냉전시대에 한국이 가졌던 것과 같은 기회를 맞았다. 한국은 냉전시대 對공산진영 최전선이었던 덕분에 자유진영 특히 미국으로부터 각별한 지원을 받았다. 지금 베트남은 마치 그때의 한국과 같은 국제정치적 입지를 갖게 된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 같은 베트남의 기회는 역설적이게도 중국이 제공해 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베트남과 갈등을 빚지 않도록 조심했다면 베트남이 그토록 빠르게 미국에 접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지만 중국은 이웃의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에 대해 힘을 아끼고 자중하는 나라가 아니다. 중화 패권주의는 중국의 불변의 DNA다.

어떻든 중국은 늘 그랬듯이 (성공을 하든 말든) 군림천하를 꿈꾸며 굴기를 위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도처에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은 늘 그랬듯이 그 중국과 맞설 것이고, 그 덕분에 맞은 ‘미국과의 좋은 관계’라는 국가적 도약의 기회를 꽤 오랫동안 누리게 될 것이다.

한국은 베트남을 보면서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우월감이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예감은 들지 않는가?